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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자매 모임-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02조회수 : 4274
    • 작성자 : 이은정
    • 작성일 : 2023년 3월 31일 8시 41분 25초
  • 2023330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3월 마지막주 자매모임이 1층 체리티홀에서 있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구속하여

    모이기에 힘쓰시는 자매님들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모임이 서로에게 도전이 되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2장 서양의 요가

     

    19세기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간 요가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요가는 서양에서 더욱 대중화되어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행하기 쉽게 되었다. 요가 경전인 요가 수트라에는 요가는 마음의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동양의 영성과 기독교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선이 늘 있었다. 그런데 이 선이 이제 흐려졌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급속하게 성장하는 영적 혁명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영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아니 어쩌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문화적인 변동에 더디게 반응해 왔다. 이러한 천진난만함의 결과, 이런 현상이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넘어 들어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영적 생활을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사고의 본질이 무엇이고 왜 이것이 뉴에이지 사상과 맞아떨어지는지 명쾌하게 이해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만유 안에 있는 신?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 힘 혹은 능력이 흘러나온다. 이것이 요가 명상의 최종적인 목표다. 명상은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켜 신적 존재를 곧장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신은 온 세상 안에 있고, 온 세상은 신 안에 있다.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유일한 차이는 신이 어떻게 온 세상 안에 존재 하는가 뿐이다. 모든 창조세계는 신적 동력 안에 살아 있고 활성 한 임재로서의 신을 품고 있다. 단지 감춰져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 이유에서 성경적인 기독교와 정면으로 맞선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오로지 참되신 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되, 그분의 정체는 모든 사람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정체의 충만함은 그 육체적인 형태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에게만 나타나 있다.

     

    성경은 사람 안에 신성이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선명하게 가르친다.

    내재신론자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이 자신 안에 신적 정체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하나님이 온 세상 안에 계시다는 이론은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격적 본질을 삼위일체 밖의 누구 혹은 어떤 것과도 나누지 않으실 것이고, 나누실 수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지 그것을 애초부터 소유한자들은 아니다.

     

    반면 내재신론과 범신론의 경우, 신을 소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밖을 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마음의 복도로 들어가시게 할 때 진정 신이 있구나, 내가 신과 떨어져 있지 않구나 하고 알게 된다고 말한다.

     

    - 침묵은 신의 언어인가?

    신비한 침묵이 뉴에이지 수련자들이 침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똑같은 방법들, 즉 만트라와 호흡법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됐다.

     

    관상 기도는 이성이 아니라 심령이 신을 관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말 혹은 거룩한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단어의 뜻을 숙고하지 말라. 사고와 고찰을 그쳐야 한다. 모든 감정과 생각은 떨쳐 버려라.

     

    성경 어디에도 침묵이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확고부동하게 십자가의 메시지.

     

    - 관상적인 영성의 범위

    많은 기독교인이 실용적인 기독교 신비 운동이 존재하는지, 결정적인 계기의 전환이 있는지, 그리고 이 관상적인 영성으로 향하는 하나의 명백한 흐름이 수면 위로 부상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실용적인 기독교 신비가의 가르침을 너무 잘 흡수한 나머지 목사들조차 이 변화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관상 기도 운동의 기원을 살펴보면 로마 카톨릭 수도사 토머스 키팅이 시작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 운동의 가장 명백한 통합 형태는 로마 카톨릭에서 발견된다. 관상 기도 운동을 통해 주로 그 동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상 기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교권을 이용하여 신자들에게 권장한 카톨릭교회의 최근 공식 신앙 고백을 보면, “관상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침묵이다.”

    많은 서가에 관상 기도는 영성이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고 영성 서가들에 꽂힌 책들의 80에서 90퍼센트가 신비적 기도에 대한 것들이다.

     

    - 동양에서 빌려 온 사막 교부들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 은자들이 살았다. 이 은자들은 역사상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 은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고립된 작은 마을에 기거했다. 관상 운동은 만트라를 기도 도구로 권장한 이 수도사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초기 기독교 수사들의 명상법과 생황규칙은 동방의 몇 개 왕국에서 볼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 고행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사막 교부들은 많은 기도의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했다.

    기독교 명상 수련은 이집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명상 수련의 지적,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기반의 상당 부분 역시 헬레니즘과 로마 이집트의 신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다양한 영지주의적인 사변과 접촉한 곳이 알렉산드리아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진지한 이상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힌두교도들이 그들의 신에 다가가기 위해 썼던 방법이 있다면, 기독교 만트라도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쓰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따르라는 그분의 교리를 무시할 때, 결국은 이교도들의 길을 따르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수없이 자행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기사는 영적인 불순함을 보여 준다. 가인은 경건에 이르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대로 하는 가인의 종교가 되었다.

     

    여러 면에서 사막 교부들은 가인과도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교리를 순순히 듣고 옳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사막 교부들의 경건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별력의 부족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의도는 좋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막 교부들과 그 영적 후배들의 시도에 대한 답으로 찰스 스펄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지혜는 십자가 교리를 손질해서 타락한 본성의 변질된 기호에 좀 더 부드럽게 다가가고 잘 맞는 체계가 되게 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육체의 지혜는 복음을 증진하기는커녕 복음을 오염시킨다. 아니 다른 복음이 되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형태로든 변경하고 수정하는 것은 오염이고 수욕이다.

     

    - 혼합 영성

    관상 기도의 최종적인 결과는 혼합적인 영성이다. 혼합 영성의 배후에 있는 전제는 신성이 온 세상 안에 들어 있고, 신의 임재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신비 사상(즉 명상)을 통해 이런 신성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전제는 한 사람을 성경의 건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로 연결하는 일종의 자기 최면적인 황홀경 상태에 근거를 두고 있을뿐더러, 그 경험에 의해 유지된다.

     

    목사며 저자인 존 맥아더는 자신의 저서-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신앙-에서 이 점을 깊이 있게 요약하고 그 안에 내재하는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난 20면 동안 복음주의자들의 합의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메시지는 교리에 대해서는 짧아지고 경험에 대해서는 길어졌다. 사고가 감정보다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언제나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손꼽히던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됐다.

     

    건전한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뉴에이지는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신비적인 접근법을 제공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건강한 기독교 교리는 인류가 죄악 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분리됐다는 이해에서 나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1114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변형하느니라.

    15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변형된다 해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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