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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님들 화사한 웃음에 나라걱정을 잠시 잊었습니다~^^ 말씀(하나님)으로 마음을 충분히 적신후에야 버틸수 있는, 마지막때임을 실감하는 하루하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기록된 바,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느니라,하시더라.-누가복음4장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m.youtube.com/watch?v=381GiIHyl_A&pp=iggCQAE%3D
2026-05-23 21:01:5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성령님과 함께 걸으셨나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며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 이 말씀에 따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워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성도들이 눈을 뜨고 올바른 의를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이번 시간에는 챕터10. 신대륙의 청교도 신정국가 - [광야에서 피어난 자유]이며, 미국에서 침례교가 말하는 정교 분리와 양심의 자유, 국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라는 이상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비로서 역사속에 모습을 드러냈는가? 그리고 메사추세츠 신정국가의 구조 및 한계와 로저 윌리엄스가 로드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종교의 자유가 침례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확산, 그리고 미국적 자유 개념 형성에  어떤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청교도들의 이주 - 또 다른 탈출 - 17세기 초 영국은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에게 여전히 위험한 곳이었다. 탄압을 피해 그들은 새로운 선택지를 고민하였고, 그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신대륙 아메리카였다. - 1620년 9월,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메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1630년에는 약 1,000명의 청교도들이 11척의 배를 타고 메사추세츠만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빠르게 번영하는 식민지가 되었으나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곳은 아니었다. (자매: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와 정착이 미국의 역사와 종교의 자유를 가져온 것이 아니고, 이 책의 배움을 통해 침례교의 유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현재의 미국과 한국의 상황을 보며 깨닫게 되네요.) ● 메사추세츠의 신정국가 - 메사추세츠 식민지의 국가 운영이 청교도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영국 성공회 대신 회중교회(청교도)가 지배하는 국가 교회체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 회심한 교회 회원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기에 회원 자격을 거절당한 수많은 가정에 벌금과 차별등, 깊은 상처를 남겼다. - 1656~1661년 사이에 퀘이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메리 다이어라는 여성도 자신의 신앙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으로 인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매:영국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왜 여전히 국가교회를 하며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를 했을까? 먼저는 인간의 악함 때문이고, 이들이 이주한 1620년경에는 아직 킹제임스 성경이 보편화 되지 못했기에, 읽고 연구하며 사고하는 부분에서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이것이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구현한 '종교의 자유'의 실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할 자유를 원했지만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같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매:존 코튼 목사는 "이단자를 관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것이다" 란 말을 하였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 분 자체로 거룩하신 분이기에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거룩함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그도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좋은 부분만 취하고 악한 일에는 눈을 감는 다면 오늘 날 좌파의 사상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 로저 윌리엄스 - 다른 목소리 - 1631년2월, 윌리엄스와 제인이 보스턴에 도착했을때 메사추세츠 청교도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학자였고 능력있는 설교자였으며 열정적인 청교도였다. - 목사직을 제안한 보스턴 교회가 여전히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자 '분리되지 않은 교회'라고 비판하였고, 곧 윌리엄스의 급진적 견해들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윌리엄스의 위험한 생각들 - 그의 주장들은 메사추세츠 청교도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첫째, 국가는 종교를 강제 할수없다. 둘째, 교회는 순수해야 한다. 셋째, 영국 왕은 원주민의 땅에 대한 권리가 없다. 이는 식민지의 법적 기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넷째, 각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 할 권리가 있다.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극도로 급진적인 주장 이었다. 그는 양심의 자유는 진리 뿐 아니라 오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매:윌리엄스의 주장 중 교회는 순수해야 한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한번 쯤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습니다. 