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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본주의 성도들이 반(反)지성주의자들 이라구요?-8(도약과 추락)조회수 : 3074
    • 작성자 : 박세원
    • 작성일 : 2023년 8월 2일 22시 47분 36초
  • -이신론(deism)이냐 공리주의(utilitarianism)냐 -

    안녕하세요?지난번엔 세속적(무신론적)실존주의에 대해 간략히
    알아봤고 이번엔 말씀드린대로 종교적(유신론적)실존주의에 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먼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쇠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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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해 지면을 잠시 할애하자면 그의 이름은 덴마크 말로 '공동묘지'를 뜻합니다.
    그는 1813년 7남매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쇠얀의 부친 미카엘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성공한 상인이었으므로 쇠얀은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분위기는 엄격하고 음울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으나 두 가지의 과오로 인해 평생을 죄책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는 쇠얀의 어머니와 결혼한 일입니다. 당시 교회법은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결혼은 아버지에게는 두 번째였습니다.

    그는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자기 집 어린 하녀와 재혼했습니다. 그 하녀가 바로 쇠얀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두 달 만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결혼했던 상황, 그리고 두 달 만에 낳은 아기(혼전임신)는 쇠얀의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겼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목동을 할 때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하늘에다 대고 하나님을 저주했던 일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 자신의 삶을 재앙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무려 82세까지 살았는데 그는 긴 생애 동안 두 명의 부인이 죽고 8남매 중 6명이 죽는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쇠얀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습니다.
    쇠얀은 이 일을 '대지진'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쇠얀도 자신의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자신의 집안과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환경과 경험들이 그의 사상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훗날 그는 국가 기구가 된 기성교회와 관리가 된 사제들을 이를 갈며 미워했고, 고난 속의 생활과 신앙을 지지하고 순수했던 초대 기독교와 교회를 갈망했고 평생에 걸쳐 '가능성'을 찾아 사색하고, 이윽고 20세기의 사상과 신학에 큰불을 지핀 거대한 폭탄이 된 사람, 맏형을 제외한 다섯 형과 누이들이 서른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목격하며 자신도 아주 젊어서 죽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살다가 이윽고 마흔 두살에 요절한 인물입니다.

    그럼 쇠얀이 전개한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자면

    그는 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에서 실존에는 세 범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심미적 실존인데
    여기서 직접적 심미주의는 감각적 쾌락,관능,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외모,매너,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돈 후안)이 여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로서
    타고난 매력은 없지만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부류(요하네스)입니다.

    둘째로 윤리적 실존인데 이것은 심미적 실존보다 한차원 높은 실존입니다.
    윤리적이며 법을 잘 준수하고 사회적 명망이 있는 부류(빌헬름 판사)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는 종교적 실존으로서 가장 고차원의 실존입니다.
    윤리적 실존보다 더 상위에 속한 자들로서 종교가 가르치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입니다.
    법이 종교적 이념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듯이 말이죠.

    쇠얀은"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며,
    이는 개별자가 처음에 보편적인 것 안에 있다가 이후에는 보편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있는 개별자로 고립된다고 하는 역설.
    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높고, 보편적인 것에 거스를 권리가 부여되어 있고, 그 밑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한다는 역설(윤리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능가하는 개별자).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는 역설이다(신 앞에 선 단독자)."

    ...여기서 쇠얀이 말한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다 다를수 있습니다만 '구원'을 받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육신 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유일하신 나의 구원자 라는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객관적(특별계시-성경)이며 성경적인 신념, 성경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 해야 맞는 말입니다.

    물론 쇠얀이 살던 시대 덴마크는 국가 교회(state church)가 지배했었고 어김없이 계급화된 사제들의 부패상이 만연했습니다.
    그의 저서 및 사상은 이것을 비난하고 반박하는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이란 타락한 국가교회를 지칭한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사탕발림에 현혹되는 이유가 현재 우리나라 교회의 실태가 칼빈주의를 내세우는 교단신학과 성경의 권위를 넘보는 교회와 목사의 행태가 로만 카톨릭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고찰해 볼 사항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양상을 띄기에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쇠얀의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몇몇 부분에선 정통 기독교 신앙과 유사한 점도 존재합니다만,
    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을 보면 그가 말하는 신앙이 명백히 비성경적 이란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쉐퍼는 신앙에 두가지 개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명령하고 요구하는 즉 정당하고 적절한 이유에 근거를 두고서 그것을 따르는것. 즉 성경에 근거한 신앙, 성경적 신앙에 의한 순종이며,

    또 하나는 어둠 속에서 뛰어오르는 맹목적 도약 즉,
    이성 없이(혹은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이 신앙의 도약(a blind leap of faith) 입니다.

