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우연히 아주 좋은 글을 접하게 되어 나누고자 올립니다.
모두 책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책을 읽는 이유: 해석하기 그리고 육화하기
지난 토요일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과 호주의 경기가 끝난 후,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축구를 배우지만, 학교에서는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중요한 지적이다. 즐기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인가?
즐김에 이르는 여러 단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한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자주 인용되는 공자의 말이지만(『논어』, 「옹야(雍也)」), 즐기는 데에도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관심과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 일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즐김은 관심과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지함과 성실성을 지나 익숙해질 정도의 연습을 거쳐 결국 좋아함의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도달될 수 있는 향유의 경지인 것이다. 삶에서 ‘깊은 즐김’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삶을 깊이 향유할 수 있는 대상과 그 방법은 물론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향유물의 하나가 책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전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좋은 책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 이외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나 집의 아이들에게도 그런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경우에는 정말 잘 안 읽어서 곤혹스럽기는 하다. 실제로 세상에는 책을 전혀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기리는 좋은 시도 있다.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 - 김광규 , 「묘비명」
이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비석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비석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 눈여겨볼 일은 없다.
아마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가끔 거기로 날아들 것이다. 그럼에도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는 누구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어느 유명한 문인”을 데려다가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쓰게 하기도 한다. 이런 허황된 역설도 시인은 아무런 평가 없이 무심하게 기록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물음 없이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아마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책을 읽어라’는 말 이전에 던져야 할 것은 ‘왜 읽는가’라는 물음이다.
읽기는 점화의 순간
왜 책을 읽는가? 이 물음은, 사실 삶의 많은 문제가 그러하듯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거기에는 ‘무슨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같은 물음도 이어져 있고, 좀 더 심각하게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가’나 ‘책은 무슨 쓸모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도 겹쳐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물음에 그 나름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 물음의 주체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읽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책을 고르고 무슨 주제에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대상을 해석하느냐에서 이미 그 사람의 오랜 독서의 경로가, 그 문제의식의 깊이가 웬만큼 드러나기 때문이다.
읽는 일에, 거창하게 말하여, ‘삶을 바친’ 사람치고 절절한 영혼이 아닌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 그들은 글로써, 이 활자(活字)로써 세상을 읽고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면서 삶을 좀 더 고결하게 살고자 꿈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이고, 그들이 책을 쓴다면 그 책은 그런 고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읽은 것은 그렇게 읽은 자의 생활 속으로 조금씩 체화된다.
물론 책의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문학의 책은, 그것도 뛰어난 저작이라면, 예외 없이 이런 정신의 탐사, 영혼의 절절한 갈구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이 저자가 품은 절실한 고민의 소산이듯이, 독자 역시 이 책을 자신이 부닥친 문제에 대한, 또 삶과 인간에 대한 절절한 관심 속에서 만난다. 이 절실함의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책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따라서 느끼고 이해하는 수용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독서란 하나의 절실한 마음과 또 다른 하나의 절실한 마음이 만나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고 잦아드는 점화와 생성의 시간이다. 하나의 열정과 또 하나의 열정이 만나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거나 이 세계 앞에서 그 내면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숨어 있던 한 편이 열린다. 여기에는 낯섦과 충격, 당혹과 경탄의 순간이 있다. 삶의 어떤 가능성은 이렇게 생겨난다. 이러한 경험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또 우리 사는 사회와 현실과 세계에 대한 깨우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와 관심에 따른 읽기
간혹 강연이나 토론 같은 모임이 끝난 후,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주저하곤 한다. 나의 대답이 별반 도움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관심도 그 어떤 호기심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관심의 종류나 고민의 방향은 사람마다 참으로 다르다. 어느 한편의 간곡한 사연도 다른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것일 수 있고, 아무리 성인군자의 말도 생계 현실 아래서는 한가한 잡담일 수도 있다.
드물게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말 귀에 부는 봄바람’이나 ‘쇠귀에 경 읽기’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책에는, 더욱이 좋은 책에는 환산하기 힘든 직관과 통찰과 지혜가 들어 있다. 그것은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물음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왕 읽는다면, 고전을 읽는 게 좋겠지요.
모두들 시간도 모자라고 힘도 드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시간과 노동의 경제를 고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좀 더 궁금해한다면, 이렇게 보충한다. “무조건 읽기보다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또 자기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면 되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역사소설’을 읽고, 사랑에 관심이 있다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식으로. 각자에겐 제각기 다른 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해서 뜻있는 일이기는 어렵고, 오래가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도 무슨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 읽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관심과 물음과 호기심에 따라 시작하여 점차 자기 눈높이에 맞춰 더 심화하면서 확대하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욕구, 어떤 말 못할 충동으로부터 시작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읽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
인문학에서의 활동이 크게 말하기와 읽기 그리고 쓰기로 구성되어 있다면, 여기에서 말하기는 외적 대인관계적 활동일 것이고, 읽기는 좀 더 내향적인 활동이며, 쓰기는 이런 읽기에서의 내향화된 결과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그래서 좀 더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쓰기가 표현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라면, 읽기는 이렇게 쓰인 결과물로서의 책을 영육으로 흡수하여 소화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읽기는 쓰기보다는 소극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좀더 내밀한 활동이고, 그래서 읽기에서는 관조나 명상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일수록, 수용미학에서 말하듯이, 해석의 ‘빈 자리’를 많이 허용한다.
그만큼 좋은 책은 세상의 복잡다기함뿐만 아니라 인격의 다양한 독자성과 그 신비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 배우는 것만큼이나 이 책이 말하지 않은 부분의 의미를 채워가기도 하며, 이렇게 스스로 채워가면서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인문학의 언어는 그렇다. 그것은 기록된 정신의 산물이면서 독자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고, 독자는 이렇게 그 의미를 구성하면서 스스로 자기 삶을 조직하고 형성해간다. 의미의 형성과 주조(鑄造)는 인문 활동의 핵심 내용이다.