오늘 날에도 적용해보면, 우리 교회안에도 회심한 성도들만의 모임이 아니기에, 믿음을 고백한 후 침례를 받고 회원으로 가입하는 과정을 둔 방침은 현대 교회안에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 재판과 추방 - 1635년 10월, 총회 앞에 소환된 윌리엄스는 '새롭고 위험한 의견을 퍼뜨리고 정부와 교회의 권위를 거스른 죄' 라는 판결을 받았고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추방 당했다. 1636년1월, 윌리엄스는 한겨울의 폭풍 속으로 도망쳐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 광야에서의 14주 - 이후에 윌리엄스가 겪은 14주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윌리엄스는 원주민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로 존중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 프로비던스 - 하나님의 섭리 - 1636년 봄, 윌리엄스는 나라간셋 부족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며 그 땅을 프로비던스(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 라고 이름 지었다. - 공동체의 원칙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선언했다. 예배의 참석을 강요하지 않았고, 국가가 특정 교리를 강제할 수 없으며, 모든 남성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졌다. 교회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으며 정부는 교회를 간섭하지 않는다. 프로비던스가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으나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한 시대를 몇 세기나  앞서간 곳이다. ● 1638년 - 미국 최초의 침례 교회 - 1638년 윌리엄스는 홀리만을 포함한 약 10명에게 침례를 주며 미국 최초의 침례 교회가 프로비던스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며 프로비던스 제일 침례 교회로 불린다. 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침례교의 핵심 원리를 실천했다. ● [피로 물든 박해의 교리] - 윌리엄스의 대작 - 1644년 윌리엄스는 [피로 물든 박해의 교리]라는 책을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종교적 박해를 정당화하는 모든 논리를 공격하는 강력한 저술이었다. 영국 의회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몰래 읽으며 그의 사상은 점차 확산되었다. ● 로드 아일랜드 - 피난처가 된 식민지 - 1644년 윌리엄스는 영국 의회로 부터 로드 아일랜드 개척지에 대한 허가서를 얻었는데 이 허가서는 로드 아일랜드의 독특한 원칙, 즉 종교의 자유, 정교 분리, 자치권을 보장했다. 로드 아일랜드는 17세기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었다. (자매:청교도들은 로드 아일랜드를 이단들의 소굴이라고 비난했지만, 종교의 자유는 경제적으로도 성공하게 하며 시장 경제의 모델이 된것 같습니다. 정교 분리와 자유 시장 경제가 하나님의 원리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됩니다) ● 미국 침례교의 확산 - 18세기에 일어난 대각성 운동은 영적 부흥 운동이었다. 휫 필드와 에드워즈같은 설교자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교회들이 성장했다. 침례교의 신자침례 강조와 회심에 대한 강조는 폭발적으로 성도들이 늘어나게 했고 18세기 말, 침례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 중 하나가 되었다. (자매:진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양심을 강제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지만, 분명한것은 스스로 교리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안에 몰래 들어와 분란을 조장하는 다른 교리를 가진 자들에게는 더욱 단호함이 필요하고 때론 교회의 리더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것도 기억해야 겠습니다.)        
2026-05-23 12:28:59 | 최성미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이번주 자매모임은 매년 두 번 정도 하는 바자회로 진행하였습니다. 행사 때 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순서를 결정하곤 하였는데, 이번 바자회에서는 그동안 함께 읽고 나누었던 신약교회사 책에서 문제를 만들고 각 조별로 스피드퀴즈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어도 긴장하여 답이 생각나지 않거나 혹은 오답으로 까르르 웃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임에 참석하지 않던 서른명 정도의 자매님들이 동참하여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러 자매들의 섬김을 통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여전히 나라 안팍의 사정이 불안정하지만,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주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2026-05-09 16:26:12 | 최성미
어제도  나라생각에 눈물로 기도드리다 잠들면서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경험하는 하루하루입니다.오늘아침 갑자기 드는 우스운생각이-나라걱정은 이리 크면서 내본인 거룩한생활 이거하나 제대로 못하나싶은게..예수님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삶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크게 결단했습니다~^^성령님의 인도-예수님 말씀에 복종-하나님께 영광 드려야지 다짐합니다. 아버지! 나라 살려주세요..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 거룩할지니라.기록된바,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하였느니라.-베드로전서1장15,1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youtu.be/ujftc4iXC7g?si=kKwV_YgPE5V6Qx5v
2026-05-03 07:54:29 | 목영주
악하고 약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해서 죄를 저지른다는 자매님의 의견에 큰 공감이 됩니다. 오늘날 악한 시대에서도 당장 느껴지는 안락함에 종교의 자유의 가치를 잊고 조금씩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어나길 소망합니다.
