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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써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 네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분야든 어려운 것을 쉽게 알려주는 것은 그 분야의 고수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을 읽을수록 이렇게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부와 연구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오늘도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하고 자매 모임에서 나눴던 것들도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제3장 성경과 번역 (166-211p)    169p '개역성경'은 스펄전과 무디의 시대의 신자들이 보던 성경이 아니라 천주교 계열의 사본을 뿌리로 둔 성경이다. 천주교 계열 사본은 그때만 해도 1%만이 채택하던 소수의 사본이며, 대다수는 99%의 성경들이 번역의 대상으로 채택한 온전한 공인 본문이었다. 현재 남은 공인 본문 번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KJB)뿐이다. : 어느 뉴스에서 소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소수 사본이 굉장히 가치 있고 옳은 것처럼 보도하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어떤 사본이 옳은 것인지 가르쳐주는 곳이 거의 없고, 킹제임스 성경이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버전으로만 여기는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올바른 성경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보다 목사에게서 신령하다고 듣거나 장로나 집사에게서 들은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171p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께 즉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6) 개역성경은 '왕과 제사장'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바꿈 :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거의 개역성경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때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백성' 정도로만 치부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왕이 될 것이라고는 킹제임스 흠정역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정확한 사본으로 정확한 번역을 하니 우리의 신분이 백성에서 왕으로 올라가는(?) 감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정확한 성경 말씀은 우리의 실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5p 아버지의 상속언약(testament)은 유언장이다. '옛 유언'과 '새 유언'인 구약과 신약이 있다. 이것을 함부로 고치면 되겠는가. 왕들의 왕인 아버지가 다음 왕을 정했는데, 누군가 슬쩍 내용을 바꿔서 왕자에게 전달한다면 그는 유언장 내용의 부당함을 고소하는 적대적 관계에 놓인 자일 것이다. : 우리가 휴거되어 예수님과 함께 왕이 되고 통치하는 것을 바꾼 구절들을 보면 의도적으로 변질했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소망이 가득한 천국을 가려놓고 오히려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두려움을 야기하는 목사들과 천국의 소망이 현실과 직결되는 단어들을 변질시켜둔 성경을 보면, 우리가 킹제임스 영어성경과 흠정역 성경을 만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읽으면 천국의 소망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고, 우리는 현재 삶에서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181p "만일 이 책이(KJB) 무오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 무오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찰스 H. 스펄전- : 불분명한 삶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인생을 걸 수 있습니다. 188p 고지식한 번역(형식적 일치 기법: 성경, 법조문, 판결문, 상속 유언장, 계약서) vs 유연한 번역(동적 일치 기법: 에세이, 소설, 시, 칼럼, 설교문, 묵상집) : '고지식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유연한 번역을 한 성경을 찾아서 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약서, 법조문 등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들은 당연히 고지식한 번역을 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법조문이자 판결문이고 상속 유언장이며 계약서라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2024-07-09 22:24:55 | 박수현
잘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통적으로 느끼신 점을 전달하는 글 속에서 자매님의 말랑말랑한? 어투,마음을 읽게 되네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고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해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높이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38편2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7-01 23:24:54 | 목영주
우리는 kjv 으로 이미  읽고있기에  개역과의 차이를 일일이 대조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지요.  우리 교회 밖에서 흠정역의 우수성을 낱낱이  밝혀주는 분이 있어 감사하지요. 작가의 역량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편하게 글을 써주어 감사하고요. 자매모임에 꾸준히 참여하시는 분들께도 감사해요.  
