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우연히 아주 좋은 글을 접하게 되어 나누고자 올립니다.
모두 책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책을 읽는 이유: 해석하기 그리고 육화하기
지난 토요일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과 호주의 경기가 끝난 후,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축구를 배우지만, 학교에서는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중요한 지적이다. 즐기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인가?
즐김에 이르는 여러 단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한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자주 인용되는 공자의 말이지만(『논어』, 「옹야(雍也)」), 즐기는 데에도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관심과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 일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즐김은 관심과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지함과 성실성을 지나 익숙해질 정도의 연습을 거쳐 결국 좋아함의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도달될 수 있는 향유의 경지인 것이다. 삶에서 ‘깊은 즐김’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삶을 깊이 향유할 수 있는 대상과 그 방법은 물론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향유물의 하나가 책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전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좋은 책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 이외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나 집의 아이들에게도 그런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경우에는 정말 잘 안 읽어서 곤혹스럽기는 하다. 실제로 세상에는 책을 전혀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기리는 좋은 시도 있다.
한 줄의 시는커녕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많은 돈을 벌었고높은 자리에 올라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 김광규 , 「묘비명」
이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비석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비석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 눈여겨볼 일은 없다.
아마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가끔 거기로 날아들 것이다. 그럼에도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는 누구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어느 유명한 문인”을 데려다가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쓰게 하기도 한다. 이런 허황된 역설도 시인은 아무런 평가 없이 무심하게 기록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물음 없이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아마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책을 읽어라’는 말 이전에 던져야 할 것은 ‘왜 읽는가’라는 물음이다.
읽기는 점화의 순간
왜 책을 읽는가? 이 물음은, 사실 삶의 많은 문제가 그러하듯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거기에는 ‘무슨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같은 물음도 이어져 있고, 좀 더 심각하게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가’나 ‘책은 무슨 쓸모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도 겹쳐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물음에 그 나름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 물음의 주체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읽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책을 고르고 무슨 주제에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대상을 해석하느냐에서 이미 그 사람의 오랜 독서의 경로가, 그 문제의식의 깊이가 웬만큼 드러나기 때문이다.
읽는 일에, 거창하게 말하여, ‘삶을 바친’ 사람치고 절절한 영혼이 아닌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 그들은 글로써, 이 활자(活字)로써 세상을 읽고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면서 삶을 좀 더 고결하게 살고자 꿈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이고, 그들이 책을 쓴다면 그 책은 그런 고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읽은 것은 그렇게 읽은 자의 생활 속으로 조금씩 체화된다.
물론 책의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문학의 책은, 그것도 뛰어난 저작이라면, 예외 없이 이런 정신의 탐사, 영혼의 절절한 갈구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이 저자가 품은 절실한 고민의 소산이듯이, 독자 역시 이 책을 자신이 부닥친 문제에 대한, 또 삶과 인간에 대한 절절한 관심 속에서 만난다. 이 절실함의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책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따라서 느끼고 이해하는 수용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독서란 하나의 절실한 마음과 또 다른 하나의 절실한 마음이 만나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고 잦아드는 점화와 생성의 시간이다. 하나의 열정과 또 하나의 열정이 만나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거나 이 세계 앞에서 그 내면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숨어 있던 한 편이 열린다. 여기에는 낯섦과 충격, 당혹과 경탄의 순간이 있다. 삶의 어떤 가능성은 이렇게 생겨난다. 이러한 경험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또 우리 사는 사회와 현실과 세계에 대한 깨우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와 관심에 따른 읽기
간혹 강연이나 토론 같은 모임이 끝난 후,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주저하곤 한다. 나의 대답이 별반 도움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관심도 그 어떤 호기심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관심의 종류나 고민의 방향은 사람마다 참으로 다르다. 어느 한편의 간곡한 사연도 다른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것일 수 있고, 아무리 성인군자의 말도 생계 현실 아래서는 한가한 잡담일 수도 있다.
드물게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말 귀에 부는 봄바람’이나 ‘쇠귀에 경 읽기’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책에는, 더욱이 좋은 책에는 환산하기 힘든 직관과 통찰과 지혜가 들어 있다. 그것은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물음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왕 읽는다면, 고전을 읽는 게 좋겠지요.