2026-05-02 18:56:34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평안하게 지내셨나요?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는 신약교회사를 읽고 배우며 알게되는, 많은 역사적 사건 속을 관통하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 행위는 악하고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롭고 올바르기에 사악한 자가 참을수 없어서 죽였다는것, 그것은 모든 시대 순교자들의 원형이고 거짓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는것이 세상의 역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침례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모든 교회 역사속에 있는 고난과 박해가 왜 일어나는지 수긍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주는 챕터9. 영국 침례교의 탄생과 확산에 대해 살펴보고 나누었습니다. ● 영국 침례교의 탄생 및 확산 - 분리 주의에서 침례교로 (AD1534 - 1689) - 16~17세기 영국 교회는 국왕이 머리인 전형적인 국가 교회 체제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회심한 신자들의 자발적 교회, 신자침례, 정교분리,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침례교가 태어날수 있었을까? - 이 장에서는 헨리8세의 종교 개혁과 1689년 관용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침례교의 원리를 통해 근대 자유주의 역사에 어떤 출발점을 남겼는지 살펴 보려한다. ● 헨리8세의 종교 개혁 - 권력의 이동, 복음의 회복은 아니었다 - 1534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으로 선언한 수장령이 통과되며 영국의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매우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신학적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이동이었다. (자매:수장령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카톨릭의 교리와 색채가 많이 남은 영국 교회에 한가지 변화는 영어로 번역된 틴데일 성경이 비치 된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수 있었던 이 작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영국을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 국가 교회 체제의 문제점 - 헨리8세 이후, 에드워드 치하에서 영국 교회는 개신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메리1세는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리려했다. 수백명이 순교 된 메리의 박해는 역효과를 낳고 '블러디 메리' 라는 오명을 얻었다. 메리 이후 등극한 엘리자베스는 중도적 절충을 추구했다. 그녀는 영국을 다시 개신교로 세우되 카톨릭 신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수장령과 함께 통일령을 통과시켜 이 두법은 영국 국교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기초가 되었다. (자매:지도자나 정권이 바뀔때마다 고난과 박해가 반복되는 역사를 바라보며, 사람은 본성이 악하기에 역사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하여 악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신약 교회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 할때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국가 교회체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국가 교회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나중에 청교도 운동과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결국 침례교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 청교도의 등장 - 안에서 개혁하려는 시도 -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안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들이 원한것은 예배를 더 단순하게 만들고 개인적이고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했지만 국왕과 의회등 국가가 통치하는 정치적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 분리주의 등장 - 밖으로 나가는 선택 -16세기말,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한 참된 계혁은 불가능하기에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회중을 세우는 분리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청교도들과 많은 신학적 확신을 공유했지만 그들과 달리 국교회를 떠났다. - 1593년 배로와 그린우드라는 두명의 분리주의 지도자가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죄목은 '여왕폐하의 권위를 부정하고 국교회를 비방하며 반란을 선동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교회를 세운것 뿐이었다. ● 존 스마이스 - 진리를 찾는 순례자 - 1600년경, 스마이스는 링컨시의 공식 설교자로 임명 되었는데 이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는 성경을 강해하는 강력한 설교자로 알려졌으나 그의 설교는 점점 더 국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1602년 해임된 후 분리주의 회중에 합류 했으며,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 하였다. (자매:지금껏 종교 개혁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대부분이 명석하고 많은 공부를 한 분들이네요. 