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생님이 하얀 백지에 점을 찍고는 학생들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점이요. 하는데 한 학생만이 턱을 괴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하니까 그 학생은 백지가 보입니다 라고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얀 부분을 보기 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을 한다. 아침 시간 시사 토론에 있어서도 상대의 논리적 허점이나 결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을 시켜 나간다. 어찌보면 짧은 시간에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또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허점들을 공략해 나간다. 긴장속에서 서로의 주장들을 예심히 지켜 보게 되는데 어쨌든 없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 한순간 반대편에 와서 전혀 새로운 공격을 하는 것을 볼 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받은 자에게도 여전히 부정적인 옛 성품들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나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분명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자,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네가티브 사상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하나님앞에 합당치 않음을 부각함으로써 자신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을 은연 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도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을 부러워할지는 몰라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행이나 실패하는 것을 보면 겉으로 안됐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상승된 기분에 빠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이 부분에서 많은 만족감이나 패배감에 빠지는 것 같다. 네가티브 사상을 가질 자격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시고, 하나님만이 진실하시며,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네가티브한 사상을 가지실 수 없는 분이시다. 사람들은 동서고금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짓말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네가티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의 믿음의 선조들을 보면 네가티브 신앙보다는 포지티브한 신앙을 가졌음을 발견한다. 물론 대언자들이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심정으로 접근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좁은 길을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며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항시 비춰보는 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영이 죽어있는 믿지않는 자의 혼은 육체의 격전장으로 변모해 버렸다. 영이 살아있는 우리 믿는자에게도 여전히 육체의 것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나의 혼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위치에 놓여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어제 읽었던 잠언 24장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굳게 세워지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재물로 채워지리로다.“ (잠24:3,4절) 집이 건축되고 가꾸어지듯이 우리의 믿음이 지혜로 건축되고, 명철로 굳게 세워지며, 지식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갔으면 합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며 그가 걸려 넘어질 때에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말지니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염려하노라.“ (잠24:17,18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