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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낮 기온이 올라가며 더위를 느끼는 것을 보니 초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봄의 새싹들도 점점 자라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게 보이네요. 성도님들도 또 다른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주님의 신실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매들도 주님의 신실함을 닮아가기 위해 어김없이 이번 주 모임을 열었는데요. 폴 트립 저자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느새 후반부에 다다라 15, 16장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희생의 필요성과 역설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고, 또 불완전한 사람의 분노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 말씀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15 예수님 외의 모든 보물을 내려놓으라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한다는 걸 아는가? 왜 연예인들은 그토록 치열한 개인적, 정신적, 신체적,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까? 그 대답을 생각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이나마 TV에 노출됨으로써 상당한 단기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또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특권을 자랑할 수 있고,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존재다. 우리는 뭔가 하기로 마음을 정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놀라울 정도로 희생을 한다.  직장에서 하는 희생은 놀라울 정도다. 일터에 일찍 가서 늦게까지 일한다. 상사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 감사,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도 놀랍다. 상대의 모든 변덕을 맞춰주고, 그들에게 우리의 일정도 맞춰주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체중을 감량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장하고, 여유 있는 특별한 휴가를 즐기고,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갖고, 학위를 취득하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명품 신발을 신고, 하나의 주제에 전문가가 되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척과 친구를 방문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항거하고, 혹은 이 모든 것을 벗어나 단지 쉬기 위해 사람들이 희생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에 갖고 있기 마련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느냐다. -희생의 왕국  이 왕국 역사의 중심에는 충격적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왕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완벽히 이해되는 희생이면서 동시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희생이다. 그리고 그 희생이 그때부터 왕국의 운영 일정을 결정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이 상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양식도 주셨다. 이 왕국은 십자가의 왕국이고, 그 희생을 기념하는 모든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금항아리  '무지개 끝에서 금항아리를 찾는다'는 속담처럼, 우리 모두는 자기 나름의 금항아리를 찾으며 살고 있다. 즉 모든 개인적 희생의 이면에는 어떤 보물에 대한 탐구가 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요청도 설명해준다. (눅14:28-33) 예수님은 그들이(또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얻고 지키고 즐기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생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서 황금 항아리를 찾아보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분이 계셔야 할 자리를 넘보는 다른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우리를 통치해서는 안 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움켜쥔 삶  당신 삶에서 현재 주먹을 꽉 쥐고 움켜쥔 부분은 어디인가?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서 뭔가를 빼앗으려 하자 그 사람이 그 소중한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손이 하얗게 되도록 물건을 움켜쥐고 있다. 익숙한 장면 아닌가? 당신이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주먹이 하얗게 되는가?  우리는 물건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쥐었던 것이 어느덧 우리를 통제하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손을 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요청하신다.  우리가 합당하게 소유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또 신속히 사라져 버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소유할 때다. 16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선한 동시에 분노하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가장 위대한 드라마기에 한 번 읽어서는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지만 자주 오해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바로 야고보서 1장 19-20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진노하는 것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분노의 연대기  성경 이야기는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은 전쟁'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즉 성경 이야기는 두 가지 분노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분노다.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 즉 거룩하고, 의롭고, 완벽하고, 사랑이 담긴 방식을 원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분노다. 사람들은 왜 분노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방식, 즉 거룩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의롭지 않고, 불완전하고, 사랑이 없는 방식을 원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이 두 분노는 공존할 수 없다. -두 가지 분노, 두 가지 명분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운 명분, 그분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버리실 수 없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고, 버리셔도 안 된다. 그분의 의로운 명분으로 인해 분노하시는 그 열정이 온 세상의 희망이다. 그분의 방법은 옳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도 영적으로 자신의 명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길 원한다. 