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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성도님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장마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장마로 인한 침수에 잘 대비하셔서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랍니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기록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른 사례들이 책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유익을 위해 줄거리는 최대한 간소화하여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제2장 성경과 단어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합 3:2)… 과연 적절한 번역일까?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부흥'의 개념- 한국 교회는 '교인 수가 늘어나는 일'과 '부흥'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하박국의 구절을 즐겨 인용해 왔다.  리바이벌과 부흥은 같은 말이라지만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이바이벌은 다시 돌이킨다는 뜻이지만 한국 교회에서 부흥은 다시 부(復)에 흥할 흥(興)인데 , '부'보다는 '흥'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성경은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 자의적 해석, 감정을 담은 다어 선택, 목적을 반영한 번역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뜻이 딱 떨어지지 않고 답답할 때도 있지만 왜곡의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더 정확히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은 성경 번역과 해석과 적용은 '말씀을 내게 맞출 것인가', '나를 말씀에 맞출 것인가'의 싸움이다. 악귀, 사신, 산 영, 생령… 왜 성경에 이런 단어가?  영, 혼, 육은 따로따로- 사람에게는 영이 있고 혼이 있다. 이를 동시에 부르는 한자어 '영혼(靈魂)'은 성경에 없다. 스피릿은 스피릿이고 소울은 소울이다. 성경에서 구분하는 혼이란 사람 자신이며, 마음이고 정신이며 목숨이다. 스스로와 외부 세계를 판단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 혼이다. 몸은 죽어도 혼은 영영 죽지 않는다.  영은 좀 더 깊은 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느끼는 부분이며 내 것이라기보다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육적인 사람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가까이 한다. 혼이 그 선택과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귀신은 다 마귀의 졸개들- 개역성경의 악귀나 귀신은 다 마귀들(devils)이다. 큰 마귀(Devil) 루시퍼의 졸개들인 악하고 부정한 영들로 마지막에 불 호수로 가 영원히 형벌받을 존재들이다. 이들은 온갖 현상과 갖가지 방법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데, 사람의 혼령인 척하는 것도 그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일 뿐이다. 한편 드라마 <악귀> 등 퇴마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킨다. 악령이 있고 선한 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고, 악귀를 내쫓고 퇴치하는 자들은 선한 능력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 악하고 악한 영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뿐이다. 생육하다 vs. 다산하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면서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셨다. 땅은 많은 열매를 내고, 그 씨앗들도 가장 좁은 공간에 가장 많이 맺힐 수 있도록 수학적으로 설계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것을 인간이 제한하고 끊고 자르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하나님도 아무 때나 열매를 줄이고 멈추신다면 사람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은 출산 장려 캠페인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말씀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많이 생산해 다양해지고 수를 늘리라는 것이다. 뜻은 알겠지만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말이기 때문이었다.  "자식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열심히 생육하시길."  "애가 넷이면 생육을 잘했네."  개인적으로 '생육하다'라는 말에서 자녀를 되도록 많이 낳거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세상을 채우는 것이 떠오르지 않아 출산 장려 효과 면에서나 이해하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생육'이 아닌 '다산'으로 번역했다(창1:28, 흠정역) . '다산(多産)'은 물론 많이 낳고 많이 열매 맺는 것이다. 훨씬 쉽고 명료하다. 물론 이것도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생육하다'하는 말보다 현실적이다.  번역은 선택의 예술이라 했다. 단어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고민할 때 번역자는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성경이라면 언어와 교리에 모두 능숙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배제하고 그대로 옮기려는 의지가 있어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바른 관점과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균형이다. 우리는 이 책을 보고 공통적으로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킹제임스 흠정역 덕분에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고 바른 교리로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역된 단어 하나로 인해 기독교에 샤머니즘이 만연하고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단어, 한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역시 책이기 때문에 앞뒤 문맥에 따라 읽었을 때 누구든지 쉽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이 책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06-30 20:49:48 | 박수현
안녕하세요, 자매님. 자매 모임에 참석 인원이 늘어 조가 4개로 나뉘게 되었고, 교제는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최대한 수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6-30 20:44:19 | 박수현
사진을 보는 즐거움이 있네요.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자면 실제로 나누어진 이야기가 궁금해요. 전에는 이리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러하다든가, 진실을 알고나서 생활 속에 적용했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이지요. 요약은  간단하게 하셔서 책을 보는 사람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4-06-19 13:34:03 | 이수영
