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다가..
"나를 바라보라 "
너무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죄된 생각과 너의 허물을 탓하면서..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네요.
우리가 바라봐야하는 것은 예수님이고
그럴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데 말이지요.
늦은밤 잠이 오지않아 잘 알지 못했던 스펄전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깨우쳤던 "나만 바라보라" 란 좋은 말씀을 저도 마음에 담고
편안히 자러 갑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3 03:05:04 | 강평원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분은 어쩌면 그렇게도 고난이 많았는지요?
어떤 형제님은 두 아들과 교회에 나오기 위해 극렬한 반대를 하는 아내를 위해
주일엔 더 일찍 일어나 밥해서 먹이고 치우고 교회를 다녔는데
그 형제님의 메세지는 너무나 큰 힘이 있었어요.
사탄역할을 하는 그 아내를 향한 진정어린 복음의 메세지는
감동이 주곤 했지요.
사람이 보기엔 지지리 복이 없다고 할지 모르나
하늘에서의 상급은 너무나 크리라 생각되어져요
주님의 방법은 사람이 보기에 평탄한 길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2013-11-01 19:12:22 | 이수영
스펄전: 전 유럽을 영적 각성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복음주의 목사
이 위대한 목사도 그리 길지 않았던 인생의 후반부에 통풍과 우울증으로 심히 크게 고생하였습니다.
거짓 불 소동으로 인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마이크가 없던 시절에 한 번에 2만 명에게 설교했다니 이보다 큰 기적이 있을까요?
그가 겪었던 비방과 육체적/심적 고통이 지금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올립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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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 163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 수천 명의 환자를 치유하면서도 자기 병은 치유하지 못해 늘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병으로 죽은 사람. 이것이 스펄전의 이력서다.
그러나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세기적인 복음주의 설교가, 전 유럽을 영적 각성으로 몰아넣은 부흥사, 22세의 어린 나이에 매주 만 명 이상의 군중에게 설교하던 설교의 왕자. 6천여 좌석이 마련된 메트로폴리탄 교회가 그를 위해 세워졌고, 런던 교회의 수정궁에서 설교했을 때는 이만 삼천 명이라는 기록적인 인파가 운집했는데….
인간이 지닌 한계, 환경이 주는 무력감, 사회의 온갖 비리와 악조건. 이러한 것을 극복해낸 비결은 무엇일까?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배우는 과정일 것이다.
사상과 뿌리
19세기 영국에는 기라성 같은 설교자들이 배출되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 구세군의 설립자인 윌리엄 부스도 이 시대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19세기 영국의 설교계를 이끌었던 쌍두마차가 있다. 비국교도 계열의 찰스 스펄전과 국교도 계열의 존 라일. 스펄전은 이천 년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로서 ‘설교의 왕’이라 불린다.
청교도 스펄전 가문은 1568년 그들이 정착해 온 때로부터 1834년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서 많은 목사를 배출했다. 찰스 스펄전은 이런 혈통을 지닌 목사 아버지와 역시 철저한 청교도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삶을 보고 자라났다. 찰스 스펄전은 1834년 6월 액세스의 지방도시인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스펄전은 작은 교회를 돌보는 목사였다. 이들 부부에게 모두 1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9명의 자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찰스는 6세 때 스탬본 교구 안에 있는 조그마한 조합 교회의 목사인 할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찰스의 할아버지의 삶은 철저히 성경 안에 세워져 있었다. 이런 할아버지의 신앙관은 그대로 손자에게 전해져 찰스 스펄전 또한 성경말씀 안에서 어려서부터 확고한 신앙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 스펄전의 신앙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할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폭스의 「순교자의 책」 등 청교도 서적이었다. 그는 천로역정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도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짐이 바로 ‘죄’임을 알기까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펄전이 활동하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이었다. 그녀의 통치기간 동안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확장시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대외적인 영토 확장과 산업혁명으로 일부 특수 계층은 혜택을 받아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빈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빈민가 노동자 계급의 평균 수명이 25세였다는 기록도 있다. 런던에서만도 많은 아이들이 빈곤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감옥에 가거나 어린 나이에 죽어 갔다. 집 없는 아이들이 시장의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썩은 자두, 오렌지, 사과 등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풍경도 흔한 것이었다. 당시 성공회는 국교였기에 정부의 지원 아래 기반을 든든히 닦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비국교도 교파들 즉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앞서 휫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힘입어 이들 교회가 상당한 각성과 성장을 이루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형식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소년에게 야망을 갖게 했다. 복음으로, 진리로, 사랑으로! 전 영국에 빛을 비추리라!
