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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모임- ‘에라스무스’의 재발견   >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에라스무스에게는 분명 완전치 못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보았을 때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과 계획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 에라스무스를 인본주의자라 불렀던 그 시대의 인본주의자의 정의내리는 관점은 오늘날 사람을 하나님 위에 놓으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과 그 개념의 차이가 있다.   >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된 에라스무스는 카톨릭교회가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의 영과 혼은 그런 틀에서부터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웠다. 본인이 속한 로마 카톨릭교회의 부조리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공연한 사악함에 대항하여 저술한 ‘야만인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실제로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하나이다. “로마 교황의 이 같은 독재는 기독교를 좀먹는 해충”이라고 말했다.   > 에라스무스를 논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는 점이다. 라이온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라는 책에는 젊었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다라고 나와 있다.   >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 로마 카톨릭교도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영은 천주교보다 성경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은 그의 진술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연약한 여인이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스스로 읽고 깨닫기를 바라며,,,,쟁기질하는 소년이 쟁기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죽음이 다가올 때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으셨다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주며, 그분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와 같은 진술문은 결코 16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인본주의자’의 확신이 아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경말씀을 전해 주려는 매우 고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 에라스무스의 출간된 그리스어 신약성경 첫 번째 판은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동시에 들어간 두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성경 즉 ‘디아글롯’ 이었다. 두 번째 판은 첫 번째 판을 조금 개정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근간이 되었다. 세 번째 판은 소위 ‘사도 요한의 쉼표’라 불리는 요한일서 5장 7절 말씀을 삽입시킨 것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이 구절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구절이다.   > 에라스무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와 더불어 그 교회의 신조들이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은 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문제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교회의 어떤 의식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고 담대히 외쳤다. 이처럼 에라스무스가 충실한 카톨릭교도였다는 비평가들의 말을 수긍하기에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보는 그는 너무나 형편없는 본보기였다.   > 에라스무스는 결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매님들 나눔 이야기 *   > 마치 드러난 역사를 다시 드러내는 시간 같다.   > 우리나라는 사실 신학역사가 없다. 미국의 신학역사를 우리는 보고 접하고 있고,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 바른 말씀을 보면서 기존 말씀을 내려놓는 것 하나도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 바른 성경을 보면서 육체의 자유함이 아닌 말씀 안에서 자유함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 예레미야 33장 3절에 기존에 봤던 성경에는 ‘부르짖으라’ 고 되어있지만 킹제임스에는 ‘부르라‘로 되어있다. 말씀대로 주여삼창을 하고 주여 주여 부르짖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줄 알았던 때가 있다. 이만큼 말씀이 곧 교리가 됨을 실감한다.   > 성경이 다르면 교회의 문화가 달라질 수 있다. 성전, 성직자의 개념이 없이 우리는 예배당(강당), 동일한 사역자 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자유함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 에라스무스를 보며 성경보존에 있어 다양하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심을 들여다 보게 된다. 그가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편집하는 동안 그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 같은 그의 확신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만,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에 답을 다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전적인 믿음이 있다. 완전한 성경을 보존해주신 믿음, 그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내 안의 믿음이다.             부천 소사에서 오시는 박경미 자매님께서 자매모임에 첫 걸음을 해주셨어요. 세 자녀를 두고 계십니다.     최근 새로 오신 우리 자매님들께서 얼마나 교제시간에 열심이신지,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두 자매님께서 또 얼큰한 동태찌게로 제법 추운 날씨에 움츠려드는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셨네요.   반찬도 뚝딱뚝딱  멋지십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따르는 믿음은 정말이지 보이는것으로 걷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걷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 입니다. 우리안에 드러나는 갈등과 논쟁의 대다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샬롬.  
2019-12-08 00:23:04 | 장영희
교재, 교제의 진수(?)를 보여주고 계시는 지역자매모임 자매님들, 참 보기좋습니다. 어떤 종류의 복음 사역이든 그것과 관련해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주는 유일한 규칙은 성경이다,  아멘!  
