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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 큰 울림이 됩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해 준 믿음의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 손에 들려 주신 완전한 성경 말씀으로 진리를 마음껏 알도록 해 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2026-04-25 15:11:42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신약교회사를 지난주까지는 part 1, 챕터 7까지 공부하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이후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AD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국가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변하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에 의해 천주교 신학이 완성되며,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시대로 접어 들었다. AD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정치, 교육, 행정등 모든 분야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배하게 되며 약 1,000년의 중세 암흑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소수임에도 박해를 견디며 이어져 왔다.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등이 그들이다. 루터의 95개 논제로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유럽의 어둠을 깨운 거대한 사건이다. 지난주까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의 미완성된 개혁까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주 부터는 part 2. '신약교회 회복 운동으로서의 침례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 챕터8. 스위스 재침례교회 - 신앙의 자유를 향한 여정의 출발 - 오직 성경을 외치던 개혁의 한 복판에서 왜 성경대로 믿고 교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단으로 정죄 되었는가? 왜 루터파와 츠빙글리에게 까지 박해를 받고 수장 되기까지 했는가? 이 장에서는 스위스 취리히 개혁의 중심에서 재침례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최초의 신자 침례와 슐라이트하임 신앙 고백이 어떤 핵심 원리들을 세웠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 개혁의 불길이 알프스를 넘다 - 1517년10월31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게시이후 종교 개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자치적인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교회 개혁은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 될수 있었다. 재침례교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강이 흐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 울리히 츠빙글리 - 스위스의 개혁자 - 중세 교회에서 설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달랐다. 그는 성경 본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었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빛으로 검토했다. 그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듣게 되었다. -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벌어지며 큰 논쟁이 촉발되었고, 사순절 금식 규정에 대해 공개적 토론이 시작 되었다. 츠빙글리는 67개조 논제를 제시하여 카톨릭측을 반박하며 시의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취리히 종교 개혁의 공식적 시작이었다. ● 젊은 급진파들 -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 많은 젊은이들이 츠빙글리의 개혁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게오르그  블라우록 등이며 츠빙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모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연구했으며 당시 교회와 비교하였다. - 신약교회와 16세기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침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16세기에는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주어졌다. 신약 교회는 국가와 독립적이었지만 당시의 교회는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츠빙글리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지만, 젊은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두 그룹간의 충돌은 불가피 해졌다. (자매: 젊은 개혁자들과 츠빙글리의 충돌을 보며, 사도행전의 바울도 바나바와 의견이 달라서 충돌하고 각자의 길을 간 사례가 있듯이, 특히 이 때는 중세의 벽과 시대의 상황이 주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 유아 세례 논쟁 - 갈등의 폭발 - 갈등이 폭발한 지점은 유아 세례 문제였다. 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고 교회론, 국가론, 사회구조 전체와 연결된 이슈였다. 출생 등록이 시민권 부여였으며 사회 편입이었다. 더 나아가 유아 세례는 국가 교회 체제의 핵심이었다. (자매: 유아 세례, 자동 시민권, 자동 교회  회원등을 읽으며 우리 교회의 회원 가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40개 필수 설교를 듣고, 교회의 철학이나 교리를 바르게 알고, 받아 들인후 회원이 되는 절차는 신약 교회와 침례 교회가 추구하는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 됩니다.) -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1524년 10월,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자는 처벌 받는다는 경고를 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그레벨, 만츠 그리고 반대론자들은 취리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은 결정의 순간을 만들었다. 시의회에 순종 할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결과를 감수 할것인가? ● 1525년 1월 21일 - 재침례교의 탄생 -'그때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 (행5:29) - 블라우록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으로서 성경대로 침례를 받기 원했다. 