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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또 20만원 어치의 책을 구입했습니다. 성도들과 같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자꾸 책을 삽니다. 재정이 어렵다는 집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교회 도서관의 책들은 많이 넣어 주고 싶습니다. 돈이 없으면 그냥 내가 사서 넣으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너무 좋은 책들을 샀습니다. 스윈돌의 성경 인물 강해는 참 좋습니다.   읽어야 삽니다.   부디 성경과 더불어 경건서적을 많이 읽으십시다. 하나님은 책으로 일하십니다. 마귀도 마찬가지고요.   다음은 이태준의 '책'이라는 수필입니다.   내 마음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요.     책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계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아 첫 페이지를 읽어 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 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려 가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이러는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 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 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 보고 구백 구십구 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구백구십구 권을 돌려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 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은 물질 이상이다. 영양令孃이나 귀부인을 초대한 듯 결코 땀이나 때가 묻은 손을 대어서는 실례다. 책은 세수는 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菱華紙처럼 부드러워 한손에 말아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 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態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2009-09-12 17:14:06 | 관리자
사람은 짐승과 달리 글로 자기의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쓰는 연습을 하면 평생토록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기계쟁이로 교육을 받아 글을 잘 못 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글의 묘미와 힘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글을 잘 써서 하나님의 진리를 통괘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의 아이들이 좋은 글을 잘 쓰면 너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보는 전문 잡지에 다음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서 한 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포스와 내공 강신호: 한전KPS(주) GT정비기술센터 고온부품팀장   요즘 흔하게 쓰는 말 중에 ‘포스가 느껴진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포스’는 선과 악의 균형을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의 대명사로서 영화 스타워즈 중 대사에 등장한다. 말 그대로 외부로 발산되는 독특한 기운(氣運)이나 힘을 의미한다. 또 개성이나 의지, 심지어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의 열망 등을 함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기존에 널리 쓰이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지배구조의 수직성이나 권위로부터 나오는 힘이라면 포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힘마저도 표현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다.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말로 무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력(功力) 이나 내공(內功)이라는 단어도 생각할 수 있다. 공력이 안과 바깥 모두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내공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 실체를 알 수 없는 힘을 통칭하면서 ‘수양과 단련의 깊은 정도’를 표현하는 말일 게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나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으니 글머리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는 듯도 하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언어를 통해 주고 받을 수 있는 의미들의 발랄함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중에는 굳이 ‘포스’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제법인데’라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힘이 있네’ 라고만 해도 충분히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고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우린 굳이 색다른 단어를 찾아내어 쓰고야 만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포스는 외국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단어이다. 공력이니 내공이니 하는 말도 무협소설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즐겼던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되새김되던 단어들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을 타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단어가 주는 의미 이상의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은 보편성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어휘밖에 쓸 수 없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식상할 것인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서로 할 말만을 주고받는 행위일 뿐이라면 그런 관계는 너무 건조할 것이다. 마치 기계나 로봇 시스템을 제어할 때처럼 명령어 몇 줄 입력해주면 되는 식의 관계라면 그건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아니다. 