결국 사람의 분노의 그의 운명이 된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이 분노하지 않으실 때 분노한다. -은혜의 격렬한 분노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가 얽혀 있는 것을 볼 때, 다가올 충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두 분노가 충돌하면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두 분노는 결국 충돌하게 되지만 어디서 충돌할지는 예상할 수 없다. 이 둘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한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격렬한 은혜의 자리요, 영원한 변화를 가져온 십자가라는 한 극적인 순간에 분노가 폭발한다. 사도행전 2장 22-24절에 적힌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죄와 반역을 저지르는 세상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분의 분노를 표현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분노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자기 방식을 원하며 메시아를 미워하고 분노한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갔다.  이 분노의 순간이 심판이나 정죄로 끝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은혜의 격렬한 분노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선과 분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무슨 일을 하려고 하셨는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왕국이 그분의 목표였을까? 아니다. 십자가는 매일 분노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처나 세상의 아픔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방해받기 때문에 화를 낸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분노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까지 만드시고자 한 사람들의 문화는 그분을 매우 사랑하고, 그분의 의로운 명분에 온전히 헌신하고, 죄가 그들과 세상에 행한 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매일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문화다. 이 사람들은 선한 동시에 분노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기에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분노다. 죄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해하고 은혜로 반응하는 긍휼의 분노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의로운 분노를 가지게 하려고 죽으셨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작은 왕국의 열망을 실현하는 데 끊임없이 장애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환경에 대해 속으로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와 그 죄가 당신과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가 당신이 사는 세상을 망가트린 것에 분노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드라마  성경에서 펼쳐지는, 즉 두개의 서로 대립하는 분노를 다룬 이 거시적 드라마는 당신의 삶이라는 미니 드라마이기도 하다. 일상의 상황과 관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이 두 가지 분노 중에서 어떤 것이 당신의 마음을 통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이라는 자기희생적인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긍휼이라는 회복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정의라는 구속하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평화라는 화해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이런 식으로 분노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꿈에 붙들리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을 갖게 되었기에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게 된다. 지금 현재 일상에서 당신은 누구의 왕국을 위해 분노하는가?          
2024-05-27 22:55:50 | 박수현
  채리티 청년부의 5월을 형제 자매님들과 나눠보려해요:)       ☞ 5월 12일 스승의 날   목사님과 사모님께 케이크와 꽃 그리고 청년부 형제 자매님들이 작성한 편지를 전달해 드렸어요.     단체 사진이 빠질 수 없죠>< 다같이 기념 사진 찰칵!!       우리 채리티 청년부를 챙겨주시는 김홍석 형제님과 이승연 자매님과도 찰칵!! 항상 감사해요     ☞ 5월 12일 저녁준비♬   요리의 끝은 설거지!!      형제님들의 진지하고 진중하고 든든한 모습.         보기에 좋아야 먹기에도 좋은법!! 왕진지한 자매님들~~     ☞ 5월 26일 청년부 세미나(김용중 형제님, 어신 자매님)   김용중 형제님꼐서 "구원: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은혜로"라는 주제로 세미나 해 주셨어요.      어신 자매님께서 "성화: 구원 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 해 주셨어요.       세미나 후 토론과 교제를 나누는 모습 이에요:-)     ☞ 김주헌 형제님 송별회   주헌 형제님이 곧 미국으로 떠나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 마음으로 축하해주었어요:) 주헌 형제님 미국 가서도 잘 지낼수 있게 기도 부탁드려요!!   5월 달에도 형제 자매님들과의 풍성한 교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꼐 감사드립니다
2024-05-26 21:48:46 | 차승규
안녕하세요, 이번 주 자매 모임은 독서 모임 대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선교사들, 조선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는데요,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방영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으로 건너온 많은 선교사들이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삶(문화, 생활, 전통 등)을 영상으로 기록했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배척받는 약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방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의료, 그리고 교육 등을 아낌없이 제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조선 팔도에 널리 퍼지는 귀중한 모습들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1890년 조선 땅에 100명 남짓 되었던 성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0만 명이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 대한민국이 건국된 기적의 나라, 은혜의 나라, 나의 조국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천에 있는 성경 전래지에 가면 1816년 조선 땅에 킹 제임스 성경이 최초로 들어오게 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스토리는 직접 방문하여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이 땅에 전달되었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고 생각되네요. 자매 모임 사진을 공유합니다.                    
