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목사님 유튜브를 통해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개혁개정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처음 바꾸고 나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신앙생활 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목사님께 대적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씀도 드려보지도 못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해 이렇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목사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희 목사님께 목사님의 강의 말씀을 제가 구입해서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목사님 말씀을 큰 화면으로 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도 구입하고 싶습니다 담당자와 연락 할수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2013-05-29 23:17:52 | 서덕중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s://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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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7:37:29 | 관리자
공감합니다. 집 근처 장로교회에 나가 본 적이 있는데 목사님께서 성경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교회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을 이야기하며 정말 훌륭한 분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말씀시간을 마쳤습니다. 안전한 설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기관리를 한다고 느꼈습니다.
2013-05-20 10:46:14 | 장영락
아멘
2013-05-20 10:43:09 | 장영락
안녕하세요?
이것은 아내를 통해 아침에 들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자매(?)는 "이렇게 무서운 글에 은혜가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글인데 말입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사는 분들에게는 무서운 글일지 모르지만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극히 정상적인 글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어려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원 저자가 개역성경을 썼으므로 성경 구절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센스만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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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죄를 부추기는,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대로 조장 되었던... <비겁한 침묵의 악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다양한 언어의 색깔과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함께 해야 할 목표와 방향들을 정해야 될 때
그 의견들이 제시 되 면은, 그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 하게 된다.
그 침묵 속에는...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한다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가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나와는 뜻이 다르기에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 그 침묵들을 쓰기도 하며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모두 다 관심이 없기에 그대로 그렇게 침묵들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여러 상황들과 오랜 정서 상조용히 있는 침묵들을, 미덕처럼 여겨왔고 여겨져왔었다. 한 두 번씩은 모두 다 경험들을 해 봤던 일들...
그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말해서 생겨났던 어려운 일들
또 굳이 빠르게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그러함에도...그러나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또 분명하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할 때 임에도 가만히 있어서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위험한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죄를 부추기는 일들에... 함께 덩달아 수없이 무언의 동조를 해 왔던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불의와 불법들 앞에, 그대로 말하지 않는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그 곳이 바로 이 시대 전혀 부끄러움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벌거벗은 교회들이 아닐까?
오랫동안 하나님께선 불의와 불법 수많은 악들 앞에서그 악의 근원인 이유와 원인들 뿐 아니라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뜻들도 계속해서 보내 오셨다.그 무지함과 안타까운 많은 연약함들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다 드러내시고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데...
지금은, 침묵 할 때가 아니고... 절대로 결코, 침묵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교회들 속...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이 일어 날 때마다하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도 없는 무지함 가운데그 안에서 계속 되어지는 무분별함과 무책임들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 속에 타락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렸고
설령, 불의와 불법들 앞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뜻들을 알았다 해도서로의 기득권들과 더러운 이권들이 오랜 세월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 켜눈감고, 입을 다물고, 철저하게 침묵함으로...끓어오르는 탐심과 탐욕으로, 오랜 때가 찌들어가는 흉칙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렇게 까지, 이렇게 되도록 망가트려 버렸다.
이제, 이 상황들 속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그 어느 것보다... 불의와 불법들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무언의 동조이다.이제 곧 이어, 그 책임들을 너무나 선명히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하나 물으실 것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보라 이 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이사야65:2~7>
이제, 하나님의 그 모든 때가 되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적 무지함 들과 무관심들로 함께 빚어 만들어 놓은 교만함의 축제들로 높이 쌓아올린 타락한 성들...
그 안에서... 그 속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패역들의 끈질긴 고리들...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 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일에 무언의 동조들을 해 왔던 수많은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랫동안 진실들을 꼭꼭 감추고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이 시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우리들의 벌거벗은 몸,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아닐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이사야5:12,13>
정녕 눈앞에서 수많은 불의가 행하여지고 도적질한 영적 권력의 남용들이 자행되어도알면서도, 보면서도, 그 권력의 폭력들 앞에서자신들의 이름과 영역, 지위와 위치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아무 말 하지 못하고도리어 그 권력 앞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묵인해 버리는 정녕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 하도록...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왔던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와 비리가 무엇인지는 그 권력의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 받는 영향력의 달콤함들 때문에 모두 다 쉬쉬쉬하며 꼬리들을 감추고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탐욕의 방들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은 정녕 아닌지....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이사야5:20>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 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어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8:12>
그러나 오래도록, 오랫동안 이 패역 앞에 긴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광과 이름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 일어나시리니... 그 때가 되면 불의와 불법들을 알면서도 도와주었던 자와 도움을 받았던 자 모두가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의 채찍들 앞에 반드시 그대로 두렵게 서게 될 것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6;30,31>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3988?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boardType=M®dt=20130514032134
2013-05-15 14:53:5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인을 통해 옥성호 형제의 귀한 글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력 있는 설교입니다.
