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진리] ; 제3부 복음주의는 어떻게 지성을 잃어버렸는가 9_복음주의는 무엇이 좋은가 : 제1차 대각성운동
“기독교는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회심했다면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알 수 있을까?“ -제임스 맥그레디(James McGready)
본문은 ‘덴젤’이라는 사람의 구원 예화로 시작한다. 죄와 회개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인 복음주의 이야기다. (지금은 ‘고전적인’ 복음주의라고 하지만, 대각성운동 당시는 ‘새로운’ 복음주의였다)
복음주의가 끼친 영향을 평가해 보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식은 놀랄만큼 효과적으로 미국 사회를 “기독교화”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교회 제도가 폐지되기 전에는 교회가 정부를 끼고 있어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교회는 약화되었다. 독점이 게으름을 낳았다. 성직자들은 흔히 특권층처럼 사는 경우가 많았고 여가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주의 목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쉴새없이 헌신한 열정적인 활동가들이었다.
기존의 교회들은 부흥사들의 “가슴의 종교”에 반하여 “이성”의 편에 선다고 선언하였지만 그것은 확실히 실패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 역사를 보아도 신자들이 주변문화와 거북한 관계를 맺는 종교집단이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복음주의자들은 폭풍을 뚫고 다니며 변경지방의 복음화를 이끌어내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한 진리를 전하려는 부흥사들의 열정적인 수고가 있었다. 부흥사들은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하는 뜨거운 감정적 체험을 하도록 설득하였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한번의 회심사건으로 충분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설파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주의는 별개의 교단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갱신운동으로 시작되었기에 독자적인 지적 전통을 개발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1차 대각성운동이 낳은 긍정적인 유산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반지성주의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는 결론은 부인할 수 없다.
-자매님들과 나눈 이야기-
*종교개혁 당시 지성을 추구하는 사조로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음이 쇠퇴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대각성 운동때 복음주의는 지성을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시대별로 다양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한국교계가 전반적으로 신비주의나 경험주의가 많다보니 독립침례교회들도 영향을 받아서 지성이 약한 모습이 있다.
*찬양, 기도하는 방식의 변화에 대한 나눔(11월 18일 오후찬양시간) -모두 좋았다는 의견이었고, 수위를 잘 지켜야 한다는 우려 의견도 있었다. 새로 오신 분들이나 질서를 위해서 안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교회는 교리적인 부분과 뜨거운 가슴이 균형 잡혀 있는 것 같아서 감사했다.
*‘주변문화와 거북한 관계를 맺는 종교집단이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는 부분에서 우리교회가 생각났다.
*전인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같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함을 반영한다.
*극도의 이분법적 사고와 성속분리를 보면서 구원파가 생각났다.
*제대로 된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은 은혜이다.
*워크아웃과 워크인 설교가 좋았다.
※ 특송 연습으로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찬양으로 시작하니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은 뉴질랜드에서 최문선 자매님이 오셨습니다. 직장 때문에 자주 못 나오시는 김혜순 자매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인천서구에서 박정아 자매님이 처음으로 함께해주셨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아서 더욱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식사는 김승연, 임정석, 김세연 자매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닭볶음탕과 동치미의 조합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됩니다.^^ (오늘은 장영희 자매님을 대신해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