그레벨은 물 한 그릇을 가져와서 신앙을 고백하게 한 후, 머리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줍니다. 그 순간부터 재침례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신약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자매: 재침례교가 탄생하던 그날 저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질문인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점검 해야겠습니다.) ● 재침례교 신학과 실천 -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 - 1527년 2월 24일, 스위스와 독일 국경 근처의 슐라이트 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재침례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서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이 작성 되었는데 이는 재침례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초기 문서 중 하나이며, 후대 침례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 제1조: 믿는 자 들에게 주어지는 침례. 제2조: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파문(출회). 제3조: 주의 만찬. 제4조: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 제5조: 목회자는 교회가 선택한다. 제6조: 칼, 즉 무력이나 폭력은 안된다. 제7조: 법정에서 맹세.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 박해의 시작과 확산 - 1526년 11월, 슈파이어 제국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재침례교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모든 자는 화형, 참수, 익사 또는 재판없는 처형이 그 법이었다. 1527년 1월 5일,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서 펠릭스 만츠가 처형되면서 그는 재침례교 운동의 첫번째 순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1527년 5월,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을 이끌었던 사틀러는 아내 마르가레타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그의 혀를 자르고 뜨거운 쇠로 몸을 일곱 번 지진 뒤 그를 불태워 재로 만들라"는 끔찍한 형벌이 기록되었다. 재침례교인들의 피는 유럽 곳곳에서 흘렀고 초기 재침례 운동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확산 되어갔다. ● 뮌스터의 비극 - 재침례교의 오명 - 1534년부터 1535년까지 독일의 뮌스터 시에서는 일부 급진적인 재침례교도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뮌스터에서 벌어진 광신과 폭력은 오랫동안 재침례교 전체의 이미지를 훼손했고 '재침례교인'이라는 이름은 '위험한 과격파' 라는 의미로 오해되었다. (자매: 수많은 평화로운 재침례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오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것은, 마귀가 일하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미리 선점하여 조직적으로 방해하는것, 킹제임스성경 논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귀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 재침례교가 침례교에 남긴 유산 - 재침례교와 후대 침례교의 관계는 오랫동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 과연 직접적 조직적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영적, 신학적 계승 관계인가? 가장 정확한 이해는 이것이다. 재침례교가 남긴 후대의 열매라는 점에서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그들이 박해속에서 피로 확증한 원리들을 침례교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세계적 운동으로 성장 시킨것이다. - 재침례교의 영향은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북미로 이어졌다. 로저 윌리암스는 재침례 전통에서 강조해 온 양심의 자유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실천하며 로드 아일랜드를 세웠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원리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까지 반영되며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자매: 미국의 헌법은 현대 사회 자유 민주주의 기틀이 되었는데, 그들의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수 있는것 같아요. 무엇보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 영혼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이루어질수 없는 일이었을것 같습니다) ● 결론 - 취리히의 유산과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 1525년 1월 21일 저녁, 취리히의 한 작은 방에서 일어난 일은 세계사를 바꾸었다. 그날 밤 몇명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침례를 주었을때 그들은 단순히 종교 의식을 거행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학적 혁명이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교회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 오늘 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자 침례 - 이 모든것은 성경에 손종하려고 한 침례교 성도들의 고난의 유산이다. 그들의 원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침례교의 길이다. 이 길이 취리히에서 시작된 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2026-04-25 14:32:47 | 최성미
불완전했지만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은 선조들 덕분에 지금 믿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신약 교회를 지켜 나가기 위해 저 스스로도 노력하고자 다짐해 봅니다.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4-20 09:50:03 | 김지훈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며  많은 사람이 그 댓가를 치루고 오늘에 이르렀어요.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으나 신약교회를 이어나가는 우리교회가 있어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수고해 주시는 자매님들도 참으로 귀합니다.  