존 위클리프, 루터, 칼빈, 얀 후스, 그리고 존 스마이어스등,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꾸실때 쓰임을 받은 면면을 살펴보면서 한국의 선교 초기와 그 이후에도 바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현재의 한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 스마이스는 메노나이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메노는 신자 침례의 성경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고 자발적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또 다른 근본적인 의문에 직면하며 참된 침례에 대한 정당성과 기원을 묻게 되었다. - 1609년 신약교회 회복을 위해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은 스마이스는, 스스로 침례를 주는 '자기침례'를 시행한 후 즉시 회중의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국 침례 교회의 탄생이었다. - 스마이스와 그의 회중의 신학은 일반 속죄 또는 보편 속죄를 주장하는 일반 침례교로 불리게 된다. ● 토마스 헬위스 - 영국 땅에 침례교를 세우다. - 1612년초, 헬위스와 약 10~12명의 동료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외곽의 스피털필즈 지역에 정착해 자신의 집에서 작은 회중을 모았다. 이것이 영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 교회였다. - 1612년 헬위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을 출판했는데 제목은 [불법의 신비에 대한 짧은 선언]이었다. 이 책은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선언이었다. "왕은 영혼의 주인이 아니다" (자매:헬위스는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보며 진정한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의 자유와 영혼의 자유를 위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 임에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리더의 본을 보여 준것 같습니다.) - 헬위스의 대담한 선언은 결국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순교자였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정교 분리를 위해, 침례교의 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종교적 다양성의 확대 - 왕당파와 의회파의 충돌로 내전이 일어나 국교 체제가 약화되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 되었다. 또한 종교적 다양성이 점차 허용되기 시작한 환경이 마련되었다. 의회파의 승리로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그는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며 양심에 따라 예배 할 자유를 허용했다. - 1651년 일반 침례교는 '표준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을 발표했다. 이 고백서는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부활, 재림같은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확증했다. 동시에 침례교의 독특한 원리들[신자 침례, 회중 정치, 정교 분리]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 박해 속 성장 - 박해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걸러냈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들은 남았는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박해는 침례교의 핵심 원리를 확증했다. 정교 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면 국가는 언제든지 진리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매:허가없이 설교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존 번연의 상황은 앞을 보지 못하는 딸과, 가족이 견뎌야하는 궁핍함이 감옥에서 겪는 고통보다 크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쓸수 있었던것은 그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목적을 이루신다는것을 다시 한번 더 알게 됩니다) - 1689년, 새 정부는 '관용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 법은 삼위 일체를 믿는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있었지만 법적 박해는 끝났다. ● 결론 - 대서양을 향하여 - 17세기말, 영국 침례교의 원리들은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침례교는 특별한 역활을 하게된다. 침례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정교 분리를 주장했으며 양심의 자유를 옹호했다. 로저 윌리암스, 존 릴랜드, 아이작 백커스 같은 침례교 지도자들은 미국 헌법의 종교 조항 형성에 기여했다. (자매:메이플라워호를 재현해 놓은것을 보았는데 그때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신앙인들, 거저 주어지는것은 없고 늘 희생을 통해 이루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된 씨앗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영국에 심어졌고 그것이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소수의 신실함이 다수의 타협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침례교 역사는 권력이 아니라 원리의 승리이다.        
2026-05-02 14:38:38 | 최성미
주님을 믿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 입니다. 주님 자신이 진리이기에  좁은 문 일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길이기에 세상이 싫어합니다. 우리는 선진들의 피로 치른 귀한  믿음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우리 침례교회가 어떻게 명맥을 이어 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이네요.  
2026-04-26 18:08:16 | 이수영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5장 22절~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youtu.be/H2UxI1GmNbw?si=7QbGS2YalNvHC-Rw 하나님은 계세요. 제가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만이 제삶의 주인이십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아버지가 지켜주시고 바르게 세워주세요..