2024-07-01 18:34:22 | 이수영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장마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장마로 인한 침수에 잘 대비하셔서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랍니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기록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른 사례들이 책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유익을 위해 줄거리는 최대한 간소화하여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제2장 성경과 단어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합 3:2)… 과연 적절한 번역일까?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부흥'의 개념- 한국 교회는 '교인 수가 늘어나는 일'과 '부흥'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하박국의 구절을 즐겨 인용해 왔다.  리바이벌과 부흥은 같은 말이라지만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이바이벌은 다시 돌이킨다는 뜻이지만 한국 교회에서 부흥은 다시 부(復)에 흥할 흥(興)인데 , '부'보다는 '흥'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성경은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 자의적 해석, 감정을 담은 다어 선택, 목적을 반영한 번역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뜻이 딱 떨어지지 않고 답답할 때도 있지만 왜곡의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더 정확히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은 성경 번역과 해석과 적용은 '말씀을 내게 맞출 것인가', '나를 말씀에 맞출 것인가'의 싸움이다. 악귀, 사신, 산 영, 생령… 왜 성경에 이런 단어가?  영, 혼, 육은 따로따로- 사람에게는 영이 있고 혼이 있다. 이를 동시에 부르는 한자어 '영혼(靈魂)'은 성경에 없다. 스피릿은 스피릿이고 소울은 소울이다. 성경에서 구분하는 혼이란 사람 자신이며, 마음이고 정신이며 목숨이다. 스스로와 외부 세계를 판단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 혼이다. 몸은 죽어도 혼은 영영 죽지 않는다.  영은 좀 더 깊은 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느끼는 부분이며 내 것이라기보다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육적인 사람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가까이 한다. 혼이 그 선택과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귀신은 다 마귀의 졸개들- 개역성경의 악귀나 귀신은 다 마귀들(devils)이다. 큰 마귀(Devil) 루시퍼의 졸개들인 악하고 부정한 영들로 마지막에 불 호수로 가 영원히 형벌받을 존재들이다. 이들은 온갖 현상과 갖가지 방법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데, 사람의 혼령인 척하는 것도 그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일 뿐이다. 한편 드라마 <악귀> 등 퇴마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킨다. 악령이 있고 선한 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고, 악귀를 내쫓고 퇴치하는 자들은 선한 능력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 악하고 악한 영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뿐이다. 생육하다 vs. 다산하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면서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셨다. 땅은 많은 열매를 내고, 그 씨앗들도 가장 좁은 공간에 가장 많이 맺힐 수 있도록 수학적으로 설계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것을 인간이 제한하고 끊고 자르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하나님도 아무 때나 열매를 줄이고 멈추신다면 사람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은 출산 장려 캠페인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말씀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많이 생산해 다양해지고 수를 늘리라는 것이다. 뜻은 알겠지만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말이기 때문이었다.  "자식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열심히 생육하시길."  "애가 넷이면 생육을 잘했네."  개인적으로 '생육하다'라는 말에서 자녀를 되도록 많이 낳거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세상을 채우는 것이 떠오르지 않아 출산 장려 효과 면에서나 이해하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생육'이 아닌 '다산'으로 번역했다(창1:28, 흠정역) . '다산(多産)'은 물론 많이 낳고 많이 열매 맺는 것이다. 훨씬 쉽고 명료하다. 물론 이것도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생육하다'하는 말보다 현실적이다.  번역은 선택의 예술이라 했다. 단어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고민할 때 번역자는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성경이라면 언어와 교리에 모두 능숙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배제하고 그대로 옮기려는 의지가 있어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바른 관점과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균형이다. 우리는 이 책을 보고 공통적으로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킹제임스 흠정역 덕분에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고 바른 교리로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역된 단어 하나로 인해 기독교에 샤머니즘이 만연하고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단어, 한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역시 책이기 때문에 앞뒤 문맥에 따라 읽었을 때 누구든지 쉽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이 책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06-30 20:49:48 | 박수현
안녕하세요, 자매님. 자매 모임에 참석 인원이 늘어 조가 4개로 나뉘게 되었고, 교제는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최대한 수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6-30 20:44:19 | 박수현
사진을 보는 즐거움이 있네요.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자면 실제로 나누어진 이야기가 궁금해요. 전에는 이리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러하다든가, 진실을 알고나서 생활 속에 적용했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이지요. 요약은  간단하게 하셔서 책을 보는 사람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4-06-19 13:34:03 | 이수영
하나님계심을 많이 느끼게 해준 책으로 읽으면서 많이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성경이 이세상에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는 문해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공감은 하되 진리는 하나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하루 잘 살아내겠습니다~^^
2024-06-18 08:12:09 | 목영주
