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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보라 ㅎㅎ 구원받을 이름은 오직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했더니만 다좋은데 그말만 빼고 어떤종교든 모두다 구원은 있다고 합시다? 그라믄 이단 취급 안받을겁니다 이런!! 설교도 듣고 킹제임스성경도 본다믄서 뮐듣고 뮐본겨?
2015-02-14 12:02:22 | 오경철
사람의 정욕과 사람들의 세력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떨궈야 말씀의 입법 취지자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고(요17:17)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마세요(갈1:10).
2015-02-14 10:45:39 | 나서일
킹제임스 성경은 4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고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이미 받아들여진 성경입니다. 또한 그 선한 열매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대체한다고 나타난 현대역본들이 범람하고 있다고 하나 속을 들여다 보면 문제투성이뿐이고 오히려 정확한 믿음의 주춧돌을 흔들려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격 입니다. 늦은 시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읽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큰 은혜라 생각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통해 그동안 잘못된 구습과 관행들이 하나님앞에서 바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오류가 없는 것을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없고, 오류가 있는 것을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1%를 버린다면 궁극적으로 100%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인데 본인이 무슨 일로 쓰여지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네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자로 예수님만 아니면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만 아니면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2015-02-14 09:14:32 | 조양교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말에 공감되는 말입니다. 저는 1992년부터 독립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는 개역성경에 문구를 수정하며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을 학수고대하던중에 2001년경 정목사님께서 흠정역 성경을 출시하면서 정말 기쁜마음으로 읽고, 사랑하며 같이 공부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카페도 당시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적극적으로 보급하셨던 한 형제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공격하는 위치를 보며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이 최종권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격이 있을것입니다. 부디 성도님들께서는 이런일로 흔들리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2015-02-14 00:14:46 | 박진태
개역, 개정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은 받을 수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인지.. " ~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을 따라 ~ " 비정상적인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취급 받는 것은 결코 두려워 할 일이 아닙니다. '칼빈 가라사대'에서 어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2015-02-13 22:55:44 | 김항수
(시 12:6흠정역)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 12:7흠정역)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주께서 친히 말씀들을 지금까지 보존하셨고 앞으로도 보존하실것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자들이 있다면, 결국 그들은 거짓말하실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짓말하는분으로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 하는 것이 될것입니다. (민 23:19, 킹흠정)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들만의 이단판정, 혹은 목에 칼을 댄다 하더라도, 절대 타협할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의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자들은 즉시 배척해야 합니다. p.s 개역성경과 다른 버전의 성경들은 말씀이 변개되고, 삭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pure-100%)말씀이 될수 없습니다. 주께서 친히 지키신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될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오십시오,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이 "성경을 기만하는 자들의 오류"를 수도 없이 많이 찾을 것입니다.
2015-02-13 20:49:48 | 김정호
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절로 성경 신자가 되고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올라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없다면 결국 종교 다원주의와 교회들의 배교를 막고 분별력 없는 성도들과 무지한 사람들을 보호할 방법이 전혀 없어지게 될 겁니다. 회원 수도 조회 수도 극히 미비한 ‘~ 불편한 진실’카페가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을 평소 불편한 시선을 바라보던 이들에게는 좋은 도구로 악용되는 듯합니다. 아무리 겸손하고 온건한 자세로 우리의 믿는바 진리를 전해도 어느 시점에선가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더욱 겸손하고 바른 자세로 모두 하나가 되어 담대히 진리를 전할 수 있길 소원합니다.
2015-02-13 18:36:50 | 김대용
'-- 불편한 진실'카페의 내용은 1611년 이후로 지금까지 있어왔지만 그들이 그렇게 믿고자 작정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다는 말씀에 자신의 1%를 더하여 완성을 이룬다고 생각하나봅니다. 이런 일은 없겠지만, 가령 우리 교회가 성경에 관한 확신이 없어진다면 저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겠지요. 종교 다원화 주의와 성경의 다양성은 넓은 길이고 성경신자가 가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2015-02-13 17:13:36 | 차대식
올해부터 사랑침례교회에 출석한성도로써 많은고민과 생각끝에 이곳에 오게된 가장큰이유는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책이 흠이없고 완벽히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것을 믿는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믿음이 흔들린다면 저의믿음은 없어지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1%로는 저의 100%입니다.