2026-04-19 21:29:52 | 이수영
<하나님계심에 확신이 있다면 내꺼를 내려놓아야하는건 당연한 것이다>육신의 연약함으로 잘안되어져서 그렇지,그것이 정답이라면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결단의 시간은  제경험상 그 가치가 컸어요..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말씀으로 계심을 자꾸 확인 기뻐해야 하는구나..하는것도 체감합니다. 저는 제가 나이가 들어 작은꽃들이 예쁜줄 알았는데 하나님계심을 깊이 알수록 성화될수록 자연이 눈물나게 곱다는걸 오늘 알았네요!(저처럼 헤매면서 더디게 성화과정 보내지 않게, 갓구원받은 젊은 성도분들을 위해 몇줄 적어봤습니다~^^) -내 형제들아,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1장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19 16:00:2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으로 보내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벗꽃들이 어느덧 푸른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따가운 햇살에 저도 모르게 그늘로 피하면서 봄의 끝나감을 아쉬워 합니다. 시대와 국가의 상황이 우리의 혼을 짓누르는 때에도 계절과 꽃들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자매모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온 몸을 통해 기뻐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감사히 보냈습니다. 이번주 챕터는 7. 16세기 종교개혁(좋은시작, 미완의 개혁)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 서론 - 새벽이 밝아오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 앞에는 한 장의 라틴어 문서가 게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제였다. 그 문서는 유럽을 뒤흔드는 폭풍의 시작이었다. - 이 장은 종교 개혁이 회복한 진리와 남겨 둔 한계를 함께 살피며, 루터와 칼빈, 츠빙글리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교회론과 양심의 자유 문제에서 왜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는지 검토한다. (자매: 우리는 개혁자들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으며, 지금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것 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다가도 모기같은 작은 문제마저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걸려 넘어지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될때마다 안타깝습니다) ● 마르틴 루터(1483 - 1546) - 종교 개혁의 시작 - 1505년 7월 2일, 죽음의 공포에서 루터는 극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수도사가 되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루터를 괴롭혔다. 그는 이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이해했다. 1518년경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정죄하는 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얻게 되는 '칭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매: 처음에 루터가 두려워했던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얻는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의'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씀들을 통해 얻는 이런 영적인 기쁨들을 놓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95개의 논제는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을 불러왔고 공개토론을 통해 교황의 무오성과 공의회의 권위가 절대적일수 없으며 그들도 오류를 범할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521년 공식적 파문을 당하며 로마교회와 완전한 결별을 했다. - "나는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제국 의회에서의 이 답변으로 루터를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졌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선 후제를 통해 구출하시고 보호하심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자매: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한 확신을 말하는 루터의 고백처럼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교만이 아니고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하기위한 근거가 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 교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루터는 단 11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어린이들의 말을 관찰했다. 생동감있고 이해하기 쉽게 독일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했다. 1534년 독일어 루터 성경전서가 출판되었고 이는 독일어의 표준화를 이끌고 유럽 종교 개혁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루터의 유산은 대단히 복잡하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복음을 회복하고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로 신학을 정립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은 교회론에서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교회와 유아 세례를 유지했으며 성경신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했다. 그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확립하지 못했고 반 유대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무엇을 믿느냐?"는 개혁했지만 "교회란 무엇인가?" 는 전혀 개혁하지 못했다. 