2019-12-06 23:50:44 | 이청원
일주일동안 기다려지는 자매모임~ 연애하는 심정으로 달려갑니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말씀으로 살고자 애쓰는 마음들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이삭의 배우자로 리브가의 선택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인을 바랬던 적이 있는데, 우리에게 더 자세하게 명시된 성경과 맑은정신으로 선택할수 있는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믿음의 길을 깨닫게 되어 감사합니다.
2019-12-06 17:57:36 | 정소희
일주일에 한번씩 자매님들과 교제를 나누다보면  한 주가 참 의미있어 집니다. 내가 한 이야기들 뒤돌아서 점검해보고 자매모임때 나눠야 할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생각해서 정리해보고, 거기에다 내가 모자랐던 사고의 부분들을 자매모임하면서 사고의 확장이 되니, 참 유익한 모임임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도 교제를 통해서 좋은 성품으로 성화되길 기도해봅니다.^^
2019-12-06 14:50:50 | 우종미
날이 추워지고 연말이 다가와서인지..추운날 가족을 위해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 형제자매님들께 그냥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더욱더 말씀안에서의 자유로움으로 힘얻어..세상속에서 열심히 나아가겠습니다~
2019-12-06 12:44:26 | 목영주
처음으로 믿음 생활을 우리교회서 시작한 자매님들은 일반교회서 힘들어 했던 일들을 들으면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에 눈이 동그래지곤 해요. 우리교회 더해진 많은 성도들이 자기도 모르게  몸에 익숙한 패턴을 따른 언행을 볼 때가 많이 있지요. 비운 컵에 담지 않고 반쯤 담긴 컵에 새물을 담았다고 표현하게 되는데 다행히 우리 자매님들은 예전것을 버리고 잘 안착하고 있어서 예쁘지요.    
2019-12-06 12:38:39 | 이수영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 Part 14. (p211-226) 단순한 정당성의 차원을 넘어서   ◉ 본문 내용 요약   어떠한 행동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좋은 의사결정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마저도 우리의 최종적 호소가 될 수 없다. 사도바울이 지적한 점이 바로 그것인 것 같다. “모든 것이 내게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내가 어떤 것의 권능 아래에도 놓이지 아니하리라.”(고전6:12)   * 다음의 예시를 통한 의사결정의 복잡성   1.의사결정과 양심의 가책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너무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연약한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규칙을 만들어 낸다.(이것을 먹으면 안 된다. 저것을 마시면 안 된다. 그곳에 가면 안 된다 등.)   우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이러한 점을 고려할 수 밖에 없으나 누군가가 고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고기를 주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자유롭다.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하나하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자유를 사소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울이 지키고자 하는 바로 그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유와 무관심의 문제- 연약한 형제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랑이 결여 되었거나 판단과 무시의 대우를 받지 않도록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교제를 유지시켜 주는 은혜로운 방식으로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양심의 기준을 다른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한다면 즉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양심을 자기 자신의 미성숙한 사고에 묶어두려 한다면 교회는 즉각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2.의사결정과 결혼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수많은 후보들 가운데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복잡한 의사결정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적인 사실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성경이 잘못 적용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과 관련된 하나님의 인도에서 많이 오용되는 본문인 창세기 24:12-20의 경우(이삭의 결혼문제) ①일상적이지 않은 섭리를 묘사하고 있다. ②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에 특수하게 주어진 상황이다. ③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의 직접적 후계자로 언약의 성취를 위한 특수한 상황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에 있지않다. 오늘날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보증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적 차원에서도 이 본문은 우리가 따라해야 할 모델이 아니다.   3.의사결정과 복음 사역   내가 해외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가? 