2015-02-13 15:24:16 | 이광호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에 어떤 분이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기사를 보내주셨습니다.참으로 세상이 악을 해야 치닫고 있습니다.우리가 깨어서 진리를 추구해야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 목사=신부들=승려 (종교 다원주의)   여러분은 석가와 예수님이, 같은 구세주라고 보시나요? 여기 MBC 뉴스를 보시면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해도 알지 못하는 미혹된 백성과 주의 종들이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영적인 행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속히 임할 것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은 피의 심판이며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이 도래할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신사참배를 독려하고 앞장 선 사람들이 누군지 아시나요? 목사들과 교회와 교단이 신사참배를 독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상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심히 참혹할 정도로 엄청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6.25인 한국전쟁을 통해서 한국을 반으로 가르셨고 수많은 국민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2013년 10월 30일~11월 7일까지 부산 WCC(세계 교회 협의회)총회 를 통해 우상숭배를 했으며,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세월호'라는 전무한 참사가 발생해서 대한민국을 침몰시켰습니다.   지금은 영적 미혹이 너무나 강한 시대입니다. 신천지, 여호와의증인 등 드러난 이단 사이비들은 물론, WCC (NCCK) 가입 교단 목사들과 비성경(불법)적인 빈야드ㆍ신사도운동 사역자 및 여자 목사들까지 정통보수교단의  간판(광명한 천사)으로 위장하여 파죽지세로 천지사방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영들을 성경에 의해 분별하고 올바른 주님의 교회(목사)를 만나, 성경으로 돌아가고 참 믿음을 회복하며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날마다 성경말씀과 기도로써 중무장하여 마귀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생활(전도)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깝습니다! 더이상 거짓 대언자에게 미혹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부처는 결코 같은 구세주가 아닙니다!   * MBC 종교의 통합 (목사와 신부와 승려) http://youtu.be/sWXixRBkq3g
2015-02-13 14:26:44 | 관리자
1% 부족이 100% 부족과 다름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사람이기 때문에 1% 부족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고, 추앙받을만 하다.' 라고 그들은 말 할겁니다. 대단히 인본주의적인 사고의 발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고, 또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천년의 세월을 목숨을 걸고 지켜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두고 '갑론을박'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스스로의 생각의 틀 속에 가둬버리는 가증스런 일이고, 이단의 교리에 동조하는 길입니다. 성경신자이지만 부족한 우리가 100% 완전한 성경을 굳건히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합니다.
2015-02-13 13:11:45 | 한원규
가장 중요한 1%를 버리라고요?   구약시대 바빌론 포로생활 이후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느6:1-9에 보면 적들이 만나서 타협하자고 하면서 그의 일을 무너뜨리려 하고 느6:10-14에 보면 적들이 스마야라는 사람을 고용하여 좋은 일을 하게 하는 척하면서 느헤미야를 곤경에 빠뜨리려 합니다.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결국 느6:15에 있는 것처럼 50일 만에 성벽 건축이 완성합니다.   시간을 내셔서 느헤미야 6장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올해 들어서면서 묘하게도 킹제임스 성경 사역을 두고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시도가 이곳저곳에서 있는 것 같습니다.1월의 현대 종교 기사 게재 사건이 그중 하나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1473   어제는 은근한 회유와 으름장을 놓는 듯한 내용의 이메일을 받고 내심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정오의 빛’이라는 이름의 독자가 보낸 이메일은 정중하게 시작하지만 거의 위협하는 수준에서 내용이 끝납니다.   이 편지를 읽고 전주의 김재근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드디어 진짜 적들이 나타났군요. 1% 포기하면 다 받아들이겠다.... 이런 논리에 미국 침례교회들이 넘어갔잖아요. 이 사람의 말은 기름보다 부드러우나 실상은 칼을 꺼낸 든 것이네요.더 각성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신학교가 있고 수많은 목사와 신학자가 있음에도 왜 현재 많은 교회가 진리에서 이탈하며 배교하고 비로소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라는 말씀이 완전하게 성취될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메일을 보낸 독자가 버리라고 종용하는 1%는 나머지 99%를 떠받치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말씀을 오늘날 완전하게 보존해 주셨다는 1%의 이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100%를 포기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그 독자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악한 영적 세력은 성경이 알려주듯이 매우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 믿음의 사람들을 공략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며 우리 모두 더욱 깨어 마음을 하나로 모아 킹제임스 성경의 확산과 정착을 위해 같이 기도합시다.   샬롬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각하께 고백하오니 곧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을 따라 내 조상들의 [하나님]께 그렇게 경배하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나이다.”