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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례인가, 세례인가?조회수 : 923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년 8월 4일 9시 31분 13초
  • 침례인가, 세례인가?
     
    (*) 밑에 글이 있으니 참조하세요.
     
    샬롬
     
    패스터
     
    01 죽음으로 지킨 진리 침례
     
     
     
    02 침례와 세례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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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례인가, 세례인가?
     
    ●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세례를 주고 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침례를 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침례와 세례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저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 행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침례냐 세례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천주교의 영향으로 기존의 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침례의 참된 의미가 가려졌으며 심지어 성경 구절 자체가 삭제되어 진리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디 수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바쳐 가며 주 예수님의 진리인 침례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한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사람과 전통을 따르시렵니까? 엘리야같이 하나님을 따르시렵니까? 주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곧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성경대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가 나의 친구니라(요15:14).
    한글 개역(개정)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밥티조’(baptizo, 스트롱 번호 907), ‘밥티스마’(baptisma, 908번), 그리고 ‘밥티스테스’(Baptistes, 910번) 등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어 ‘밥토’(bapto, 911번)에서 나왔으며 신약성경에 총 115회 사용되었는데 용례별로 살펴보면 명사 ‘밥티스마’가 23회, 인물을 가리키는 명사 ‘밥티스테스’가 15회 그리고 동사 ‘밥티조’가 77회 쓰였다.

    한편 개역(개정)성경과는 달리 「바인의 신약성경단어사전」,  「국제표준성경백과사전」, 「엉거의 성경사전」, 「스트롱의 용어색인」 등 기독교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참고문헌들과 신학적 편견 없이 영어 단어 자체의 뜻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등의 세속 문헌들은 한결같이 이 단어들의 바른 의미가 ‘물을 뿌리는 세례’(sprinkling)가 아니라 ‘물속에 담그는 침례’(immersion)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처럼 어원 자체의 의미가 너무나 분명한 이 단어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는 세례로 번역되어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성경대로 침례를 행하지 않고 세례를 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게 된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유독 중국, 일본, 한국 성경에만 이 단어들이 세례로 번역되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침례가 세례로 바뀐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천주교가 기독교보다 먼저 진출한 것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세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를 차지하므로 다수결의 논리를 따라 세례가 옳고 침례는 그르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한국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민족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침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선 침례가 맞고 세례는 틀릴까? 과연 하나님께서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리실까? 침례는 중요한 성경의 교리일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달 과정에 마귀가 개입한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므로 성경에 근거해 바르게 침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대로 행하기 원하는 성도들은 이 문제 역시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도들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 그 기준에 기꺼이 순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침례
     
    침례를 주려면 몸을 완전히 잠글 만큼의 많은 물이 필요하지만 세례를 주는 데는 많은 물이 필요 없다.
    ●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더라(요3:23, 모든 성경 구절은 킹제임스 흠정역에서 발췌함).
    침례를 받으려면 많은 물 있는 곳으로 직접 가야 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면 물을 가져와도 된다.
    ● 그들이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어떤 물에 이르매(행8:36)
    침례를 받으려면 직접 ‘물속으로’(into the water) 내려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속으로 내려가니 그가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행8:38).
    침례는 ‘강 속에서’(in Jordan) 받으나 세례는 그렇지 않다.
    ● [그들이] 자기 죄들을 자백하며 요르단 속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마3:6).
    침례를 받은 뒤에는 ‘물속에서’(out of the water) 나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 [침례 이후에] 그들이 물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행8:39)
    성경은 한결같이 침례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불 침례와 성령 침례 역시 ‘잠기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 참으로 나[침례자 요한]는 회개에 이르도록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그분[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1-12).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성령 침례가 곧 불 침례이므로 뜨거운 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침례자 요한은 이 구절을 결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 문맥과 함께 이 구절을 읽어 보면 성령 침례를 받는 자는 예수님의 곳간에 즉 천국에 들어가지만 불 침례를 받는 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절에서 침례 즉 ‘몸 전체가 잠기는 것’과 세례 즉 ‘이마에 뿌리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성령 세례를 받아 이마에만 성령님이 계시면 어떻게 될까?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서 과연 이마에만 불이 붙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침례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이 물속에, 성령님 안에, 불 속에 잠기는 것’임을 보여 준다.
    침례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매장,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특별히 성도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임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규례이다.
     