침례교는 루터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려고 한다. (자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극적회심, 수도사, 성경연구등을 통해 시대와 교회의 문제를 깨닫고 95개 논제를 통해 종교 개혁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비록 개혁은 미완의 모습이어도 우리 침례교가 이어져 올수있는 근간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며, 현시대에도 누군가를 준비하고 계실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 울리히 츠빙글리(1484 - 1531) - 스위스 개혁 - 츠빙글리는 루터와 거의 동시에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고, 설교자가 되었을때는 전통적인 미사 본문 대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외쳤다. - 1523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 편에 서며 개혁을 지지하였다. 취리히에서 성상들이 제거되고 미사가 폐지 되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다른 견해로 인해, 루터와 개혁파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다. (자매: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동시대에 함께 종교 개혁 운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 그의 신학은 개혁 교회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예배에서 성경에 없는것은 모두 제거 하여, 단순함은 개혁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도 교회론에서는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역시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 세례를 옹호 했으며, 재침례 성도들을 박해하여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자는 수장한다는 법을 통과시킨 시의회를 지지하였다. ● 존 칼빈(1509 - 1564) - 제네바의 개혁자 - 칼빈은 루터의 저작들을 읽었고 개신교 신학을 받아 들였으며 결국 로마 카톨릭과 결별했다. 26세때인 1536년 논리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개혁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고 이것이 나중에 칼빈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자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카톨릭의 부패와 교리에 저항하며  개혁한 그들도 사회적 환경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개인의 한계가 미완의 개혁으로 끝맺음 된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기독교 모범 도시로 만들려 했으며 교회와 시 정부가 협력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교회규례, 당회 등을 조직화하여 엄격하게 개혁하려 했다. - 칼빈 신학의 핵심은 다섯가지로 구분 될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다. 둘째, 이중 예정론(구원, 유기)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셋째, 인간이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설명은 때때로 '인간의 부패가 곧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다'라는 방식으로 오해 되곤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수 없음을 가르쳤다. (자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너무 치우친 견해로 인해 전적타락, 전적무능력이란 교리 때문인지,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교제 했던 성도들 중에는 사업이 잘 될때는 은혜로 여기다가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교회에 충성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로 여기곤 했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지만 영혼의 자유가 없이 억매인 그분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 결론 - 불완전한 개혁과 침례교의 부름 - 종교 개혁은 위대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세례를 고수 했으며 이단을 박해하고 양심의 자유를 부정했다. 이들은 왜 더 나아가지 못했을까? 첫째는, 천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였다. 둘째, 당시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 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셋째, 정치적 필요성이었다. 넷째, 신학적 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성경적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 루터가 문을 열었고 재침례 교인들이 그 문을 통해 나아갔고 침례교가 그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신약 교회의 완전한 회복이다. 성경 만을 따르고 그리스도 만을 높이고 은혜 만을 자랑하는 교회이다.            
2026-04-18 15:47:45 | 최성미
평소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가치, 우리가 편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 이런 소중한 것들을 지금 지키지 못한다면 자녀들은 너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텐데... 생각만으로도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신약 교회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2026-04-12 21:35:29 | 김지훈
죽을때 제일 아쉽고 후회될 그것이 지금 제일 급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경우는 말씀에 순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 제자식들 말씀좋아하고 하나님염두해두며 열심히 살아가기를 같이 훈련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요즘 더 추가된것은 <피하고싶은 상황,사람들 따뜻하게 바라보기> 입니다.이것이 설령 핍박가운데 해야하는 것이어도 제 본인이 힘든것일뿐 진리에 굴복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이정도의 깨우침을 겪지않으면 엄청 대강 살아갈 저를- 미리 알고계시는 하나님께 살짝 죄송했어요~^^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12 08:15:02 | 목영주
항상 진리는 좁은 문이죠. 우리는 피의 역사,  생명의 희생 덕분에 존재하고 핍박은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필수가 되네요. 믿음을 생명으로 지켜낸 믿음의 선진들의 귀한 업적을 모든 분들이알았으면 좋겠어요. 자매모임이  성장과  섬김의 모임이 되어 가기를 바래요.