다행히 인간의 지적 감성적 능력은 상대방의 혀끝으로 발음되는 몇 가지 단어들로도 많은 정보를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단지 상대방의 발음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사한 단어들의 의미와 느낌으로부터 밝고 어두운 측면, 기쁘고 슬픈 측면, 선하고 악한 측면 등을 가려낸 뒤, 대응하기 위한 단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극도로 짧은 반응시간 내에 자신이 판단한 내용을 근거로 적절한 단어들을 조합해내고 얼굴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의도와 감정으로 표현한다. 이때 대화를 윤택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느냐에 따라 대화의 질과 깊이가 달라진다. 다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적당한 용언들을 분위기나 상태에 따라 제때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저 의미만을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도 짧은 말로써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시구처럼 미사여구를 섞어야 한다거나 은유법과 같은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부하거나 사무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쉬운 대화 도중에 신선하면서 톡 튀는 단어로 상대방의 감성을 자극한다면 대화의 과정이나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자주 보는 TV 드라마들은 배우들을 통해 의도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화려한 대사로 시청자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유창하고도 논리 정연한 대화들이 오가면서 감정이 빠르게 전달되다보면 보는 이들은 어느새 극중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능력에 따라 감동의 깊이는 더해진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기발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 등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는 유행어들은 시대적 상황을 담거나 대중 정서와도 일치할 때 더욱 반향이 크고 수명이 길어진다. 다양한 신조어나 줄임말의 등장과 활용 또한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핸드폰과 컴퓨터가 폭 넓게 보급되어 다양한 통신매체로서의 구실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매체들은 온전한 문장을 주고받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시간과 비트(bit) 수를 제한하고 쓴 것만큼의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질서가 갖는 헤게모니는 무의미하다. 만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격식과 맞춤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면 당장 컴퓨터와 핸드폰의 활용이 위축될 것이다. 때문에 현명한 유저들은 신조어나 줄임말과 같은 대안을 만들어 내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단어와 감정을 전달하게 위한 온갖 궁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톡톡 튀는 창의력이나 감성의 순발력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며, 당시의 문화와 정서에 동화되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인터넷 속어나 신조어가 난무하는 문화적 현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법을 무시하면서 만들어진 만큼 우리말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조어와 유행어가 담고 있는 재치와 새로운 정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면 언어란 감정을 담는 그릇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을 만들어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사회적 수요층의 공감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물론 수요층이 다양한 만큼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태로 생겨난 그릇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릇들은 밑이 좁거나 깊이가 얕아 많이 담지 못하는 그릇이다. 즉 그릇의 생김과 크기에 따라 담기는 감정의 양과 전달되는 형식이 달라질 것이고 대화와 교류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재미있고 식상하지 않은 그릇들이 많은 편이 사회를 밝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여유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과의 대화가 좀 더 즐겁듯, 밝은 표정으로 늘 진지한 사람과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지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만 그럴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재치와 유머 수준 자체가 동떨어져 있어서는 통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대방에 집중하는 총기 있는 눈빛과 매너를 통해서 만남을 유쾌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의지가 마구 발산되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포스’와 ‘내공’도 없이 남들이 그래주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9-08-15 12:04:20 | 관리자
목사님께도 제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목사님 글 읽으니까요. 그 전에는 아무 생각없었는데... 그러면서, 혹시 제가 목사님 애 먹이는 사람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반성이 되네요. 그런데요..그냥 생긴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합니다. 전 그러고 살거든요. 그래서 속이 편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는 엄~청 생각하면서 삽니다. 사람들의 시각은 너무나 천차만별이어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뭘 해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뭘 해도 좋아하더라고요.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동일한 시각으로 저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잘 하고 있는지...사람의 시선은 참 헛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목사님. 그냥 지금 하시는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지금도 최선을 다 해 하시잖아요.더 하시면 병 납니데이.....이상 저의 생각.