나를 바라보라
1849년, 뉴마켓 마을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여름이었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삶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점차 커다란 번민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은 해 왔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살아온 자신에 대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된 회의였다. ‘도대체 회개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나 자신도 수없이 해 왔지만 실제로 내가 체험한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렇게 살아도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찰스에게 일어나는 이런 의구심과 번민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었다.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순간순간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정, 내면적인 죄들 때문에 심한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죄의 사악함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불행한 일을 다시 경험하라 한다면 차라리 병상에서 7년 동안 열병을 앓아누워 있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찰스는 어려서부터 청교도적 신앙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그의 생활모습에서는 어떤 결점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규범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죄에 대한 번민은 계속되었고 하소연하듯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시기에 나의 이 번민을 모른 척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따라서 그는 주일이면 자기의 짐을 벗어던지는 데 도움이 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여러 군데를 전전하였다.
1849년 12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마른 체격에 초라한 행색을 한 구두수선공이 어리숙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라는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라보는 일은 어떤 행동이나 수고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냥 눈만 목표를 향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손발까지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철없는 아이도 바라볼 수가 있고, 귀머거리, 늙은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당신 하나만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피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죽음 당하였고 무덤에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다시 살아나 하늘로 들림을 받았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찰스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어 즉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쳤다. “오 주여, 이 죄인이 지금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때 그의 가슴 안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격과 환희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교가 스펄전
스미스(W.M.Smith)는 “스펄전은 설교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펄전은 “준비 없이 습관적으로 강단에 서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그는 준비된 설교자였다. 비록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어도 끊임없는 연구로 그의 지적 능력은 대단했다. 특히 청교도 저서들의 수집광이었고 열렬한 청교도 독서가였다. 그런 그에게 ‘백과사전 두뇌’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설교할 때마다 자유자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웨슬리와 휫필드, 존 번연 같은 인물들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청중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경지식을 모아 ‘주해와 주석’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하여 약 3천 권의 책을 참고했다 한다.
스펄전의 설교는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성도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적용할 수 있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도 쉬운 구어체를 사용했다. 그 당시는 마이크와 앰프 시설이 있기 전이었다. 어떤 악기나 음향시설도 없는 때였다. 그런 악조건에서 수천 혹은 수만 명의 가슴을 후려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과 만이천 명이 입장 가능한 서레이가든 음악당에서 숱한 세월 성도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나 하나님의 일이 목표가 아니었다. 늘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였다. 그의 사상과 삶의 뿌리 및 목표는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님을 위해 고통 받고 병들고 무시당할 각오가 되어 있던 그의 열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설교만 해도 무려 삼천 오백 편 이상이다.