(행24:14)   -----------사랑하는 정동수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목사님의 올바른 설교말씀들 많이 들어봤으며, 킹제임스 성경도 여러 권 구입하여 읽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을 쓰신 분께서 의견을 제시하셨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64 사랑하는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합리적이신 분이시고 학식이 있으시며 건전한 토론 능력이 있으신 분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킹제임스 성경 유일설에 관한 반대 의견을 하나하나 읽어보신다면, 합리적인 목사님께서 스스로도 무엇이 옳은지 양심이 판정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100% 옳은 사람은 없습니다. 전 정동수 목사님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99%의 글들과 설교들을 지금도 좋아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런 설교들도 매우 합리적이며 올바른 메세지였고, 칼빈도 이 점에 있어서 동일 의견이었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전해오셨습니다. 다만 1%...... 1%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 유일 보존설을 이제는 내려놓는 것이 목사님 개인과 성도들 모두를 위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메일 드려봅니다. 누구나 그 글을 읽어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킹제임스 성경 유일보존이 아니라는 것을 상식을 가진 일반인이라면 판단하게 됩니다. 학식있고 합리적이신 정동수 목사님의 양심이 스스로 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는 수십 년을 킹제임스 성경 유일 보존설을 주장하며 노력해오셨습니다. 그 수십 년 동안, 누군가는 이단에서 빠져나와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는 등 하나님께 영광이며 긍정적 열매도 있었음이 사실입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킹제임스 성경 유일보존설로 인하여 가족과 함께 평생 섬겨오던 기존 교회를 불신하게 되고, 평생을 읽어온 개역개정 성경을 불신하게 되어결과적으로 믿음에 혼란이 오고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는 부정적 열매도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긍정적 열매, 부정적 열매가 있었으니 지나간 일은 긍정적으로 추억하시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입니다.누구나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편견없이 양쪽 주장을 접해본다면, 킹제임스 성경 유일보존설은 비합리적 생각임이 명확합니다. 양심 스스로도 "나도 인간이기에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었구나"하고 느끼고도 계속 이 주장을 해나간다면 결국 한국교회로부터 이단판정을 받게 되고, 불쌍한 성도들은 새로운 이단에 빠진 꼴이 되며,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 자멸을 초래하게 될 뿐인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모든 생각과 모든 글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차분히 설교해주시는 모습에 성도들은 좋은 열매를 맺은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디 1%의 오류, 즉 킹제임스 성경 유일보존설, 그것만 내려놓아 주셨으면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좋은 성경입니다. 다만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존해주신 유일한 성경이라는 그 1%의 생각만 내려놓으시고, 성도들께 솔직히 말씀드려주시길 저는 소망합니다.그 부분을 내려놓는다 해도 성도들이 목사님을 정죄한다거나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 부분을 내려놓는다 해도 좋은 KJV성경을 소개해주신 목사님께 여전히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무언가를 느끼면서도 내려놓지 않는다면...그런 채로 수십 년이 흘러 사랑하는 정동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 후에는 "킹제임스교"라는 이단이 하나 추가되는 것 밖에는 어떤 열매가 있을까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고, 성도들은 기존교회에 속한 가족 친지들과 극한 갈등을 빚게 되며, 가정이 불화하고 사회문제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계속 그 주장을 고집하려 하신다 해도....널리 알려질수록 더 빨리 이단판정을 받게 될 뿐이며 결국은 점점 성도들 수가 줄을 것이고, 결국은 대부분 이단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동수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결국 자연스럽게 킹제임스교는 사라질 뿐인 것이 현실입니다. 고로 1%의 오류를 내려놓으시고, 계속 노력해 오셨던 대로 (말씀선포, 복음전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양들 돌봄 등) 99%의 올바른 삶을 계속 이어나가신다면 성도들도 동요없이 계속 사랑하는 정동수 목사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오히려 1%를 내려놓지 않으신다면,성도들을 점차 자연스럽게 떠나갈 것이며, 남아 있는 성도들마저도 마음 속 양심상으로는 잘못되었다고 느낀 채로 신앙생활 해나갈 것이며, 한 세대가 끝나면 결국 새로 생겼다가 100년을 못가고 사라진 이단으로 역사에 남을 뿐인 것이.....명백한 눈앞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하는 목사님께 메일 드려봤습니다. 추운 겨울날 몸 건강히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
2015-02-13 10:32:52 | 관리자
