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패러독스 역설(paradox, 逆說)은 언뜻 보면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분명하게 모순되어 있어서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함께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방패를 자랑하며 이 방패는 단단해서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창을 자랑하며 이 창은 날카로워서 어떤 방패라도 뚫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뚫으면 어떻게 되겠소?” 세상에 이런 방패와 창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모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상반되는 공의와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이 모두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혼란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는 공의와 사랑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들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다고 한다.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한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원수들까지 사랑하라고 말한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셨다고 말한다. 공의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대로 행했는지 행하지 않았는지 공정하게 심판하고 공정하게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이고,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공의는 심판해야 하고, 사랑은 심판을 보류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다. 미국에서 1930년 한 할머니가 굶고 있는 손자들을 걱정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10달러의 벌금형이 선고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라과디아가 갑자기 "그리고 그 벌금은 제가 내겠습니다."라며 스스로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고는 나머지 법정에 있는 모든 경무관, 검사, 변호사 및 방청객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을 선고했다. 이 할머니가 이렇데 된데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거둬들인 돈은 벌금 10달러를 제외하고 전액 노인에게 전달되었다. 이때 할머니는 진심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판사가 벌금형을 선고하는 것은 공의이고, 심판대에서 내려와 대신 벌금을 내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초나라 상인의 창과 방패는 상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공존한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다.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며,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공의만 있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 더 이상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 (로마서 1장 32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