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진리 결국, 과학은 사물에 관한 것, 신학은 말에 관한 것이다. -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3_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공적 영역에 다시 도입할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려면 세속적 이원론의 발생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뿌리로부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적합한 효과적인 복음 전도 전략도 개발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과 이성은 각기 별개의 범주로 나뉘어졌다. 이성을 신적 계시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의 창고로 받드는 이념, 일종의 ‘합리주의’가 태동을 하고, 이로서 종교가 오류의 잣대 역할을 하는 대신, 이제는 이성이 진리의 잣대로 격상되어 그 잣대는 종교가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자연이 유일한 실재이며 과학적 이성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는 과학적 유물론과 동일시되는 계몽주의가 시작되었다. 물질과 정신의 뚜렷한 이분법 이후 실증주의와 과학적 유물론 같은 철학이 발생하게 되었고, 개인의 이성적 의지를 중시함으로 과학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는 자유로운 것 “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이 있었다. 칸트의 이분법을 달리 묘사하면, 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 영역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의 영역이 각각 하층부와 상층부를 이룬다. 사회과학자들을 통해 이런 용어가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사실 대 가치다. 세속적인 신학의 도약을 들여다보자, 인문학과 사회학 분야는 그 주도권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딜레마를 요약하면, 윤리학은 유물론적 과학이 비실재적(unreal)이라고 선언한 어떤 것의 실재(reality)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신비” 는 도덕적, 인도주의적 이상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규정하는 진리 내에 기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긍정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지적 상실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극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인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의미와 중요한 의의가 그저 유용한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희망사항으로, 비합리적 신비로 말이다. 계몽주의 이래 사실 영역은 계속해서 가치의 영역 속으로 그 영토를 확장한 끝에 가치의 영역은 그저 비합리적인 희망과 공상을 표현하는 말로 전락했고, 과학적 유물론이 규정하는 실재 내에는 아무런 기반도 없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모순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과, 그의 삶 전체가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창조적 교리로 든든한 기반을 제공받기에 인격적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우리자신의 인격성도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야말로 최고의 인간 이상을 지지하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삶과 실재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으로 제시해야 마땅하다. 종교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인 것이다. 사실의 영역이 강력한 제국주의로 성장하여 가치의 영역을 급격하게 식민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 자아와 도덕적 책임 같은 전통적 개념들을 편리한 허구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오늘날 대학캠퍼스를 보면 옳고 그른 것은 개인의 가치관과 문화적 다양성의 차이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사실의 영역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고 가치의 영역이 반격을 가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진리에 대한 이층적 관점으로의 전환은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결정적인 결함은 진리에 대한 이층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은 오류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적 특징은 성경에 대한 세세한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 영역론에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독교를 그 뿌리로부터 떼어 내어 상층부에 던져 버린 셈이다. 거기서 기독교는 주관적이고 알맹이 없는 상징과 은유로 전락하고 만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심오하고 광범위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 둘로 따로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 영적인 의미를 함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이다. C.S 루이스가 깨달은 기독교는 경험적 증거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사건들이 가장 고상한 영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충되고 반대되는 진리의 분열이 없었다. 기독교는 이처럼 한 개인의 내면생활에도 분열현상이 없는 우리의 이성과 영적 갈망을 둘 다 채워준다.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우리가 전도활동에 참여 할 때는 기독교 진리의 전체적 통일성이 우리 메시지의 핵심을 차지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기독교를 통일되고 포괄적인 진리로 제시하는 일이다. 먼저 기독교가 모든 차원에서 진리임을 확신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합리적, 역사적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영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는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도록 부름 받았는데, 그 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직면한 도전은 이전 세대의 것과 같지 않다. 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려면 오늘 그 영이 취하는 형태를 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대적하지 못할뿐더러 무의식중에 그것에 동화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의 현 시점에서 가장 지배적인 잘못된 세계관을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과 속, 공과 사, 사실과 가치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없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 세계관만이 온전하고 통합된 진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실재의 제한된 한 면이 아니라 총체적 실재에 관한 진리다. 즉 총체적 진리다. ♥ 자매님들 나눔 이야기♥ * 원론적인 진리, 총체적으로 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 마귀의 때, 악한 때에 더욱 긴장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경각심과 부담을 갖어야 함을 느낀다. * 기독교 안에서 마저 진리를 두고 양립된 분열과 다툼이 있고, 세속적인 이원론에 맞서 싸울 영적인 공격을 감당할 우리의 처지를 보면 루터와 같이 복음위에 진리를 사수하리란 각오가 필요하다. * 맑은 정신으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의 확신 속에서 각자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며 의무이다. * 우리의 교만과 죄성이 세상을 발전시켰다. 인간의 그 악함이 결국 또 세상을 멸망시킨다. *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이분법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 * 우리교회에서 적용하는 거룩과 사랑의 비율은 하나님의 속성을 제한하고 또 하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교회의 철학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기준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 교회 안의 철학과 문화는 인위적인 잣대가 아니다. 총체적인 진리에서 비롯된 우리의 비전이며 영적 의무이다. * 교회로서의 바른 방향을 알고 가는 우리교회의 방향을 아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 이전에 분별하지 못한 기독교의 역행을 발견하면서 더욱 그리스도인으로서 긴장하고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 우리가 시간을 따로 떼어 나누는 교제인 만큼 준비를 하는 우리의 마음도 더욱 풍성한 교제를 위해 노력하자. “아... 가면 갈수록 읽고 이해한 것을 말로 풀어서 나누는 것들이 더욱 어려워지는 완전한 진리입니다^^ 모르는 것을 묻고 이해를 구하며 충분히 또 최선을 다해 설명으로 이해를 돕는 우리 자매님들의 진정성 있는 교제의 시간이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가을의 문턱인가 싶더니 가을을 만끽하기도 전에 벌써 겨울날씨를 체감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또 센스 있고 순발력 있는 우리 자매님들 얼큰하고 뜨끈한 동태탕 메인으로 근사한 식사준비를 해주셨네요. 반찬도 그새 뚝딱 몇 가지를 준비하셨는지.... 풍족하고 정성스런 밥상으로 자매모임의 마무리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