2026-04-25 17:19:03 | 목영주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 큰 울림이 됩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해 준 믿음의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 손에 들려 주신 완전한 성경 말씀으로 진리를 마음껏 알도록 해 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2026-04-25 15:11:42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신약교회사를 지난주까지는 part 1, 챕터 7까지 공부하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이후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AD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국가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변하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에 의해 천주교 신학이 완성되며,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시대로 접어 들었다. AD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정치, 교육, 행정등 모든 분야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배하게 되며 약 1,000년의 중세 암흑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소수임에도 박해를 견디며 이어져 왔다.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등이 그들이다. 루터의 95개 논제로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유럽의 어둠을 깨운 거대한 사건이다. 지난주까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의 미완성된 개혁까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주 부터는 part 2. '신약교회 회복 운동으로서의 침례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 챕터8. 스위스 재침례교회 - 신앙의 자유를 향한 여정의 출발 - 오직 성경을 외치던 개혁의 한 복판에서 왜 성경대로 믿고 교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단으로 정죄 되었는가? 왜 루터파와 츠빙글리에게 까지 박해를 받고 수장 되기까지 했는가? 이 장에서는 스위스 취리히 개혁의 중심에서 재침례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최초의 신자 침례와 슐라이트하임 신앙 고백이 어떤 핵심 원리들을 세웠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 개혁의 불길이 알프스를 넘다 - 1517년10월31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게시이후 종교 개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자치적인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교회 개혁은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 될수 있었다. 재침례교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강이 흐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 울리히 츠빙글리 - 스위스의 개혁자 - 중세 교회에서 설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달랐다. 그는 성경 본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었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빛으로 검토했다. 그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듣게 되었다. -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벌어지며 큰 논쟁이 촉발되었고, 사순절 금식 규정에 대해 공개적 토론이 시작 되었다. 츠빙글리는 67개조 논제를 제시하여 카톨릭측을 반박하며 시의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취리히 종교 개혁의 공식적 시작이었다. ● 젊은 급진파들 -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 많은 젊은이들이 츠빙글리의 개혁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게오르그  블라우록 등이며 츠빙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모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연구했으며 당시 교회와 비교하였다. - 신약교회와 16세기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침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16세기에는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주어졌다. 신약 교회는 국가와 독립적이었지만 당시의 교회는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츠빙글리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지만, 젊은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두 그룹간의 충돌은 불가피 해졌다. (자매: 젊은 개혁자들과 츠빙글리의 충돌을 보며, 사도행전의 바울도 바나바와 의견이 달라서 충돌하고 각자의 길을 간 사례가 있듯이, 특히 이 때는 중세의 벽과 시대의 상황이 주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 유아 세례 논쟁 - 갈등의 폭발 - 갈등이 폭발한 지점은 유아 세례 문제였다. 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고 교회론, 국가론, 사회구조 전체와 연결된 이슈였다. 출생 등록이 시민권 부여였으며 사회 편입이었다. 더 나아가 유아 세례는 국가 교회 체제의 핵심이었다. (자매: 유아 세례, 자동 시민권, 자동 교회  회원등을 읽으며 우리 교회의 회원 가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40개 필수 설교를 듣고, 교회의 철학이나 교리를 바르게 알고, 받아 들인후 회원이 되는 절차는 신약 교회와 침례 교회가 추구하는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 됩니다.) -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1524년 10월,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자는 처벌 받는다는 경고를 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그레벨, 만츠 그리고 반대론자들은 취리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은 결정의 순간을 만들었다. 시의회에 순종 할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결과를 감수 할것인가? ● 1525년 1월 21일 - 재침례교의 탄생 -'그때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 (행5:29) - 블라우록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으로서 성경대로 침례를 받기 원했다. 그레벨은 물 한 그릇을 가져와서 신앙을 고백하게 한 후, 머리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줍니다. 그 순간부터 재침례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신약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자매: 재침례교가 탄생하던 그날 저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질문인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점검 해야겠습니다.) ● 재침례교 신학과 실천 -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 - 1527년 2월 24일, 스위스와 독일 국경 근처의 슐라이트 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재침례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서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이 작성 되었는데 이는 재침례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초기 문서 중 하나이며, 후대 침례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 제1조: 믿는 자 들에게 주어지는 침례. 제2조: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파문(출회). 제3조: 주의 만찬. 제4조: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 제5조: 목회자는 교회가 선택한다. 제6조: 칼, 즉 무력이나 폭력은 안된다. 제7조: 법정에서 맹세.