선교나 목회를 고려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복잡성을 가진 의사결정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공통된 감정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음 사역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내적 열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같이 주관적인 감정이 종종 다른 모든 고려 사항들을 지배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감정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라고 확신하며 때론 그러한 확신이 너무 강해 다른 견해를 제시할 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칙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지도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떠한 규칙을 주셨는가?” 라는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의 고백으로 대답한다. “구약과 신약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지도해 주는 유일한 규칙이다”(소요리 문답2번)   어떤 종류의 복음 사역이든 그것과 관련해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주는 유일한 규칙은 성경이다.   바울은 몸 전체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섬기는자, 위로하는 자, 돕는 자, 구제하는 자, 지도자, 긍휼을 베푸는 자들)을 준비해 주신다고 한다.(롬12장)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은사들과 일치하는 그 어떠한 정당한 ‘소명’으로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 기독교 사역에 대해서 가지는 단순한 느낌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   직분에 반드시 필요한 자질,기술,은사,너그러움,성숙함,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흠이 없고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가르칠수 있으며 최근에 회심한 사람(초신자)은 안 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의 면밀한 조사를 통과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주의와 겸손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 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롬12:3)   이제 하나님은 교회가 그들 자신의 설교자를 선택할 책임을 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명한 지침을 따라서 적절한 은사를 가진 설교자들을 선택하기를 기대하신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사람을 강단 사역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부름’에는 두가지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 첫째는 복음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과 둘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라는 똑같은 부름을 받았고 누가 더 낫거나 더 못한 경우가 없다.   교회는 알맞은 자질의 사람을 이곳 저곳으로 부를수 있는데 그 어떠한 경우든 이것은 교회의 부름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것이 성경적 자유의 영역안에 있는 일이므로 거룩한 부름인 것은 사실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일도 거룩하며, 화형당하는 그리스도인 순교자도 거룩하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복잡한 경우가 많은 의사결정의 임무를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적인 기도,이성,신앙,지혜,형제의 사랑,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을 실천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 나눔의 글   1. 의사결정에 있어서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고정된 좁은 틀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을 사용해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율법주의가 아닌 오직 주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바른 말씀의 범위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2. 20대 때 잘못된 성경지식으로 현상만 보고 주님을 증명하려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구약시대에 사용되었던 사람들을 오늘날 내게 적용하며 마치 내가 특별한 사람인 양 나를 위해 애쓰고 살았던 무지와 어리석음속의  과거 삶들을 되돌아 볼 때 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시대적으로 잘 분별해서 이해하고 나의 사고가 그 진리들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삶으로 바뀔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이 모임과 좋은 책들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아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3.‘하나님의 인도’ 이 책은 믿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꼭 한번은 읽혀져야 할 만큼 좋은 내용인 것 같다. 책은 갈무리가 되었지만 다시한번 정독하여 읽고 싶다.   우종미 자매님표 셀프 김밥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먹을 때면 그 마음을 먹는 것 같아 먹기도 전에 배가 부릅니다. 너무 너무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2019-12-06 12:14:20 | 황선연