하나님계심을 많이 느끼게 해준 책으로 읽으면서 많이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성경이 이세상에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는 문해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공감은 하되 진리는 하나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하루 잘 살아내겠습니다~^^
2024-06-18 08:12:09 | 목영주
안녕하세요? 저는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곤 합니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연한 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제도 늘 그러한 것 같습니다. 6월 6일 공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하며 나누는 교제 시간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새 책으로 첫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재욱 저자의 [문해력으로 읽은 성경]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성경의 이해 제2장 성경과 단어 제3장 성경과 번역 제4장 킹제임스 흠정역 변호 이번 자매 모임에서 나누었던 제1장을 간략히 공유하겠습니다(문해력을 체크 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재미와 유익을 위해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성경 문해력 테스트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문해력이 많이 요구된다. 물건의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며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지하철의 안내판을 보면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등의 일도 다 이에 해당한다.  성경에도 문해력은 꼭 필요하다. 문해력(literacy)은 유창성(fluency)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유창성은 어떤 문장이나 설명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므로 문해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기 편한 정보가 많은데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먹기 편한 초가공식품이 많아지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많은 성경 지식들은 사실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많다. 하지만 읽은 부분이 내 부족한 문해력을 통과하면서 엉뚱한 내용이 될 정도면 곤란하다. 마귀는 사람의 뇌를 망치고, 번역가를 망치며, 언어 자체를 붕괴시킨다. 그리고 계속 의미를 바꾸고 더하고 빼며 훼방한다. 우리에게 바른 문해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제 당신의 성경 문해력을 체크해보자.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많은 자들은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인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 ● 이 구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을 다음에서 고르시오. ①웬만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②선생이 되면 정죄받는다. ③많은 사람이 선생이 될 필요는 없다. ④선생이란 엄중한 자리이니 선생이 되려는 자는 신중해야 한다.  ④번이 정답이긴 하지만 ③번도 어느 정도 진실이고, ①번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반어법에 해당한다.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 부정적 메시지를 부풀려서 하는 말이다. 성경 구절에서 정답이 여러 개인 경우는 많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조심할 것은, 진실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그것이 전혀 거짓은 아니니까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쉽다. 광고에서도 이런 수법은 자주 쓰인다.  "이 약으로 당뇨가 완전히 개선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저 약을 먹는 동안 병이 나았을 수 있지만 꼭 그 약 때문에 나은 것인지 알 수 없고, 광고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을 텐데도 이 약을 먹으면 누구나 나을 것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런 광고 문구는 일부분의 진실이면서 교묘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 구절에 담긴 정답 이외에 다른 보기에 담긴 일부분의 사실, 그 작은 가능성을 일반화해서 확대하고 그것을 진실이나 정설, 나아가 진리로 확정해선 안 된다.  평균적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고 양극단화하는 세상이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는 각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돌아간다. 신앙적 성숙함에 더해 말에 대한 이해력과 최소한의 주변 지식을 챙겨 스마트하고 현명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제 말씀 한 줄을 읽어도 신중하게 대하고 주의를 기울여 보자. 교훈이 아닌 '교리(doctrine)'를 가르치신 예수님 교리는 딱딱한 것?  종교란 본래 사람이 만들어 숭배하고 탐구하면 철학적으로 고고한 삶의 길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이런 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 정답이 없이 각자가 찾아가는 해탈과 도달의 과정이 아니라 절대자가 빈틈없이 짜 놓은 어떤 계획을 알려 준 대로 발견하고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통해 복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복이란 인생의 복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육신의 문제를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복이고 천국의 복이거늘, 성경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때때로 무척 종교적이며 두루뭉술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파악하고 순종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먼길을 돌아갈 수도 있고, 성화와 구원의 순서를 반대로 하느라 괜한 고생을 할 수도 있다.  '교리' 하면 대게 딱딱하고 이론적인 것을 떠올리면서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 교훈과 체계적인 교리가 둘 다 중요한 것이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교리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개역성경에는 '교리'라는 단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는 조직 신학 등 후대에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은 신구약에 57회나 등장한다. 교훈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것  마가복음에는 공생에 초기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부정한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있다(막1:22, 27). 제자들과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교리에 권위가 있고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로 부정한 영들까지 내어 쫓으셨다. 