어젯밤 우연히 아주 좋은 글을 접하게 되어 나누고자 올립니다. 모두 책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책을 읽는 이유: 해석하기 그리고 육화하기   지난 토요일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과 호주의 경기가 끝난 후,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축구를 배우지만, 학교에서는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중요한 지적이다. 즐기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인가?   즐김에 이르는 여러 단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한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자주 인용되는 공자의 말이지만(『논어』, 「옹야(雍也)」), 즐기는 데에도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관심과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 일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즐김은 관심과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지함과 성실성을 지나 익숙해질 정도의 연습을 거쳐 결국 좋아함의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도달될 수 있는 향유의 경지인 것이다. 삶에서 ‘깊은 즐김’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삶을 깊이 향유할 수 있는 대상과 그 방법은 물론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향유물의 하나가 책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전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좋은 책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 이외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나 집의 아이들에게도 그런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경우에는 정말 잘 안 읽어서 곤혹스럽기는 하다. 실제로 세상에는 책을 전혀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기리는 좋은 시도 있다.   한 줄의 시는커녕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많은 돈을 벌었고높은 자리에 올라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 김광규 , 「묘비명」   이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비석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비석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 눈여겨볼 일은 없다.   아마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가끔 거기로 날아들 것이다. 그럼에도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는 누구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어느 유명한 문인”을 데려다가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쓰게 하기도 한다. 이런 허황된 역설도 시인은 아무런 평가 없이 무심하게 기록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물음 없이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아마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책을 읽어라’는 말 이전에 던져야 할 것은 ‘왜 읽는가’라는 물음이다.   읽기는 점화의 순간   왜 책을 읽는가? 이 물음은, 사실 삶의 많은 문제가 그러하듯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거기에는 ‘무슨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같은 물음도 이어져 있고, 좀 더 심각하게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가’나 ‘책은 무슨 쓸모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도 겹쳐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물음에 그 나름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 물음의 주체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읽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책을 고르고 무슨 주제에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대상을 해석하느냐에서 이미 그 사람의 오랜 독서의 경로가, 그 문제의식의 깊이가 웬만큼 드러나기 때문이다.   읽는 일에, 거창하게 말하여, ‘삶을 바친’ 사람치고 절절한 영혼이 아닌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 그들은 글로써, 이 활자(活字)로써 세상을 읽고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면서 삶을 좀 더 고결하게 살고자 꿈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이고, 그들이 책을 쓴다면 그 책은 그런 고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읽은 것은 그렇게 읽은 자의 생활 속으로 조금씩 체화된다. 물론 책의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문학의 책은, 그것도 뛰어난 저작이라면, 예외 없이 이런 정신의 탐사, 영혼의 절절한 갈구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이 저자가 품은 절실한 고민의 소산이듯이, 독자 역시 이 책을 자신이 부닥친 문제에 대한, 또 삶과 인간에 대한 절절한 관심 속에서 만난다. 이 절실함의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책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따라서 느끼고 이해하는 수용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독서란 하나의 절실한 마음과 또 다른 하나의 절실한 마음이 만나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고 잦아드는 점화와 생성의 시간이다. 하나의 열정과 또 하나의 열정이 만나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거나 이 세계 앞에서 그 내면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숨어 있던 한 편이 열린다. 여기에는 낯섦과 충격, 당혹과 경탄의 순간이 있다. 삶의 어떤 가능성은 이렇게 생겨난다. 이러한 경험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또 우리 사는 사회와 현실과 세계에 대한 깨우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와 관심에 따른 읽기   간혹 강연이나 토론 같은 모임이 끝난 후,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주저하곤 한다. 나의 대답이 별반 도움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관심도 그 어떤 호기심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관심의 종류나 고민의 방향은 사람마다 참으로 다르다. 어느 한편의 간곡한 사연도 다른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것일 수 있고, 아무리 성인군자의 말도 생계 현실 아래서는 한가한 잡담일 수도 있다.   