영과 육을 풍성하게 하는 나눔과 기쁨이 고스란히 전달되네요.^^ 비록 저처럼 사정상 참석이 어려우신 자매님들께는 매 주 올라오는 나눔의 글과 사진이 대리만족의 기쁨을 전해줍니다 . 수고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9-12-01 21:38:41 | 김경민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도록 보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도 또한 보전해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성경의 무오성과 완전성을 믿지 못한다는것이 오히려 이상하지요. 새로 더해진 자매님들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늘 꿀꺽 침 삼키게 하는 사진^^ 부럽습니다~
2019-11-30 12:43:21 | 이수영
채리티홀 자매모임 - “최종권위” >(11월 21일 and 11월 28일 교제모임)     *자매님들 나눔 내용*   >성경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연계되는 다양한 부분들까지 역사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카톨릭에 외경이 자리잡힌 근거를 잘 알지 못했는데 외경의 배경과 인정범위를 알고나니 좀 더 카톨릭의 교리나 또 우리의 믿음에 대한 명확한 믿음의 분별이 서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을 맞설 자신들의 교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필요한 ‘반종교개혁’의 중심기구였던 트렌트 공회가 구약에다 외경을 추가함으로 비로소 공식적인 카톨릭 교회의 성경으로 채택하게 된 배경을 보며 비성경적 카톨릭 교리를 안고 있는 외경의 특성도 파악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라는 말씀을 보며 말씀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또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살아있는 정확한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지난날에는 믿는 사람에게 마귀가 대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마귀는 ‘믿는 우리’를 위해 있는 존재로,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 곧 진리를 가리는 악한 영적 공격의 통로로 사용할 수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우리가 바른 말씀을 찾는 이유는 다른 역본들에 구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이후 성화의 과정, 즉 구원받은 우리가 바른 성경을 통하여 바른 것을 알고, 분별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경번역에 있어서도 번역자의 동기가 중요하다. 다양한 현대역본들의 번역의 동기와 배경을 우리가 잘 들여다보고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고어의 명확하고 정확한 표현의 귀함을 알기에 이해가 편한 성경으로서 최고의 현대역본이라 칭하는 말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의 완전성, 보존성을 믿지 않는 이들의 주된 주장은 원본은 이미 소실되었고, 하늘나라에 안치되어서 그 성경의 ‘말씀들’이 아니라 ‘사상들’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바로 성경학자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관주의 위험성도 우리가 인지해야 할 부분이다.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에 따라 성경을 대하는 최종권위의 대상이 달라진다.   >성경을 볼 때 목사님께서 성경은 문맥을 봐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실감케 된다. 우리가 성경을 문맥으로 보지 않는다면 단어 하나에도 수많은 의미가 있는 영어 또한 아무리 능통한 영어학자래도 바른 성경 번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잘못된 번역의 분별도 어려울 것이다.   >사해사본이 발견됨에 있어 킹제임스 성경신자인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공인본문이 있고 무엇보다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한 단어에는 여러 개의 의미가 있다. 많게는 열 개 이상의 뜻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면 어떤 한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임을 안다. 문맥에 맞는 옳은 의미를 선택하여 번역하는 그 과정까지도 우리는 성경의 완전함과 보존성에 개입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의 말씀을 통해서 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해주신 그 보존성의 확신 아래, 오늘날 만국 공통어인 영어로의 ‘바른번역’이 갖는 의미는 크다. 우리가 킹제임스 성경에 ‘최종권위’를 두는것도 이것이다. 더불어 원어로 된 필사본 혹은 성경을 존중은 하지만 거기에 최종권위를 두지 않는 이유 또한 이것임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두주에 걸쳐 자매모임에 첫걸음을 하신 자매님은 여섯분이나 계십니다. 동탄에서 오시는 이선희 자매님과 또 신현욱 자매님께서는 지난 주부터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번주 새로 오신 네분의 자매님들은 모두 다 적극적이고 열정이 넘치셔서 첫날부터 어색하지 않고 즐겁게 첫만남을 시작했습니다.   11월도 우리 자매님들의 여러 모양의 섬김으로 풍족히 채워졌습니다.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샬롬~!!  
