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으로 보내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벗꽃들이 어느덧 푸른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따가운 햇살에 저도 모르게 그늘로 피하면서 봄의 끝나감을 아쉬워 합니다. 시대와 국가의 상황이 우리의 혼을 짓누르는 때에도 계절과 꽃들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자매모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온 몸을 통해 기뻐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감사히 보냈습니다. 이번주 챕터는 7. 16세기 종교개혁(좋은시작, 미완의 개혁)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 서론 - 새벽이 밝아오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 앞에는 한 장의 라틴어 문서가 게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제였다. 그 문서는 유럽을 뒤흔드는 폭풍의 시작이었다. - 이 장은 종교 개혁이 회복한 진리와 남겨 둔 한계를 함께 살피며, 루터와 칼빈, 츠빙글리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교회론과 양심의 자유 문제에서 왜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는지 검토한다.
(자매: 우리는 개혁자들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으며, 지금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것 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다가도 모기같은 작은 문제마저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걸려 넘어지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될때마다 안타깝습니다)
● 마르틴 루터(1483 - 1546) - 종교 개혁의 시작 - 1505년 7월 2일, 죽음의 공포에서 루터는 극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수도사가 되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루터를 괴롭혔다. 그는 이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이해했다. 1518년경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정죄하는 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얻게 되는 '칭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매: 처음에 루터가 두려워했던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얻는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의'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씀들을 통해 얻는 이런 영적인 기쁨들을 놓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95개의 논제는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을 불러왔고 공개토론을 통해 교황의 무오성과 공의회의 권위가 절대적일수 없으며 그들도 오류를 범할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521년 공식적 파문을 당하며 로마교회와 완전한 결별을 했다. - "나는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제국 의회에서의 이 답변으로 루터를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졌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선 후제를 통해 구출하시고 보호하심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자매: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한 확신을 말하는 루터의 고백처럼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교만이 아니고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하기위한 근거가 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 교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루터는 단 11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어린이들의 말을 관찰했다. 생동감있고 이해하기 쉽게 독일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했다. 1534년 독일어 루터 성경전서가 출판되었고 이는 독일어의 표준화를 이끌고 유럽 종교 개혁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루터의 유산은 대단히 복잡하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복음을 회복하고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로 신학을 정립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은 교회론에서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교회와 유아 세례를 유지했으며 성경신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했다. 그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확립하지 못했고 반 유대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무엇을 믿느냐?"는 개혁했지만 "교회란 무엇인가?" 는 전혀 개혁하지 못했다. 침례교는 루터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려고 한다.
(자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극적회심, 수도사, 성경연구등을 통해 시대와 교회의 문제를 깨닫고 95개 논제를 통해 종교 개혁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비록 개혁은 미완의 모습이어도 우리 침례교가 이어져 올수있는 근간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며, 현시대에도 누군가를 준비하고 계실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 울리히 츠빙글리(1484 - 1531) - 스위스 개혁 - 츠빙글리는 루터와 거의 동시에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고, 설교자가 되었을때는 전통적인 미사 본문 대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외쳤다. - 1523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 편에 서며 개혁을 지지하였다. 취리히에서 성상들이 제거되고 미사가 폐지 되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다른 견해로 인해, 루터와 개혁파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다.
(자매: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동시대에 함께 종교 개혁 운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 그의 신학은 개혁 교회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예배에서 성경에 없는것은 모두 제거 하여, 단순함은 개혁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도 교회론에서는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역시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 세례를 옹호 했으며, 재침례 성도들을 박해하여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자는 수장한다는 법을 통과시킨 시의회를 지지하였다.
● 존 칼빈(1509 - 1564) - 제네바의 개혁자 - 칼빈은 루터의 저작들을 읽었고 개신교 신학을 받아 들였으며 결국 로마 카톨릭과 결별했다. 26세때인 1536년 논리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개혁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고 이것이 나중에 칼빈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자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카톨릭의 부패와 교리에 저항하며 개혁한 그들도 사회적 환경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개인의 한계가 미완의 개혁으로 끝맺음 된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기독교 모범 도시로 만들려 했으며 교회와 시 정부가 협력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교회규례, 당회 등을 조직화하여 엄격하게 개혁하려 했다. - 칼빈 신학의 핵심은 다섯가지로 구분 될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다. 둘째, 이중 예정론(구원, 유기)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셋째, 인간이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설명은 때때로 '인간의 부패가 곧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다'라는 방식으로 오해 되곤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수 없음을 가르쳤다.
(자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너무 치우친 견해로 인해 전적타락, 전적무능력이란 교리 때문인지,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교제 했던 성도들 중에는 사업이 잘 될때는 은혜로 여기다가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교회에 충성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로 여기곤 했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지만 영혼의 자유가 없이 억매인 그분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 결론 - 불완전한 개혁과 침례교의 부름 - 종교 개혁은 위대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세례를 고수 했으며 이단을 박해하고 양심의 자유를 부정했다. 이들은 왜 더 나아가지 못했을까? 첫째는, 천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였다. 둘째, 당시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 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셋째, 정치적 필요성이었다. 넷째, 신학적 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성경적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 루터가 문을 열었고 재침례 교인들이 그 문을 통해 나아갔고 침례교가 그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신약 교회의 완전한 회복이다. 성경 만을 따르고 그리스도 만을 높이고 은혜 만을 자랑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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