침례 이후 주일학교 설교를 시작으로 그에게 사역의 포문이 열린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았다. 농부 집 부엌이나 때론 자리가 없어서 마구간에 모이기도 하였다. 1851년 10월 스펄전의 설교에 대한 소문으로 17세에 위터비치 침례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고 그리고 곧 뉴파크스트릿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된다. 당시 뉴파크스트릿 교회는 어마어마한 교회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펄전은 그 편지를 받고 잘못 온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너무 놀랐다.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듭 거절했지만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가게 되었는데, 역시나 성도들의 냉담과 무시를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이 교회의 신자들은 부유하고 신분 높은 이들이 많았기에 교회의 외적 웅장함과 교인들의 수준에 압도당하여 설교자가 위축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부임 후 처음 한 ‘하나님은 좋은 선물만 주신다’는 제목의 설교가 모든 사람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예상외의 설교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저녁 예배 시간에는 몇 배의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그 교회 신자들은 유명하다는 학자와 박사들의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다. 그들의 진부하고 이론적인 설교에 싫증을 느끼던 차에 스펄전의 설교에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대학교를 나왔다면 우린 아예 초청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요청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주십시오.” 스펄전은 정식 절차를 밟은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목사라는 칭호가 그에게 자연스레 붙여졌다. 그리하여 1854년 스무 살의 나이에 뉴파크스트릿 침례교회의 위임 목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주일마다 예배당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바깥 뜰까지도 꽉꽉 찼다. 불가피하게 교회증축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로 런던 중심가에 있는 4천석의 좌석을 갖춘 거대한 엑시터회관을 빌렸는데, 몇 주가 지나자 이곳도 차고 넘쳤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스펄전에 대한 명성, 설교 대가로서의 위상이 영국 전역을 뒤덮었다. 영국 안에 제 2의 휫필드가 출현했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끝없는 악평 그리고 익어가는 신앙 인격
성공의 뒷면에는 항상 시기와 비난이 있게 마련이다. 개인적인 비난을 넘어서 신문지상까지 떠들썩했다. “찰스 스펄전은 대학 문턱조차 밟아보지 않은 자다.”, “그는 성직 수여식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이런 보도를 시작으로 하여 그에 대한 악평은 계속되었다. “젊은 여인들은 그에게 현혹당하여 정신없이 날뛰고 있다. 얼빠진 소녀들로부터 여러 선물을 받은 것만 해도 상점 하나를 차리고도 남을 정도다.”, “그는 심히 불경스러운 종교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의하여 성스러운 종교가 추잡하게 더럽혀졌고 타락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겸손을 배우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마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찰스는 이런 치명적인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의연하게 일들을 진행시켜 갔다. 변명하거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진실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할뿐이었다.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을 향해 신문에 해명하는 글을 쓰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대항하고 나선다면 내가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소.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대적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끝까지 참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를 뚝심 있는 세계적인 설교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죽음을 불러온 참사
사람들의 비난과 악평은 결국 비참한 죽음까지 몰고 왔다. 엑시터회관의 좌석은 사천 석이었으나 서레이가든 음악당은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강당이었다. 매주일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신자 수를 감당치 못하여 마침내 이 음악당을 사용키로 했다. 1856년 10월 주일 오후 예배 때였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예측을 훨씬 뛰어넘어 늦게 온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설교에 들어가기 앞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외침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이 요란한 외침에 얼마나 사람들이 경황없이 날뛰었든지 발코니에 앉아 있던 이들이 난간을 부서뜨리면서 아래층으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이때 힘없는 부녀자와 아이들이 넘어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어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물론 불은 나지 않았다. 찰스를 적대시하던 자들의 계략이 성공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음악당을 다 빠져나온 다음에야 불이 났다는 것이 유언비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짓밟혀 죽은 사람이 7명이나 되었고 병원에 실려 간 중상자가 30명이었다. 다음날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수많은 비난의 글들은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다름 아니었다. “예배는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만 드려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극장과 다름없는 음악당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양심적인 지성인들은 채찍을 들고 그런 사악한 무리들을 꾸짖어 내쫓아야만 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죽고,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신음하면서 끌려 나오다니, 스펄전은 헌금 통 속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그토록 비통한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했단 말인가!”
이 일로 인해 찰스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너무 커 급기야 졸도하고 말았다. 찰스는 피신한 상태에서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7, 8일을 조용히 보냈다. 너무 괴로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비난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자기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기에 힘썼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이 말씀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러한 가시가 결코 그에게 무익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비난의 소리들을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채찍질하는 소리로 들었다. 아무리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라도 늘 칭찬과 찬양만 받는다면 어떻게 교만과 위선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이런 비난을 통해 교만과 독선이라는 악마의 소굴에서 스펄전의 영혼을 지켜주셨다.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부정해야만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배울 수 있고, 그분이 내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나 자신이 깡그리 없어져야 한다. 오 하나님, 저를 당신의 온전한 종으로만 만들어 주소서.”