2019-11-29 20:27:21 | 장영희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제하는 자매모임~ 거리 먼 교회의 보완점으로 충분히 채워줍니다^^ 바른말씀을 듣고 말씀에 대한 확실성과 신뢰가 쌓여 갈 수록  바이블 코드니 다른 매개체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헛수고를 안하게 됩니다. 맑은정신으로 읽으면 충분히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19-11-29 09:42:41 | 정소희
매번 모임 갖을때마다 깨닫는 것- 말씀 더 가까이 하자-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도 잘 안되는 저의 죄성 게으름을 공개하면 내일은 좀 분발될까요^^ 죄 많고 쉽게 넘어지는 우리들이라는 걸 알기에 아픔을 공감하는게 어렵지 않습니다..또 그것만큼 큰 위로는 없는듯 하구요..우리 사랑침례교회 가족들은 올겨울 감기도 덜 걸렸으면 좋겠어요~~
2019-11-28 21:54:09 | 목영주
자매님들이 모이면 시간이 금방가요~ 서로가  애로 사항도 나누면 서로 도와서 해결하며 나가는 우리 자매님들 너무 귀하고 예뻐요.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누어주는 자매님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2019-11-28 21:38:12 | 이수영
구리 남양주 자매 모임 교 재: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13 일 시: 2019년 11월 28일 오전 11시 장 소: 강동구에 사시는 이 선 희 자매님 Part13: 고삐 뿔린 하나님의 인도 - ‘바이블 코드’의 어리석음   ●본문 요약 교회 안에서 터무니없는 신비주의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A.D.63 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일을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 “3.내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에 에베소에 여전히 머물 것을 내가 네게 간청하였나니 이것은 네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며 4. 꾸며 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느니라.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바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 주는 일보다 오히려 논쟁을 일으키나니 그렇게 할지 니라.”(딤전1:3~4) 눈먼 인도자들이 제시하는 기독교적인 ‘인도’가 세대마다 있었다. 그 한 가지 예는 ‘바이블 코드’라고 하는 것이다.   ☞바이블 코드 마가1 1997년 영지주의자이자 기자인 마이클 드로스닌은 [바이블 코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는 컴퓨터를 사용해서 성경을 관찰함으로써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의 암살을 포함해서 20세기 말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예측하는 암호화된(숨겨진) 예언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무작위로 배합된 히브리어 문자들 속에 배합 되어 있는데, 어떤 때는 세로로, 어떤 때는 사선으로, 어떤 때는 앞으로 또 어떤 때는 뒤로 그러한 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 이름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인쇄된 텍스트를 인위적으로 조작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진 이름들은 ‘메시지’라고 가정된다.   ☞바이블 코드 마가 2 래리 미첨이 쓴 [바이블 코드에 있는 9.11] 이다. 그는 더 많은 신빙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의 규칙은 “그 어떠한 ‘새로운’ 자료든 ‘암호화되지 않은’ 성 경을 통해 이미 알려진 교리와 반드시 일치하게 하라”이다. 미첨의 터무니없는 ‘규칙’은 이런 것들이다. 예를 들어, 클리포드 윌슨 이라고 하는 사람의 개인적 정보와 그의 직업 관련 정보가 성경에 많이 나와 있다고 주장한다. 사별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의 이름, 그의 네 자녀들의 이름, 그의 아버지 이름, 그의 어머니 이름, 그의 출생지, 그의 두 번째 아내의 처녀시절 이름 전체, 그 아내의 탄생일과 다른 기타 개인적 사항들 등이 있다.   위의 것들은 히브리 언어를 철저하게 악용하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의 히브리 문화와는 전적으로 상관없는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위의 저자들은 성경을 우연과 순전한 신화의 게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영감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며 인간 저자들의 지성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나도 혹시 바이블 코드에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실제로 위의 책들은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바이블 코드에 숨겨져 있다고 가정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마지막 때까지 일어난 일들이 모두 토라에 들어 있다”라는 성경에 대한 틀린 관점에 대한 결과물인 것이다. 성경은 ‘모든 것’에 대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이지, ‘모든 역사’가 아니다. 성경은 선택적이지, 포괄적이지 않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언약 계획, 언약 백성 그리고 언약 성취에 대한 책이다.     위의 내용들에서 얻어지는 몇 가지 피할 수 없는 결론들이 있다. 첫 째, 순전히 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다 임의적이고 인위적이다. 글자배치 연쇄는 부피가 어느 정도 되는 책이면 어디에나 다 등장한다. 전화번호부도 포함해서 말이다! 둘 째, 성경이 글자들의 집합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석의가 폐지되어 버린다. 진정한 석의는 문법, 문학 장르, 그리고 문맥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 하지만 ‘바이블 코드’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셋 째, 예수님은 결코 성경을 그렇게 다루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항상 텍스트를 언급하셨다. 