2024-05-17 18:50:40 | 박수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나약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받아들일때 저의 잘못을 인정하는게 좀 더 쉬웠던것 같네요..이기심에서 오는 것이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오는 자기왕국 쌓기든 그 해결은 하나님계심 아는것! 그분의 은혜가 내것이 되고 그분을 신뢰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시련,힘겨움 속에서 예수님 붙드는 훈련은 자기왕국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2장 15-1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5-14 07:23:1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지난 한 주 동안 봄비가 내려 미세먼지와 황사가 많이 사라지고 쾌적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이번 자매 모임은 A, B, C 조 모두 인천대공원에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으로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독서 나눔은 챕터 13, 14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이 책의 후반부를 달리며 우리의 영적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지 깊숙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용서를 구하는 겸손과 그것을 허락하는 은혜에 관한 것이다 샘의 이야기: 샘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부적절 했을 뿐 아니라 죄라는 것도 알았다. 여러 번 퇴근 시간보다 빨리 퇴근하면서 동료에게 근무기록 카드를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최근에 쌍둥이가 태어난 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또 자기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다 그 일들이 적발되고 말았다. 마음으로는 수없이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죄인들도 지적하고 싶었다. 또 자기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 상기시키고 싶었다. 원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배고픈 코끼리에게 땅콩 한 알을 주는 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상사의 사무실로 걸어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변명거리를 찾았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이리도 어려울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 뜻, 내 방법  사람들을 두 가지 행사에 초대했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무언가를 항의하는 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고백하는 행사라면, 어떤 행사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 같은가?  용서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은 삶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자신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용서를 구할 수 없다. 자기 왕국에 대한 견고한 충성심은 우리가 고백하는 것을 싫어하게 만들고 현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방해한다. 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가? 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 하고 다음 날을 두려워하는가? 왜 냉소적이 되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왕국에 충성하려는 본능이 유전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고, 비난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 된다.  개인적인 왕국, 개인적인 행복을 구하려는 싸움(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은 모든 죄인이 경험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굉장히 사소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래서 원할 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거나, 누군가 내 주차 공간을 차지했거나,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몹시 화가 나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왜 이 땅에 태어났고, 왜 하나님의 은혜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는지 잊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모든 선물을 하나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용서의 왕국  용서를 구하는 것은 또 다른 왕국을 볼 때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큰 왕국이 말하는 엄청난 문제에 자기도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제안은 용서다. 하나님 나라 중심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왕이 사는 거대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상처 입은 왕이 매달려 있는 피투성이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그 왕은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신다. 그 왕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 왕국에 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의로워지셨고, 죄인인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일상의 태도가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지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왕권에 도전하고 우리가 더 나은 왕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매우 기뻐하시며 용서의 팔로 우리를 감싸주셨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선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한히 아름다운 것에 속하도록 우리를 초청해주셨다. -바로잡기  그리스도의 은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용서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고,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분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왕국을 나와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용서는 전쟁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전쟁이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 자기 의와 값없이 얻은 은혜 사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우리의 마음밭에서 매일 벌어진다. 그러나 우리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더 나은 왕국으로 우리를 환영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마지막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싸우시는, 전쟁에 능하신 왕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그분께 속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기보다 15초짜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울지라도 희망이 있다.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더 원할지라도 희망이 있다. 속히 용서하는 것보다 복수를 꿈꿀지라도 희망이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매시간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우리를 대신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신다.  그분의 왕국이 올 것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은 그저 멍하니 앉아 그분의 왕국 자녀들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즉 그분은 우리 영혼의 자유를 위해 싸운신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통치하시기 위해 싸우신다. 우리가 욕망을 벗어버리고 생각을 집중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완전하게 임한다면, 그곳은 반항하는 시민들을 계속해서 바로잡아가는 용서의 왕국일 것이다. -용서와 큰 왕국  용서를 구할 때마다 성경이 당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정확하다고 말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이기심은 당신의 가장 큰 죄며, 오직 은혜만이 희망이라고 말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마음 편하게 반역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당신의 시야가 정확해지고, 지성은 명료해지며, 마음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용서가 그 일을 단번에 최종적으로 마치게 될 영원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삶의 방식은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이다. 14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가?  