이렇듯이 책을 읽는 일에는, 읽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 읽는 사람이 책에서 찾고자 하는 꿈과 열망과 그리움이 이미 녹아 있다. 물론 재산 증식에 대한 관심이나 자기 계발에 대한 필요 때문에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얻는 기쁨이 깊기는 어렵다. 이것도 사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욕구가 물질적 세속적 차원을 넘을 수는 없다. 이에 반해 읽는 마음은 삶의 드넓은 차원—감각과 사고의 지평을 갱신하는 데로 이어진다.
우리가 그 무엇을 찬탄할 때, 우리의 느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찬탄할 만한 것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래서 스스로 찬탄해도 좋은 것이 된다.
우리가 책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 추구는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마음이, 그런 속성의 일부가 우리 안에 자라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듯이, 아름다운 마음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갈망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선미로 기울어 있지 않다면, 진선미에 대한 추구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책 읽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그 무엇—찬탄할 만한 것에 대한 숨은 갈망이 있다. 우리는 읽으면서 어떤 다른 삶을 엿보고, 어떤 현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또 다른 생활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삶의 바탕과 세계의 모태 그리고 그 고향을 떠올린다. 좋은 책과의 만남에는 마음의 이런 깊은 움직임—갈구하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이다. 감동이란 이 갈구하는 마음에 대한 나/독자의 화답이다.
느끼고 만들기 — 깊은 향유
책이 문화적 업적의 가장 높은 성취의 하나라고 한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화적 업적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책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넓혀간다.
이렇게 넓어지는 생각에 기대어 우리는 더 넓은 지평—넓고 깊은 세계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의 전체와 만나고, 그 전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때 ‘전체’는 ‘어떤 온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추상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사소한 것 —바로 내 곁에, 나와 관련하여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생생한 경험 속에, 내가 느끼고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접촉하는 모든 것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읽기란 이 일상의 전체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깊은 읽기는 세계의 새 모습—가장 일상적인 비밀을 경험케 한다. 그 점에서 나와 책은 창조적 교환 관계 속에 있다. 향수의 기쁨은 여기에서 온다.
책의 역할은, 우리가 그 책에서 배우고 느낀 대로 지금 이 세상을 느끼고 즐길 수 있을 때, 잠시 완성될 것이다. ‘잠시’라는 것은 이때의 완성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읽기가 더해짐에 따라 우리의 눈과 귀가 계속 그리고 더 높은 수준에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 자체로 삶을 깊게 음미하는 방식—세계 향유의 방식이기도 하다. 유종호 선생님은 “교양(Bildung/형성)이란 세계 향유의 방법”이라고 하셨지만, 이 깊은 향유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bilden/build)’.
책을 읽고 삶을 향유하면서 우리는 보다 높은 교양적 인간으로 변모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형성의 단계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다. 읽기에도 오랜 역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저런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착잡한 경험을 통해, 크고 작은 느낌과 절실한 노력과 연이은 깨우침의 축적 속에서 조금씩 나아간다.
한두 번의 조언이나 몇 차례의 안내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읽는 일에는 읽는 주체의 실존적 전부가 걸려 있다.
‘고전 읽기’ 강연
‘열린 연단’의 2년차 시리즈는 ‘오늘의 시대와 고전’이라는 제목 아래 2주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번 째 강연인 ‘동양의 고전’에서 이승환 교수는 고전 해석의 5단계로 ‘고증학적 이해’와 ‘텍스트적 이해’, ‘맥락적 이해’와 ‘평가적 이해’ 그리고 ‘해석학적 이해’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에 대한 접근과 그 이해 방식을 엄밀하게 순차적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뭉뚱그려 ‘해석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구자의 주체적 관점은 사실상 문헌 연구에서부터 이미 끼어들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어떤 고전에나, 그것이 동양 고전이든 서양 고전이든, 해당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해석의 과정이란, 크게 보면, 분석과 이해를 통한 사고의 반성적 과정—되돌아보는 성찰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 성찰로 읽기의 의미는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읽은 내용을 생활의 한가운데로 ‘옮겨 심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식(移植)의 과정은 육화의 실천 과정이다.(이것은 해석학적 이해라는 다섯 번째 단계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책 읽기란, 지금까지의 논의를 합쳐 다시 배열하면, 해석의 과정과 육화의 과정—두 개의 유기적인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책 읽기란 해석과 실천으로 구성된다. 실천이란 해석된 내용의 생활화/내면화 과정이다. 고전의 의미는 그 메시지가 고전을 읽은 나의 생활 속에서,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삶의 실질적 에너지가 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의미는, 그것이 생활의 실질적인 양분으로 전환될 때, 그래서 나날의 영육적 신진대사 안으로 흡수될 때, 참으로 완성된다.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六經皆我註脚)”라고 육상산(陸象山)은 말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내가 읽는 책이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삶을 위한 각주이자 토대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러므로 고전은 단순히 분석되거나 해석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한 나 자신의 생활 속 깊숙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내 삶 속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자양이 되어야 하고, 내 삶을 더 나은 수준으로 변형시켜가는 데 마땅히 기여해야 한다.
이렇게 책과 삶이 이어지지 못하다면, 그래서 글과 생활이 따로 노는 것이라면, 글은 소 귀의 경전일 뿐이다. 그러나 사
람이 소나 말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문광훈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책을 읽는 이유 : 열린연단 - http://m.openlectures.naver.com/mobile_contents?contentsId=81239&rid=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