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 박해의 시작과 확산 - 1526년 11월, 슈파이어 제국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재침례교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모든 자는 화형, 참수, 익사 또는 재판없는 처형이 그 법이었다. 1527년 1월 5일,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서 펠릭스 만츠가 처형되면서 그는 재침례교 운동의 첫번째 순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1527년 5월,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을 이끌었던 사틀러는 아내 마르가레타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그의 혀를 자르고 뜨거운 쇠로 몸을 일곱 번 지진 뒤 그를 불태워 재로 만들라"는 끔찍한 형벌이 기록되었다. 재침례교인들의 피는 유럽 곳곳에서 흘렀고 초기 재침례 운동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확산 되어갔다. ● 뮌스터의 비극 - 재침례교의 오명 - 1534년부터 1535년까지 독일의 뮌스터 시에서는 일부 급진적인 재침례교도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뮌스터에서 벌어진 광신과 폭력은 오랫동안 재침례교 전체의 이미지를 훼손했고 '재침례교인'이라는 이름은 '위험한 과격파' 라는 의미로 오해되었다. (자매: 수많은 평화로운 재침례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오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것은, 마귀가 일하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미리 선점하여 조직적으로 방해하는것, 킹제임스성경 논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귀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 재침례교가 침례교에 남긴 유산 - 재침례교와 후대 침례교의 관계는 오랫동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 과연 직접적 조직적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영적, 신학적 계승 관계인가? 가장 정확한 이해는 이것이다. 재침례교가 남긴 후대의 열매라는 점에서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그들이 박해속에서 피로 확증한 원리들을 침례교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세계적 운동으로 성장 시킨것이다. - 재침례교의 영향은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북미로 이어졌다. 로저 윌리암스는 재침례 전통에서 강조해 온 양심의 자유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실천하며 로드 아일랜드를 세웠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원리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까지 반영되며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자매: 미국의 헌법은 현대 사회 자유 민주주의 기틀이 되었는데, 그들의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수 있는것 같아요. 무엇보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 영혼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이루어질수 없는 일이었을것 같습니다) ● 결론 - 취리히의 유산과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 1525년 1월 21일 저녁, 취리히의 한 작은 방에서 일어난 일은 세계사를 바꾸었다. 그날 밤 몇명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침례를 주었을때 그들은 단순히 종교 의식을 거행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학적 혁명이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교회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 오늘 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자 침례 - 이 모든것은 성경에 손종하려고 한 침례교 성도들의 고난의 유산이다. 그들의 원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침례교의 길이다. 이 길이 취리히에서 시작된 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2026-04-25 14:32:47 | 최성미
불완전했지만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은 선조들 덕분에 지금 믿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신약 교회를 지켜 나가기 위해 저 스스로도 노력하고자 다짐해 봅니다.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4-20 09:50:03 | 김지훈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며  많은 사람이 그 댓가를 치루고 오늘에 이르렀어요.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으나 신약교회를 이어나가는 우리교회가 있어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수고해 주시는 자매님들도 참으로 귀합니다.  
2026-04-19 21:29:52 | 이수영
<하나님계심에 확신이 있다면 내꺼를 내려놓아야하는건 당연한 것이다>육신의 연약함으로 잘안되어져서 그렇지,그것이 정답이라면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결단의 시간은  제경험상 그 가치가 컸어요..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말씀으로 계심을 자꾸 확인 기뻐해야 하는구나..하는것도 체감합니다. 저는 제가 나이가 들어 작은꽃들이 예쁜줄 알았는데 하나님계심을 깊이 알수록 성화될수록 자연이 눈물나게 곱다는걸 오늘 알았네요!(저처럼 헤매면서 더디게 성화과정 보내지 않게, 갓구원받은 젊은 성도분들을 위해 몇줄 적어봤습니다~^^) -내 형제들아,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1장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19 16:00:2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으로 보내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벗꽃들이 어느덧 푸른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따가운 햇살에 저도 모르게 그늘로 피하면서 봄의 끝나감을 아쉬워 합니다. 시대와 국가의 상황이 우리의 혼을 짓누르는 때에도 계절과 꽃들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자매모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온 몸을 통해 기뻐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감사히 보냈습니다. 이번주 챕터는 7. 16세기 종교개혁(좋은시작, 미완의 개혁)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 서론 - 새벽이 밝아오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 앞에는 한 장의 라틴어 문서가 게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제였다. 그 문서는 유럽을 뒤흔드는 폭풍의 시작이었다. - 이 장은 종교 개혁이 회복한 진리와 남겨 둔 한계를 함께 살피며, 루터와 칼빈, 츠빙글리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교회론과 양심의 자유 문제에서 왜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는지 검토한다. (자매: 우리는 개혁자들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으며, 지금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것 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다가도 모기같은 작은 문제마저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걸려 넘어지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될때마다 안타깝습니다) ● 마르틴 루터(1483 - 1546) - 종교 개혁의 시작 - 1505년 7월 2일, 죽음의 공포에서 루터는 극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수도사가 되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루터를 괴롭혔다. 