2026-04-12 07:43:18 | 이수영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이번주는 자매모임 시작전에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영상 중 (행12:4)의 '이스터'에 대해 잠깐 토론을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성경에는 이스터가 유월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3절에 무교절 기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간을 무교절로 지키기에 4절에 유월절로 번역하는것은 옳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합법화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교도를 흡수하기 위해 이스터(이방여신이름)축제와 기독교의 부활절을 혼합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카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이 되어 오늘날도 이스터데이가 부활절로 사용되지만  우리는 'Resurrection Day'(부활절)로 사용하는것이 옳겠습니다. ● 어둠속의 등불 - 선구자들의 등장 (AD1170 - 1415) - 중세말 성경이 가려지고 복음이 왜곡된 깊은 어둠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내버려 두시지 않고 가장 타락한 순간, 가장 강력한 억압 속에서도 늘 자신의 증인들을 남겨두셨다.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성경, 오직믿음, 전 성도 제사장직'을 선포하며 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외침이 훗날 종교개혁과 침례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어둠속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들 이었다. ●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 : 어둠을 가른 최초의 빛 - 12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일어나 부패한 교회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나중에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로 불리게 된다. 이들이 없었다면 16세기 종교 개혁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권위이며, 교황권과 사제계급을 비판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신약교회로 돌아 가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로마카톨릭의 심장부에서 목숨을 걸고 진리를 외치며 이 모든것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 왈도파 - 알프스 산맥의 증인들 (AD 1170년 경부터) -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인 피터 왈도는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을 목도 한후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태복음19장21절의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단순한 옷을 입고 거리와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자매: 왈도는 '마19:21'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누구나 믿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큰 부자였던 그가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일에 전념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말씀대로 실행하며 사는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 왈도의 진정성과 열정이 사람들을 감동 시켰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왈도파의 특징은 첫째, 성경을 절대적 권위로 삼았다. 언제나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성경에 없는것들은 거부했다.(예:연옥, 면죄부, 화체설, 유품숭배등) 둘째, 일반 성도 설교를 실천했다. 교회는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사도행전의 빌립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로 들었다. 셋째, 그들은 예배를 단순하게 드렸다. 예배의 중심은 성경낭독과 설교였다. 넷째,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며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그들의 삶이 그들의 설교를 증명했다. (자매: 왈도파는 특히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성경을 탐구하고 연구하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전에 출석하던 교회에서는 설교에 대한것이든, 성경에 대한 것이든, 질문 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던 중세시대의 모습을 읽으며 현대 교회안의 안타까운 모습도 생각해 봅니다.) -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 왈도파는 공식적으로 이단 정죄를 받으며 파문되었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1655년 피에몬테의 부활절 학살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이는 끔찍한 학살이었다. 수세기 동안 이어진 박해에도 그들은 살아남아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자를 파송하고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자매: 베로나 공의회에서 이단 정죄를 받은 후 부터 왈도파 사냥, 색출, 밀고, 처형 이런 글 들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이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공산주의 사회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카톨릭의 영이 무엇인지 느껴집니다.) - 왈도파는 침례교와 놀라울 만큼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핵심 원리들 특히 성경의 권위, 모든 성도의 제사장직, 단순한 교회에 대한 강조는 후에 침례교가 주장하게 될 원리들과 일치했다. 역사적 자료를 통해 직접적인 계승 관계를 입증 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종교 개혁 이전에 신약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던 가장 중요한 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 존 위클리프(1320 - 1384) - 영국의 '종교 개혁 새벽별' - 14세기 영국교회의 부패는 절정에 달했다. 