모두들 시간도 모자라고 힘도 드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시간과 노동의 경제를 고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좀 더 궁금해한다면, 이렇게 보충한다. “무조건 읽기보다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또 자기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면 되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역사소설’을 읽고, 사랑에 관심이 있다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식으로. 각자에겐 제각기 다른 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해서 뜻있는 일이기는 어렵고, 오래가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도 무슨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 읽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관심과 물음과 호기심에 따라 시작하여 점차 자기 눈높이에 맞춰 더 심화하면서 확대하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욕구, 어떤 말 못할 충동으로부터 시작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읽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
인문학에서의 활동이 크게 말하기와 읽기 그리고 쓰기로 구성되어 있다면, 여기에서 말하기는 외적 대인관계적 활동일 것이고, 읽기는 좀 더 내향적인 활동이며, 쓰기는 이런 읽기에서의 내향화된 결과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그래서 좀 더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쓰기가 표현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라면, 읽기는 이렇게 쓰인 결과물로서의 책을 영육으로 흡수하여 소화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읽기는 쓰기보다는 소극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좀더 내밀한 활동이고, 그래서 읽기에서는 관조나 명상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좋은 책일수록, 수용미학에서 말하듯이, 해석의 ‘빈 자리’를 많이 허용한다.
그만큼 좋은 책은 세상의 복잡다기함뿐만 아니라 인격의 다양한 독자성과 그 신비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 배우는 것만큼이나 이 책이 말하지 않은 부분의 의미를 채워가기도 하며, 이렇게 스스로 채워가면서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인문학의 언어는 그렇다. 그것은 기록된 정신의 산물이면서 독자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고, 독자는 이렇게 그 의미를 구성하면서 스스로 자기 삶을 조직하고 형성해간다. 의미의 형성과 주조(鑄造)는 인문 활동의 핵심 내용이다.
이렇듯이 책을 읽는 일에는, 읽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 읽는 사람이 책에서 찾고자 하는 꿈과 열망과 그리움이 이미 녹아 있다. 물론 재산 증식에 대한 관심이나 자기 계발에 대한 필요 때문에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얻는 기쁨이 깊기는 어렵다. 이것도 사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욕구가 물질적 세속적 차원을 넘을 수는 없다. 이에 반해 읽는 마음은 삶의 드넓은 차원—감각과 사고의 지평을 갱신하는 데로 이어진다.
우리가 그 무엇을 찬탄할 때, 우리의 느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찬탄할 만한 것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래서 스스로 찬탄해도 좋은 것이 된다.
우리가 책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 추구는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마음이, 그런 속성의 일부가 우리 안에 자라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듯이, 아름다운 마음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갈망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선미로 기울어 있지 않다면, 진선미에 대한 추구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책 읽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그 무엇—찬탄할 만한 것에 대한 숨은 갈망이 있다. 우리는 읽으면서 어떤 다른 삶을 엿보고, 어떤 현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또 다른 생활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삶의 바탕과 세계의 모태 그리고 그 고향을 떠올린다. 좋은 책과의 만남에는 마음의 이런 깊은 움직임—갈구하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이다. 감동이란 이 갈구하는 마음에 대한 나/독자의 화답이다.
느끼고 만들기 — 깊은 향유
책이 문화적 업적의 가장 높은 성취의 하나라고 한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화적 업적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책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넓혀간다.
이렇게 넓어지는 생각에 기대어 우리는 더 넓은 지평—넓고 깊은 세계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의 전체와 만나고, 그 전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때 ‘전체’는 ‘어떤 온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추상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사소한 것 —바로 내 곁에, 나와 관련하여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생생한 경험 속에, 내가 느끼고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접촉하는 모든 것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읽기란 이 일상의 전체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깊은 읽기는 세계의 새 모습—가장 일상적인 비밀을 경험케 한다. 그 점에서 나와 책은 창조적 교환 관계 속에 있다. 향수의 기쁨은 여기에서 온다.
