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진리 제2부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5_ 다윈과 베렌스타인 곰의 만남 〔다윈주의〕는 과학적 증거보다는 무신론적 철학의 가정(假定)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_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 "신앙에 대해 처음으로 의심을 품게 한 것은 바로 다윈주의였다“ 「하나님, 그 증거」의 저자 패트릭 글린이 회상하면서 한 말이다. 결국 다윈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굳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기원에 관한 이론은 세계관 형성에 토대 역할을 한다는 점과 각 세계관은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그것이 타락과 구속의 개념을 좌우한다는 것을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기원을 둘러싼 논쟁을 파악하고 그것이 현대의 사조에 미치는 폭넓은 영향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라는 상표로 포장돼 팔리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실제로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 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개인적 “가치”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판을 뒤집기 위해 사실/가치의 이분법을 이용할 수 있는데, 진화 자체가 사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윈의 핀치새들에서 부리크기의 변화는 새들이 불리한 환경아래서도 핀치새로서 생존하게 하는 하나의 순환적 변이였다. 이처럼 다윈주의 패러다임에 따라 엄청난 양의 연구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성공사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초파리의 돌연변이와 같이 “고정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변화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다윈주의가 적자의 생존은 설명할지 몰라도 적자의 도래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그림자체는 다시 그려져야 한다. 순조롭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생명 형태의 연결고리 대신에 변덕스럽게 건너뛰는 과정으로 변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견해는 단속평형설이라 불리는데, 난데없이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는 간헐적인 분출로 인해 전반적인 안정기조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다윈주의는 영향력 있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위기에 처한 이론」과 같은 상태다. 여기서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처럼 역전 가능한 조그마한 변화에 설득당하는 이유는, 이미 다른 근거- 철학적 근거-에 의존해 자연만이 생명의 모든 형태를 창조할 역량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신념에 설득 당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이미 철학적 자연주의에 설득당한 셈이다. 다윈의 경우, 진화는 특정한 이론의 문제라기보다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었음이 확실하다. 철학이 사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이론이든 자연주의적이지 않으면, 그 가치 여부를 고려하기에 앞서 아예 배제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자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어떤 메커니즘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경험론적 발견이기보다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추론된 것이다. 철학적 자연주의자들이 과학의 정의 자체를 좌지우지 하는 것을 왜 우리가 묵인해야 하는가! 과학철학자 마이클 루즈가 시인한 것처럼 진화는 정말 “ 단순한 과학이상의 것” 이라는 것과 “진화는 일종의 세속적 이데올로기요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 대안으로 생겨난 것이다” 라는 고백이 집중할 부분이다. 그렇담 그리스도인들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싸움의 핵심은 우주가 지적 행위의 결과인지 맹목적이고 비인지적인 힘의 결과인지 여부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에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증거가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기독교를 객관적 진리로 고려할 여지를 철저하게 막은 장본인은 바로 다윈주의였다. 종교를 가치 중심의 영역에 밀어내고 비이성적 신념으로 규정했다. “과학은 유전자와 세포 같은 물질세계를 다루고, 종교는 가치와 의미 같은 영적 세계를 다룬다”고 진술한 어느 학생들이 사실/가치의 이분법을 흡수한 방법은 결국 ‘과학은 사실에 관한 것이고, 종교는 가치에 관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종교를 진리나 증거의 문제와는 관계없는 비인지적 범주로 축소시키려 할 때, 우리는 이미 싸움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의 증거를 제공함으로서 기독교를 참된 지식의 지위로 회복시키고 공적 담론의 장에서 의석을 되찾게 해준다. ♥자매님들 나눔 이야기♥ * 성경의 창조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바른 이해가 아니라 유물론적인 세계관이 신앙의 영역에 침투하여 고스란히 스며들었기에 여전히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우리 믿음의 의미와 목적(하나님의 보편적 가치)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안정과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이 발견 된다. * 학교에서 배웠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지식을 성경으로 다시 씻고 정립하는 시간이 필요 했듯이, 성경적인 근거로 진화론을 반박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시간과 노력을 써 키워야 한다. * 철학자들의 유물론적 입장이 좌성향의 이념까지 도래하는 결과를 낳은 듯하다. 철학자들의 근간을 허물기 위한 물고를 그리스도인이 터야 한다. * 반종교적 동기가 과학적 작업을 하도록 했다는 부분에서 마지막 남은 기독교가 그들의 목표라는 사실을 짐작하면 교회의 역할이 막중함을 느낀다. *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믿음이 스스로가 실재적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지하고 그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 우리 아이들이야 말로 전쟁터의 ‘영적 군사’ 임에 다를 바 없다. 학교에서 거짓을 배우고 시험을 치르는 현실과 정정하여 사실을 배우고 재 정립 할 혼란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 아이들을 위한 뜨거운 기도가 필요하다. * 아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접근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 부모들이 공부하며 논리적인 지식을 준비해야 한다. *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인식된 의미를 잘 파악하고 사용해야 하는 단어 선택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 과학자들의 양심적 선언이 공공연히 있었음에도 여전히 공교육에서 파워가 있는 진화론은 ‘기독교의 대안’ 이라고 본문에서 표현하는 바처럼, 이 시대 기독교의 긴 영적 전쟁의 대상임을 실감한다. * 성경을 배울 때 성경공부 위주의 학습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학습이 매우 중요함을 느낀다. * 우리의 믿음은 과학적 주장과 세계관적 함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대안을 간구해야 한다. * 베렌스타인 곰을 책으로 보면서 미리 인지 하지 못했던 위험한 요소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묘한 영적 침투를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느낀다. *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고난이 될 수 있는 세대다. 우리가 믿는 성경과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서 고백하는 믿음을 우리 삶의 각 영역에서 지키며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창조질서 곧 진리를 지켜내는 것이다. “ 어려운 과학 이야기가 자매님들의 호기심과 열정을 통해 제법 자연스러운 토론이 되고,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이 허술한 진화론의 유물론적 철학 앞에 농락당한 기독교 진리를 생각하며, 억누르던 화도 표출하고 공감과 위로와 다짐의 시간을 갖게 된 듯 합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 그리스도인의 필독서라는 확신이 더해지는 ‘완전한 진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