변해야 산다
이렇게 준비시킨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전 영국과 유럽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런던 시내에 늘어나는 술집과 창녀촌, 산업혁명으로 인한 구조적 모순, 부가 가져온 정신적 황폐와 가난으로 인한 자살, 진화론과 고등비평이 가져온 합리적 사고 등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펄전의 설교는 물질과 인간 중심의 사고로 황폐해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도구였다. 복음만이 유일한 낙이고 희망임을 일깨워준 청량제였다. 콜레라가 발생했을 당시 전염병의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기도해 준 스펄전을 통해 사람들은 복음을 마시고 호흡했다. 팔천 명이 넘는 신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마치 잃은 양처럼 보살피고 돌보는 그의 목회 모습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설교집 판매로 생긴 수익금 일부로만 청렴하게 생활하면서 교회에서 주는 급료는 처음부터 받지 않은 그의 태도는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작은 빛이 온 영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음악당에서의 참사 이후 수만 명을 수용하는 테버네클 교회가 세워진 것은 스펄전에게 있어서 도약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스펄전의 활동영역은 전세계로 뻗어갔다. 오늘의 신학교와 다름없는 설교자 양성소를 세워 수많은 사역자들을 길러내고, 월간 잡지를 발간하여 문서선교에 힘쓰고, 고아원을 설립하여 구제사업에 힘썼다. 매주일의 설교가 인쇄물로 제작되어 유럽 각지에서 수백만 명이 그의 설교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스펄전의 청교도 정신은 로이드 존스 등으로 이어져 우리 시대 복음주의의 뿌리와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변화된 한 사람의 힘은 시대를 초월하여 놀라운 생명력을 전해 주고 있다.
2013-11-01 17:42:2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요즘 “현재를 이기는 능력, 영원”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영원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심히 많이 달라진다는 글을 읽고 많이 동감이 되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이나, 비방을 당하는 사람이나 오해하는 사람이나 오해를 당하는 사람이나 다 영원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모든 일이 좀 더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영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앞으로 우리 믿는 자들이 다 같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같이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특히 한 교회에서 서로 지체로 섬기는 형제/자매들이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모두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영원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을 모두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후자의 눈을 더 크게 뜨면 뜰수록 형제/자매님들을 더 잘 섬기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차 미래에 우리 교회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믿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5년 반 동안 저를 믿고 함께해 주신 형제/자매님들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한마음으로 함께해 주셔서 교회가 이토록 잘 유지되어 왔습니다. 또한, 최근에 오셔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미래에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교회를 물려주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의 방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사귐이 풍성해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솔하게 자기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의 조언과 권고에도 귀를 잘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없이 가면을 쓰고 가식으로 지체를 대하면 평생 교회에 와도 자기 안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들이 만나서 활발하게 사귐을 갖는 것을 보노라면 목사의 마음이 매우 기쁩니다.
부디 서로 섬기는 모습이 풍성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빌2:13).
2013-10-31 15:35:5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원어를 들먹이며 성도들을 속이거나 못살게 구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다음 글을 적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샬롬
패스터
2013-10-23 13:28:30 | 관리자
힘들고 하기싫은 것들을 치워주세요..기도에서, 힘들어도 앞으로 갈 수 있게만 해 주세요..바뀌었습니다.
어제 견뎠으니 오늘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어느새 감사만 하는 기술자, 달인이 되겠지요.
부족한 한 줄 글을 남겨도 챙피하지 않는..사랑침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큰 위로가 됩니다.
2013-10-22 18:38:19 | 목영주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살펴보니 성도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갖는 주제는 영혼육, 천국, 지옥 등입니다.
여기에 대해 조직신학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노트와 함께(40-47과) 보시기 바랍니다.
노트는 PDF 파일로 올렸습니다.
샬롬
패스터
영혼육 01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7
영혼육 02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8
운명: 최종 목적지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42
지옥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43
천국 01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51
천국 02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52
2013-10-22 17:58:04 | 관리자
요즘 신학원, 주일학교, 설교, 성경 공부 등을 준비하느라 바삐 지냅니다.
이게 제가 지고 갈 짐이려니 생각하며 아내와 가족들의 협조로 그럭저럭 힘든 시간을 잘 넘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세대를 섬기다가 잠들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혀--(행13:36)
우리 다 같이 "내 세대를 섬기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 세대를 섬기고 죽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침례교회에 오시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들어온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오늘도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임을 알게 해 주네요.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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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후에야 감사할 일이 많음을 안다.