드물게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말 귀에 부는 봄바람’이나 ‘쇠귀에 경 읽기’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책에는, 더욱이 좋은 책에는 환산하기 힘든 직관과 통찰과 지혜가 들어 있다. 그것은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물음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왕 읽는다면, 고전을 읽는 게 좋겠지요.   모두들 시간도 모자라고 힘도 드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시간과 노동의 경제를 고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좀 더 궁금해한다면, 이렇게 보충한다. “무조건 읽기보다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또 자기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면 되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역사소설’을 읽고, 사랑에 관심이 있다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식으로. 각자에겐 제각기 다른 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해서 뜻있는 일이기는 어렵고, 오래가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도 무슨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 읽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관심과 물음과 호기심에 따라 시작하여 점차 자기 눈높이에 맞춰 더 심화하면서 확대하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욕구, 어떤 말 못할 충동으로부터 시작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읽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   인문학에서의 활동이 크게 말하기와 읽기 그리고 쓰기로 구성되어 있다면, 여기에서 말하기는 외적 대인관계적 활동일 것이고, 읽기는 좀 더 내향적인 활동이며, 쓰기는 이런 읽기에서의 내향화된 결과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그래서 좀 더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쓰기가 표현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라면, 읽기는 이렇게 쓰인 결과물로서의 책을 영육으로 흡수하여 소화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읽기는 쓰기보다는 소극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좀더 내밀한 활동이고, 그래서 읽기에서는 관조나 명상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일수록, 수용미학에서 말하듯이, 해석의 ‘빈 자리’를 많이 허용한다. 그만큼 좋은 책은 세상의 복잡다기함뿐만 아니라 인격의 다양한 독자성과 그 신비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 배우는 것만큼이나 이 책이 말하지 않은 부분의 의미를 채워가기도 하며, 이렇게 스스로 채워가면서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인문학의 언어는 그렇다. 그것은 기록된 정신의 산물이면서 독자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고, 독자는 이렇게 그 의미를 구성하면서 스스로 자기 삶을 조직하고 형성해간다. 의미의 형성과 주조(鑄造)는 인문 활동의 핵심 내용이다.   이렇듯이 책을 읽는 일에는, 읽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 읽는 사람이 책에서 찾고자 하는 꿈과 열망과 그리움이 이미 녹아 있다. 물론 재산 증식에 대한 관심이나 자기 계발에 대한 필요 때문에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얻는 기쁨이 깊기는 어렵다. 이것도 사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욕구가 물질적 세속적 차원을 넘을 수는 없다. 이에 반해 읽는 마음은 삶의 드넓은 차원—감각과 사고의 지평을 갱신하는 데로 이어진다.   우리가 그 무엇을 찬탄할 때, 우리의 느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찬탄할 만한 것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래서 스스로 찬탄해도 좋은 것이 된다.   우리가 책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 추구는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마음이, 그런 속성의 일부가 우리 안에 자라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듯이, 아름다운 마음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갈망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선미로 기울어 있지 않다면, 진선미에 대한 추구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책 읽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그 무엇—찬탄할 만한 것에 대한 숨은 갈망이 있다. 우리는 읽으면서 어떤 다른 삶을 엿보고, 어떤 현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또 다른 생활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삶의 바탕과 세계의 모태 그리고 그 고향을 떠올린다. 좋은 책과의 만남에는 마음의 이런 깊은 움직임—갈구하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이다. 감동이란 이 갈구하는 마음에 대한 나/독자의 화답이다.   느끼고 만들기 — 깊은 향유   책이 문화적 업적의 가장 높은 성취의 하나라고 한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화적 업적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책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넓혀간다.   이렇게 넓어지는 생각에 기대어 우리는 더 넓은 지평—넓고 깊은 세계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의 전체와 만나고, 그 전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때 ‘전체’는 ‘어떤 온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추상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사소한 것 —바로 내 곁에, 나와 관련하여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생생한 경험 속에, 내가 느끼고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접촉하는 모든 것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읽기란 이 일상의 전체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깊은 읽기는 세계의 새 모습—가장 일상적인 비밀을 경험케 한다. 