책의 역할은, 우리가 그 책에서 배우고 느낀 대로 지금 이 세상을 느끼고 즐길 수 있을 때, 잠시 완성될 것이다. ‘잠시’라는 것은 이때의 완성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읽기가 더해짐에 따라 우리의 눈과 귀가 계속 그리고 더 높은 수준에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 자체로 삶을 깊게 음미하는 방식—세계 향유의 방식이기도 하다. 유종호 선생님은 “교양(Bildung/형성)이란 세계 향유의 방법”이라고 하셨지만, 이 깊은 향유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bilden/build)’.
책을 읽고 삶을 향유하면서 우리는 보다 높은 교양적 인간으로 변모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형성의 단계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다. 읽기에도 오랜 역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저런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착잡한 경험을 통해, 크고 작은 느낌과 절실한 노력과 연이은 깨우침의 축적 속에서 조금씩 나아간다.
한두 번의 조언이나 몇 차례의 안내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읽는 일에는 읽는 주체의 실존적 전부가 걸려 있다.
‘고전 읽기’ 강연
‘열린 연단’의 2년차 시리즈는 ‘오늘의 시대와 고전’이라는 제목 아래 2주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번 째 강연인 ‘동양의 고전’에서 이승환 교수는 고전 해석의 5단계로 ‘고증학적 이해’와 ‘텍스트적 이해’, ‘맥락적 이해’와 ‘평가적 이해’ 그리고 ‘해석학적 이해’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에 대한 접근과 그 이해 방식을 엄밀하게 순차적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뭉뚱그려 ‘해석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구자의 주체적 관점은 사실상 문헌 연구에서부터 이미 끼어들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어떤 고전에나, 그것이 동양 고전이든 서양 고전이든, 해당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해석의 과정이란, 크게 보면, 분석과 이해를 통한 사고의 반성적 과정—되돌아보는 성찰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 성찰로 읽기의 의미는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읽은 내용을 생활의 한가운데로 ‘옮겨 심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식(移植)의 과정은 육화의 실천 과정이다.(이것은 해석학적 이해라는 다섯 번째 단계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책 읽기란, 지금까지의 논의를 합쳐 다시 배열하면, 해석의 과정과 육화의 과정—두 개의 유기적인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책 읽기란 해석과 실천으로 구성된다. 실천이란 해석된 내용의 생활화/내면화 과정이다. 고전의 의미는 그 메시지가 고전을 읽은 나의 생활 속에서,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삶의 실질적 에너지가 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의미는, 그것이 생활의 실질적인 양분으로 전환될 때, 그래서 나날의 영육적 신진대사 안으로 흡수될 때, 참으로 완성된다.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六經皆我註脚)”라고 육상산(陸象山)은 말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내가 읽는 책이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삶을 위한 각주이자 토대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러므로 고전은 단순히 분석되거나 해석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한 나 자신의 생활 속 깊숙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내 삶 속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자양이 되어야 하고, 내 삶을 더 나은 수준으로 변형시켜가는 데 마땅히 기여해야 한다.
이렇게 책과 삶이 이어지지 못하다면, 그래서 글과 생활이 따로 노는 것이라면, 글은 소 귀의 경전일 뿐이다. 그러나 사
람이 소나 말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문광훈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책을 읽는 이유 : 열린연단 - http://m.openlectures.naver.com/mobile_contents?contentsId=81239&rid=253
2015-02-09 18:31:02 | 관리자
오늘 다시 목사님 컬럼을 읽으면서 왜 이 글을 쓰셨는 가를 다시금 뒤돌아 보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존교회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바르면 다른 것은 무시해도 괜찮치 않나하는 생각으로 지내면서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른교회,바른 말씀이 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며 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 큰 특권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이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부부의 철학과 교회전반의 치리일들은 우리보다 더 큰 숲을 보시니까 목표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나가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항상 한 박자 느리게 깨닫게 되네요~^^
2015년도 한달 반이 지났네요~
품격있는 사랑침례교회 성도가 되는 이 해가 되길 소망하며 노력해야지 ..다짐해봅니다~^^
2015-02-09 11:37:05 | 최은희
저희도 로마로 시집을 와서 아기를 낳고 입양하며 신혼기간을 거쳐 결혼생활을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가족간에 문제가 생기는 거 같아요. 서로 화목하게 잘 자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로서 미숙하지만 애를 쓰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우리 온 식구들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큰 살림을 잘 감당해야겠지요..ㅎㅎ
2015-01-24 19:56:30 | 오혜미
제목을 통해서만도 충분히 이해되듯이 교회 안에서의 성도간 지켜야 할 예의나 규칙, 그리고 최근 활성화되는 SNS를 통한 자유로운 교제 중에도 꼭 준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한 부분까지 목사님께서 사랑침례교회 성도 한분 한분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 담겨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만간 홈페이지에 새롭게 추가될 '필수기사' 항목을 공유할 수 있게 되므로써 저를 포함하여 사랑침례교회 정착을 원하시고, 또 리더로서의 성장을 원하시는 모든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내용 감사드리고, 여행 안전하게 잘 다녀오시기 기도합니다.