정통 카톨릭 신학자였던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를 통해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라고 선언했다.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 라는 주장이 성경에 없기에 교황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역시 지적하며 사제의 역활이 필요 없음을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라고 결론을 지었다. -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하고 지속적인 공헌은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일반 성도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며 1382년경 신약 성경, 1388년경 구약 성경 까지 최초의 완전한 영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위클리프를 추종하던 롤라드도 그의 가르침대로 검소한 옷을 입고 광장이나 시장에서 영어성경을 읽어주고 암송하도록 가르쳤다. 그들은 카톨릭의 부패를 폭로하며 단순한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자매: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과 다른 가르침을 비판했던 위클리프의 모습을 보며, 당시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을텐데 깨닫는 자는 소수 였구나 하는것과, 그럼에도 신.구약을 모두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큰 쓰임을 받는것을 보며 적은 숫자여도 진리 안에서 있어야 함을 생각합니다.) - 위클리프는 '종교 개혁의 새벽 별'로 불린다. 루터보다 150년 앞선 종교 개혁의 원리들을 발견했고 그는 성경이 일반 성도의 손에 들어 가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원칙은 영국  종교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 얀 후스 (c.1369 -1415) - 보헤미아의 순교자 - 보헤미아의 남부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얀 후스는 명석한 두뇌로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명성있는 설교가 이자 개혁가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위클리프의 많은 주장에 동의했다. 그의 저작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고 자신의 설교와 강단에서 가르쳤다. - 특히 후스는 설교단에서 교황청의 부패와 사제들의 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교황 요한23세가 면죄부를 파는것에 분노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종이 쪽지로 죄를 용서 할수있는지 돈으로 용서를 살수 있다는 것은 복음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외쳤다. 얀 후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교회는 위협을 느꼈다. (자매: 중세말 교황청과 사제들의 부패는 재산 착취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음행으로 사생아가 많이 출생 하였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수녀원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것도 사회 공헌의 의미도 있지만, 이런 부패를 감추기 위해 라는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 1415년 7월 6일 공의회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는 세속 권력에 넘겨져 화형 당하게 되었는데, 화형 당하는 그날 후스의 머리에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후스의 순교 소식이 전해 지자 백성들은 분노하며 후스파 운동이 폭발적으로 보헤미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후스는 민족 영웅으로, 순교자로, 진리의 증인으로 기억되었다. (자매: 우리 시대에도 언제든 교회를 박해하는 깊은 어둠의 때가 올 수 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것, 다음 세대인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바르게 양육 하는것, 그리고 핍박을 견딜수 있는 믿음을 위해 늘 기도로 준비해야겠습니다.) ● 결론 - 선구자들의 공통된 메세지와 침례교와의 연결 - 왈도파, 롤라드, 후스파, 그리고 침례교는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다. 그들은 모두 신약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고 모두 초대 교회의 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비록 서로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어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선구자들이 없었다면 16세기 종교 개혁도 불가능 했을것이다. 그들이 뿌린 씨앗이 종교 개혁의 열매를 맺게 했다. 진리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시대에도 당신의 증인들을 남겨 두시며,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증인들을 가지고 계신다.                  
2026-04-11 17:30:03 | 최성미
한 자매님의 말씀처럼, 이 시대에서조차도 사람의 말을 믿고 무작정 따르며 성경기록을 기준 삼지 않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항상 좋은 의견 나눠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2026-04-05 22:19:34 | 김지훈
자매님들이 많이 참석하고 계시네요. 근심 걱정 많은 세상에 자매들과의 교제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지요. 교회가 권력을 갖게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국가교회화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들과  같지 않으면 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도....
2026-04-04 22:56:37 | 이수영