그 점에서 나와 책은 창조적 교환 관계 속에 있다. 향수의 기쁨은 여기에서 온다.   책의 역할은, 우리가 그 책에서 배우고 느낀 대로 지금 이 세상을 느끼고 즐길 수 있을 때, 잠시 완성될 것이다. ‘잠시’라는 것은 이때의 완성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읽기가 더해짐에 따라 우리의 눈과 귀가 계속 그리고 더 높은 수준에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 자체로 삶을 깊게 음미하는 방식—세계 향유의 방식이기도 하다. 유종호 선생님은 “교양(Bildung/형성)이란 세계 향유의 방법”이라고 하셨지만, 이 깊은 향유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bilden/build)’. 책을 읽고 삶을 향유하면서 우리는 보다 높은 교양적 인간으로 변모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형성의 단계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다. 읽기에도 오랜 역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저런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착잡한 경험을 통해, 크고 작은 느낌과 절실한 노력과 연이은 깨우침의 축적 속에서 조금씩 나아간다. 한두 번의 조언이나 몇 차례의 안내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읽는 일에는 읽는 주체의 실존적 전부가 걸려 있다.   ‘고전 읽기’ 강연   ‘열린 연단’의 2년차 시리즈는 ‘오늘의 시대와 고전’이라는 제목 아래 2주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번 째 강연인 ‘동양의 고전’에서 이승환 교수는 고전 해석의 5단계로 ‘고증학적 이해’와 ‘텍스트적 이해’, ‘맥락적 이해’와 ‘평가적 이해’ 그리고 ‘해석학적 이해’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에 대한 접근과 그 이해 방식을 엄밀하게 순차적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뭉뚱그려 ‘해석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구자의 주체적 관점은 사실상 문헌 연구에서부터 이미 끼어들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어떤 고전에나, 그것이 동양 고전이든 서양 고전이든, 해당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해석의 과정이란, 크게 보면, 분석과 이해를 통한 사고의 반성적 과정—되돌아보는 성찰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 성찰로 읽기의 의미는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읽은 내용을 생활의 한가운데로 ‘옮겨 심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식(移植)의 과정은 육화의 실천 과정이다.(이것은 해석학적 이해라는 다섯 번째 단계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책 읽기란, 지금까지의 논의를 합쳐 다시 배열하면, 해석의 과정과 육화의 과정—두 개의 유기적인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책 읽기란 해석과 실천으로 구성된다. 실천이란 해석된 내용의 생활화/내면화 과정이다. 고전의 의미는 그 메시지가 고전을 읽은 나의 생활 속에서,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삶의 실질적 에너지가 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의미는, 그것이 생활의 실질적인 양분으로 전환될 때, 그래서 나날의 영육적 신진대사 안으로 흡수될 때, 참으로 완성된다.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六經皆我註脚)”라고 육상산(陸象山)은 말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내가 읽는 책이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삶을 위한 각주이자 토대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러므로 고전은 단순히 분석되거나 해석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한 나 자신의 생활 속 깊숙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내 삶 속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자양이 되어야 하고, 내 삶을 더 나은 수준으로 변형시켜가는 데 마땅히 기여해야 한다.   이렇게 책과 삶이 이어지지 못하다면, 그래서 글과 생활이 따로 노는 것이라면, 글은 소 귀의 경전일 뿐이다. 그러나 사 람이 소나 말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문광훈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책을 읽는 이유 : 열린연단 - http://m.openlectures.naver.com/mobile_contents?contentsId=81239&rid=253
2015-02-09 18:31:02 | 관리자
오늘 다시 목사님 컬럼을 읽으면서 왜 이 글을 쓰셨는 가를 다시금 뒤돌아 보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존교회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바르면 다른 것은 무시해도 괜찮치 않나하는 생각으로 지내면서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른교회,바른 말씀이 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며 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 큰 특권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이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부부의 철학과 교회전반의 치리일들은 우리보다 더 큰 숲을 보시니까 목표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나가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항상 한 박자 느리게 깨닫게 되네요~^^ 2015년도 한달 반이 지났네요~ 품격있는 사랑침례교회 성도가 되는 이 해가 되길 소망하며 노력해야지 ..다짐해봅니다~^^
2015-02-09 11:37:05 | 최은희
저희도 로마로 시집을 와서 아기를 낳고 입양하며 신혼기간을 거쳐 결혼생활을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가족간에 문제가 생기는 거 같아요. 서로 화목하게 잘 자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로서 미숙하지만 애를 쓰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우리 온 식구들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큰 살림을 잘 감당해야겠지요..ㅎㅎ