바른 것을 선포하는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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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설교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군요.
“그 목사님 설교를 한 마디로 하면 ‘안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지.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안전한 설교....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설교는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바로 안전한 설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안전한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거나....둘 중 하나였습니다.
안전한 설교를 달리 표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목회자들 중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설교는 안전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나의 설교가 과연 ......성도들의 현실과는 동 떨어져 저 멀리 구름 위에서 들리는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시’와도 같은 그런 설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설교로 가득찬 교회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설교에 물든 목회자와 그런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진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현상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상의 평온함을 깨는 어떠 시도들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해온 것이 비록 ‘거짓과 기만,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관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이 아닌 일상이 제공하는 기득권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참과 거짓을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위험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위험과 더 많은 적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한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33년간 짧은 생이었지만 자신의 ‘위험한 인생’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외쳤던 ‘위험한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집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는 점점 더 우리의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변은 ‘동업자 의식’에 젖은 ‘안전한 설교’, ‘믿음의 명문가를 만들자’라는 식의 안전함을 넘어 실로 하나마나한 헛소리 설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 바뀌었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메일을 통해 내가 갈급하던 ‘위험한 설교’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름 아닌 사랑의교회 문제들과 관련해 한 집사님이 내게 보낸 장문의 글었습니다. 그 메일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몇 년전 제 초심과 각오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지쳐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그래선 안되겠지요?”
이 분의 글은, 이 분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내게 하나의 ‘위험한 설교’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강단 위에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가 실종되어가는 만큼 나는 내 주변에서 삶으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들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신앙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Dxch/60?listURI=%2Fhowsarang%2FDxch%3FboardType%3D
2013-05-15 14:44:56 | 관리자
맞습니다.
대표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은 사실 문제가 많은 싸이트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팩트자료들도 많고 거짓 자료들도 많습니다. 왜곡된 교리와 베리칩을 파급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3~4년 전에 알게된 싸이트이고 제가 사랑침례교회를 알기전까지만 해도 자주 들어갔던 싸이트였습니다. 그 때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알지요
저는 최근에도 이 싸이트를 자주 방문합니다. 아직 추방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에는 글을 올리면 통보없이 삭제당하는 글들이 좀있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반론글들과 오류에 대한 바른이해의 글을 댓글로 수차례 달았는데 최근에는 댓글까지도 삭제당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올린글은 김문수 목사님의 이기는자는 누구인가라는 글이었습니다. 설령 기성교인이라고 해도 읽어보면 수긍하거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 있겠다 정도라고 보는데 쪽지로 보내온 삭제이유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했다는 이유입니다. ...헐
.
운영진이 문제가 많지만 착각속에 그곳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생각해서 뭐랄까 돌이킬수 있는 이정표들을 세워보려고 했는데 그것을 막네요!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몇일전 모든 데이터를 지우고 털어버렸습니다.
왜? 라는 질문과 함께 하루종일 뒷조사 비슷한 추적을 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저는 좀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사이트에 바로 알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관련자료는 정리해서 한번 올려보려합니다.)
2013-04-28 01:31:54 | 노영기
싸이의 젠틀맨을 분석한 글을 담은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블로그에는 여러 가지 세상의 변화들을 담은 유익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나 회복 교회 그리고 종말론을 다루는 이런 블로그는 대부분 환난 통과를 가르치는 분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들은 열심을 다해 행위로 7년 환난가를 통과하는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스스로에게는 기쁨이 될지 모르지만 이들이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믿음을 가르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대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로서 열심을 다해 행위로 무엇인가 해 보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해 정보는 보되 결코 두려워하거나 행위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보여 주는 시대의 추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리 칩이 짐승의 표라고 해서 성도들을 속여 불안 속에 집어넣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안입니다.
부디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하면서 환난 전 휴거의 복된 소망 가운데 평안히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세상이 다 변해도 안전합니다.
샬롬
2013-04-27 10:39:1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싸이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배후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싸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노영기 형제님이 올려 준 기사가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09#c_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10
오늘 지인에게서 매우 유용한 정보가 와서 소개합니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니 거의 다 맞습니다.