2015-01-23 13:05:37 | 한원규
글을 쓰는 솜씨가 부족해서 여러말을 하기어렵지만...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침례교회 사랑합니다^^
2015-01-22 19:46:15 | 정인영
새로온 성도로써 목사님께서 무슨말씀을 하시려는지
충분히 이해가되고 공감이갑니다.
저부터 잘따르고 사랑침례교회의 올바른성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맘편히 건강하게 잘다녀오실길 기도하겠습니다.
2015-01-22 15:29:17 | 이광호
안녕하세요?
출국을 앞두고 아무래도 마음속의 이야기를 쓰고 가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씁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배경과 성향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밝혔듯이 사랑침례교회는 무엇보다 영혼의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어지는 영혼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자유가 남용되면 교회는 말 그대로 혼동의 도가니가 되고 맙니다.
물론 우리 중 아무도 이런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그것이 모두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의 철학과 가치에 동의하고 순응하며 따라 주셔야 합니다.그래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의 리더가 되어 섬길 기회가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철학과 가치와 배치되는 본인만의 독특한 가치와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그것을 추구하면 그 누가 의도하지 않더라고 결국 스스로 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코 누가 무어라 말하거나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존전략에 관해서도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719
방언, 직통 계시, 구원 상실, 환난 통과, 킹제임스 성경 부정 등과 같은 믿음을 내세우고 고집하면 이 교회에서 생존, 즉 잘 적응하고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본인이 믿는 것은 자유지만 글이나 말로 전파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밴드, 카톡 방 등 어디에서도 교회의 믿음과 반대되는 글을 올리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글이 올라오거든 운영자는 속히 지우고 당사자에게 올리지 말라고 알려주기 바랍니다.
밴드, 카톡 방 등이 자칫 잘못하면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말’의 온상이 되기 쉬우니 모두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나 교회는 절대 이런 온라인상의 교제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다만 ‘쓸데없는 글’이나 ‘쓸데없는 영상’ 등을 올려서 다른 이들의 시간을 빼앗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오프라인 모임과 온라인 모임에서는 오고 가는 말이 순수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가 어떤가 살펴보기 바랍니다.반말과 형, 언니, 오빠 등의 호칭은 구습이요, 일반 교회나 사회 클럽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그러므로 아무리 친해도 서로가 그리스도인의 품격과 경건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옷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옷을 입도록 합시다.교회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 만날 때도 특히 자매님들은 선정적인 옷을 피해야 합니다.이것은 세대 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이든 교회든 어디는 경건하게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 문제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420
이런 것들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으나 새로 오시는 분들이 많아 또 반복합니다.
목사도 이제 이런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어느 정도 지쳐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분들이 바르게 본을 보여 주셔서 새로 오신 분들이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는 분위기가 정착되길 바랍니다.
또한 교회를 하다 보면 사람의 모임인지라 늘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직시해서 그 문제의 근원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명확하게 교회 철학에 맞지 않는 일을 했고 이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한 어떤 사람이 정확한 사실을 교회에 알렸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라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전달자나 확인자가 문제인가요? 아니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문제인가요?