교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거나, 주님과 함께한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거나,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볼 때, 이 모든것 배후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것, 한가지 근본적인 추구, 한 가지 확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이 중요한 한 가지는 어떤 추구나 습관이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의 열정이다.  왕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요구하신 모든 선한 것 뒤에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해줄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이 중심적이고 지속적인 로맨스다. 이 로맨스는 우리 삶의 단 하난의 거룩한 로맨스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 로맨스를 위해 창조되었고 구원받았다. 이 로맨스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우주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우리의 사랑이다. 큰 왕국 삶의 핵심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 마음의 눈이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 영혼이 감사로 가득 차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받아주심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와 그분이 연합하고,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다니 믿을 수 없다! 왕 중의 왕이시며,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며, 온 우주의 통치자 되시는 그분이 내 친구가 되려 하신다니 믿을 수 없다! 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이 얼마나 희생하셨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친다. 이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이 사랑으로 동기 부여가 되고 방향을 찾게 된다. 당신의 마음이 이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자신의 작은 왕국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분주하고, 그날그날 짜인 많은 일과 앞으로 해야 할 많은 계획들로 너무 마음이 산만해서 이 중요한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게 말이 될까?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초청을 받았는데(이 관계는 우리 스스로 절대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할 자격도 되지 않는 관계다) 다른 일에 너무 열심을 내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게 가능할까?  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녀가 그의 인생에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서로 영적으로 교감하고 사랑할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고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들 안에서 너무나 쉽게 만족을 찾는 바람에 예수님 안에서 만족을 찾을 힘과 시간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중에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추구하는 합당한 이유를 다 댈 수 있다. 이것들 때문에 우리의 의미, 정체성, 목적, 소망의 가장 확실한 원천이 되어야 할 이 단 하나의 중요한 사랑을 구하지 못하는데도,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우리의 일정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일정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운동, 저녁수업, 음악 레슨, 극장, 쇼핑, 휴가, 부업, 집 꾸미기, 골프, 어린이 야구 리그, 콘서트, 레스토랑, 리모델링, 정치, TV, 미용실 예약, 아이팟, 박물관, 병원 예약, 예산 관리, 비디오, 놀이공원, 개랑 산책하기, 컨퍼런스, 독서, 요리교실, 기타 등등…  일요일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노래하지만 월요일에는 이 단 하나의 중요한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이 타당한가? 우리 시간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바쁜 일정으로 인해 실망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다해 그렇게 시간을 관리하는 것 아닌가? 하루 일정을 보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기뻐하는지 드러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가 있다. 예수님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당신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 모든 바람, 모든 결정, 모든 말을 인도하고 형성한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랑의 강렬한 감정과 마법 같은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실제로 건강한 사랑의 관계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시간, 돈, 애정, 감정, 힘을 기울여야 한다. 건강한 관계는 서너 번의 중요한 순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작은 순간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가 진지하다면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변덕스러운 마음  우리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할 일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문제는 너무나 쉽게 이 중요한 사랑에서 멀어져 다른 것을 사랑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성경은 이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요일2:15-17 참조).  세상은 우리 눈에 너무나 매력적이고 우리 마음을 쉽게 현혹한다. 창조세계가 창조주보다 더 실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다른 사랑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 존재의 핵심이 되어야 할 이 위대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대비해야 하고 영적 간음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일은 계속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빼앗기게 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큰 왕국에서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외로움을 드러낸다. *그 사람을 생각하느라 가끔 집중하기 어렵다. *기회만 생기면 그 그 사람의 성품과 업적을 자랑한다. *향수와 간절한 기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경솔하게 이기적으로 상처를 주었던 순간들을 후회하며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가 보낸 모든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모든 말의 의미를 분석하고 희망을 주는 구절은 다 외운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에 그의 친구들의 공동체를 찾는다. *그를 향한 공격을 개인적으로 감당하고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누군가 가질 수 있는 오해를 명확히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왜 이 모든 일을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외롭기 때문이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으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마음의 고통을 완화시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을 끝없이 응시하고 다가올 놀라운 재회의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기독교인의 삶을 기다림의 삶이라 기록하고 있다(롬8:23-25, 갈5:5; 살전1:9-10; 히9:28 참조)  하나님 나라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삶과 같아야 한다. 그를 기다리면서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가올 재회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마음속에 고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다.                      