안녕하세요? 저는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곤 합니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연한 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제도 늘 그러한 것 같습니다. 6월 6일 공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하며 나누는 교제 시간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새 책으로 첫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재욱 저자의 [문해력으로 읽은 성경]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성경의 이해 제2장 성경과 단어 제3장 성경과 번역 제4장 킹제임스 흠정역 변호 이번 자매 모임에서 나누었던 제1장을 간략히 공유하겠습니다(문해력을 체크 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재미와 유익을 위해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성경 문해력 테스트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문해력이 많이 요구된다. 물건의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며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지하철의 안내판을 보면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등의 일도 다 이에 해당한다.  성경에도 문해력은 꼭 필요하다. 문해력(literacy)은 유창성(fluency)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유창성은 어떤 문장이나 설명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므로 문해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기 편한 정보가 많은데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먹기 편한 초가공식품이 많아지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많은 성경 지식들은 사실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많다. 하지만 읽은 부분이 내 부족한 문해력을 통과하면서 엉뚱한 내용이 될 정도면 곤란하다. 마귀는 사람의 뇌를 망치고, 번역가를 망치며, 언어 자체를 붕괴시킨다. 그리고 계속 의미를 바꾸고 더하고 빼며 훼방한다. 우리에게 바른 문해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제 당신의 성경 문해력을 체크해보자.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많은 자들은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인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 ● 이 구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을 다음에서 고르시오. ①웬만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②선생이 되면 정죄받는다. ③많은 사람이 선생이 될 필요는 없다. ④선생이란 엄중한 자리이니 선생이 되려는 자는 신중해야 한다.  ④번이 정답이긴 하지만 ③번도 어느 정도 진실이고, ①번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반어법에 해당한다.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 부정적 메시지를 부풀려서 하는 말이다. 성경 구절에서 정답이 여러 개인 경우는 많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조심할 것은, 진실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그것이 전혀 거짓은 아니니까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쉽다. 광고에서도 이런 수법은 자주 쓰인다.  "이 약으로 당뇨가 완전히 개선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저 약을 먹는 동안 병이 나았을 수 있지만 꼭 그 약 때문에 나은 것인지 알 수 없고, 광고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을 텐데도 이 약을 먹으면 누구나 나을 것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런 광고 문구는 일부분의 진실이면서 교묘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 구절에 담긴 정답 이외에 다른 보기에 담긴 일부분의 사실, 그 작은 가능성을 일반화해서 확대하고 그것을 진실이나 정설, 나아가 진리로 확정해선 안 된다.  평균적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고 양극단화하는 세상이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는 각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돌아간다. 신앙적 성숙함에 더해 말에 대한 이해력과 최소한의 주변 지식을 챙겨 스마트하고 현명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제 말씀 한 줄을 읽어도 신중하게 대하고 주의를 기울여 보자. 교훈이 아닌 '교리(doctrine)'를 가르치신 예수님 교리는 딱딱한 것?  종교란 본래 사람이 만들어 숭배하고 탐구하면 철학적으로 고고한 삶의 길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이런 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 정답이 없이 각자가 찾아가는 해탈과 도달의 과정이 아니라 절대자가 빈틈없이 짜 놓은 어떤 계획을 알려 준 대로 발견하고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통해 복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복이란 인생의 복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육신의 문제를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복이고 천국의 복이거늘, 성경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때때로 무척 종교적이며 두루뭉술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파악하고 순종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먼길을 돌아갈 수도 있고, 성화와 구원의 순서를 반대로 하느라 괜한 고생을 할 수도 있다.  '교리' 하면 대게 딱딱하고 이론적인 것을 떠올리면서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 교훈과 체계적인 교리가 둘 다 중요한 것이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교리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개역성경에는 '교리'라는 단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는 조직 신학 등 후대에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은 신구약에 57회나 등장한다. 교훈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것  마가복음에는 공생에 초기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부정한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있다(막1:22, 27). 제자들과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교리에 권위가 있고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로 부정한 영들까지 내어 쫓으셨다. 개역성경은 '교리'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번역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doctrine(독트린, 교리)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현대 역본은 티칭(teaching, 교훈, 가르침)으로 바꿨다. '교훈'이란 가훈, 급훈처럼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좋은 얘기 정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는 현대 역본 번역자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 번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라고 보는 그들은 '독트린'을 '티칭'으로 바꿔 예수님의 사역을 편하하고, 성경의 묘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  교훈과 가르침은 성인군자나 철학자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리는 다르다. 기독교 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면 놀랍도록 흥미롭고 쉬운 것이 교리다. 