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6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한 믿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교제는 주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인 것 같아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칭의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나 선함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공로나 선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왔도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회심한 그 순간부터,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주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대면 할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죄 없는 완전함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범죄 할 때, 아버지께 우리를 변호해주실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는 비록 형편없는 기도를 드릴지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기도해주시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아버지, 우리는 날이 갈수록 우리의 죄책을 더 알게 되고 점점 더 우리의 죄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더욱 더 신실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주님 주께서 우리를 향해 하신 대속 사역은 우리가 우리의 섬김을 통해 주를 높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섬김을 결코 공로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을 보완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잘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섬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토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리스도만을 높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 10장 말씀을 묵상하라. 묵상은 적극적으로 성경을 되새기는 것이다. 시편에서 ‘묵상’대신 쓰인 표현으로는 ‘생각하다’와 ‘깊이 되새기다’를 들 수 있다. 묵상한다는 말은 스스로 진리에 관해 묻는 걸 가리킨다. “지금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 걸까? 진리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거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진심으로 믿고 단단히 붙잡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성경 어느 본문을 묵상한다는 말에는 미리 치열한 연구와 해석을 거쳐 그 뜻을 파악한 상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슨 얘긴지도 모르는 말씀을 되새기거나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이끌어 간다.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성경 전체를 볼 때 본문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토대로 두고 성경을 읽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거기에 마음이 사로잡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정이나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아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분석과 성찰을 부추기고 그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영적으로 성경을 ‘소화’하는 작업이다. 삶에 적용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상태와 앞길을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어떻게 이끄는지 숙고하게 한다. 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 소망을 품게 하며, 스스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기억하게 한다. 성경의 진리들을 가슴에 단단히 품고 새겨야 한다. 초월 명상의 한 갈래로 요즘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만트라명상’은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적인 묵상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추상화하면 안 된다. 삶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여기면 안 된다. 성경 진리의 가르침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행동과다와 주의력결핍장애에 빠진 현대사회는 속도가 떨어지는 성찰과 묵상을 실종된 기술쯤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일의 앞뒤를 골똘히 생각하여 깊은 확신에 이르는 성품을 갖는다. 어려운 개념을 쉽고 간단한 말로 설명할 줄 알며, 무슨 일을 하든 이면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사를 건성으로 살피며,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고르고 선택하며 살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피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묵상하는 이들은 압력을 받아 내고 견딜 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쭉정이처럼 남들이 몰려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가식적이고, 공허하며, 진전성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데 실패하여 원래 모습과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희귀한 일을 두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믿음의 진리가 마음과 성품을 사로잡고 또 빚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이것저것 떼고 나면 몇 푼 안 될 것 같아 오래도록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와 달리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가 막혀 어쩔 줄 모를 게 뻔하다. 실제로는 갑부였는데 쪼들리며 살았다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만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쁜 습관에 시달리고, 걱정, 따분함, 낙담, 분노 등에 휩쓸리기 일쑤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맞서고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문제와 이슈들이 산더미 같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해졌으면서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사도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의 ‘화학처리’,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감동’을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진리에 동의하고 입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생활방식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성령님이 마음을 민감하게 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리의 빛에 노출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성령님은 현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쁨에 겨워 두려움을 잊고 과감하게 행동하게 하신다. 그러면 인생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복음 속에서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영적인 완고함, 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해야 한다. 얼룩덜룩 오점이 많은 선행 기록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 허다한 죄와 허물을 다 덮는 게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선택은 저마다의 몫이다. 두려움과 야심, 탐욕과 욕정, 중독과 내면의 공허감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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