2024-05-13 19:55:26 | 박수현
안녕하세요, 이번 자매 모임에선 독서를 잠시 뒤로 하고 성경 퀴즈와 바자회를 진행하였습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부함으로써 꼭 필요한 곳에 물건이 쓰일 수 있게 바자회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뜻깊었습니다. 바자회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성경 지식들을 퀴즈를 내어 먼저 푸는 자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방식이었는데요, 매우 긴장감 있고 수준 높은 성경 지식들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퀴즈를 제공해주신 이은정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첨부 파일에 우리의 모습들을 편집한 영상을 올려두었습니다 (편집해주신 사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자매 모임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2024-05-05 22:21:32 | 박수현
평강기쁨은 하나님안에서만 찾을수 있고 다른곳은 모두 섬김의 가치의미밖에 없는 요즘이 다행감사인거네요~^^ 전도를 위한 알맞은 당근과 채찍이 핍박가운데에서는 쉽지않음을 깨닫게 되는 4월입니다. -..강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오 큰 산아, 네가 누구냐? 스룹바벨 앞에서 네가 평야가 되리라..-스가랴 4장 6,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4-30 09:51:16 | 목영주
 안녕하세요. 푸른 생명이 활짝 피어올랐던 4월이 점점 지나 이제는 더위를 느끼는 계절이 가까워 지네요.  A조 자매모임에서는 독서미팅 후 대공원으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리더 남윤수 자매님의 세심한 수고 덕분에 맛있는 묵밥도 먹고, 황톳길을 맨발로 체험하며 지체끼리 즐거운 교제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양한 꽃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예술성에 깊이 감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즐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래에 사진 공유하겠습니다.  독서미팅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탄식할 때 근원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나누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재즈로 탁월하게 비유한 내용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11 하나님 안에서 탄식하라 현실세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불만족할 수밖에 없다 - 캣의 이야기  현관에 서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원하던 걸 다 가지고 있었다.  3일 전 그녀와 브렌트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서 멋진 주말을 보내고 돌아왔다. 150년 된 그들의 농가 뒤편 정원에는 추수를 기다리는 채소들이 가득했다. 브렌트는 좋은 직업에 집 주변을 잘 돌보는 손재주도 있었고, 무엇보다 캣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캣은 어린 자녀를 둔 비슷한 나이의 친한 친구들도 있었다. 매주 화요일에 있는 자녀 동반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도시에서 위치가 좋은 곳에 콘도를 소유한 덕에 그곳에서 나온 수익으로 그들이 꿈꾸던 농가를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내 장식도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원을 매우 사랑했는데, 도시에서는 실내에서 화초만 겨우 가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자신들이 기른 야채를 먹고 있다!  캣과 브렌트의 관계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캣은 친구들의 결혼생활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비하면 자신에게는 감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중보기도의 소명 때문에 캣은 자신들이 살기로 결심한 그 작은 마을의 교회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매우 따뜻했고, 교회 위치도 그들이 다니기에 편리했다. 그녀는 유치부를 맡아서 방도 꾸미며 즐겁게 사역했다. 캣과 브렌트는 이런 작은 교회에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는 큰 도시 교회가 제공하던 프로그램과 행사의 공백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다 갑자기 브렌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러 도시로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해야 할 하루의 일과가 있었지만 캣은 자신의 삶이 참 복되다고 생각했다. -너무 쉬운 만족  얼핏 보면 캣과 브렌트의 삶은 매우 경건해 보인다. 하나님의 명령을 대놓고 어기는 일도 없고, 부부관계도 꽤 건강하다. 교회 일도 참여하고, 하나님의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끝없는 갈등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채도 많지 않다. 이웃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무언가 크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 겉으로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경건하지 않다.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찾으면서 끝없는 마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  캣의 문제는 너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캣은 자신의 작은 왕국의 꿈이 거의 실현되었다는 것에 기뻐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것도 탄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탄식할 시간  그리스도가 오셔서 마지막 왕국에 들어가시기까지 모든 기독교인의 기본 언어는 탄식이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2-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창조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것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바나다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약속되었지만 아직 받지 못한 것이 