신약교회사와 안어울리는 댓글 하나 쓸게요.~^^큰애와 사는얘기하다 큰거 건졌어요..목영주가 튀어나오지않고 참아내는것,절제는 내 의를 세우지않는것의 극히 일부분이다.그정도로는 기쁨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내가 주도적으로 하나님생각으로 살아야 기쁨으로 살아진다.하나님의 생각이란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것을 바라보려 하는것과 하나님만으로 기쁘다는 것을 포함,모든것을 선하게 이끌어주실거라는 그 확고한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여지는게 다가 아닌것은 물론이고 모든것들 가지고 하나님뜻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결국 기뻐하는것 그것밖에는 우리가 이세상에서 할 수 있는게 없다.결국 하나님이 그걸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는게 아닐까싶고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수 있다-는 큰애고백입니다.저는 제자식이라 그런건지 말씀이 실체가 되어 제가 업그레이드되어진 느낌이에요..여러모양으로 성화되어지는 우리지만,저와같은 경우 겪는 성도분들에게 위로도움될까 그대로 적어봤습니다아~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베드로후서3장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04 17:55:37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평안히 보내셨나요? 지난 4월 1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종교단체 해산법' 반대집회에 여러 형제. 자매들이 참여를 하였습니다. 다음날 자매모임을 나누기전에 이번 이슈로 대화를 나누며 한국교회 성도들의 무관심이 씁쓸하고 영적인 눈이 잠긴것같아 다들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분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도우실까요? 마음의 부담을 지고 그럼에도 우리는 신약교회의 정체성과 올바른 성경, 킹제임스흠정역을 알리는것이 본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번주 자매모임은 챕터5 '중세 종교재판소' 이며 , 이 장에서는 어거스틴의 "강제로라도 데려오라"는 원칙이 어떻게 중세 종교재판소 라는 거대한 폭력시스템으로 제도화 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파괴 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 중세 종교재판소- 교회의 무력사용과 이단 탄압 (AD 1184 - 1600) -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강제는 필요하며 국가의 힘을 빌려 도덕과 신앙을 지키는것이 왜 나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중세 역사를 보면 알수있다. 성경의 권위와 복음은 사라지고 은혜는 행위로 대체되며, 회심은 유아세례속에 묻히고 연옥, 면죄부, 강제개종과 같은 제도들이 삶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신약교회 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부분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붙잡아야 하는지 알아보자. ● 어거스틴에서 종교 재판소까지 - 황제 하인리히4세의 카노사의 굴욕, 성경을 번역하고 카톨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얀 후스,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은 갈릴레이 등 이 세 사건은 교회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굴복 시켰다는 것이다. 이 모든것에 신학적 뿌리는 4세기 어거스틴이 만들었다. 강제 무력 사용이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며 이 사상이 중세에 이르러 종교 재판소로 실행이 되었다. (자매: 어거스틴은 '누가복음14:23' 절에서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를 적용하며 이것을 강제로라도 데려오게 하는 근거로 삼았는데 이것은 강하게 권유하란 뜻이지 물리적 행사를 하라는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편의적으로 해석하는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 종교재판소 - 국가 정책이 된 이단심판 - 12세기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왈도파와 알비파였다. 1184년 교황 루키우스3세 때에 국가와 교회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처벌하는 제도를 확립한 이단 심판제도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어거스틴이 제시한 원리 즉, 교회가 국가의 칼을 빌려 이단을 억압할수 있다는것이 공식 정책으로 제도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자매: 베로나칙령의 내용 중 관할 구역을 순회하며 이단 여부를 조사할것, 이단으로 판정된 자는 국가의 형벌과 재산이 몰수 된다는 내용을 보며 이번에 통과 시키려고 하는 '종교단체 해산법'과 겹쳐 보이는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1231년 교황 그레고리9세는 교황청이 직접 통제하는 종교재판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교황은 통일된 기준으로 일관되게 작동하는 전문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주요특징은 첫째, 교황의 직접 통제이다. 둘째, 이단색출에 매우 적극적인 도미니크회 중심의 운영이다. 셋째, 고문의 공식화이다. 넷째, 고발자는 익명으로 보호되는 피고인의 권리 제한이다. 다섯째, 재산 몰수의 제도화이다. 이 제도는 종교재판소의 부패를 구조적으로 심화시킨 핵심요인이었다. ● 공포 시스템 - 종교재판의 절차 - 1단계, 조사와 고발로 이루어진다. 고발 동기는 종교적 이유 뿐만아니라 원한, 경제적 이익, 시기심등 다양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2단계, 이단 혐의가 제기되면 고발자나 혐의내용도 모른채 종교재판소 감옥에 갇혀 불확실성과 공포 속에서 지내야했다. 3단계, 심문의 핵심 목표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기에 모호한 질문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4단계, 판결과 형벌이 주어졌다. (자매: 요즘은 공무원이나 군인의 진급 등에서도 정치적인 성향을 조사한후 승진을 할수도 강제 퇴사를 할수도 있다는걸 들었습니다. 미디어의 선동으로 서로가 고발하는 시스템(예:벌금파파라치)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참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 공식적으로 교회는 직접 죽이지않고 국가가 처형했지만 이는 교묘한 위선이었다. 교회는 형식적으로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세속 권력자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이것은 "국가가 이단을 억압하는것이 정당하다"는 어거스틴이 확립한 원칙의 실제 적용이었다.   ● 어거스틴의 논리가 제도가 되다 -  신학적 정당성 - 어거스틴의 논리는 "이단은 영혼의 살인자 이므로 육체의 살인자를 처형하듯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카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로 왜곡되었다. 이단은 사람들을 교회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므로 국가는 이단을 억압할 의무가 있었다. - 종교재판소는 단순히 권력욕이나 잔인함의 산물이 아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단자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확히 어거스틴의 '국가가 이단을 강제로 교화하는 것은 사랑의 행동' 이라는 신학적 논리에 정당한 행동이었다.  (자매: 종교 재판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것을 읽으며 성경말씀이 기준이 아니고 사람의 말을 믿는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게 되는거 같아요!)   ● 종교 재판소의 희생자들 - 종교 재판소는 누구를 공격했는가? 공식적으로는 '이단자'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알비파는 카톨릭의 성례체계, 사도제도, 교회조직을 거부했다. 교황은 알비파의 영향이 강한 남프랑스를 공격하여 수만명을 죽였으며, 교황특사 아르노아모리는 "모두 죽여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아실것이다" 라는 악명높은 말을 남겼다. - 종교 재판소의 또 다른 표적은 왈도파였는데 그들은 성경중심, 일반성도 설교, 단순한 교회, 교황권 비판을 특징으로 했다. 그들은 침례교의 많은 원리들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반복된 박해, 특히 피에몬테지역의 학살을 견디고 살아남은 공동체로서 종교의 자유와 신앙고백의 역사적 증인으로 평가된다. (자매: 신약교회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것으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은 왈비파는 알프스의 깊은 골짜기 춥고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침례교의 원리를 지키며 오늘날까지 전달한 그들의 믿음에 감동이 됩니다) - 성경을 번역하며 소유하거나 읽는 것으로도 종교재판소의 처벌을 받거나 심지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독교 내부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고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영역을 뛰어넘어 마녀사냥과, 지식, 과학, 사상을 통제하는 기구로 변질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자매: 성경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종교재판소에서 처벌되던 때를 보며 오늘날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자유가 있음에도 오히려 쌓아만 두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 스페인 종교재판소 - 공포의 절정 (AD1478 - 1834) - 종교재판소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것은 '스페인 종교재판소'였다. 특히 '신앙의 행위' 라고 불리는 공개의식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고 대중을 위협하였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이 강한 형태로 실제 운영은 교황이 아니라 왕실의 손에 있는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결합한 형태였다. 1483년부터 1498년까지 15년 동안 대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했던 토르케마다의 이름은 종교적 광신과 잔혹함의 상징이었다. (자매: 공개재판인 신앙의 행위를 군중들은 구경거리로 때론 축제처럼 하였다는것을 보며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은 일로 여기기에 악한일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는 모습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과 다를바 없는것 같습니다.) ● 종교재판소의 결과 - 진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수십만명을 죽였으며, 교회가 승인한것 말고는 과학적 탐구도, 철학적 사색도, 신학적 논의도  위험했다. 또한 종교재판소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완전히 부정했다. 외적 복종만을 요구했고 내적 확신은 무시했으며 결과는 위선의 문화였다. - 복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종교재판소는 결국 복음에 대한 증오를 낳았다.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는자가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역사는 교회가 권력을 가질때 얼마나 타락하는지 보여주는 끔찍한 증거이다. ● 결론 - 어거스틴에서 종교재판소까지, 그리고 침례교의 부름 - 침례교는 어거스틴과 종교재판소의 역사로 부터 깊은 교훈을 얻었다. 침례교의 선조들과 왈도파와 재침례교인들은 종교재판소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의 피는 침례교인 들에게 외친다. "다시는 그 길을 가지 말라. 다시는 교회가 칼을 들지 말라. 다시는 신앙을 강제하지 말라" 종교재판소라는 제도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원리, 즉 교회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신앙을 강제 할수 있다는 원리는 여전히 위험하다. 이 원리를 거부하고 정교분리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것이 침례교의 사명이다.                  
2026-04-04 15:14:33 | 최성미
중세 암흑기에서도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켜온 믿음의 선조들 덕분에, 자유롭고 편안한 환경에서 믿음 생활을 하는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소중한 가치를 신약 교회 성도들이 많이 깨우치길 소망합니다!
2026-03-30 17:10:24 | 김지훈
(잘할 수 있는게 거의 없음에도,절망적인 상황에 많이 빠져도)믿음의 가치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던,인간인 저의 본성을 알게 되는 요즘입니다. 회개하고,믿음이 곧 순종임을 고백하며,하루를 말씀읽기 기도하는 마음으로 훈련! 저의 자유의지를 아버지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하시니라.-요한복음4장2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하시니라.-누가복음15장10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3-29 10:22:04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