그러나 대다수의 강단에서 그저 주제식 교훈이 선포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에도 많은 교훈이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경륜이자 로드맵에 관한 필수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신비(mystery)다. 이것은 보편적 교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진리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교리 안에 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마13:11)  교리적 신비의 특징은 말 그대로 비밀이라는 점이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 마음이 강퍅한 자들, 목이 곧은 자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은다. 성도가 마음을 열고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로 나아가면 유익이 있다.  우리가 올바른 교리를 알아 갈수록 기독교를 여타 종교의 틀에서 뭉뚱그려 생각하는 습성도 점차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조물주(造物主)인가? 창조자 vs 조물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Creator)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겼느니라.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니라. 아멘. (롬 1:25)  영어로 creator가 아니 Creator라고 이니셜을 대문자로 쓰는 것은 단순한 제조자가 아니라 신적 창조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로마서의 '창조자'를 '조물주'로 번역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롭 1:25, 개역)  물론 '조물주'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조물주라는 말은 좀 더 중립적인 용어다. 세간에 떠도는 유행어 중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듯이 불신자들도 조물주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물론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물주는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제인 먼저 원불교 용어 사전의 설명이 등장한다. 원불교에서는 조물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라고도 한다니, 이런 사상이야말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창조물을 창조자와 뒤바꾸는 개념이 아닐까.  창조(創造)와 조물(造物)은 다른 말이다. '창조'는 무언가 새롭게, 또 창의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개념인 반면에, '조물'은 글자 그대로 무언가 만든다는 뜻만이 들어 있다. 또한 조물주라는 말은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주(主)'로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타 종교의 잡신을 '주'로 인정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다.  성경은 문학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이므로 단어의 기계적 중립성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주관적으로 번역해야 오히려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라는 단어는 오역이 아닐지 몰라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조물주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 편에 서라! 공정성과 객관성의 문제  법원이나 언론은 늘 객관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고, 자기 이득을 위해 게편을 드는 가재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는 돈이 있다. 돈이 왕이며 맘몬이 최고신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인간의 갈대 같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객관성에도 종류가 있고 대상이 있다. '자로 잰 듯한 중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론이라면 감정을 빼고 양쪽의 의견을 글자 수까지 동등하게 보도할 정도록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양쪽 말을 똑같이 다룰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중립은 공평일지는 몰라도 공정은 아니다. 사안의 경중이나 정의에 대한 기준이 빠진 중립을 비꼬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판단할 때도 이런 갈등에 부닥칠 때가 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객관적인 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가장 공정하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불공정이며 횡포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그들의 비판을 수용해야 할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성경  누군가 권력가나 대기업과 소송 중인데 판사가 내 편이 아니면 낭패일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이 해석하거나 번역하거나 설교하면 제대로 된 것일 수 없다. 특히 성경은 무조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고 쓰는 성경이 거의 전부인데, 물론 그것이 문법적으로나 어법상 맞는 것이지만 과연 잘하는 일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 27:26, 개역)  바라바도 바라바, 예수님도 예수다. 문법이란 세상의 약속이지만 하나님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은 예수라 쓰지 못하겠다 하면 그만이다.  그때에 그가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니라. (마 27: 26, 흠정역)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고유 명사에 '님'을 붙이면 안 되는 어법을 그렇게 잘 따지려면 모든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어법상 회중기도 중에 타인에게 존칭을 붙여선 안 된다. 대화하는 대상인 하나님보다 더 낮은 존재를 언급할 때는 내게 아무리 높아도 존칭을 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기독교용어연구회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시정을 교육해 왔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몰라서도 그렇지만 알아도 면전에서 담임 목사를 김 목사, 이 목사 이렇게 지칭하는 대표기도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하는 기도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가? 물론 사람도 듣기 때문이고, 어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존칭을 빼기도 어렵다. 어법은 알아도 존중의 의미이며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면서 어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존중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경은 왜 굳이 어법대로 예수님을 '예수'라고 표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책은 애지중지하면서도 안에 있는 표현이 하나님을 깍아내리고 폄하하는데도 무감하다면 말씀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엔 하나님 쪽으로 기우는 것이 낫다. 실패할 수 없는 공평한 길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고 하셨다. 사람도 그럴 텐데 당연한 이치 아닌가…  타 종교와 기계적 균형을 맞추는 자들, 마치 남 얘기하듯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나열해 놓고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 자체인 말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편파적이어도 지나치지 않은 하나님 편에 서라!            
