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낮 기온이 올라가며 더위를 느끼는 것을 보니 초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봄의 새싹들도 점점 자라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게 보이네요. 성도님들도 또 다른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주님의 신실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매들도 주님의 신실함을 닮아가기 위해 어김없이 이번 주 모임을 열었는데요. 폴 트립 저자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느새 후반부에 다다라 15, 16장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희생의 필요성과 역설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고, 또 불완전한 사람의 분노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 말씀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15 예수님 외의 모든 보물을 내려놓으라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한다는 걸 아는가? 왜 연예인들은 그토록 치열한 개인적, 정신적, 신체적,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까? 그 대답을 생각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이나마 TV에 노출됨으로써 상당한 단기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또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특권을 자랑할 수 있고,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존재다. 우리는 뭔가 하기로 마음을 정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놀라울 정도로 희생을 한다. 직장에서 하는 희생은 놀라울 정도다. 일터에 일찍 가서 늦게까지 일한다. 상사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 감사,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도 놀랍다. 상대의 모든 변덕을 맞춰주고, 그들에게 우리의 일정도 맞춰주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체중을 감량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장하고, 여유 있는 특별한 휴가를 즐기고,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갖고, 학위를 취득하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명품 신발을 신고, 하나의 주제에 전문가가 되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척과 친구를 방문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항거하고, 혹은 이 모든 것을 벗어나 단지 쉬기 위해 사람들이 희생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에 갖고 있기 마련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느냐다. -희생의 왕국 이 왕국 역사의 중심에는 충격적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왕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완벽히 이해되는 희생이면서 동시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희생이다. 그리고 그 희생이 그때부터 왕국의 운영 일정을 결정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이 상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양식도 주셨다. 이 왕국은 십자가의 왕국이고, 그 희생을 기념하는 모든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금항아리 '무지개 끝에서 금항아리를 찾는다'는 속담처럼, 우리 모두는 자기 나름의 금항아리를 찾으며 살고 있다. 즉 모든 개인적 희생의 이면에는 어떤 보물에 대한 탐구가 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요청도 설명해준다. (눅14:28-33) 예수님은 그들이(또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얻고 지키고 즐기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생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서 황금 항아리를 찾아보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분이 계셔야 할 자리를 넘보는 다른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우리를 통치해서는 안 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움켜쥔 삶 당신 삶에서 현재 주먹을 꽉 쥐고 움켜쥔 부분은 어디인가?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서 뭔가를 빼앗으려 하자 그 사람이 그 소중한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손이 하얗게 되도록 물건을 움켜쥐고 있다. 익숙한 장면 아닌가? 당신이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주먹이 하얗게 되는가? 우리는 물건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쥐었던 것이 어느덧 우리를 통제하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손을 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요청하신다. 우리가 합당하게 소유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또 신속히 사라져 버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소유할 때다. 16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선한 동시에 분노하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가장 위대한 드라마기에 한 번 읽어서는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지만 자주 오해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바로 야고보서 1장 19-20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진노하는 것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분노의 연대기 성경 이야기는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은 전쟁'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즉 성경 이야기는 두 가지 분노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분노다.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 즉 거룩하고, 의롭고, 완벽하고, 사랑이 담긴 방식을 원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분노다. 사람들은 왜 분노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방식, 즉 거룩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의롭지 않고, 불완전하고, 사랑이 없는 방식을 원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이 두 분노는 공존할 수 없다. -두 가지 분노, 두 가지 명분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운 명분, 그분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버리실 수 없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고, 버리셔도 안 된다. 그분의 의로운 명분으로 인해 분노하시는 그 열정이 온 세상의 희망이다. 그분의 방법은 옳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도 영적으로 자신의 명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길 원한다. 결국 사람의 분노의 그의 운명이 된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이 분노하지 않으실 때 분노한다. -은혜의 격렬한 분노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가 얽혀 있는 것을 볼 때, 다가올 충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두 분노가 충돌하면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두 분노는 결국 충돌하게 되지만 어디서 충돌할지는 예상할 수 없다. 이 둘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한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격렬한 은혜의 자리요, 영원한 변화를 가져온 십자가라는 한 극적인 순간에 분노가 폭발한다. 사도행전 2장 22-24절에 적힌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죄와 반역을 저지르는 세상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분의 분노를 표현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분노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자기 방식을 원하며 메시아를 미워하고 분노한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갔다. 이 분노의 순간이 심판이나 정죄로 끝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은혜의 격렬한 분노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선과 분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무슨 일을 하려고 하셨는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왕국이 그분의 목표였을까? 아니다. 십자가는 매일 분노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처나 세상의 아픔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방해받기 때문에 화를 낸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분노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까지 만드시고자 한 사람들의 문화는 그분을 매우 사랑하고, 그분의 의로운 명분에 온전히 헌신하고, 죄가 그들과 세상에 행한 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매일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문화다. 이 사람들은 선한 동시에 분노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기에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분노다. 죄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해하고 은혜로 반응하는 긍휼의 분노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의로운 분노를 가지게 하려고 죽으셨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작은 왕국의 열망을 실현하는 데 끊임없이 장애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환경에 대해 속으로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와 그 죄가 당신과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가 당신이 사는 세상을 망가트린 것에 분노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드라마 성경에서 펼쳐지는, 즉 두개의 서로 대립하는 분노를 다룬 이 거시적 드라마는 당신의 삶이라는 미니 드라마이기도 하다. 일상의 상황과 관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이 두 가지 분노 중에서 어떤 것이 당신의 마음을 통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이라는 자기희생적인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긍휼이라는 회복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정의라는 구속하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평화라는 화해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이런 식으로 분노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꿈에 붙들리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을 갖게 되었기에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게 된다. 지금 현재 일상에서 당신은 누구의 왕국을 위해 분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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