    결국 쇠얀의 신앙은 '맹목적 도약'이며 목적은 '공리주의'의 실현입니다.쇠얀이 [Fear and Trembling]에서 말하는 결론이자 신앙의 목적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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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거롭지만 쇠얀의 저서 [Fear and Trembling]를 대충이나마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반박을 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행위는 우리가 가진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가 가진것이라곤 오로지 자기 혼자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비밀스럽게 모리아 산으로 데려갔고,
    칼을 들어 결박 당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폭로했다. 아브라함을 신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신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결코 체계화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그가 그렇게 두려운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시간적인 삶 전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희망과 정체성을
    영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삭을, 이삭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집착을 버릴수 있었던 핵심동기다.(...중략) 아브라함은 그 이전까지 이삭은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라는 희망, 이삭을 통해 자신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이삭을 죽이라고 명하시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자 자신이 따라야 할 분이라고 그는 믿는다.
    이러한 기사는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만,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윤리적인것의 목적론적 정지)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때 그는, 홀로, 하나님만 보았다(신앞에 선 단독자).
    쇠얀은 아브라함이 살인미수죄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이라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영웅적인 도약은 너무나 드높은 경지여서 이 도약앞에서 뭇 사람들은 한없는 두려움으로 전율한다.
    인간이 자신 안에 하나님을 잃고 혹은 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영혼의 죽음>이자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

    ...혹시 쇠얀의 말에 수긍하는분 계십니까?저는 쇠얀의 의견에 전혀 동의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 당시에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만,
    그러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 같은 전 지구적인 사건을 겪거나 혹은 겪은 직후 세대들이 데라와 아브라함이 살았을 당시에 여전히 생존(노아,셈,아르박삿,에벨,살라)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이 당시에 아브라함이 우리처럼 완전한 성경 말씀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그에 필적하는 '산 증인'들의 신뢰할만한 '증언'을 전해듣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증인'들의 수명을 길게 보전하신 것은 온 땅에 편만한 우상숭배(다신론,범신론)로 부터 인류를 지켜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창세기 대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겪은 세대들인 노아(950세),노아의 아들인 셈(600세),셈의 아들인 아르박삿(438세),아르박삿의 아들인 에벨(464세),살라(433세) 이후 자손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것을 보면 말이죠.

    다시 말하면 그는 창세기 12장 1절의 하나님과의 동행 이전부터
    조직신학의 신론(theism)의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쉐퍼가 말한 첫번째에 속하는 체계화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백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땅의 산에서 번제헌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것도 그의 신앙의 맹목적 도약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떠나왔던 우르땅의 우상신들과 달리
    유일하고 전지전능하시며 공의롭고 좋으신분 이란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과 함께 하던 청년들과 모리아 땅에 동행한것입니다.

    쇠얀의 말처럼 의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맹목적 신양의 도약을 한 아브라함이라는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창 22장 5절 ; 8절을 보면 확연히 알수 있습니다.
    의인 욥의 고백(욥 1:21)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만하면 쇠얀 키르케고르와 그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의에 대해 간략히 알아봄과 동시에 왜 그것이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지 나눠본것 같습니다.

    이어서 제임스 사이어가 요약한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왜 이신론(deism)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지 간단히 적어보고 마치겠습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의 명제를 다소 받아들인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가장 특징적 요소는 우주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및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1.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자신을 발견하는 그 위치를 강조함.
    자기 자신의 존재, 자기 자신의 의식, 자기 자신의 자기 결정력 등에 대한 각 개인의 확신을 출발점으로 삼음.

    2.인격적인 것은 가치 있다.
    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 처럼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의 구분을 강조함.인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함.
    유대인 실존주의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나-너(I-Thou), '나-그것(I-It)이란 용어를 사용함. '나-그것'의 관계에서 인간은 객체가 되게 하는 자(the objectifier)다.
    "세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세계 밖으로 나가도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신은 '완전한 타자'다.
    그러나 그는 또한 완전한 자기 동일자이며 완전한 현존자이다.
    확실히 그는 나타나서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의 나(my I)보다도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신비이기도 하다."

    3. 지식은 주관적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
    1835년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아는 일이 모든 행동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중요한 일은 내가 무엇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가, 또 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요점은 나를 위한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살아야 할 이상을 찾는 것이다. 비록 내가 철학자들의 체계를 애써 파고들려 하고, 필요하다면 그 체계를 검토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란 말인가?"

    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 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전통적 기독유신론에서 두 단계 퇴보 했다.
    첫 단계는 기록된 역사의 정확성을 불신하기 시작한 것.
    19세기 중반의 스트라우스(D.F. Strauss), 어니스트 르낭(Ernest Renan) 같은 고등 비평가들은 기적과 다른 기록들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자연주의의 전제 위에서 이론을 세워 나갔다.
    기적에 대한 기록은 원시적 사고 형태를 지닌 미신적 인간들이 주장한 것이고 따라서 거짓이 틀림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 기사의 권위를, 심지어 기적을 언급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손상시킴.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으로 대표되는 일단의 고등 비평가들은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수세기에 걸쳐 여러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 했다.
    이것은 성경의 자중을 손상시켰으며 모든 성경 내용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게 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송두리째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신 둘째 단계로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선한 생활에 대한 성경의 모범들과 도덕에 대한 강조점이 중요하다고 왜곡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와 육체의 부활은 헌신적인 인간애으로서의 모범과 영적 교훈을 위한 신화로 격하 되었다.

    둘째 단계는 사실성에 대한 관심을 잃은 대신 종교적 뜻이나 의미를 강조한 것.

    성경의 권위와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한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신정통주의를 주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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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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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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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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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 

    등이 있다.


    혹시나 많이 부족하고 엉성한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있다면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아는 것에 있어서 아주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런 현대사상들에 대해 공부하고 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이런것들이 '칼빈주의'에 경도되고 또 교단이 대형화 됨에 따라 국가 교회적인 권위주의 양상을 띄는 우리나라에서 거기 속한 구성원들한테 복음적인것 마냥 자칫 매혹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많으셨고 다들 무더위에 늘 주 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딤후 4: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이 글을 작성하며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과 프랜시스 쉐퍼, 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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