2024-06-17 18:58:42 | 박수현
안녕하세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와 평안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풍성이 부어지길 바랍니다. 자매 모임에서 나누고 있는 책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도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며 이번 주는 더욱 깊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요, 놀라운 것은 매주 자매님들의 참석이 늘어나 다음 시간부터 4개의 조로 편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열매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경건 서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성경정인 것들은 각자의 삶에 적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한 번에 잘되진 않습니다).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시는 자매님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셔서 저는 감사함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책의 마지막을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17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다  마지막 단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어떻게 적절하게 마무리할지 자문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충만한 소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 점을 놓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되는 소망에 일시적으로 동기 부여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소망의 원천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될 때까지는 그것이 꽤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망을 주는 실망  당신의 삶에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다음에 나오는 실제 삶의 예를 살펴보자.  벤과 에밀리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기대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결혼 예비 상담을 받으러 왔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듯 했다(교회에서 예식을 위한 시설물 허가를 내주기 전 요청하는 것이었다). 에밀리는 자신들이 대화를 잘하고 있으며 둘 사이의 문제도 잘 해결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걱정스러웠다. 그들의 소망은 상대방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다.  6개월 후 벤과 에밀리를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얼굴의 미소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죄인과 죄인이 만나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중대한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얼마 되지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그들의 큰 문제였다. -실망을 주는 세상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삶의 음악은 종종 우울한 느낌을 주는 단조로 연주된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해보라.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거의 없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은 그런 것이다. 실망은 사실 모든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고, 슬픔은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감정이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곳이 빛나고 밝고 개인적으로 동기 부여를 주는, 영원한 소망을 주는 곳이라는 사실임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소망  이 끔찍하게 망가진 세상에서의 삶은 힘들다. 때로는 모든 것이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악인들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들은 계속 해를 당하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다. 정직하면 빚지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이처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소망은 어리석은 자의 전유물 같다.  낙담할 이유들은 많다. 두려워할 것들도 많다. 우리 중 누구도 실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지니는 근본적인 점 중 하나는 그곳이 밝고 빛나고 영원한 소망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실망을 주는 소망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5절에서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다. 사도 바울은 매일의 우리 삶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축하는 것들을 찬양하고 있다. 바울에게 소망을 준 것은 삶의 환경이나 관계가 쉽고 잘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소망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 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이 점을 조심스럽지만 폭발적인 원리로 보여준다. 바로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그것은 잘못된 소망이라는 것이다. -다른 길  하지만 다른 소망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보증된 약속들을 받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왕국이다. 우리가 마주치고, 경험하고, 견뎠던 모든 것에 다 목적이 있다. 마지막 결산이 있을 것이다. 모든 악한 것이 패하여 사라질 시간이 올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자신의 작은 왕국의 욕망들을 '필요한 것'으로 승격시킬 때, 더 이상 이런 보증된 약속들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소망하고, 간절히 바라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확신했던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주신다면, 그분이 은혜로 당신을 해방시키려 한 중독적인 것들을 장려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느끼는 필요를 보충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는 소망이 없고 자멸하게 되어 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이 주신 최고로 좋은 것들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은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그분에 대한 소망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동기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두려움 없이 그분 안에서 쉬는 것이다. 당신이 이 소망을 알게 되고, 이 소망으로 사람들과 환경을 다루게 되고, 당신의 소망이 진정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있을 때,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될 것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로 함께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6월 6일은 현충일로 한 주 쉬어가고 그 다음 목요일에 새로운 책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 -김재욱-]으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2024-05-31 21:31:29 | 박수현
꼼꼼히 읽으면서 마음을 재점검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마음 지키기 위해 일상생활하며 되뇌이는 문구가 있어요 '저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입니다~^^ -열심을 다해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산물들이 거기에서 나오느니라- 잠언 4장 23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5-28 21:51:07 | 목영주
죄로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주예수님의 부르신 부름에 합당히 살아가도록 애써야 하는  마지막 시대에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으로 살 수 있도록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세상에 살아갈  힘이 되지요. 기쁨으로 섬기는 자매모임이 성화를 이루어가도록 힘을 줍니다.
2024-05-28 06:17:52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