개역성경은 '교리'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번역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doctrine(독트린, 교리)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현대 역본은 티칭(teaching, 교훈, 가르침)으로 바꿨다. '교훈'이란 가훈, 급훈처럼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좋은 얘기 정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는 현대 역본 번역자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 번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라고 보는 그들은 '독트린'을 '티칭'으로 바꿔 예수님의 사역을 편하하고, 성경의 묘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  교훈과 가르침은 성인군자나 철학자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리는 다르다. 기독교 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면 놀랍도록 흥미롭고 쉬운 것이 교리다. 그러나 대다수의 강단에서 그저 주제식 교훈이 선포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에도 많은 교훈이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경륜이자 로드맵에 관한 필수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신비(mystery)다. 이것은 보편적 교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진리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교리 안에 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마13:11)  교리적 신비의 특징은 말 그대로 비밀이라는 점이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 마음이 강퍅한 자들, 목이 곧은 자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은다. 성도가 마음을 열고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로 나아가면 유익이 있다.  우리가 올바른 교리를 알아 갈수록 기독교를 여타 종교의 틀에서 뭉뚱그려 생각하는 습성도 점차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조물주(造物主)인가? 창조자 vs 조물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Creator)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겼느니라.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니라. 아멘. (롬 1:25)  영어로 creator가 아니 Creator라고 이니셜을 대문자로 쓰는 것은 단순한 제조자가 아니라 신적 창조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로마서의 '창조자'를 '조물주'로 번역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롭 1:25, 개역)  물론 '조물주'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조물주라는 말은 좀 더 중립적인 용어다. 세간에 떠도는 유행어 중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듯이 불신자들도 조물주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물론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물주는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제인 먼저 원불교 용어 사전의 설명이 등장한다. 원불교에서는 조물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라고도 한다니, 이런 사상이야말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창조물을 창조자와 뒤바꾸는 개념이 아닐까.  창조(創造)와 조물(造物)은 다른 말이다. '창조'는 무언가 새롭게, 또 창의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개념인 반면에, '조물'은 글자 그대로 무언가 만든다는 뜻만이 들어 있다. 또한 조물주라는 말은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주(主)'로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타 종교의 잡신을 '주'로 인정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다.  성경은 문학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이므로 단어의 기계적 중립성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주관적으로 번역해야 오히려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라는 단어는 오역이 아닐지 몰라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조물주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 편에 서라! 공정성과 객관성의 문제  법원이나 언론은 늘 객관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고, 자기 이득을 위해 게편을 드는 가재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는 돈이 있다. 돈이 왕이며 맘몬이 최고신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인간의 갈대 같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객관성에도 종류가 있고 대상이 있다. '자로 잰 듯한 중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론이라면 감정을 빼고 양쪽의 의견을 글자 수까지 동등하게 보도할 정도록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양쪽 말을 똑같이 다룰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중립은 공평일지는 몰라도 공정은 아니다. 사안의 경중이나 정의에 대한 기준이 빠진 중립을 비꼬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판단할 때도 이런 갈등에 부닥칠 때가 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객관적인 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가장 공정하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불공정이며 횡포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그들의 비판을 수용해야 할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성경  누군가 권력가나 대기업과 소송 중인데 판사가 내 편이 아니면 낭패일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이 해석하거나 번역하거나 설교하면 제대로 된 것일 수 없다. 특히 성경은 무조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고 쓰는 성경이 거의 전부인데, 물론 그것이 문법적으로나 어법상 맞는 것이지만 과연 잘하는 일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 27:26, 개역)  바라바도 바라바, 예수님도 예수다. 문법이란 세상의 약속이지만 하나님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은 예수라 쓰지 못하겠다 하면 그만이다.  그때에 그가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니라. (마 27: 26, 흠정역)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고유 명사에 '님'을 붙이면 안 되는 어법을 그렇게 잘 따지려면 모든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어법상 회중기도 중에 타인에게 존칭을 붙여선 안 된다. 