2009-08-12 19:25:53 | 백화자
이번에 가평의 유명산 계곡으로 휴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아이들 포함 약 50명이 좋은 날씨에 안전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이 일을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는 수련회가 아니라 쉬다 오는 휴양회로 계획했기에 목사에게도 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는 날 밤과 오는 날 아침에 1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믿음의 증언을 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알게 된 경위, 사랑침례교회를 찾게 된 경위, 그 이후의 삶의 변화 등을 이야기하는데 든는 제게는 참으로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부족한 도구를 써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주셔서 여러 형제 자매가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데 혹시 우리 교회에 와서 나로 인해 실족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부지불식 간에 지도자를 따르게 되는데 과연 내가 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힘을 잃으면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과연 내가 교회의 목사로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늘 이야기하듯이 교회를 바르게 이끌고 갈 수 있는 전임 목회자가 나오면 자리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목회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의 모든 위치에서,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려 합니다. 파트타임 목사가 주어진 기간까지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2009-08-12 13:15:30 | 관리자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교회에 대한 확신과 신약시대에 성행하는 율법주의로 인한 페단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우리의 과거와 율법주의를 부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글도 쓰고 책들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저 사람이 혹시 완전히 무정부주의자 혹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는 결코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꼭 반작용으로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의 십일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면 꼭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따서 말을 전하거나 퍼뜨립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므로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개의치 않고 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증거 구절로 내민 것은 이사야서 54장 9-10절이었습니다. 9 이것이 내게는 노아의 물들과 같으니라. 내가 다시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덮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한 것 같이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꾸짖지도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나니 10 산들이 떠나가고 작은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내 친절이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내 화평의 언약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주}가 말하노라. 구원받으면 우리가 죄를 져도 하나님이 근심하지도 않고 노하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극도의 방종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마귀의 교묘한 가르침입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앞뒤 문맥을 보면 신약시대가 지나 주의 날이 이르러(즉 재림이 이르러)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시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스라엘이 천년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과거의 오래 기간에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 온 민족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뒤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인용해서 구원받은 사람은(교회는) 죄를 지어도 더 이상 하나님이 근심하거나 노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신약과 구약을 바로 나누어야 한다고 열렬히 외치는 자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이 슬퍼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협잡꾼들에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요일2:3-4). 십계명의 대부분(안식일 제외)2. 주님을 섬기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살전4:3, 7), 술, 담배 안하고 청결하게 사는 것 등3.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분리하고 세상의 풍조에 따르지 않는 것(롬12:2), 록 음악, 옷, 세상 문화4. 지역 교회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에 지도자들이 정한 규례를 따르는 것(행15:29), 방언 안하고 교회에 깨끗하게 옷입고 가는 것 등 5. 형제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롬14:21)6. 인륜을 지키는 것   구원받았으니 규칙도 없고, 헌금도 없고, 인륜도 없고, 교회 모임도 없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속히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방종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흐려놓으니 예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이야기해도 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니 "교회에 가자"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자"고 할 때의 교회는 교회 모임을 말하지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말의 유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 드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자유는 결코 무법주의가 아닙니다. 자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하고 가릴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바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시다. 이런 협잡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시다. 
2009-08-08 14:16:31 | 관리자
신약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말씀과 기도가 병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여러 여건으로 인해 기도 모임을 갖지 못했지만 이제 금요일 오후 8시에 매주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찬송가 2-3곡을 부르고, 성경 2-3장을 같이 읽고, 간증하고 국가와 민족, 킹제임스 성경, 사랑침례교회의 필요, 개인적인 기도 요청 등을 두고 참여한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8시부터 9시50분 정도까지 진행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금요 기도 모임을 좋아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설교를 준비하지 않고 격의 없이 자유롭게 성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조금 더 일찍 가서 먼저 교회를 살펴보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유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기도를 하겠다고 모이는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신약 교회 부흥의 원인이기 때문에 기도회로 인해 소망을 갖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께서 기록해 놓은 교회 운영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교회가 문제를 놓고 기도로 모일 때 하나님의 영께서 그 모임에 기름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너무 간단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습니다. 이 같은 기도 모임이 자율적으로 형성이 되어 성령님의 충만이 임할 때 전도와 선교가 그 다음 단계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윤아와 민철이를 포함해서 14명이 나왔습니다. 기도회 모임을 통해 서로의 사정을 알고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령님의 기름부어 주심을 구하는 일이 날마다, 주마다 진전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기초 체력을 강화시켜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려니와 너희는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시에 머물라(눅24:49). 주님, 주님께서 기록해 주신 대로 이제 기도로 모입니다. 성령님의 뜨거운 권능으로 인해 우리의 가슴이 녹는 일이 생기도록 도와주십시오. 시작이 미약하고 리더를 포함해 모두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채워 주셔서 주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도록 친히 일하십시오. 아멘. DSJ  그때에 사람들이 날마다 다윗에게 와서 그를 돕고자 하더니 마침내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 같이 큰 군대가 되었더라(대상12:22). - 내게 안수하시고 늘 기도로 도와주시는 웨이트 목사님의 사모님이 몇년 전에 내 생일 카드에 이 말씀을 적어서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DSJ
2009-07-12 03:10:48 | 관리자
요즘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십니다(갈2:20).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불교도나 다른 종교인들은 신성에 참여하기 부단히 노력을 합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든 수행과 고행 그리고 봉사, 구제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신성에 참여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와 영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벧후1:4). 이게 믿깁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 즉 신성(Divine nature)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느끼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그분의 생명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 본성(예 사람)은 십자가에서 일순간에 죽었습니다(육체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리스도 그분께서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모두가 이것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이요, 그리스도의 소망입니다.   이러면 교회의 문제, 자아의 문제, 삶의 문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요즘 이런 책들을 읽고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미국 교회에서 선교사를 지망하는 젊은 목사가 이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차분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진국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들었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을 부추기거나 기복 신앙으로 마음을 사거나 겁을 주지 않고도 열정을 가지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설교할 때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게 됨을 보았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요15:4). 이 진리를 따라 사는 저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2009-06-29 13:31:31 | 관리자