대부분의 교회는 사랑을 강조하기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어느 면에서는 약자)을 감싸고 전달자나 확인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왜 그것을 알렸느냐?”, “왜 그것을 확인하느냐? 그냥 두면 덮어질 텐데.”라고 말하며 오히려 전달자나 확인자에게 책임을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전에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사실관계가 확인된 사안에 대해서는 전달자나 확인자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분을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 이 부분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서 이야기 한 ‘사랑침례교회에서의 생존전략’에서 분명하게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 중의 하나는 쓸데없이 남을 비방하고 다니는 것입니다.”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 될 정확한 사실을 교회에 알리는 것과 사실이 아닌 일을 왜곡하고 꾸며서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말을 계속 옮기는 것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일으킨 문제를 전달한 사람을 탓하거나 쓸데없이 남을 비방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모두가 교회의 생존전략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가운데 이런 일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중구난방이 되거나 불필요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가 커져도 영적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허약한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한 일들을 예방하기 위해 교회 사이트를 조금 수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이트의 좌측 중앙에 <교회소식>, <기도부탁> 옆에 <필수기사>를 넣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의 철학을 담은 글과 영상을 링크해 놓을 것입니다.다음이 한 예일 것입니다.
지나간 날들의 교훈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181
목사와 성도의 영원한 기쁨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97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51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와서 정착하기 원하고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리더로 성장하기 원하는 분들은 2-3주 내로 생길 <필수기사> 항목들을 필수적으로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올린 이 글은 어느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진심으로 교회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바라는 목사의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절대 어느 누군가에게 부끄러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잘 헤아려 주십시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추구하며 그런 가운데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교회로 성장하길 원합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0장 말씀을 모두 읽고 자신을 스스로 차분하게 점검해 봅시다.
지금은 제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지만
앞으로 다시 만날 때는 기쁜 얼굴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1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2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그 확신을 가지고 너희를 담대히 대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우리를 육신에 따라 걷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내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대할 줄로 생각하노라.
3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강한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5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6 너희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에 모든 불순종을 응징하려고 준비되어 있노라.
7 너희는 겉모습대로 사물을 보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을진대 이것 즉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다시 생각할지니라.
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라고 주신 것인즉 그것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9 이것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무섭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0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
11 그런 자는 이것을 생각할지니 곧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말하는 우리가 어떠함같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우리도 그와 같으리라는 것이라.
12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아니하노라. 오직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분량 밖의 것들을 자랑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규칙의 분량에 따라 자랑하려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다다른 분량이라.
14 우리는 마치 너희에게 다다르지 아니한 것 같이 우리의 분량을 넘어 뻗어나가지 아니하노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너희에게도 이르렀느니라.
15 우리는 우리의 분량 밖의 것들 곧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것들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의 믿음이 자라날 때에 우리의 규칙에 따라 우리가 너희를 통하여 넘치도록 확장되기를 바라노니
16 이것은 너희를 넘어선 지역들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이미 예비되어 우리 손에 들어온 것들을 다른 사람의 구획선 안에서 자랑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7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
18 자기를 추천하는 자가 인정받지 아니하고 [주]께서 추천하시는 자가 인정받느니라.
2015-01-22 10:40:30 | 관리자
때로는 교회봉사를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제가드러나는걸 바랬는지도모름니다.
그런것같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드러나는 삶이되고자합니다.
2015-01-21 10:20:06 | 이광호
교회는 일하러 오는 데가 아니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어찌나 신선하고 감사하던지요
그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일에 치여살았던 저로서는 정말이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 같은 시원함이었습니다.