그는 이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이해했다. 1518년경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정죄하는 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얻게 되는 '칭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매: 처음에 루터가 두려워했던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얻는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의'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씀들을 통해 얻는 이런 영적인 기쁨들을 놓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95개의 논제는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을 불러왔고 공개토론을 통해 교황의 무오성과 공의회의 권위가 절대적일수 없으며 그들도 오류를 범할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521년 공식적 파문을 당하며 로마교회와 완전한 결별을 했다. - "나는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제국 의회에서의 이 답변으로 루터를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졌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선 후제를 통해 구출하시고 보호하심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자매: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한 확신을 말하는 루터의 고백처럼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교만이 아니고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하기위한 근거가 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 교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루터는 단 11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어린이들의 말을 관찰했다. 생동감있고 이해하기 쉽게 독일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했다. 1534년 독일어 루터 성경전서가 출판되었고 이는 독일어의 표준화를 이끌고 유럽 종교 개혁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루터의 유산은 대단히 복잡하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복음을 회복하고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로 신학을 정립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은 교회론에서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교회와 유아 세례를 유지했으며 성경신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했다. 그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확립하지 못했고 반 유대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무엇을 믿느냐?"는 개혁했지만 "교회란 무엇인가?" 는 전혀 개혁하지 못했다. 침례교는 루터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려고 한다. (자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극적회심, 수도사, 성경연구등을 통해 시대와 교회의 문제를 깨닫고 95개 논제를 통해 종교 개혁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비록 개혁은 미완의 모습이어도 우리 침례교가 이어져 올수있는 근간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며, 현시대에도 누군가를 준비하고 계실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 울리히 츠빙글리(1484 - 1531) - 스위스 개혁 - 츠빙글리는 루터와 거의 동시에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고, 설교자가 되었을때는 전통적인 미사 본문 대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외쳤다. - 1523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 편에 서며 개혁을 지지하였다. 취리히에서 성상들이 제거되고 미사가 폐지 되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다른 견해로 인해, 루터와 개혁파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다. (자매: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동시대에 함께 종교 개혁 운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 그의 신학은 개혁 교회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예배에서 성경에 없는것은 모두 제거 하여, 단순함은 개혁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도 교회론에서는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역시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 세례를 옹호 했으며, 재침례 성도들을 박해하여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자는 수장한다는 법을 통과시킨 시의회를 지지하였다. ● 존 칼빈(1509 - 1564) - 제네바의 개혁자 - 칼빈은 루터의 저작들을 읽었고 개신교 신학을 받아 들였으며 결국 로마 카톨릭과 결별했다. 26세때인 1536년 논리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개혁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고 이것이 나중에 칼빈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자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카톨릭의 부패와 교리에 저항하며  개혁한 그들도 사회적 환경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개인의 한계가 미완의 개혁으로 끝맺음 된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기독교 모범 도시로 만들려 했으며 교회와 시 정부가 협력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교회규례, 당회 등을 조직화하여 엄격하게 개혁하려 했다. - 칼빈 신학의 핵심은 다섯가지로 구분 될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다. 둘째, 이중 예정론(구원, 유기)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셋째, 인간이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설명은 때때로 '인간의 부패가 곧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다'라는 방식으로 오해 되곤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수 없음을 가르쳤다. (자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너무 치우친 견해로 인해 전적타락, 전적무능력이란 교리 때문인지,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교제 했던 성도들 중에는 사업이 잘 될때는 은혜로 여기다가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교회에 충성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로 여기곤 했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지만 영혼의 자유가 없이 억매인 그분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 결론 - 불완전한 개혁과 침례교의 부름 - 종교 개혁은 위대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세례를 고수 했으며 이단을 박해하고 양심의 자유를 부정했다. 이들은 왜 더 나아가지 못했을까? 첫째는, 천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였다. 둘째, 당시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 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셋째, 정치적 필요성이었다. 넷째, 신학적 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성경적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 루터가 문을 열었고 재침례 교인들이 그 문을 통해 나아갔고 침례교가 그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신약 교회의 완전한 회복이다. 성경 만을 따르고 그리스도 만을 높이고 은혜 만을 자랑하는 교회이다.            
2026-04-18 15:47:45 | 최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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