감옥에 있다 나오면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언제든지 원할 때 산책하고 길을 건너고 상점에 들어가 신문을 사고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단순한 행위에...자유로운 사람은 이런 것에 늘 감사하지 않는다.사람은 속박을 당한 뒤에야 그런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 넬슨 만델라,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사소한 일에 감사할 줄 알고 그 마음을 표현할 때그 순간부터 인생은 천국이 됩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감사도 기술입니다
2013-10-22 17:33:57 | 관리자
고양이들 팔자가 참 좋네요. ㅋㅋ
작년에 추운 겨울에 고양이 한 마리가 저희 아파트 문 앞에서 계속 서성이길래 다가 갔더니 제 발에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전을 펴서, 강아지 키웠을 때 남은 통조림으로 배를 채워줬지요.
사람에게 잘 다가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주인에게 버림받았던 것으로 추정이 되었습니다. 데려다가 키우고 싶었지만, 둘째 짠양이가 개나 고양이라면 비명과 함께 절도하는 수준이라 키우진 못했지만, 목사님댁 고양이들은 주인 잘 만나 구원을 얻었네요.
사람이나 고양이나 주인을 잘 만나야 좋은 팔자? 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똑 같은 이치임에 틀림 없는 진리입니다. ^^
위의 사진을 보니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심에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2013-10-22 15:51:00 | 김상진
자신들의 비전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비전이 아닌 자신들의 비전이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양심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암시하고 환경에 꿰어 맞추다 보니 양심이 둔하여 지고 둔하여 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니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자유롭게 되며 더 나아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확신을 용감하게 외치고, 간증까지 하는 무모한 짓들이 적지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현실속에서 '목회자는 사역이라기 보다는 인격'이라는 말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
2013-10-21 22:00:03 | 김상진
아멘!
참으로 조목조목 수긍이 됩니다.
현대 교회가 많은 면에서 빗나가는 것은
정확한 교리의 가르침을 외면하기 때문이죠.
말의 의중과 경중을 따져 다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직결되어 있는 성경의 교리를
너무 성의 없이 대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으니
사탄 마귀의 밥이 될수 밖에요.
교리가 분명한 가르침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2013-10-21 15:26:59 | 이춘옥
아멘!
2013-10-21 14:10:37 | 이수영
오늘 아침에는 전병국 형제님이 쓰신 글을 올립니다.
교리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바른 성경, 바른 구원, 바른 교리, 바른 교회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에는 핵심 요약 성경 해석법 책자를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56
샬롬
패스터
교리 공부가 필요한 7가지 이유
우리는 교리(敎理; doctrine)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 공부를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교리를 공부하면 머리만 커지고 영혼이 메마른다며 교리 공부 자체를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교리 때문이라면서 교리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정리할 때 사도 바울이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What saith the script-xure?” (로마서 4:3)
자신의 기분이나 경험, 지도자의 가르침, 모임의 분위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교리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1. 교리를 알아야 부흥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의 끝 부분과 같은 부흥을 꿈꾼다.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사도행전 2:46-47)
이렇게 사랑 넘치는 교회, 기쁨 가득한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개 이런 결과적인 모습을 흠모할 뿐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이끌었던 개혁의 모습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로 모인 사람들에게 부흥을 앞두고 나타났던 모습들이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입은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찬양? 봉사? 기도? 아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이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사도행전 2:42)
그들은 함께 모여 4가지 실천했다. 사도들의 교리(가르침)를 배우고 교제하고 빵을 떼며 기도했다. 그들은 제일 앞에 사도들의 교리를 두었다. 교제와 만찬과 기도는 그 다음이었다. 사도들의 교리란 오늘날 성경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생활이라는 기차의 기관실과 같다. 제일 앞에서 끌어주고 방향을 잡아준다. 교제 앞에, 만찬 앞에, 기도 앞에 교리가 있고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 4가지 일들을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steadfastly)” 계속했다. 다시 말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재미있을 때나 지루할 때나, 사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교리를 배우고 교제하고 만찬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많은 이적과 표적, 재산의 나눔, 매일의 모임, 교회의 성장 등은 그 뒤에 찾아온 일들이었다.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2. 교리를 알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의 복음은 감상적인 외침이나 피상적인 말로 꾸민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체계적인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교리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7-18)
사도 바울은 “죄의 종이…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로마의 성도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인가? 그들이 “교리의 그 틀(that form of doctrine)”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하나의 교리체계로 말하고 있다. 물론 조직신학이나 구원론같이 좀 더 학문적이고 복잡한 지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복음은 분명히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죄인 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에 대한 믿음이 차례로 이어진다(고전 15:1-5). 바울은 우리가 이 복음을, 이 교리의 틀을 지성으로(“전달된”), 감정으로(“마음으로부터”), 의지로(“순종하고”) 믿고 받아들이면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가 되는 것과 교리를 아는 것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다.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이미 교리 공부의 시작이다.