말은 일을 통해 신앙을 배우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계속 가중되는 일들속에 나중에는 감사와 기쁨은 잃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속에서 맡은일을 해내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이 곧 신앙이고 믿음을 재는 척도이기에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편히 말도 못하면서 속으로만 가슴앓이 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우리교회에 나오면서 자유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모든일을 대할 수 있게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듯이 주님앞에 책임을 다하며 자유를 누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5-01-20 11:52:06 | 이정희
이청원 자매님, 공감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5-01-20 10:27:07 | 한원규
아멘! ^^
2015-01-20 10:26:23 | 한원규
윤계영형제님, 좋은 글을 남겨 주시어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말씀에 아멘 아멘입니다!! 자주 좋은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2015-01-20 10:25:24 | 한원규
"교회는 일하러 오는 데가 아닙니다. 너무 교회 일에 몰두한 나머지 예배와 교제와 성장을 등한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갑자기 일을 하고 싶어진다"는 한 자매님의 덧글을 읽으며 같은 느낌입니다. ^^ 제가 굳이 말씀 안드려도 모든 성도님들께서 공감하시듯이 저희 교회의 시스템은 교회의 교리만큼이나 단순,명료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주보를 만들지 않고, 주일이외 수요예배나 철야기도, 새벽기도도 없습니다. 물론 안해야 하는 것들이지요. 그러다보니 제가 사랑침례교회 출석한 1년8개월의 경험상 대부분의 일들은 직분자들이 주일날 조금 일찍 교회나와서 감당하기 충분한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이 것을 다시 말하면, 우리 교회의 교리를 실제 생활방식으로 지켜 나가고자는 좋은 목회자가 있고, 이를 실천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있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2015-01-20 10:23:03 | 한원규
오늘 저의 설교가 끝나는 시간 아직도 구원이 내게는 확신으로 느껴지지 않으신분 혹 이자리에 계십니까? 교회문을 나서기전 저를 잠시 만나뵙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후 디저트같은 팁을 주기적으로 늘 한결같이 제안 해오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교회 바로 우리 사랑침례교회안에 목자로 계신다는게 얼마나 하나님께 일파만파 감사한지요. 오늘은 방미로 두주간 교회를 비우시면서 두고가는 양떼의 안녕으로 문안 편지하셨습니다. 영혼이 편안한 교회 한 혼이라도 마귀가 이끄는 곳에 가지 못하게 하고 싶으신 설교를 꾸준하게 대언해 오시면서 참교회가 무엇인지 바른교회를 하게될때 하나님은 어떻게 성도들을 변화하며 이끄시는지 볼수있고 보여지는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가 아닐까 느낌을 받게되는 동기부여가 바로 윗 두분 자매님의 댓글에서도 나타나 있구나를 느끼면서 좀처럼 댓글을 사양하는 저를 컴앞에 결국 앉히고 말더라구요. 세상이 점점 어려워 지고 있다는 말은 교회나 교회밖에나 이구동성 된지가 불과 몇해전일까요? 아니지요. 처음에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좋은것들을 다분히 마귀에게 빼앗긴이후 세상이 온통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혀있어 하나님과의 통신이 두절되고 맑은정신에서 혼잡과 타락의길을 걷게된 인류역사의 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저역시도 내용 모르고 순번대로 탑승-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어린아이 때를 지나 소년을 지나 청년을 지나 장년을 지나 이제 노년을 향하여 인생의 끝 어딘가에 쳐져있을 엔드라인을 향하여 뭔가 모를 두려움을 내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오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참... 바보가 따로 없구나... 결국 이게 답이더라구요. 왜? 남의 인생에 비해 내인생은 이나이가 되도록 껍질이 알곡을 온전히 뒤덮어놓은채의 흉년이란 말인가. 하나님과의 통신이 두절된 상태이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의 굴절된 교만의 바이러스를 이땅에 메시아가 오시지못하게 역사해온 마귀의 술수, 숱한 말씀의 변개가 이제는 바른교회의 미디어 선교를 통해 낱낱히 공개되고 수정되어져 가고 있으며 향후 날이갈수록 기하급수로 확장 되여질 때가 곧 오리라 확신하고 싶은 요즈음입니다.