대화하는 대상인 하나님보다 더 낮은 존재를 언급할 때는 내게 아무리 높아도 존칭을 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기독교용어연구회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시정을 교육해 왔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몰라서도 그렇지만 알아도 면전에서 담임 목사를 김 목사, 이 목사 이렇게 지칭하는 대표기도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하는 기도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가? 물론 사람도 듣기 때문이고, 어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존칭을 빼기도 어렵다. 어법은 알아도 존중의 의미이며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면서 어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존중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경은 왜 굳이 어법대로 예수님을 '예수'라고 표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책은 애지중지하면서도 안에 있는 표현이 하나님을 깍아내리고 폄하하는데도 무감하다면 말씀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엔 하나님 쪽으로 기우는 것이 낫다. 실패할 수 없는 공평한 길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고 하셨다. 사람도 그럴 텐데 당연한 이치 아닌가…  타 종교와 기계적 균형을 맞추는 자들, 마치 남 얘기하듯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나열해 놓고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 자체인 말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편파적이어도 지나치지 않은 하나님 편에 서라!            
2024-06-17 18:58:42 | 박수현
안녕하세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와 평안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풍성이 부어지길 바랍니다. 자매 모임에서 나누고 있는 책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도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며 이번 주는 더욱 깊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요, 놀라운 것은 매주 자매님들의 참석이 늘어나 다음 시간부터 4개의 조로 편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열매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경건 서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성경정인 것들은 각자의 삶에 적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한 번에 잘되진 않습니다).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시는 자매님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셔서 저는 감사함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책의 마지막을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17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다  마지막 단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어떻게 적절하게 마무리할지 자문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충만한 소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 점을 놓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되는 소망에 일시적으로 동기 부여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소망의 원천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될 때까지는 그것이 꽤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망을 주는 실망  당신의 삶에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다음에 나오는 실제 삶의 예를 살펴보자.  벤과 에밀리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기대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결혼 예비 상담을 받으러 왔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듯 했다(교회에서 예식을 위한 시설물 허가를 내주기 전 요청하는 것이었다). 에밀리는 자신들이 대화를 잘하고 있으며 둘 사이의 문제도 잘 해결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걱정스러웠다. 그들의 소망은 상대방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다.  6개월 후 벤과 에밀리를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얼굴의 미소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죄인과 죄인이 만나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중대한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얼마 되지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그들의 큰 문제였다. -실망을 주는 세상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삶의 음악은 종종 우울한 느낌을 주는 단조로 연주된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해보라.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거의 없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은 그런 것이다. 실망은 사실 모든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고, 슬픔은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감정이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곳이 빛나고 밝고 개인적으로 동기 부여를 주는, 영원한 소망을 주는 곳이라는 사실임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소망  이 끔찍하게 망가진 세상에서의 삶은 힘들다. 때로는 모든 것이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악인들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들은 계속 해를 당하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다. 정직하면 빚지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이처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소망은 어리석은 자의 전유물 같다.  낙담할 이유들은 많다. 두려워할 것들도 많다. 우리 중 누구도 실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지니는 근본적인 점 중 하나는 그곳이 밝고 빛나고 영원한 소망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실망을 주는 소망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5절에서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다. 사도 바울은 매일의 우리 삶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축하는 것들을 찬양하고 있다. 바울에게 소망을 준 것은 삶의 환경이나 관계가 쉽고 잘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소망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 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이 점을 조심스럽지만 폭발적인 원리로 보여준다. 바로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그것은 잘못된 소망이라는 것이다. -다른 길  하지만 다른 소망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보증된 약속들을 받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왕국이다. 