특히 싸이와 호루스를 다루는 첫째 링크를 주의 깊게 잘 보기 바랍니다.
물론 싸이가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바빌론 미스테리를 이루어가는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래서 뉴에이지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계신 분께서 싸이를 덮은 악령인 마귀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샬롬
(1) 「싸이의 Gentleman과 호루스」
http://blog.naver.com/esedae?Redirect=Log&logNo=90171244147&from=postView
(2) 가수 싸이는 장막성전(신천지의 모태가 되는 이단)의 교주였던 유재열의 사위이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48
유재열은 한국 기독교 이단 중 가장 어린 나이(18세)에 교주가 되었고 과천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신도를 이끌었다고 한다.
70년대 사기사건에 연루된후 잠적하였고, 이후 장막성전은 여러개의 이단종파를 파생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이다.
유재열은 현재 스포츠제품회사와 철강회사를 경영한다고 한다.
가수 싸이는 유재열의 딸인 유혜연과 결혼하였다.
2013-04-23 23:48:48 | 관리자
설교자의 복장의 색깔까지도 단순함과 단정함으로 예수님만 드러내려는 마음의 작정이
귀감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색의 양복을 입으셨는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구원에서부터 성화에 이르기까지 판단해야만 살 수 있는데 위트 있는 판단의 한 가지 힌트를 주시니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013-04-22 14:22:55 | 김상희
예수님을 믿은 후 생활도 단순해짐을 확연히 느낍니다.
내 것 치장(?)하던 것에서 남을 섬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를 더 이쁘게 가꿔주는, 성경말씀 읽는 시간은 양보할 수 없지만요~
요번주 유난히 사랑침례 식구들께 고맙고 저도 한 식구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2013-04-22 14:15:21 | 목영주
늘 목사님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참으로 본이되며 은혜가 됩니다.
사랑침례교회 지체인 저희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의 모습이 주님앞에서 바를 때 교회는 저절로 주님께 영광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2013-04-22 14:04:05 | 김상희
안녕하세요?
언제부턴가 제가 항상 네이비(곤색) 양복만 입으니까
아마 목사가 옷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염려해 주시는 분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염려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 아내에게 이야기했듯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는 설교하는 날 꼭 네이비 양복만 입을 것입니다.
신학원 강해의 경우에는 배경이 블루이므로 대개는 그레이를 입을 것입니다.
네이비 양복만 입으려는 것은 제 마음에서 작정한 것입니다.
목사의 양복과 넥타이가 너무 화려하면 자기가 영광을 받게 되고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설교를 하는 한 춘하추동 항상 네이비만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네이비 양복을 입고 오면 그 날은 설교를 하는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됩니다(ㅎㅎ).
샬롬
패스터
2013-04-22 11:50:47 | 관리자
귀한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문득 지난 주 피어스 선교사님께서 목요자매모임에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자 한다면, 다시말해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들의 땅을 고치신다. 현재 우리에게 이러한 겸손한 목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목자가 더 많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3-04-22 01:11:06 | 김경민
안녕하세요?
오늘 우연히 싸이와 관련된 글을 읽다가 - 한류 포르노 파급에 대한 글 -
고 옥한흠 목사님(사랑의 교회)께서 5년 전에 현재 담임 목사인 오정현 목사에게 보낸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http://www.yesu.net/sesang/570508
개인적으로 저는 옥한흠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오늘 이 글을 읽고 목사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많이 깨달았습니다.
지금 저는 교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심정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합니다.
위의 글을 통해 바른 교리를 가졌어도 목자의 심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과 비슷하였습니다.
목사마다 시대의 요청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목사의 심정 자체는 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옥 목사님과 함께 제 아내의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참담한 상태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는 들어 쓰시는 줄 알므로
이제는 조금 더 나 자신을 내려놓고 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현재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분이나 앞으로 하고자 하는 분들이
옥 목사님의 글을 두고 두고 읽어보면서 목사의 자세를 점검하면 좋은 것 같아 글을 링크했습니다.
