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산다고 하는 것!
비가 내립니다. 장마가 찾아 왔으니 비가 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 비를 무척 좋아 했었습니다. 비구름 낀 하늘을 좋아하고 비 내리는 모습을 좋아하며 비 내리는 소리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리고 비를 흠뻑 맞고 나돌아 다니기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카운터에 앉아 그렇게 좋아라하던 장대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습니다.
나는 비 내리는 모습과 그 소리가 흥미로워 의자를 창가로 가까이 끌어다 놓았습니다. 따끈따끈한 커피도 한잔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헤어졌던 애인이라도 만난 듯 비 내리는 세상천지를 내 눈 속으로 힘껏 끌어안아봅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 없이는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그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첫사랑의 연인 같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아채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무언가 마음 한쪽이 허전하였고, 낯 선 곳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거나 찾아보거나 혹은 누구에게 물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내기에만도 너무나 바쁘게 허덕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란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바빠서 감기 들 새는커녕 죽을 틈조차 없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나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오래 전의 애인 같은 장대비가 내리던 날! 나는 오랫동안 내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답게 산다고 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산다고 하는 것!
비를 사랑해 본 일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비와 연애를 해 본 일이 있으신가요? 비 내리는 날, 아기를 잉태하듯 꽃삽으로 꽃밭의 흙을 파고 꽃모종을 하는 손길을 생각해 봅니다.
아~ 그때가 언제였는가? 나는 내 어린소년시절을 그렇게 비를 사랑하며 살았었습니다. 나의 옛 집 대문 옆 꽃밭에 가득 심어 놓았던 봉선화와 채송화의 꽃잎에 맺혔던 빗방울들의 모습을 지금도 나의 동공 안에 그대로 그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수한 입술들이었습니다. 방긋방긋 꽃으로 웃는 입술들 말입니다. 그것들은 또 무수한 눈빛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 내 주변 소녀들의 수줍고 사랑 많던 눈빛들 말입니다. 그것들은 또 손짓이었습니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던 내 친구들의 다정한 손짓들 말입니다. 나는 그 입술 같고 눈빛 같고 손짓 같은 비와 나의 소년시절 내내 풋풋한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절, 어느 비 내리는 날, 비를 맞으며 개울물에서 동네아이들과 물고기를 잡고 놀던 일은 말 그대로 천국이었습니다. 나는 비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빗물이 고인 진창길을 겅중겅중 뛰어 건너는 것조차도 크나큰 행복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발에 물이 들어가 양말을 흠뻑 적시게라도 되면 더욱 큰 즐거움으로 크게 소리 내어 목청껏 떠들며 까르르 웃기도 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은 그 나중 일이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니, 그 시절의 우리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았었습니다. 비와 깊은 사랑에 빠져서 말입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인은 모두가 다 그렇게 사람답게 사는 삶 을 잃어버린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인은 비에 대한 연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대신 우리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도시와 시커먼 아스팔트길과 그 길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가을볕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첫눈 오는 날도 잃었습니다. 우리는 아지랑이 불타는 봄 동산도 잃었습니다. 현대인의 가을볕과 첫눈 오는 날과 아지랑이 봄 동산은 컴퓨터의 각종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인은 수줍음으로 물든 처녀의 붉은 볼과 샘물의 원천과도 같던 그 순박한 눈빛을 잃었습니다. 대신 성인잡지와 성인드라마와 성인영화와 성인연극을 얻었습니다. 현대인은 대단위 공업단지마다 우뚝 솟은 공장굴뚝의 시꺼먼 연기와 맞벌이부부와 그들에게 주어지는 통장과 카드 한 장을 얻었습니다. 대신 검은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의 사랑과 옛날식 가정주부를 잃었습니다.
현대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따뜻한 젖가슴을 잃었습니다. 대신 탁아소 놀이터의 싸늘한 모래밭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목포의 눈물과 동백 아가씨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잃었습니다. 대신 낮도깨비 같은 아이들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댄스 뮤직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누룽지를 잃었습니다. 대신 일회용 라면과 일회용 자판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초가지붕을 잃었습니다. 그 속에서 도란도란 소곤소곤 들려오던 엄마 아빠의 정다운 말소리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푸른 들판과 개구리 소년들과 메뚜기 떼들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바보 같은 사랑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냉장고와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를 얻었습니다. 대신 앞치마에 밴 엄마냄새를 잃었습니다. 덤으로 이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고 사는 조강지처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연날리기와 땅따먹기와 제기차기와 구슬치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잃었습니다. 이 시대의 아이들은 아무도 별 하나, 나 하나를 세지 않습니다. 대신 전자게임과 괴기영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단 칼에 목숨을 앗아가는 일제 만화를 무상으로 얻었습니다.
내가 이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해 내고 비통한 심정에 빠져 혼자 신음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비다운 비를 제대로 구경하던 한낮의 장대비는 서서히 그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일 년 내내 언제나 그러하듯 새들보다 일찍 일어나 “목욕합니다.”라는 입간판을 내어 놓고 옴짝달싹하기조차 버거운 카운터로 기어들어가 또 하루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잠깐 교대하여 햇볕이 쪼이는 밖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카운터 앞에는 조그마한 빈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빈터에는 단 한번 내리는 비에도 안감 힘을 다해서 맹렬한 속도로 돋아 나와야 짧은 날들을 살아낼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잡초들이 한 뼘이나 되게 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잡초 밭에 내려 쪼이는 햇볕은 도시의 스모그에 늙고 찌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어디선가 벌써 날개 짓이 분명해진 나비 한 마리가 잡초 밭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을 찾아 날아 왔습니다.
그 나비 한 마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아! 하고 굳게 다문 입술 한쪽으로 짧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 나비 한마리가 되었더라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사람 보다 나비 한 마리를 먼저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보다 달빛을 먼저 지으시고 달맞이꽃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보다 다람쥐와 개와 고양이와 물고기와 시냇물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태어나자마자 그것들과 같이 살라고 그랬던 것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구나. 그것들과 같이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로구나!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비 오는 날, 비하고 흠뻑 사랑에 빠져 개울물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냉장고도 세탁기도 전자레인지도 돌려줄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다 돌려주겠습니다. 대신 나의 어린 시절의 진짜 어머니들과 진짜 아내들과 진짜 동네처녀들을 되찾아 오고 싶습니다. 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제대로 된 치마를 입고 수줍은 눈빛으로 지나쳐 가는 여자들만 길거리에서 다시 바라보면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 성능 좋은 컴퓨터도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 인터넷도 포기하겠습니다. 다시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 누런 공책에 힘들게 글을 쓰며 살더라도 포르노와 마약과 권총강도가 없는 세상에서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시 한 번 더 한가롭고 여유롭게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아무 때나 친구들이 가릴 것 없이 내 집에 찾아오고 찾아 갈 수 있게 된다면, 동네 어른들 앞에 다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며 살 수 있게 된다면, 아버님 말씀이라면 다시 벌벌 오금을 떨며 살 수 있게 된다면, 가슴 속에는 늘 천국의 햇볕을 가득가득 저축하고 넉넉한 사랑으로 살아가던 옛날 그 아내가 찾아와 다시 한 번 살아볼 수 있다면,
나는 눈앞에 다가온 찬란한 21세기 문명 같은 것은 깨끗이 다 포기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흙냄새 물씬 풍기는 산업혁명 이전 세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밤에는 호롱불을 켜 놓고 낮 에는 달구지를 타고 다니며 살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지어주신 세상에서 다람쥐와 산새들과 어울려 물고기를 잡으며 진짜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 정말로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2013년 7월 6일(토) 유 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