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푸른 생명이 활짝 피어올랐던 4월이 점점 지나 이제는 더위를 느끼는 계절이 가까워 지네요. A조 자매모임에서는 독서미팅 후 대공원으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리더 남윤수 자매님의 세심한 수고 덕분에 맛있는 묵밥도 먹고, 황톳길을 맨발로 체험하며 지체끼리 즐거운 교제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양한 꽃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예술성에 깊이 감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즐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래에 사진 공유하겠습니다. 독서미팅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탄식할 때 근원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나누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재즈로 탁월하게 비유한 내용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11 하나님 안에서 탄식하라 현실세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불만족할 수밖에 없다 - 캣의 이야기 현관에 서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원하던 걸 다 가지고 있었다. 3일 전 그녀와 브렌트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서 멋진 주말을 보내고 돌아왔다. 150년 된 그들의 농가 뒤편 정원에는 추수를 기다리는 채소들이 가득했다. 브렌트는 좋은 직업에 집 주변을 잘 돌보는 손재주도 있었고, 무엇보다 캣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캣은 어린 자녀를 둔 비슷한 나이의 친한 친구들도 있었다. 매주 화요일에 있는 자녀 동반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도시에서 위치가 좋은 곳에 콘도를 소유한 덕에 그곳에서 나온 수익으로 그들이 꿈꾸던 농가를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내 장식도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원을 매우 사랑했는데, 도시에서는 실내에서 화초만 겨우 가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자신들이 기른 야채를 먹고 있다! 캣과 브렌트의 관계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캣은 친구들의 결혼생활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비하면 자신에게는 감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중보기도의 소명 때문에 캣은 자신들이 살기로 결심한 그 작은 마을의 교회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매우 따뜻했고, 교회 위치도 그들이 다니기에 편리했다. 그녀는 유치부를 맡아서 방도 꾸미며 즐겁게 사역했다. 캣과 브렌트는 이런 작은 교회에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는 큰 도시 교회가 제공하던 프로그램과 행사의 공백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다 갑자기 브렌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러 도시로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해야 할 하루의 일과가 있었지만 캣은 자신의 삶이 참 복되다고 생각했다. -너무 쉬운 만족 얼핏 보면 캣과 브렌트의 삶은 매우 경건해 보인다. 하나님의 명령을 대놓고 어기는 일도 없고, 부부관계도 꽤 건강하다. 교회 일도 참여하고, 하나님의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끝없는 갈등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채도 많지 않다. 이웃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무언가 크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 겉으로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경건하지 않다.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찾으면서 끝없는 마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 캣의 문제는 너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캣은 자신의 작은 왕국의 꿈이 거의 실현되었다는 것에 기뻐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것도 탄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탄식할 시간 그리스도가 오셔서 마지막 왕국에 들어가시기까지 모든 기독교인의 기본 언어는 탄식이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2-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창조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것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바나다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약속되었지만 아직 받지 못한 것이 있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구원이 아직 모두에게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물리적 세계의 일시적인 즐거움은 우리 마음에 늘 공허감을 남기며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죄가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기에 일어나는 모든 피해가 모든 상황과 여건 속에 보이므로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오직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고 오직 영원에서 성취될 수 있는것을 물리적 세계에서 찾으려는 유혹에 늘 빠진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탄식은 작은 왕국의 욕망을 큰 왕국의 관심으로 바꾼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난다. -축소와 만족 캣의 문제는 그녀에게 감사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쉽게 만족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캣의 삶에는 구속을 바라는 탄식(로마서 8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피맺힌 절규)이 철저히 빠져 있다. 그녀의 삶 내면의 만족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이것이 경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캣이 만족하는 것들을 한번 살펴보자 ◆물리적인 현실세계가 주는 일시적인 성취감 캣이 느끼는 성취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녀가 이 현실세계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획득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겉치장된 믿음의 속을 들여다보면, 캣의 만족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브렌트에게 뭔가 일이 생겨서 직장을 잃거나, 집을 팔아야 하거나, 아이들 중 한 명이 아프다면, 캣의 기쁨과 행복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이런 것들 안에서 누리는 그녀의 만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건하지 않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 비극적이고, 불완전하게,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문제다. ◆중도에 끝난 구속사역 캣의 삶에는 시험받고 고군분투하며 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이 그녀 안에 시작하신 일이 너무나 불완전한데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캣은 영적 성장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교회와 성경 공부에 참석한다. 그리고 기독교인 남편에 대해 감사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믿음에 가까이 이르고자 하는 열의는 거의 없다. 