우리가 마주치고, 경험하고, 견뎠던 모든 것에 다 목적이 있다. 마지막 결산이 있을 것이다. 모든 악한 것이 패하여 사라질 시간이 올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자신의 작은 왕국의 욕망들을 '필요한 것'으로 승격시킬 때, 더 이상 이런 보증된 약속들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소망하고, 간절히 바라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확신했던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주신다면, 그분이 은혜로 당신을 해방시키려 한 중독적인 것들을 장려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느끼는 필요를 보충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는 소망이 없고 자멸하게 되어 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이 주신 최고로 좋은 것들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은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그분에 대한 소망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동기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두려움 없이 그분 안에서 쉬는 것이다. 당신이 이 소망을 알게 되고, 이 소망으로 사람들과 환경을 다루게 되고, 당신의 소망이 진정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있을 때,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될 것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로 함께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6월 6일은 현충일로 한 주 쉬어가고 그 다음 목요일에 새로운 책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 -김재욱-]으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2024-05-31 21:31:29 | 박수현
꼼꼼히 읽으면서 마음을 재점검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마음 지키기 위해 일상생활하며 되뇌이는 문구가 있어요 '저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입니다~^^ -열심을 다해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산물들이 거기에서 나오느니라- 잠언 4장 23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5-28 21:51:07 | 목영주
죄로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주예수님의 부르신 부름에 합당히 살아가도록 애써야 하는  마지막 시대에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으로 살 수 있도록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세상에 살아갈  힘이 되지요. 기쁨으로 섬기는 자매모임이 성화를 이루어가도록 힘을 줍니다.
2024-05-28 06:17:52 | 이수영
안녕하세요, 한낮 기온이 올라가며 더위를 느끼는 것을 보니 초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봄의 새싹들도 점점 자라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게 보이네요. 성도님들도 또 다른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주님의 신실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매들도 주님의 신실함을 닮아가기 위해 어김없이 이번 주 모임을 열었는데요. 폴 트립 저자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느새 후반부에 다다라 15, 16장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희생의 필요성과 역설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고, 또 불완전한 사람의 분노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 말씀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15 예수님 외의 모든 보물을 내려놓으라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한다는 걸 아는가? 왜 연예인들은 그토록 치열한 개인적, 정신적, 신체적,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까? 그 대답을 생각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이나마 TV에 노출됨으로써 상당한 단기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또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특권을 자랑할 수 있고,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존재다. 우리는 뭔가 하기로 마음을 정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놀라울 정도로 희생을 한다.  직장에서 하는 희생은 놀라울 정도다. 일터에 일찍 가서 늦게까지 일한다. 상사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 감사,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도 놀랍다. 상대의 모든 변덕을 맞춰주고, 그들에게 우리의 일정도 맞춰주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체중을 감량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장하고, 여유 있는 특별한 휴가를 즐기고,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갖고, 학위를 취득하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명품 신발을 신고, 하나의 주제에 전문가가 되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척과 친구를 방문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항거하고, 혹은 이 모든 것을 벗어나 단지 쉬기 위해 사람들이 희생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에 갖고 있기 마련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느냐다. -희생의 왕국  이 왕국 역사의 중심에는 충격적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왕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완벽히 이해되는 희생이면서 동시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희생이다. 그리고 그 희생이 그때부터 왕국의 운영 일정을 결정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이 상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양식도 주셨다. 이 왕국은 십자가의 왕국이고, 그 희생을 기념하는 모든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금항아리  '무지개 끝에서 금항아리를 찾는다'는 속담처럼, 우리 모두는 자기 나름의 금항아리를 찾으며 살고 있다. 즉 모든 개인적 희생의 이면에는 어떤 보물에 대한 탐구가 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요청도 설명해준다. (눅14:28-33) 예수님은 그들이(또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얻고 지키고 즐기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생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서 황금 항아리를 찾아보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분이 계셔야 할 자리를 넘보는 다른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우리를 통치해서는 안 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움켜쥔 삶  당신 삶에서 현재 주먹을 꽉 쥐고 움켜쥔 부분은 어디인가?