오늘 미국에 오면서 김남준 목사님의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를 읽었습니다. 1-2년 전에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는데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목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1주 전에 이스라엘 비행기를 타면서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와 설교자를 읽었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정리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아주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원근각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오신 성도들의 눈을 보니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먼길을 시간을 들여 올까요? 말씀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힘을 다해 준비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교회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기근이 있는 시대에 정말로 하나님을 높이는 열정적인 설교자가 꼭 필요합니다. 주일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돌아가면 쉬지 말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나라에 이런 설교자가 몇명이라도 생기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해 주십시오.   참 미국에 잘 왔습니다. 로키 마운틴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하얀 눈이 산 위에 있지요. 아주 자연 경관이 좋은 곳입니다. 한 학생과 같이 왔습니다. 그 심령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6-24 13:04:06 | 관리자
오늘은 시간을 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음산책'(찰스 스윈들)을 다 읽었습니다. 50여 년 동안 목사, 신학대학 학장 등을 지내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신 목사님이 은퇴할 때가 되어 예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를 기술하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함께 공부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들어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 등을 접하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는 삶에 대해 성도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을 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했고 그러자 그런 일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 바쁘게 살면서 주님을 위한 일들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즉 내 육신을 만족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으로 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구원 받은 사람의 옛사람에 대한 글이 좋았습니다. 자전거 아시지요. 자전거를 타다 보면 여러 가지 요령이 생기고 기술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오랫 동안 자전거를 안 타다가 또 타면 여전히 그 기술과 요령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옛사람 즉 육신(flesh)도 자전거 기술과 같습니다. 우리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육신을 통제하지 않고 살면 성령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지요.   육신 하면 이제 자전거 생각을 합시다. 몸에 밴 기술 말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르도록 애를 씁시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2009-06-04 19:31:19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접 기도 복음이 아니다 ● 정동수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를 읽고 간단히 설명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은 뒤 손을 들고 나오면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람 순수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지요.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무 쉽게 Easy believism에 빠져서 또 압력에 견디지 못해 영접 기도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영접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을 들라고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선자(혹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나 집회에서 손든 사람의 수를 세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한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고 또 순순한 의도로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폴 워셔 목사의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게 기독교를 받아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앞에 말할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일 때 제가 하던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들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있지도 않는데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결심을 도와주는 것과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저 설교들과 신앙고백하는 법 그리고 교회성장등을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에게 다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가 그렇다라고 진지하게 대답을 하며 기도하면,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변하지도 않으면서, 그들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이라 일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젠 그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결정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물어보십시오. 사탄도 그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죄인중에 죄인으로 말이죠. 질문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들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서 그동안 사랑해 왔던 죄악을 이젠 진심으로 싫어하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천국가고 싶습니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하나님이 없길 원하죠. "당신은 천국가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복음이 당신에게 전해진 이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주권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을 통해 그동안 싫고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이젠 당신이 간절히 원하며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으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에 대해 그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성경에선 그를 영접하라고 했는데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사영리에 나오는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그를 당신 인생의 악세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 만드는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이 되십니다. 그가 당신의 삶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누가 자신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나에게 기도할 것인가?"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회개는 삶의 열매에 의해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구원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결심을 더 의지한 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죠?" "3년전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거든요" "정말로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했습니까? 구원의 증거, 회개의 증거, 믿음의 증거는 변화되었고 변화하고 있는 삶입니다. 예전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 이유는 오늘도 그 회개를 지속해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믿을 수 있냐고요? 왜냐하면 오늘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통해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꾸셨을 뿐만아니라 지속해서 당신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십시오. 200년 전, 또는 30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이나 청교도나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오늘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십시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떻게하면...열가지 순서들"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진정한 회심을 모르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을 예배속에서 어떠한 미디어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작된 찬양방식이나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우리의 좋은 인생을 원하기에 우리가 듣길 원하는 설교만을 전하는 화려한 연설자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잃었기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남자, 여자 그리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저 꾸밈없는 순전한 복음말입니다.