자신의 삶에서 구속사역이 중도에 끝났는데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사람들이 몹시 무례한 것과 정치적 부패와 도심 내부의 문제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때로는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실달리는 아이들의 보고서와 최근에 일어난 폭풍의 피해를 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캣은 작은 왕국의 시선으로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세상을 위해 울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서 8장의 큰 왕국의 탄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상호 만족을 주는 가벼운 공동체 그녀가 다양한 관계에 참여하는 데 있어 그들 중 아무도 건강하지 않거나 갈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꽤 의미 있는 관계들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캣에게 관계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녀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녀에게 시작하신 선한 일을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라기보다 개인 행복의 원천이었다. 때문에 캣은 수많은 가벼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너무 깊고 진지한 관계를 맺으면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이 이 정도 경계를 지켜주는 것에 감사한다. 그들은 서로 방해 받지 않는 낮은 수준에서 서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관계다. 초월적인 영광은 작은 왕국의 소망보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끌려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캣의 근시안적인 만족감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추구하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간절히 구하게 된다. -궁극적인 성취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진정으로 성취감을 누리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상의 일시적 즐거움에 만족하느라 바빠서 그분이 주시는 성취감을 발견하지 못한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것들 자체로는 악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지만, 그것들이 우리 마음의 만족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작은 왕국의 삶은 창조세계의 만족과 불만족에 온전히 좌우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채워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 즐거움은 나쁜 열매를 추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땅의 것들은 진정으로 우리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 살이 찌게 하고, 건강을 상하게 하고, 중독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다. 또한 결핍을 느끼게 만들고, 분노하게 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작은 왕국의 즐거움에 지배당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해치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맛보고, 듣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게 되면 마음과 행동으로 끝없이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날마다 깊은 감사와 탄식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향기와 잘 준비된 음식의 감칠맛에 대해 감사한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과 일몰과 강들, 산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도 감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고, 우리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이런 것들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심에 감사한다. 동시에 우리는 탄식한다. 이 세상이 상처를 입었기에 탄식한다. 어디를 보아도 상처투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다를 수 있는 온전한 존재가 아직 아니기에 탄식한다. 이 땅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킬수 없기에 탄식한다. 탄식이 하나님 자녀들의 기본 언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옳다. 당신의 삶이 닿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이 바로 이 탄식이다. 12 하나님과 구원의 음악을 연주하라 하나님은 매 순간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상호 교류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날 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난생 처음 재즈 공연을 들으러 테드 형과 함께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 갔다. 램지 루이스 트리오의 공연이었다. 나는 그날 밤 내가 경험하게 될 것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그날 밤 내 인생이 바뀌었다! 공연은 모든 관객에게 익숙한 램지 루이스의 피아노곡으로 시작됐다. 친숙한 곡 첫 번째 소절이 연주되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야! 이게 유명한 재즈란 말이야? 라디오 방송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곡이잖아!' 하지만 두 번째 소절로 넘어가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 명의 멤버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불협화음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조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각자 자신의 악기로 따로 연주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들은 상대편의 소리를 막거나 제멋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통일된 주제로 최선을 다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각자 연주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혼신을 다해 합주했다. 혼신을 다해 각자의 악기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음악은 섬세하면서도 예측불가능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재즈는 규칙을 버리고 멋대로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다. 위대한 재즈 연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불가능하고 창의적으로 연주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일련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날 밤 형식과 자유의 교차점에 대해 생각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날의 연주는 내가 경험해본 가장 자유롭고, 가장 고무적이고, 가장 즉흥적인 연주였다. 그것이 음악을 이루는 형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그날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서 경험한 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척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음악 왕국 하나님은 최고의 음악가이시다. 그분의 음악은 당신의 삶을 바꿔놓으신다. 구원의 음표들은 당신의 마음을 재배열하고, 당신의 삶을 회복시킨다. 용서, 은혜, 화해, 진리, 소망, 주권, 사랑을 노래하는 그분의 노래는 당신의 인강성을 되돌려주고, 당신의 정체성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음악을 혼자 연주하지 않기로 하셨다. 우리 한사람 하사람을 그분의 위대한 구원 밴드의 연주자로 부르신다. 