뒤돌아보니 뭘 모르고 교회 뜰만을 열심히 밟아오던 지난시절 마귀가 던져준 복음훼방약을 제대로된 처방전없이 아둥바둥 먹어대다 어느날 제대로 된 참빛을 찾아내고 복음의 진수를 발견 난생처음 주일날이 기다려지는 오늘날을 살아 가게된 요즘 저는 제가 아닌 저를 보고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읍니다. 이제 그런 인생을 자의반 타의반 웬만큼 살아내다보니 인생중에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던데 가고있어도 가고싶은 교회가 있는겁니다. 매주일 일산먼곳에서 소래포구로의 이동이야말로 제게는 유일한 살아가는 이유이며 남겨진 제삶의 순수보장형 보험이구나 생각 되어지는 요즈음의 삶에서 왜 이좋은 소식을 전하기가 이토록 힘겹단 말인가 ... 이유에 답을 내게됩니다. 전철간 예수천당 복음을 전하기 보다 먼저 마귀 그 적을 바로 알자- 마귀 그가 누구인가 세상을 제것인양 온통 등기를 내어놓은 마귀의 무질서와 교만의 벼랑-그 광야에서의 - 예수님과의 삼세번 한판 승부- 결국 말씀으로 싸워 이겨내신 승리의 찬가를 바르게 부르는 방법, 지금은 부지런히 마귀를 대적하여 이미 이겨놓으신 그 말씀으로 무장해야할 때 인것을 저뿐 아니라 대다수 사랑침례교회의 한목소리라는 것을 그곳에 한번 와 보시면 물흐르듯이 공감하게 될것이라 자랑하고 싶음이 교만방자함이라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시간 모든 일의 순서에서 말씀이 원동력이 되어지길 바라시는 목사님의 서신의 바로 댓글에 흐르는 아름다운 고백과 오히려 일하고 싶다는 이 소리... 이소리를 들으시고 발걸음 가볍게 - 물건너 먼길 잘들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아래 기쁘고 안락한 여정으로 귀국 하시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며 아침을 맞습니다. 샬롬~ 주안에서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2015-01-20 06:03:33 | 윤계영
성도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쓰심에... 그저 감사 할 따름입니다.
갑자기 일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네요..ㅎ. 물론 기쁨과 감사함으로요.~^^
2015-01-19 22:02:26 | 박순호
[그러므로 우리는 일로 보람과 성과를 찾고 심지어 그것으로 영적 만족감을 누리려는 자세를 탈피해야 합니다] 제가 그랬음을 고백합니다. 누구에게 듣는 칭찬의 순간단맛보다 지체의 쓴소리가 더 유익이되고 상처받은 모든것은 주님의 더 달고 오묘한 말씀으로 위로받을수있으니 제가 얼마나 복을 받은사람인지요. 고린도전서 3장 위 주신 말씀이 더 선명히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2015-01-19 20:21:19 | 이청원
안녕하세요?
어제 제가 광고 드리면서 부탁드린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6장28 그때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매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너희가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
교회에 오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도들 중에는 이러한 본질을 잊고 교회에 일하러 오시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행태가 우리나라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분별력이 없는 성도로 머물러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로 보람과 성과를 찾고 심지어 그것으로 영적 만족감을 누리려는 자세를 탈피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는 당연히 해야 할 여러 일이 있습니다. 주방, 청소, 주차, 안내, 방송, 찬양반, 암송반, 교사 등심지어 목회도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일 때문에 예배와 교제 그리고 각 사람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즉시 일을 중단하고 예배와 교제, 영적 성장에 치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2015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각 사람이 너무 교회 일에 몰두한 나머지 예배와 교제와 성장을 등한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배와 교제와 성장을 등한시한 상태에서의 일은 그 행위를 하는 자신과 교회 전체에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배와 교제와 성장 위에 착실하게 쌓아올린 일이 이 세상에서 영적 유익을 누릴 수 있고 나중에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확실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
그래서 2015년에는 예배와 교제의 기쁨 속에서 성장하며 그것이 밑바탕이 된 성도들의 봉사가 증가하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1-19 15:30:25 | 관리자
제경험으로는 성경을 넓게봤을때 오히려 이부분때문에 성경이 풀리고
더욱더 진리의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알게하시고 깨닫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뿐입니다.
2015-01-16 11:54:00 | 이광호
새로온 성도로써 더관심가지고 공부하며 같은진리와교리안에서
교제하기를 힘쓰겠습니다.^^
2015-01-16 11:29:47 | 이광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디모데후서 1:7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귀하신 말씀 안에서...
사랑을 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서로를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2015-01-15 22:52:32 | 김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