2009-06-04 10:33:14 | 관리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9-06-02 18:09:14 | 관리자
    사도신경   사도신경(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도 사도신경은 개혁 교회와 근본주의 침례교회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혹은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배 시에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시각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디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중언부언으로 생각하여 하지 않음으로 역시 주를 위해서 안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의 몇몇 문제와 용어를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은 영어 사도신경과 카톨릭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원문에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알지만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만 해당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인 평생 동정녀(the Virgin)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분이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소위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림보설 등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주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예수님의 혼)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엄밀하게는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럽 부분의 지옥을 모두 음부라고 해서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k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9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10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3) Holy catholic church    영문에는"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assembly)이나 종교 회의의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church" 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2세 교포 아이들(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심각하지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 카톨릭(Catholic) 교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요.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의 통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죽은 카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만들어서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Holy catholic church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참고로 저는 중학교때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로서`가 무엇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연서도 이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로 그 위의 구절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재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이해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지만 몇몇 부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고 특히 카톨릭주의가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을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2009-06-02 18:05:54 | 관리자
주기도문 ● 정동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예배 때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또 소그룹 모임 등에서도 모임을 끝맺을 때에 거의 대부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주류인 미국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절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이단을 감별(?)해 주는 연구소들이 몇 있는데 어떤 단체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감별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감별 방법 중의 하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외우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전통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번은 이런 단체의 소장이 미국에(호주에) 가서 이것을 주장하다가 그곳의 교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잘못을 시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 가운데는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므로 그것을 외우는 형제자매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안 외우고가 교만의 문제로 비쳐지고 안 외우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유래와 특징 등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흠정역 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흠정역). 1. 주기도문의 이름과 유래 주기도문은 실제로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5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부분이 끝난 뒤에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2.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8절 말씀에 있듯이 말을 많이 하면 신이 기도를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3. 미국의 침례교인들은 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가? 이 기도에는 신약 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부분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11절에는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런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웝받습니다!’ 절대로 성령님이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도 이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4.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 번역의 본문인 바티칸 사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각주 참조).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원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 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5. 주기도문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서 <대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한국 기독교(개혁신교)에서는 과거에 <대개>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은 <대개>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빼기도 합니다. 그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영어로는 for)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6. 그냥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러 준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이 이 기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 하늘의 왕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추후에 왕국이나 천년왕국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2009-06-02 18:02:50 | 관리자
자기 성찰 ● 정동수 청교도 목사들의 지침서 중 하나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Reformed pastor)입니다. 목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글이므로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참목자상(리처드 백스터, 최치남 옮김, 생명의 말씀사) 1. 자아 성찰의 내용 1)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 가장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충실히 배우는 사람이며, 성결한 사람만이 그 일을 온전히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며, 그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서입니다. 신학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철학의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무엇보다 그대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와 묵상에 힘쓰십시오. 하늘의 불을 받아 희생의 불꽃을 피우십시오. 3)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보라. 자신의 혀로 한 말을 그 생활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합니다. 저들은 설교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삶은 정확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강단 위에서만 목회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강단을 떠나 있을 때는 목회자임을 포기하는 셈이 됩니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행동 잘하는 목회자가 됩시다. 