    세례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묻혔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 즉 사망과 매장과 부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골2:12).
    세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 상징적으로, 시청각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3-4).
    세례에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새로이 옷 입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다는 진리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침례의 대상
     
    어떤 이들은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침례 중생’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특히 유아세례를 주는 천주교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 의식을 통해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 중생’을 지지하지 않으며 다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통해 자기의 다시 태어남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마귀와 마귀의 천사들 및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보인다고 말한다. 즉 믿고 다시 태어난 뒤에 침례를 받는 것이지 침례를 받아 그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행8:12).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이 과정에서 크리스천 교회가 어떤 일을 실행했는지 보여 준다. 사도행전 8장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이때 처음으로 빌립이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26-40절).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개역(개정)성경은 이상하게 37절을 ‘없음’으로 삭제하였다. 원래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다음 구절들이 한 절씩 앞으로 올라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자기의 교리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36절에서 내시는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무엇이 내가 침례 받는 것을 방해하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한 답이 37절에 나오고 내시는 그 답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한다.
    ●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행8:37).
    이 부분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친히 37절을 기록하셨다. 즉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명확한 근거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들의 믿음과 연합한 천주교가 생겨났다. 중세 암흑시대를 주도한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체제 하에 가두기 위해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 관행을 도입하여 믿음 고백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고는 어려서부터 천주교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행8:37의 말씀이 이런 비성경적 관행에 큰 거침돌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감히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다. 그 결과 개역(개정)성경,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NASB, Message 등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역본들에서는 이 중요한 구절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 구절을 잘 보존하여 천주교의 유아세례 교리가 허구임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이 구절이 없으면 앞 뒤 문맥이 통하겠는가?
    침례의 시기
     
    천주교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교리문답서 공부를 위한 학습 기간을 두는 전통을 세웠으며 이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세례를 준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세례가 ‘은혜를 가져다주는 7대 성사’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가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사가 아닐뿐더러 구원 또는 은혜도 가져다주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엡2:8-9). 성경은 이 같은 천주교의 관행과는 달리 누구든지 믿으면 곧바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내시는 믿음 고백과 함께 즉시 침례를 받았고 사도행전 16장의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도 믿는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13-14절) 같은 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믿은 즉시 침례를 받았다.
    ● 그 밤 바로 그 시각에 그가 그들을 데려다가 채찍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자기의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행16:33)
    침례의 방법
     
    위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은 요르단 강에서, 어떤 사람은 광야의 오아시스에서, 어떤 사람은 집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곧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이면 강이든 호수든 바다든 침례탕이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침례가 교회의 회원권과 관련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역 교회에서 침례를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자라면 누구나 침례를 줄 수 있으나 지역 교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사나 혹은 교회에서 정한 성도가 침례를 주는 것이 합당하다.
    침례를 행할 때 침례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은 편한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들어가고 침례를 주는 사람은 먼저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간단하게라도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을 요청한다. 침례를 받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 침례를 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침례를 준다. “○○○ 형제/자매님의 믿음 고백과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줍니다.” 이렇게 선포한 뒤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같이 죽었다가”(In the likeness of His death)라고 말하면서 침례 받는 사람을 뒤로 눕혀 물속에 잠근 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같이 살아났습니다.”(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라고 말하면서 그를 물속에서 들어 올린다. 이렇게 해서 이 형제/자매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매장되었고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이 상징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이로써 복음의 진수가 시청각적으로 모두에게 증언된다.
    침례는 명령이다!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며 산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 내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예수님의 명령들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침례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마28:19)
    주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순종의 죄이다.
    ●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곧 그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약4:17).
    많은 분들이 침례를 받으면 침례교인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침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실천한 좋은 크리스천이 된다. 중세 암흑시대의 절정기에 종교재판을 통해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천주교 사제는 종교재판소에 끌려온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물로 뿌리는 유아세례가 맞는가, 아니면 물속에 잠기는 침례가 맞는가?” 사제의 이 질문에 “물속에 잠기는 침례가 맞는다.”라고 대답한 이들은 화형을 당하거나 손을 뒤로 묶인 채 물속에 던져져서 수장되었다. 이렇듯 진리를 지키려고 고난을 받은 믿음의 선조들로 인해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까지 바른 성경, 바른 진리가 전해지게 되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의 수를 따라 전통대로 세례를 고집하겠는가? 아니면 성경대로 침례에 순종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세례는 무효임을 깨닫기 바란다. 필자 역시 전통대로 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성경을 통해 이런 진리를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침례를 받았다. 잘못 세례를 받았으면 다시 받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행19:1-5). 이처럼 귀중한 침례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사랑침례교회는 성경에 따라 구원받고 바르게 살기 원하는 모든 분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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