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서 뭔가를 빼앗으려 하자 그 사람이 그 소중한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손이 하얗게 되도록 물건을 움켜쥐고 있다. 익숙한 장면 아닌가? 당신이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주먹이 하얗게 되는가?  우리는 물건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쥐었던 것이 어느덧 우리를 통제하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손을 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요청하신다.  우리가 합당하게 소유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또 신속히 사라져 버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소유할 때다. 16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선한 동시에 분노하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가장 위대한 드라마기에 한 번 읽어서는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지만 자주 오해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바로 야고보서 1장 19-20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진노하는 것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분노의 연대기  성경 이야기는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은 전쟁'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즉 성경 이야기는 두 가지 분노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분노다.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 즉 거룩하고, 의롭고, 완벽하고, 사랑이 담긴 방식을 원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분노다. 사람들은 왜 분노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방식, 즉 거룩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의롭지 않고, 불완전하고, 사랑이 없는 방식을 원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이 두 분노는 공존할 수 없다. -두 가지 분노, 두 가지 명분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운 명분, 그분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버리실 수 없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고, 버리셔도 안 된다. 그분의 의로운 명분으로 인해 분노하시는 그 열정이 온 세상의 희망이다. 그분의 방법은 옳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도 영적으로 자신의 명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길 원한다. 결국 사람의 분노의 그의 운명이 된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이 분노하지 않으실 때 분노한다. -은혜의 격렬한 분노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가 얽혀 있는 것을 볼 때, 다가올 충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두 분노가 충돌하면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두 분노는 결국 충돌하게 되지만 어디서 충돌할지는 예상할 수 없다. 이 둘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한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격렬한 은혜의 자리요, 영원한 변화를 가져온 십자가라는 한 극적인 순간에 분노가 폭발한다. 사도행전 2장 22-24절에 적힌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죄와 반역을 저지르는 세상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분의 분노를 표현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분노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자기 방식을 원하며 메시아를 미워하고 분노한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갔다.  이 분노의 순간이 심판이나 정죄로 끝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은혜의 격렬한 분노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선과 분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무슨 일을 하려고 하셨는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왕국이 그분의 목표였을까? 아니다. 십자가는 매일 분노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처나 세상의 아픔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방해받기 때문에 화를 낸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분노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까지 만드시고자 한 사람들의 문화는 그분을 매우 사랑하고, 그분의 의로운 명분에 온전히 헌신하고, 죄가 그들과 세상에 행한 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매일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문화다. 이 사람들은 선한 동시에 분노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기에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분노다. 죄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해하고 은혜로 반응하는 긍휼의 분노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의로운 분노를 가지게 하려고 죽으셨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작은 왕국의 열망을 실현하는 데 끊임없이 장애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환경에 대해 속으로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와 그 죄가 당신과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당신은 죄가 당신이 사는 세상을 망가트린 것에 분노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드라마  성경에서 펼쳐지는, 즉 두개의 서로 대립하는 분노를 다룬 이 거시적 드라마는 당신의 삶이라는 미니 드라마이기도 하다. 일상의 상황과 관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이 두 가지 분노 중에서 어떤 것이 당신의 마음을 통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이라는 자기희생적인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긍휼이라는 회복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정의라는 구속하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평화라는 화해시키는 분노를 드러내겠는가?  이런 식으로 분노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꿈에 붙들리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운 명분을 갖게 되었기에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게 된다. 지금 현재 일상에서 당신은 누구의 왕국을 위해 분노하는가?          
