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그리스도인- 1부 : Christian 【성경탐구】 °가룟 유다의 캐스팅-1 1. 운명은 정해져 있을까? 세상의 시작과 끝은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성경이 가룟 유다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은 숙명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닌지··· 구원 예정설 또한 그런 생각에 힘을 보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숙명론은 마귀의 속삭임이다. 인간의 의지를 꺾어 승리하지 못하게 하며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타고난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돌이키고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이다. 그래서 억압의 우상 종교인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믿음들 중 한 가지가 ‘숙명론’이다. 아무튼 그렇담 가룟 유다는 강제로 캐스팅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오디션에 참가한 것인가···. 2. 가룟 유다에 관한 구약의 예언? 예수님은 구약에 300회 이상 예언된 메시아이다. 나사렛 예수님은 숙명적이라기보다 예정되고 계획된 분, 구원의 플랜에 명시된 분이시다. 누구인지 어떤 조건의 혈통인지, 어느 지역에서 나서 무슨 일들을 할 것인지 등등 아예 인적 사항이 등장한다. 가룟 유다도 이미 예언돼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전 500년경에 기록된 다음 구절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값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하매 이에 그들이 은 서른 개를 달아 내 값으로 삼으니라.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것 즉 그들이 나를 평가하여 매긴 그 상당한 값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에 내가 그 은 서른 개를 취해 주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23) 이 말씀 그대로 유다는 예수님을 은 서른 개에 판다. 나중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자살한다. 그리고 그돈은 토기장의 밭을 사는 데 사용된다(마27:3-7) 정확한 예언이 있으니 유다는 예정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유다의 인적 사항은 전혀 등장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누군가 그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어떤 자가 있는데 그는 꼭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악한 자라도 죽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이다(겔33:11). 유다를 통해 일을 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 사탄 마귀의 의지였다. 베드로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었다(마16:23). 그러나 최종적으로 오디션에 참가해 발탁된 자는 가룟 유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알고 경고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요6:70).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에 이제 마귀가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겨주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결심이 굳어진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제 그를 정확히 지적하며 자신을 배반할 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는 자 곧 그가 나를 배반하여 넘겨주리라(마26:23) 어차피 그의 운명이 예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때 직접 알려주신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여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24절) 기록된 대로 가는 것은 예수님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자도 악한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기로 예정된 자는 없다. 그런데 심지어 유다는 자기가 바로 그 자라는 것까지 알고도 회개하거나 악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유다가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게 나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5절) 3.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심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미리 아시는 것은 미리 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모세는 금으로 소의 우상을 만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시라고’ 간청한다. 역사를 바꿔달라는 거다. 분명 모세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모세가 주 자신의 하나님께 간청하여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에게 맹렬히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그가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 산에서 그들을 죽이고 지면에서 끊어 소멸시켰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에서 돌아서시고 주의 백성을 향한 이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소서(출32:11-12)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의 상속 약속을 거론하는데, 결과는 이렇다.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하던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니라(14절)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오케이 하셨다. 이런 일은 무수히 많다. 주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버리고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손을 내밀어 너를 멸하리니 내가 뜻을 돌이키는 일에 지쳤느니라(렘15:6) 얼마나 여러 번 계획을 바꿨는지 아주 일을 번복하기에 지쳤다는 말씀이다. 하나님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도 돌이킬 수 있다. 유다와 같은 자도 돌이킬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귀를 기울이고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그들의 악한 행위들로 인하여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작정하는 재앙에서 내가 뜻을 돌이키리라(렘26:3) 만일 내가 멸하리라고 선포한 그 민족이 자기들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생각했던 그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18:8) 이런 말씀들은, 너희들이 돌이키면 나도 돌이키겠다는 것이니 인간이 얼마든지 뜻을 돌이켜 회개하고 멸망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자, 그런데 성경은 유다도 뜻을 돌이켰다고 한다. 그때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유다가 그분께서 정죄 받으신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은 서른 개를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주며(마27:3) 그러나 유다가 돌이킨 것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자복한 것이 아니라 은 서른 개를 갖지 않기로 때늦은 번복을 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주님이 정죄 받으신 것을 본 뒤이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김으로 죄를 지었노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그것과 상관하라, 하거늘(4절) 정말 마음을 돌이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맞아 죽더라도 자기 잘못을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결국 유다는 회개 아닌 후회와 자책과 두려움으로 죽음을 선택했고, 그것은 스가랴 11장의 예언을 이루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수제사장들이 그 은들을 거두며 이르되, 그것은 피 값이므로 그것들을 성전 보고에 넣어 두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 하고 의논한 뒤에 나그네들을 묻기 위해 그것들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더라(5-7절) 4. 역사의 해피엔딩을 향하여 모든 일이 하나님의 큰 틀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외쳐도 믿음이 아닌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고, 믿음을 가진 뒤에도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딤전4:1) 성령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으므로 이와 같은 배교자는 반드시 나와야 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게 나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저런 경고와 예언을 보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저런 악한 길에 서지 않고 바른 교리를 따르겠다 결심하고, 그런 길로 잘못 들어섰더라도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든지 잘못된 믿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때는 변명의 여지가 없고,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큰 잘못을 했더라도 돌이키고 바로잡아야지, 자책과 회한으로 아주 망쳐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기는 법이다. 그러나 한번쯤 그 신념을 돌아보고 주님과 복음을 배반하는 가룟 유다의 길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 돌이켜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