3. 교리를 알아야 하나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너희를 간절히 보고 싶다”(롬 1:11)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이유를 말한다.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로마서 1:12-13)
간절한 그리움의 첫 번째 이유는 로마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게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서로에게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과 로마 성도들은 로마서를 썼을 당시 아직까지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은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the mutual faith)”에 있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서로 만났든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만났으나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공통된 믿음이라는 것은 공통된 대상, 공통된 내용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교리의 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대상, 다른 내용에 대한 믿음이라면 서로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서로를 나누어 놓을 것이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공통의 교리는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4. 교리를 알아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흔히 쓰는 단어는 뜻이 왜곡되기 쉽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어떤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이 신앙을 갖기 전에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은혜 받았다”였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은혜(grace)”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천국행 티켓이나 면죄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은혜는 그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딛 2:11-14; 고전 15:10). 그런데 이런 것이 단지 지식이나 이해의 정도 차이가 아니라 생사(生死)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피상적인 단어에 머무르지 말라고 경고한다. ‘복음’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된 복음과 다른 복음, 거짓 복음, 저주받을 가짜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단어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쓰는 단어가 대충 비슷하면 서둘러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칭의, 은혜 같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들을 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종교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언뜻 관용과 사랑이 넘치는 것처럼 들리지만 성경과는 크게 어긋난 모습이다. 참 사랑은 결코 진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한다(고전 13:6) 이 모습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가 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아무하고나 무작정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이(요 17:6), “아버지의 진리로…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요 17:17)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며 기도하셨다.
5. 교리를 알아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그 비결을 보여주고 있다. 성도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며 서로 참아주고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대로 교회를 잘 섬겨야 한다(엡 4:7). 또한 교회 안에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다(엡 4:12).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건강한 교회를 이루게 된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4:13-14)
건강한 교회는 앎에서 하나가 된 교회요, 점점 자라 그리스도께 이르는 교회다. 그리고 속이는 자들이 “교리의 모든 바람(every wind of doctrine)”을 부채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다. 진짜를 아는 사람은 가짜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국 교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판을 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바른 교사와 바른 교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성장은 개인적 성장이 아니라 공동체적 성장이다. 혼자서 열심히 책을 본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함께 자란다. 신앙은 교회를 이룰 때 자란다. 교리를 알아가며 자란다.
6. 교리를 알아야 싸울 수 있다.
교리는 우리끼리만 알면 그만인 지식이 아니다. 참된 교리는 늘 공격의 대상이 된다. 어떤 때는 노골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 자들에 의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염되어 갈 수도 있다. 이런 공격은 한 교회가 아니라 한 시대의 교회들을 향할 수도 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교리가 공격 당한 때가 있었다. 지난 100여 년간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한 공격이 특별히 치열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 들어온 어떤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유 3-4)
원래 유다는 “공통의 구원(the common salvation)”에 대해서 편지를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독려하는 전투적인 편지를 쓰게 되었다. “단 한 번 전달된 믿음(the faith which was once delivered)”이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속의 이단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비된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다(유 13). 참된 믿음은 참된 경건을 낳는 법이다.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을 지키려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공격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엡 6:17)
7. 교리를 알아야 전할 수 있다.
“너희가 선한 것을 따르는 자들이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며”(베드로전서 3:13-14)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행복이라 말한다. “의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10). 무서워할 필요도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베드로전서 3:14-15)
신자가 할 일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반응하는 우리를 보면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그들이 찾아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에게는 구원, 예수님의 재림, 영생의 소망이 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어느 날 찾아올 영혼구령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 준비된 사람은 좀 더 온유할 수 있다. 자신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에 애타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온유함과 두려움 가운데 교리를 알고 있어야 상대를 인도할 수 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고린도전서 8:1)
교리 공부 좀 했다고 우쭐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닦지 않은 것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마 7:24-29; 약 1:22-25). 하나님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아는 불쌍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책망에 귀를 열고 방향을 바로잡으며 의의 가르침을 따르면 점점 더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약속이다. 교리 공부에 주어진 찬란한 축복이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2013-10-21 10:03:1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아침에 읽은 좋은 글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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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사명, 비전
우리가 종종 고민하는 단어들입니다.