예수님의 끊임없는 외침은 ‘기록되었으되’였지 결코 ‘암호화되었으되’가 아니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문법적으로,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격언은 격언으로, 시는 시로, 그리고 역사적 서사는 문자적 사실로 다루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바이블 코드는 생뚱맞은 것이며, 오류이고, 어리석은 신화다.     ●자매님들의 나눔들 ☞이 ‘바이블 코드’에 대해서 말로만 들었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장에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말도 안 돼! 어떻게 성경을 저급하게 숫자나 글자의 조합으로 판단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거짓 정보를 퍼 나르는 거지?” 좀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고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역사서나 신화로 보는 이들에겐 충분히 가능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론 이 곳에 오기 전의 교회에서 잘못 배운 지식으로 성경에서 자꾸 신비한 것을 찾고 자신을 향한 특별한 계시가 있음을 확인하려고 매일 묵상을 하며, 구원받은 증거로 방언을 하려고 기를 쓰고 예배 참석하며 방언 기도하며 신유의 은사 체험을 사모했었던 종교적인 패턴들이 생각났다. 나를 위한 복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 복 받기 위해서 마치 숨겨진 코드를 찾아 헤매듯이 종교생활로 채웠던 과거의 시간들 말이다. ‘바이블 코드’는 주님을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나오는 인간의 본능에서 나오는 죄 성을 갖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대인을 향한 주님의 말씀들도 무시하고 한국 사람들이 신약의 주인공이라고 우기듯이 말이다. 아마도 성경에 대한 확신과 주님을 모르는 자들은 죽을 때까지 예언자들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인생을 그 예언에 맡기고 살아갈 것이다.   ☞성경 말씀 하나하나, 즉 성경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될 수밖에 없다. 복잡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 그것만한 기쁨이 없고 위로가 되는 게 없다. 바이블 코드의 인기도 결국엔 사람 위주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내 느낌보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내 삶을 수시로 비춰봐야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이블 코드, 다빈치 코드 등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도해서 성경외적인 것으로 관심, 시간 ,돈을 쓰게 하는 것이다. 또한 바이블 코드는 성경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이나 갈망 등을 꿰어 맞추는 것이다. 스턴버그가 지적 했듯이 모비 딕 코드도 되고, 토지코드는 어떤가? 참 어이없고 웃기는 이야기인데도, 비싸고도 두꺼운 책인 바이블 코드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참 이상하게 보인다.   ☞‘바이블 코드’란 책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15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믿음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되고 오히려 복음을 모른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 이라고 판단되어진다.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것에 대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책이라 여기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책이었기에 또 바른 신앙을 언급하기 위해서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올바른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을 다시 확인 했고 행복한 교제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 자매 모임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고 기쁘다. 사랑의 침례교회로 온 이후의 내 삶이 영혼의 자유를 느끼며 그 자유함의 참 맛을 알아가고 기쁨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더욱 더 감사하다. 말씀을 제대로 몰랐으면 위의 책들에 맘을 빼앗겼을 것을 말씀을 제대로 알아가니 위의 책들의 허영심과 잘못된 지식들에 답답해 질 뿐이다. 좋은 말씀을 알아가는 데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데 쓸데없는 책에 시간과 돈과 관심을 쓰고 싶지 않다. 자매모임을 하면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든든하고 맘 속 깊은 내막의 얘기들과 가족들과의 갈등이야기 등 밖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고 좋다.
2019-11-28 21:19:52 | 우종미
초겨울의 풍경이어서  아쉬웠지만  모처럼의 야외소풍에  각자 여러모로 수고해준  자매님들 덕분에 즐거웠지요.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든지 한 믿음 안에 있어 대화가 통하는 자매들의 교제였지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할 수가 없지요. 숨겨진 뜻을 찾으려 말고 문맥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
2019-11-22 22:18:16 | 이수영
감사하는 척이 아닌 정말 감사해서, 위축되어 있는 주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위치까지 저를 세워 주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말씀 사랑하며 가정 이웃 잘 섬기다 가겠습니다~
2019-11-22 09:05:32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