2013-04-19 17:37:07 | 관리자
어제 어느 분이 요한복음 5장 2절의 양 시장을 개역성경은 양 문이라고 해서 또 오역을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2013-04-04 09:23:1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많은 교회들이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비상식적인 일들을 함으로써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돈과 관련된 문제가 큰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달리 여러 가지 일들을 상식적으로 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있고 이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게 되었다고 광고를 하자 여기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분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교회에서 사고파는 행위를 하느냐? 사랑침례교회는 다른가 했더니 여기도 마찬가지구나.” 하며 실망하는 분이 간혹 있다고 해서 오늘은 이성과 상식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려 합니다.
성경에는 큰 원칙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세한 사항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이성과 상식을 가지고 판단해서 처리하여야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가서 희생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자, 그럼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데 사는 단 지파의 사람들은 예물을 드리려고 짐승을 끌고 몇 백 킬로미터를 걸어와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돈을 들고 와서 성전 근처에서 예물 짐승을 샀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 양 시장이 있었습니다(요5:2; 신14:26).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 큰돈을 벌려고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고 예수님은 이런 행태를 보시고 분노하셔서 탁자를 뒤집어엎으시고 채찍으로 이 장사꾼들을 때리셨습니다(요2:13-17).
신명기 14장 22-26절
22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모든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주} 네 [하나님] 앞에서 곧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먹고 또 네 소 떼와 양과 염소 떼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며 이로써 {주} 네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셨을 때에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그 길이 너무 길어 네가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손에 들고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으로 가서 26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즙이나 독주 등 네 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거기서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너와 네 집안이 함께 먹고 기뻐할지니라.
요한복음 5장 2절
2 이제 예루살렘의 양 시장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주랑 다섯 개가 있고
제가 설교하면서 교회에서는 사고팔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절대 예배당 안에서는 사고팔면 안 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질이 왜곡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판매를 합니다. 좋은 책들을 생명의 말씀사에서 싸게 가져다가 판매합니다. 자매님들이 성경 홍보 스티커를 만들어 판매합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사꾼들처럼 종교 놀이와 벌이의 일환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하는 바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집에 있는 물품 중에서 쓸 만 한 것들을 무료로 내놓으면 필요한 성도들이 적당하게 매겨진 가격에 사고 여기서 모인 돈은 전액 중국에 보낼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통 사람이 이성과 상식으로 판단할 때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상식으로 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비상식적인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언제라도 매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천에서 가장 큰 oo장로교회의 목사가 은퇴하면서 수십억 원을 은퇴금으로 받아 챙겨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 목사도 사람이고 은퇴하면 노후를 살아야 하므로 당연히 은퇴금과 연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30-40년 정도 회사를 다닌 사람이 받는 수준의 은퇴금과 연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교회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목사가 교회를 크게 만들었으니 떠나면서 그 지분을 챙기려는 것이기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서울 삼일 교회의 ooo 목사 역시 성추행을 일으키고 떠나면서 뭉테기 돈을 지분으로 받았고 또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이성과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런 목사를 징계하고 그런 데 가지 말아야 합니다(그런데 현실은 성도들이 많이 가므로 사실은 성도들이 목사를 망치고 있음).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도 은퇴 전에 재직하는 동안 교회에서 수백억 원을 빼다 아들 신문사에 쓰는 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교단 장이나 노회 장, 감독 등을 하려면 교회에서 몇 억에서 몇 십억 원을 빼다가 선거 운동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상식을 바르게 적용하면 교회 안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을 동원하여 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이성과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상식으로 판단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으면 평안하게 진행하면 됩니다.
앞으로 이런 원칙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판단하고 진행하시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3-04-03 19:03:58 | 관리자
안녕하세요?
많은 분들이 WCC에 대해 문의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이트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grace0406/22115
부산의 브니엘 신학교로 전화하시면 이 책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051-867-9107-8
http://www.penielths.or.kr/
저희 교회도 600권을 주문했습니다.
곧 오면 배포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 위의 두 사이트는 참고하시라고 드렸습니다.
그 두 사이트의 다른 내용은 제가 전혀 모릅니다.
2013-04-02 16:23:26 | 관리자
저와 제 가정이 정동수목사님을 통해 올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심과 인터넷으로 배움의 기회를 주심에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올바른 것을 얻기 힘든 이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주시는 정목사님의 노고에도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씀 또한 올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사모하고 열심으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드리며 캐나다 리치몬드힐 신영환 형제 올림
2013-03-28 05:35:53 | 신영환
영상으로목사님의말씀을매일들으면서많은은혜를받고있습니다믿음에대한바른생각과생활의활력을찿았습니다.삶의목적을바로알게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2013-03-26 11:18:46 | 김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