우리의 음악을 내려놓고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곡한 것을 칭찬하는 데 매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각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매우 치명적이 약점이 있음을 알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음악은 그분의 틀을 벗어나서 연주된다. 그래서 우리의 음악은 해롭고, 치유하지 못하고, 나뉘게 하고, 화해시키지 못하고, 저주하고, 용서하지 않고, 심지어 작곡가인 평화의 왕자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손에 든 악기를 부수지 않으시고, 음악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던지시지 않는다. 망상에 가까운 우리의 거창한 개인주의를 은혜로 용서하시고, 그분과 함께 연주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전에는 결코 연주할 수 없었던 음악을 연주할 능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귀가 속아 넘어가서 우리 음악이 그분의 음악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구원의 노래에 싫증을 내면서 우리가 쓴 음표들을 듣고자 갈망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위대한 작곡가의 제지가 필요하다. -재즈 왕국 당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은 그날 밤 그 트리오가 솜씨 좋게 적용했던 것 같은 형식과 자유의 원칙들(form and freedom principles)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된다면 어떤 형태의 삶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에게 맞는 형태와 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형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원칙들, 명제들, 명령들, 약속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가 삶으로 따라야 할 틀(형식)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 틀 안에서 연주할 때, 하나님 나라가 지극히 영광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그곳에 임한다. 이 깨어진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의 음악뿐이다. 모든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선율뿐이다. 구원의 음악은 모든 곳에 적용 가능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정하신 형식 안에서 연주할 때, 우리 삶은 자신의 삶이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거대하고 중요한 것의 일부가 된다. -불협화음이 내는 소음 조이는 일을 끝낸 후 집에 돌아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와 엠마 사이의 악감정은 너무도 극심해서 숨이 멎을 정도였다. 뭔가 잘못한 일(말을 잘못했거나 뭔가를 잊어버렸을 것이다)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일로 또다른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그와 엠마 사이가 매번 이렇지는 않았다.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는 상대방의 말을 포용했다. 그러나 결혼 후 처음 몇 달간 보인 표면적인 조화로움은 짧게 지나가버렸다. 소소한 불협화음의 순간들로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짧은 불협화음의 순간이 점점 늘어나자, 그들의 관계는 멋지게 연주된 듀엣곡이 아닌 자동차 경적 소리에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렸다. 조이와 엠마는 이런식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불협화음 같은 관계를 위해 예비된 은혜가 있다. 조이와 엠마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음악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음표들은 결과적으로 분열과 불협화음을 만든다. 그 음표들은 영혼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정을 깨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엉망으로 만든다. 정의를 왜곡하고 부패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치유 공동체가 되도록 계획하셨던 모든 공동체(가정, 교회, 정부)는 병을 앓게 되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치유를 제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재즈다! 하나님 나라의 조화로운 음악은 형식에 대한 것이면서 또한 자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저 연주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주할 악보에 모든 음표를 달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당신이 처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를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말을 미리 정해놓거나 미리 결정을 내려놓지 않으신다. 성경말씀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은 조표와 박자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엄마와 아빠들에게 자녀양육과 관련하여 주신 직접적인 명령을 공책 양면에 열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먹지 않으려는 어린 자녀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다투는 형제자매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십대 자녀를 그분의 시선으로 이끌기 위해 뭐라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각각의 상황에서 적용할 중요한 기준들이 들어있다. 하나님 나라의 재즈 같은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 자유다. 훌륭한 재즈 음악가는 연주만 훌륭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듣는 것도 매우 잘한다. 그들의 재즈는 언제나 주변과 상호 교류한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연주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자유가 하는 질문들이다. -목적을 가진 재즈 '그분은 매 순간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신다. 현상적으로 볼 때 완벽한 악보를 주시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잠시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다는 이런 생각이 왜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우리의 죄악된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편안하고, 쉽고, 성곡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문제는 이런 욕망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즐거워해야 할 한가지와 경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또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련의 기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 그 이상이다. 즉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다! 그분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딱 필요한 것만 주신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일생을 살며 즉흥 연주를 할 때 그분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이고 창의적이기 원하신다. 우리의 압축포장된 작은 세상의 경계를 초월하기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낱장 악보를 주지 않으시고 재량껏 하도록 하신 이유다. 그런 삶의 방식은 우리가 그분이 작곡하신 것과 그분이 현재 연주하고 계신 것에 집중할 때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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