'소명'이 부르심, 장소의 개념이라면'사명'은 맡겨진 임무, 일이라 할 수 있고'비전'은 소명 받은 자리에서 사명을 달성하던 중 마침내 대하게 되는 무엇일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소명과 사명, 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소명' 받은 곳이고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할 일이 '사명'일 것이며이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때가 우리의 '비전'이 아닐까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기독교 뉴스를 대하다 보면 매번 맘이 편치 않습니다.그래도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고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중보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목회자의 인격이 그의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의 인격이 그의 사역에 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결국, 목회는 우리의 사역이라기보다 우리의 인격이다."
- 필립스 브룩스
2013-10-19 10:07:53 | 관리자
조금전에 진료중 환자분과 대화 도중에 제가 출석하는 교회를 묻기에 사랑침례교회라고 답을 했더니 엄청 반가워하셨습니다. 본인도 열심히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있다고요. 한 형제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처럼 기존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열심히 바른 교리를 공부하면서 조용히 꾸준히 열심히 은밀히 몸 담고 있는 교회에서 바른 교리를 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에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사랑침례교회에 예배시간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가상의 공간에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을 매주 사모하면서 듣는 분들을 위한 이시대에 꼭 필요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사역의 소중함을 생각해 봤습니다. 혹여 정말 생각지 못하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면 저는 제일 뒤에서 입석으로 예배에 참여해도 좋습니다. ^^
2013-10-17 16:50:25 | 최호준
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오전에 잠시 말씀드린 것을 상기시키려고 잠시 글을 드립니다.
성도는 언행에서 세상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최소한 다음의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 우리가 매일 쓰는 휴대폰의 컬러링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트로트, 헤비메탈, 록 음악 등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성도의 휴대전화기에서 흘러나오면 전화 거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부탁드리니 컬러링을 살펴보시고 누가 들어도 고상한 것으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기준은 목사가 전화했을 때 민망하게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것이면 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지니라(고전14:40).
(2) 교회에 오실 때 복장을 좀 단정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꾸미지 말고 특히 자매님들은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 너무 짧은 치마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들은 청바지, 티셔츠 차림은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즉 ‘saint’라는 말은 ‘거룩히 구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패션 중에서도 우리가 따라야 할 고상한 것을 추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그래야 아이들이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요일2:15-17).
(3) 성도들끼리도 오고 가는 말에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성인들이 “야”, “너” 등의 말을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형제님, 자매님” 하시고, 상대가 성인이라도 나이 차이가 많거나 아주 친근한 관계이면 “형제, 자매”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상스럽거나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은 교회든 어디서든 절대 하지도 말고 옮기지도 말기 바랍니다.
또한 추잡한 것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나 희롱하는 말도 적합하지 아니하니 하지 말고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4:4).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런 모든 것에서 좋은 본을 보여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호감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샬롬
패스터
2013-10-16 12:50:45 | 관리자
우리는 가끔 교회에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의 기갈로 고통받은 많은 성도들에게 온전한 말씀의 꼴을 먹이고자 원근각지에서 모아주시는 성령님의 열심에 우리는 민감해야 되지 않을까요? 저도 목사님의 뜻과 같이 성령님의 인도에 맡기고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13-10-11 17:20:42 | 권원식
참고로 좋은 의견이 있으면 덧글로 혹은 개인적으로 제게 말씀해 주세요. 샬롬
2013-10-11 11:48:1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교회의 크기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매우 신실한 성도 한 분이 “목사님은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얼마나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기에 “글쎄요. 저는 처음부터 교회 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답했더니 그분은 “우리 교회가 바른 진리를 선포하며 이 땅에서 바른 교회의 모습을 보이려면 적어도 만 명은 모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만 명이 모이는 교회라니!”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큰 숫자라 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그에게 이같이 이르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세운 것을 내가 헐며 내가 심은 것을 내가 뽑으리라. 이 온 땅이라도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들을 구하느냐? 그것들을 구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네 생명을 네게 탈취물로 주리라. {주}가 말하노라.”(렘45:4-5)
또 얼마 전에는 멀리 외국에 계시는, 역시 신실한 성도 한 분이 권면의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500명이 넘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500명이 되면 빨리 분가를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형제님, 500명이 돼서 분가를 하든지 그냥 있든지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일단 함께할 목사가 있고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있어야 교회를 나누지요. 저는 인위적으로 그런 일을 못합니다.”