있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구원이 아직 모두에게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물리적 세계의 일시적인 즐거움은 우리 마음에 늘 공허감을 남기며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죄가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기에 일어나는 모든 피해가 모든 상황과 여건 속에 보이므로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오직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고 오직 영원에서 성취될 수 있는것을 물리적 세계에서 찾으려는 유혹에 늘 빠진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탄식은 작은 왕국의 욕망을 큰 왕국의 관심으로 바꾼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난다. -축소와 만족  캣의 문제는 그녀에게 감사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쉽게 만족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캣의 삶에는 구속을 바라는 탄식(로마서 8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피맺힌 절규)이 철저히 빠져 있다. 그녀의 삶 내면의 만족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이것이 경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캣이 만족하는 것들을 한번 살펴보자 ◆물리적인 현실세계가 주는 일시적인 성취감  캣이 느끼는 성취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녀가 이 현실세계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획득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겉치장된 믿음의 속을 들여다보면, 캣의 만족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브렌트에게 뭔가 일이 생겨서 직장을 잃거나, 집을 팔아야 하거나, 아이들 중 한 명이 아프다면, 캣의 기쁨과 행복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이런 것들 안에서 누리는 그녀의 만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건하지 않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 비극적이고, 불완전하게,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문제다. ◆중도에 끝난 구속사역  캣의 삶에는 시험받고 고군분투하며 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이 그녀 안에 시작하신 일이 너무나 불완전한데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캣은 영적 성장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교회와 성경 공부에 참석한다. 그리고 기독교인 남편에 대해 감사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믿음에 가까이 이르고자 하는 열의는 거의 없다. 자신의 삶에서 구속사역이 중도에 끝났는데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사람들이 몹시 무례한 것과 정치적 부패와 도심 내부의 문제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때로는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실달리는 아이들의 보고서와 최근에 일어난 폭풍의 피해를 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캣은 작은 왕국의 시선으로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세상을 위해 울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서 8장의 큰 왕국의 탄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상호 만족을 주는 가벼운 공동체  그녀가 다양한 관계에 참여하는 데 있어 그들 중 아무도 건강하지 않거나 갈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꽤 의미 있는 관계들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캣에게 관계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녀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녀에게 시작하신 선한 일을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라기보다 개인 행복의 원천이었다. 때문에 캣은 수많은 가벼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너무 깊고 진지한 관계를 맺으면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이 이 정도 경계를 지켜주는 것에 감사한다. 그들은 서로 방해 받지 않는 낮은 수준에서 서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관계다.  초월적인 영광은 작은 왕국의 소망보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끌려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캣의 근시안적인 만족감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추구하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간절히 구하게 된다. -궁극적인 성취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진정으로 성취감을 누리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상의 일시적 즐거움에 만족하느라 바빠서 그분이 주시는 성취감을 발견하지 못한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것들 자체로는 악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지만, 그것들이 우리 마음의 만족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작은 왕국의 삶은 창조세계의 만족과 불만족에 온전히 좌우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채워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 즐거움은 나쁜 열매를 추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땅의 것들은 진정으로 우리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 살이 찌게 하고, 건강을 상하게 하고, 중독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다. 