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하다 함은 가깝다는 말일 텐데 그것은 공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깝다고 느낄 때 쓸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내게 친밀한 친구를 생각해 보면 같은 경험을 많이 공유하고 늘 자주 만나고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한다. 만약 기본적으로 이런 관계가 아니라면 단지 아는 사이 혹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친구일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늘 소원한다. 나와 주님만이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관계를 바란다. 단지 아는 정도가 아닌. 그러기에 친밀한 친구와 자주 만나듯 매일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떼어놓는 일은 필수.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만남을 위해 대화가 필요한데 구약의 아브라힘이나 모세나 이사야처럼, 신약의 사도들이나 바울처럼 직접 주님을 대면하여 이야기하고픈 강한 열망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 만나주시던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이었다.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시대적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느꼈을 특별한 경험의 특별한 감정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 주님의 실체는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증해 주시는 그분의 인격이고 능력 그 자체이신 것이다. 그분과의 친밀함을 구하는 자는 먼저 성경을 펴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을 말씀을 통해 받아들인 자들이라면 그분의 말씀들을 읽을 때 지나가는 어떤 사람의 말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때 느낌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느낌은 따라오는 것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펴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느낌은 절박하게도 덤덤하게도 올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과 얼마나 정신적으로 가까운가, 다시 말하면 그분의 말씀에 얼마만큼의 신뢰를 갖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예전에 방언과 함께 기도할 때 느끼는 그 친밀감 없이, 방언 없이 기도하려니 너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기도하기 힘들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덕질'하는 이를 보게 되면 그들의 열정은 정말 하늘을 찌른다. 어떤 스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감정은 대단해서 자기 부모의 생일은 잊어도 그 스타의 생일까지 챙기며 자기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붓는다. 참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불가할 정도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당사자의 감정은 진지하다 못해 행복하다고 한다. 자기가 직접 그 스타를 만나 식사를 같이 한다거나 이야기한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 스타와 직접적인 교감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런 일방적인 '느낌'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때 자칫 이런 '일방적인 느낌'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왜 그토록 유명한 영성을 자랑하는 영성의 대가라 하는 사람들이, 예컨대 로렌스 형제나 마더 테레사나 머튼 같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고 또 일부 유익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명백한 영적 오류의 길로 갔던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고 싶다. 느낌은 따라오는 것일 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결코 아니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