첫째, 아무 흠 없이 행하여 그대의 순전함을 유지하십시오. 적어도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가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의 덕스러운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손히 대하십시오. 둘째, 자선 사업을 풍성히 하십시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자가 풍성한 희생 제물을 제공합니다. 이들을 우리의 희생 제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독실한 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보라. 그대는 스스로 조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그대가 경고하고 비난하는 죄에 자신이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로는 죄를 굴복시키고 실제로는 죄를 굴복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5)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보라. 그대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로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지식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우리 역시 부지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실천하십시오. 나태함으로 인해 연약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2009-06-02 17:58:21 | 관리자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서문 ● 정동수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 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 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 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 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6-02 17:54:04 | 관리자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 정동수 교회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채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보내온 글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기에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아마도 저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동감이 갈 것입니다. 2008년도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나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부담이 너무 커서 어디부터 기도해야 할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정말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권능을 가지고 굳게 서 있는 교회 말입니다. 율법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그리스도를 앞서지 않는 교회, 성경 말씀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서 고치고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교회, 기도와 말씀이라는 펀더멘탈이 강한 교회,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흥하고 사람은 쇠하는 교회, 그런 교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굳게 서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선포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인간을 인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목사님 말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친근하게 내 것을 허물없이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된 사람들,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말입니다. 주님, 지금까지 여기 저기 가까운데 먼데 다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내 요구가 너무나 큰 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임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마음고생하며 많이 기다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단다. 자유의 영으로 마음 놓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혼을 다해 나를 의식하려고 애쓰는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이다. 영과 진리로 내게 경배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가 준비해 놓았다.
2009-06-02 17:50:59 | 관리자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6-02 17:46:36 | 관리자
조지 위필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키기로 주님과 약속하고 매일 이것을 점검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글은 특히 목사들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내 자신을 쳐서 낮추는 작업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끝없이 성화의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이런 약속들을 지켜봅시다. 책상에 붙여 놓고 매일 보기 바랍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했는가,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2009-06-01 18:03:15 | 관리자
다음은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대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9-06-01 18:00:54 | 관리자
요즘 목사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일생을 보낸 목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며 목사의 길을 가는 많은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 성도가 적은 한국 교회의 칠거지악이란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잘못된 목사에 대해 지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는 거기서 중간에 있는 한 부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갈구하면서 전체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도 양들에게 바른 꼴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목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타락   영적 지도자로서의 고결한 신앙 인격이 말씀과 함께 외쳐질 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권위가 저절로 드러날 터임에도 “더러운 이를 취하며(벧전5: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전6:5)” “군림(주장)하는 자세(벧전5:3)”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1,2)”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고귀한 직분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혼잡케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마치 포도주에 물을 타서 포도주를 변질시킨다는 의미를 뜻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고 곧 순전함을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서 혼잡이란 뜻은 값싼 물품이나 위조품 등을 교묘한 꾀와 속임수로 진짜처럼 팔러 다니는 엉터리 잡상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해 진리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담보 잡아 사사로운 잇속과 명예를 챙기는 불의한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절망하나 순종의 걸음을 통해서는 소망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음을 성도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외로운 씨름을 하며 그분의 말씀과 대면하며 처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강단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한 고독과의 싸움이 싫어질수록 강대상에서는 분칠한 설교가 나오게 마련이며 사람들의 구미에나 맞추는 백화점 식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 만나기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행6:4)보다 더 선호할 때 타락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는지, 바빠야 할 이유와 순위가 문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강조하는 만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근사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것이나 심방 가서 만나주는 것으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강조하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마음과 물질 모두로부터의 가난과 그 가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겠다는 실천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목사는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격려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부득이한 (벧전5:2) 의무로 변질시켜 버릴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고귀한 의무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먼저 떠오를 때 목사는 타락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영적 타락이 윤리적 타락보다 더 심각하며 영적 책무의 망각이 자신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6-01 17:56:5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