2015-01-24 19:56:30 | 오혜미
제목을 통해서만도 충분히 이해되듯이 교회 안에서의 성도간 지켜야 할 예의나 규칙, 그리고 최근 활성화되는 SNS를 통한 자유로운 교제 중에도 꼭 준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한 부분까지 목사님께서 사랑침례교회 성도 한분 한분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 담겨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만간 홈페이지에 새롭게 추가될 '필수기사' 항목을 공유할 수 있게 되므로써 저를 포함하여 사랑침례교회 정착을 원하시고, 또 리더로서의 성장을 원하시는 모든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내용 감사드리고, 여행 안전하게 잘 다녀오시기 기도합니다.
2015-01-23 13:05:37 | 한원규
새로온 성도로써 목사님께서 무슨말씀을 하시려는지 충분히 이해가되고 공감이갑니다. 저부터 잘따르고 사랑침례교회의 올바른성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맘편히 건강하게 잘다녀오실길 기도하겠습니다.
2015-01-22 15:29:17 | 이광호
안녕하세요?   출국을 앞두고 아무래도 마음속의 이야기를 쓰고 가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씁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배경과 성향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밝혔듯이 사랑침례교회는 무엇보다 영혼의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어지는 영혼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자유가 남용되면 교회는 말 그대로 혼동의 도가니가 되고 맙니다.   물론 우리 중 아무도 이런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그것이 모두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의 철학과 가치에 동의하고 순응하며 따라 주셔야 합니다.그래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의 리더가 되어 섬길 기회가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철학과 가치와 배치되는 본인만의 독특한 가치와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그것을 추구하면 그 누가 의도하지 않더라고 결국 스스로 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코 누가 무어라 말하거나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존전략에 관해서도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719   방언, 직통 계시, 구원 상실, 환난 통과, 킹제임스 성경 부정 등과 같은 믿음을 내세우고 고집하면 이 교회에서 생존, 즉 잘 적응하고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본인이 믿는 것은 자유지만 글이나 말로 전파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밴드, 카톡 방 등 어디에서도 교회의 믿음과 반대되는 글을 올리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글이 올라오거든 운영자는 속히 지우고 당사자에게 올리지 말라고 알려주기 바랍니다.   밴드, 카톡 방 등이 자칫 잘못하면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말’의 온상이 되기 쉬우니 모두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나 교회는 절대 이런 온라인상의 교제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다만 ‘쓸데없는 글’이나 ‘쓸데없는 영상’ 등을 올려서 다른 이들의 시간을 빼앗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오프라인 모임과 온라인 모임에서는 오고 가는 말이 순수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가 어떤가 살펴보기 바랍니다.반말과 형, 언니, 오빠 등의 호칭은 구습이요, 일반 교회나 사회 클럽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그러므로 아무리 친해도 서로가 그리스도인의 품격과 경건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옷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옷을 입도록 합시다.교회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 만날 때도 특히 자매님들은 선정적인 옷을 피해야 합니다.이것은 세대 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이든 교회든 어디는 경건하게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 문제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420   이런 것들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으나 새로 오시는 분들이 많아 또 반복합니다.   목사도 이제 이런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어느 정도 지쳐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분들이 바르게 본을 보여 주셔서 새로 오신 분들이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는 분위기가 정착되길 바랍니다.   또한 교회를 하다 보면 사람의 모임인지라 늘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직시해서 그 문제의 근원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명확하게 교회 철학에 맞지 않는 일을 했고 이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한 어떤 사람이 정확한 사실을 교회에 알렸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라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전달자나 확인자가 문제인가요? 아니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문제인가요?   대부분의 교회는 사랑을 강조하기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어느 면에서는 약자)을 감싸고 전달자나 확인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왜 그것을 알렸느냐?”, “왜 그것을 확인하느냐? 그냥 두면 덮어질 텐데.”라고 말하며 오히려 전달자나 확인자에게 책임을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전에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사실관계가 확인된 사안에 대해서는 전달자나 확인자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분을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 이 부분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서 이야기 한 ‘사랑침례교회에서의 생존전략’에서 분명하게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 중의 하나는 쓸데없이 남을 비방하고 다니는 것입니다.”