2024-05-27 22:55:50 | 박수현
안녕하세요, 이번 주 자매 모임은 독서 모임 대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선교사들, 조선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는데요,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방영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으로 건너온 많은 선교사들이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삶(문화, 생활, 전통 등)을 영상으로 기록했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배척받는 약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방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의료, 그리고 교육 등을 아낌없이 제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조선 팔도에 널리 퍼지는 귀중한 모습들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1890년 조선 땅에 100명 남짓 되었던 성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0만 명이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 대한민국이 건국된 기적의 나라, 은혜의 나라, 나의 조국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천에 있는 성경 전래지에 가면 1816년 조선 땅에 킹 제임스 성경이 최초로 들어오게 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스토리는 직접 방문하여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이 땅에 전달되었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고 생각되네요. 자매 모임 사진을 공유합니다.                    
2024-05-17 18:50:40 | 박수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나약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받아들일때 저의 잘못을 인정하는게 좀 더 쉬웠던것 같네요..이기심에서 오는 것이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오는 자기왕국 쌓기든 그 해결은 하나님계심 아는것! 그분의 은혜가 내것이 되고 그분을 신뢰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시련,힘겨움 속에서 예수님 붙드는 훈련은 자기왕국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2장 15-1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5-14 07:23:1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지난 한 주 동안 봄비가 내려 미세먼지와 황사가 많이 사라지고 쾌적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이번 자매 모임은 A, B, C 조 모두 인천대공원에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으로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독서 나눔은 챕터 13, 14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이 책의 후반부를 달리며 우리의 영적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지 깊숙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용서를 구하는 겸손과 그것을 허락하는 은혜에 관한 것이다 샘의 이야기: 샘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부적절 했을 뿐 아니라 죄라는 것도 알았다. 여러 번 퇴근 시간보다 빨리 퇴근하면서 동료에게 근무기록 카드를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최근에 쌍둥이가 태어난 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또 자기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다 그 일들이 적발되고 말았다. 마음으로는 수없이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죄인들도 지적하고 싶었다. 또 자기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 상기시키고 싶었다. 원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배고픈 코끼리에게 땅콩 한 알을 주는 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상사의 사무실로 걸어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변명거리를 찾았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이리도 어려울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 뜻, 내 방법  사람들을 두 가지 행사에 초대했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무언가를 항의하는 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고백하는 행사라면, 어떤 행사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 같은가?  용서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은 삶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자신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용서를 구할 수 없다. 자기 왕국에 대한 견고한 충성심은 우리가 고백하는 것을 싫어하게 만들고 현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방해한다. 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가? 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 하고 다음 날을 두려워하는가? 왜 냉소적이 되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왕국에 충성하려는 본능이 유전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고, 비난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 된다.  개인적인 왕국, 개인적인 행복을 구하려는 싸움(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은 모든 죄인이 경험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굉장히 사소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래서 원할 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거나, 누군가 내 주차 공간을 차지했거나,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몹시 화가 나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왜 이 땅에 태어났고, 왜 하나님의 은혜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는지 잊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모든 선물을 하나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용서의 왕국  용서를 구하는 것은 또 다른 왕국을 볼 때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큰 왕국이 말하는 엄청난 문제에 자기도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제안은 용서다. 하나님 나라 중심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왕이 사는 거대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상처 입은 왕이 매달려 있는 피투성이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그 왕은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신다. 그 왕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 왕국에 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의로워지셨고, 죄인인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일상의 태도가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지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왕권에 도전하고 우리가 더 나은 왕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매우 기뻐하시며 용서의 팔로 우리를 감싸주셨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선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한히 아름다운 것에 속하도록 우리를 초청해주셨다. -바로잡기  그리스도의 은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용서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고,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분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왕국을 나와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용서는 전쟁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전쟁이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 자기 의와 값없이 얻은 은혜 사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우리의 마음밭에서 매일 벌어진다. 