저희 교회에 오시는 분들 중 상당수가 기존 교회에 염증을 느낀 분들이고 특히 큰 교회에서 목사들의 여러 비리를 보아왔기에 “교회는 절대 크면 안 된다. 100명, 200명 혹은 많아야 300명이면 족하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 저희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를 옮긴 분들 중에도 “교회는 작아야 한다. 송내 시절에 200명이 딱 좋았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랑침례교회는 절대로 건물을 가지면 안 된다. 교회 건물이 문제다.” 등과 같은 비정상적인 발언을 합니다.
과거의 좋지 못한 경험이 있어서 나름대로 어떤 생각을 정립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과거 출석하던 혹은 알고 있던 교회들의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자신 안에 어떤 기준을 세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이 기준을 하나님의 뜻과 개별 지역교회의 상황을 고려해 바르게 적용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이 가진 잣대만으로 적용하고 분별하면 편견에 의한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우리 속에 거하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를 물 흐르듯 따라야 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초대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3,000명이 구원받았고 날마다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졌습니다(행2장). 또 얼마 뒤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남자만 5,000명이 믿게 되었습니다(행4:4). 그러므로 남녀노소 합치면 예루살렘 교회에는 적어도 20,000명의 성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시민의 수가 10만명가량이었으므로 전체 시민의 5분의 1일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물론 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행7장에서 스데반 사건이 일어나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대부분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행8:1).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많아야 100명 정도의 성도만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온 세상으로 나가 복음의 증인이 되어 행1:8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정립된, 교회의 크기에 대한 저의 생각은 한마디로 “내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교회의 크기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람들의 적당한 교회를 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더해져서 앉을 자리가 없어서 고민하고 심지어 몇 달 동안 불면증을 앓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교회의 크기 자체로 고민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진리를 찾아 먼데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만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였고 그 결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있어서 10월 9일에는 30대의 16가정이 주님 안에서 즐겁게 놀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9명의 30세 이상 청년들이 자기들만의 모임을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는 그저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만 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정상적인 목사의 심정일 것입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저는 오직 대다수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저는 어느 지역의 성도들이 적정한 수가 되고 거기를 목회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그 목회자와 성도들이 같이 나가 원하는 곳에 지역 교회를 세우고 우리 교회는 여러 면에서 그 교회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유효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온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여러 지역에 목회할 수 있는 분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원도 운영하고 있고 모든 신학원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 누구나 듣게 하고 있습니다. 신학원을 안 다녔어도 얼마든지 그런 강의를 듣고 소명을 받아 확신 있게 목회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든 적게 하든 나누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 교회에 오시는 분들을 정성껏 최선을 다해 섬기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생각속의 어떤 인위적인 숫자의 잣대를 가지고 교회의 크기 등에 대해 주장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성령님의 인도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성실히 하면 됩니다.
이제 주일 오전 참석 인원이 400명 정도로 늘면서 여러 배경을 가진 분들이 이 교회에 더 많이 올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분들과 또 이미 오신 분들 중에서 교회의 앞날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기에 교회의 크기에 대한 목사의 생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여 간단히 적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이 평안한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10-11 11:47:33 | 관리자
목사님.
운동을 하면 땀을 흘리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땀 냄새는 모기들이 아주 좋아하지요~ 그러나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면 몸에 이로운 것이 훨씬 더 많답니다.
열심히 일 하시는 그 땀 때문에 목사님께서는 모기에게 피를 뜯기시지만, 대신 사랑침례교회 성도들은 목사님께서 뜯기시는 피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경험하게 된답니다.
힘내십시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목사님의 땀을 응원하고 기도하고 있답니다.
화이팅 입니다. ^^
2013-10-10 23:10:09 | 김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