또한 결핍을 느끼게 만들고, 분노하게 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작은 왕국의 즐거움에 지배당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해치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맛보고, 듣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게 되면 마음과 행동으로 끝없이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날마다 깊은 감사와 탄식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향기와 잘 준비된 음식의 감칠맛에 대해 감사한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과 일몰과 강들, 산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도 감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고, 우리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이런 것들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심에 감사한다.  동시에 우리는 탄식한다. 이 세상이 상처를 입었기에 탄식한다. 어디를 보아도 상처투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다를 수 있는 온전한 존재가 아직 아니기에 탄식한다. 이 땅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킬수 없기에 탄식한다.  탄식이 하나님 자녀들의 기본 언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옳다. 당신의 삶이 닿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이 바로 이 탄식이다. 12 하나님과 구원의 음악을 연주하라 하나님은 매 순간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상호 교류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날 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난생 처음 재즈 공연을 들으러 테드 형과 함께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 갔다. 램지 루이스 트리오의 공연이었다. 나는 그날 밤 내가 경험하게 될 것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그날 밤 내 인생이 바뀌었다!  공연은 모든 관객에게 익숙한 램지 루이스의 피아노곡으로 시작됐다. 친숙한 곡 첫 번째 소절이 연주되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야! 이게 유명한 재즈란 말이야? 라디오 방송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곡이잖아!' 하지만 두 번째 소절로 넘어가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 명의 멤버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불협화음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조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각자 자신의 악기로 따로 연주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들은 상대편의 소리를 막거나 제멋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통일된 주제로 최선을 다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각자 연주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혼신을 다해 합주했다. 혼신을 다해 각자의 악기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음악은 섬세하면서도 예측불가능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재즈는 규칙을 버리고 멋대로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다. 위대한 재즈 연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불가능하고 창의적으로 연주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일련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날 밤 형식과 자유의 교차점에 대해 생각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날의 연주는 내가 경험해본 가장 자유롭고, 가장 고무적이고, 가장 즉흥적인 연주였다. 그것이 음악을 이루는 형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그날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서 경험한 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척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음악 왕국  하나님은 최고의 음악가이시다. 그분의 음악은 당신의 삶을 바꿔놓으신다. 구원의 음표들은 당신의 마음을 재배열하고, 당신의 삶을 회복시킨다. 용서, 은혜, 화해, 진리, 소망, 주권, 사랑을 노래하는 그분의 노래는 당신의 인강성을 되돌려주고, 당신의 정체성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음악을 혼자 연주하지 않기로 하셨다. 우리 한사람 하사람을 그분의 위대한 구원 밴드의 연주자로 부르신다. 우리의 음악을 내려놓고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곡한 것을 칭찬하는 데 매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각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매우 치명적이 약점이 있음을 알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음악은 그분의 틀을 벗어나서 연주된다. 그래서 우리의 음악은 해롭고, 치유하지 못하고, 나뉘게 하고, 화해시키지 못하고, 저주하고, 용서하지 않고, 심지어 작곡가인 평화의 왕자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손에 든 악기를 부수지 않으시고, 음악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던지시지 않는다. 망상에 가까운 우리의 거창한 개인주의를 은혜로 용서하시고, 그분과 함께 연주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전에는 결코 연주할 수 없었던 음악을 연주할 능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귀가 속아 넘어가서 우리 음악이 그분의 음악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구원의 노래에 싫증을 내면서 우리가 쓴 음표들을 듣고자 갈망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위대한 작곡가의 제지가 필요하다. -재즈 왕국  당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은 그날 밤 그 트리오가 솜씨 좋게 적용했던 것 같은 형식과 자유의 원칙들(form and freedom principles)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된다면 어떤 형태의 삶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에게 맞는 형태와 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형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원칙들, 명제들, 명령들, 약속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가 삶으로 따라야 할 틀(형식)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 틀 안에서 연주할 때, 하나님 나라가 지극히 영광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그곳에 임한다.  