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 될 정확한 사실을 교회에 알리는 것과 사실이 아닌 일을 왜곡하고 꾸며서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말을 계속 옮기는 것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일으킨 문제를 전달한 사람을 탓하거나 쓸데없이 남을 비방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모두가 교회의 생존전략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가운데 이런 일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중구난방이 되거나 불필요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가 커져도 영적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허약한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한 일들을 예방하기 위해 교회 사이트를 조금 수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이트의 좌측 중앙에 <교회소식>, <기도부탁> 옆에 <필수기사>를 넣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의 철학을 담은 글과 영상을 링크해 놓을 것입니다.다음이 한 예일 것입니다.   지나간 날들의 교훈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181   목사와 성도의 영원한 기쁨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97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51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와서 정착하기 원하고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리더로 성장하기 원하는 분들은 2-3주 내로 생길 <필수기사> 항목들을 필수적으로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올린 이 글은 어느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진심으로 교회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바라는 목사의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절대 어느 누군가에게 부끄러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잘 헤아려 주십시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추구하며 그런 가운데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교회로 성장하길 원합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0장 말씀을 모두 읽고 자신을 스스로 차분하게 점검해 봅시다.   지금은 제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지만 앞으로 다시 만날 때는 기쁜 얼굴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1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2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그 확신을 가지고 너희를 담대히 대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우리를 육신에 따라 걷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내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대할 줄로 생각하노라.   3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강한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5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6 너희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에 모든 불순종을 응징하려고 준비되어 있노라.   7 너희는 겉모습대로 사물을 보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을진대 이것 즉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다시 생각할지니라. 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라고 주신 것인즉 그것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9 이것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무섭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0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   11 그런 자는 이것을 생각할지니 곧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말하는 우리가 어떠함같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우리도 그와 같으리라는 것이라. 12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아니하노라. 오직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분량 밖의 것들을 자랑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규칙의 분량에 따라 자랑하려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다다른 분량이라.   14 우리는 마치 너희에게 다다르지 아니한 것 같이 우리의 분량을 넘어 뻗어나가지 아니하노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너희에게도 이르렀느니라.   15 우리는 우리의 분량 밖의 것들 곧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것들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의 믿음이 자라날 때에 우리의 규칙에 따라 우리가 너희를 통하여 넘치도록 확장되기를 바라노니 16 이것은 너희를 넘어선 지역들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이미 예비되어 우리 손에 들어온 것들을 다른 사람의 구획선 안에서 자랑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7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   18 자기를 추천하는 자가 인정받지 아니하고 [주]께서 추천하시는 자가 인정받느니라.
2015-01-22 10:40: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