이 깨어진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의 음악뿐이다. 모든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선율뿐이다. 구원의 음악은 모든 곳에 적용 가능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정하신 형식 안에서 연주할 때, 우리 삶은 자신의 삶이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거대하고 중요한 것의 일부가 된다. -불협화음이 내는 소음  조이는 일을 끝낸 후 집에 돌아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와 엠마 사이의 악감정은 너무도 극심해서 숨이 멎을 정도였다. 뭔가 잘못한 일(말을 잘못했거나 뭔가를 잊어버렸을 것이다)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일로 또다른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그와 엠마 사이가 매번 이렇지는 않았다.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는 상대방의 말을 포용했다. 그러나 결혼 후 처음 몇 달간 보인 표면적인 조화로움은 짧게 지나가버렸다.  소소한 불협화음의 순간들로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짧은 불협화음의 순간이 점점 늘어나자, 그들의 관계는 멋지게 연주된 듀엣곡이 아닌 자동차 경적 소리에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렸다. 조이와 엠마는 이런식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불협화음 같은 관계를 위해 예비된 은혜가 있다. 조이와 엠마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음악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음표들은 결과적으로 분열과 불협화음을 만든다. 그 음표들은 영혼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정을 깨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엉망으로 만든다. 정의를 왜곡하고 부패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치유 공동체가 되도록 계획하셨던 모든 공동체(가정, 교회, 정부)는 병을 앓게 되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치유를 제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재즈다!  하나님 나라의 조화로운 음악은 형식에 대한 것이면서 또한 자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저 연주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주할 악보에 모든 음표를 달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당신이 처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를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말을 미리 정해놓거나 미리 결정을 내려놓지 않으신다. 성경말씀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은 조표와 박자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엄마와 아빠들에게 자녀양육과 관련하여 주신 직접적인 명령을 공책 양면에 열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먹지 않으려는 어린 자녀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다투는 형제자매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십대 자녀를 그분의 시선으로 이끌기 위해 뭐라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각각의 상황에서 적용할 중요한 기준들이 들어있다.  하나님 나라의 재즈 같은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 자유다. 훌륭한 재즈 음악가는 연주만 훌륭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듣는 것도 매우 잘한다. 그들의 재즈는 언제나 주변과 상호 교류한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연주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자유가 하는 질문들이다. -목적을 가진 재즈  '그분은 매 순간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신다. 현상적으로 볼 때 완벽한 악보를 주시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잠시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다는 이런 생각이 왜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우리의 죄악된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편안하고, 쉽고, 성곡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문제는 이런 욕망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즐거워해야 할 한가지와 경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또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련의 기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 그 이상이다. 즉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다! 그분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딱 필요한 것만 주신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일생을 살며 즉흥 연주를 할 때 그분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이고 창의적이기 원하신다. 우리의 압축포장된 작은 세상의 경계를 초월하기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낱장 악보를 주지 않으시고 재량껏 하도록 하신 이유다. 그런 삶의 방식은 우리가 그분이 작곡하신 것과 그분이 현재 연주하고 계신 것에 집중할 때만 작동한다.                      
2024-04-29 17:13:00 | 박수현
독서 모임이 좋은 점은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024-04-25 07:32:15 | 이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