그러나 우리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더 나은 왕국으로 우리를 환영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마지막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싸우시는, 전쟁에 능하신 왕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그분께 속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기보다 15초짜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울지라도 희망이 있다.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더 원할지라도 희망이 있다. 속히 용서하는 것보다 복수를 꿈꿀지라도 희망이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매시간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우리를 대신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신다.  그분의 왕국이 올 것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은 그저 멍하니 앉아 그분의 왕국 자녀들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즉 그분은 우리 영혼의 자유를 위해 싸운신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통치하시기 위해 싸우신다. 우리가 욕망을 벗어버리고 생각을 집중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완전하게 임한다면, 그곳은 반항하는 시민들을 계속해서 바로잡아가는 용서의 왕국일 것이다. -용서와 큰 왕국  용서를 구할 때마다 성경이 당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정확하다고 말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이기심은 당신의 가장 큰 죄며, 오직 은혜만이 희망이라고 말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마음 편하게 반역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당신의 시야가 정확해지고, 지성은 명료해지며, 마음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용서가 그 일을 단번에 최종적으로 마치게 될 영원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삶의 방식은 당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이다. 14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가?  교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거나, 주님과 함께한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거나,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볼 때, 이 모든것 배후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것, 한가지 근본적인 추구, 한 가지 확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이 중요한 한 가지는 어떤 추구나 습관이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의 열정이다.  왕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요구하신 모든 선한 것 뒤에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해줄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이 중심적이고 지속적인 로맨스다. 이 로맨스는 우리 삶의 단 하난의 거룩한 로맨스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 로맨스를 위해 창조되었고 구원받았다. 이 로맨스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우주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우리의 사랑이다. 큰 왕국 삶의 핵심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 마음의 눈이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 영혼이 감사로 가득 차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받아주심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와 그분이 연합하고,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다니 믿을 수 없다! 왕 중의 왕이시며,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며, 온 우주의 통치자 되시는 그분이 내 친구가 되려 하신다니 믿을 수 없다! 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이 얼마나 희생하셨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친다. 이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이 사랑으로 동기 부여가 되고 방향을 찾게 된다. 당신의 마음이 이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자신의 작은 왕국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분주하고, 그날그날 짜인 많은 일과 앞으로 해야 할 많은 계획들로 너무 마음이 산만해서 이 중요한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게 말이 될까?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초청을 받았는데(이 관계는 우리 스스로 절대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할 자격도 되지 않는 관계다) 다른 일에 너무 열심을 내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게 가능할까?  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녀가 그의 인생에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서로 영적으로 교감하고 사랑할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고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들 안에서 너무나 쉽게 만족을 찾는 바람에 예수님 안에서 만족을 찾을 힘과 시간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중에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추구하는 합당한 이유를 다 댈 수 있다. 이것들 때문에 우리의 의미, 정체성, 목적, 소망의 가장 확실한 원천이 되어야 할 이 단 하나의 중요한 사랑을 구하지 못하는데도,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우리의 일정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일정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운동, 저녁수업, 음악 레슨, 극장, 쇼핑, 휴가, 부업, 집 꾸미기, 골프, 어린이 야구 리그, 콘서트, 레스토랑, 리모델링, 정치, TV, 미용실 예약, 아이팟, 박물관, 병원 예약, 예산 관리, 비디오, 놀이공원, 개랑 산책하기, 컨퍼런스, 독서, 요리교실, 기타 등등…  일요일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노래하지만 월요일에는 이 단 하나의 중요한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이 타당한가? 우리 시간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바쁜 일정으로 인해 실망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다해 그렇게 시간을 관리하는 것 아닌가? 하루 일정을 보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기뻐하는지 드러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가 있다. 예수님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당신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 모든 바람, 모든 결정, 모든 말을 인도하고 형성한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랑의 강렬한 감정과 마법 같은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실제로 건강한 사랑의 관계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시간, 돈, 애정, 감정, 힘을 기울여야 한다. 건강한 관계는 서너 번의 중요한 순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작은 순간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가 진지하다면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변덕스러운 마음  우리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할 일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문제는 너무나 쉽게 이 중요한 사랑에서 멀어져 다른 것을 사랑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성경은 이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요일2:15-17 참조).  세상은 우리 눈에 너무나 매력적이고 우리 마음을 쉽게 현혹한다. 창조세계가 창조주보다 더 실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다른 사랑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 존재의 핵심이 되어야 할 이 위대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대비해야 하고 영적 간음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일은 계속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빼앗기게 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큰 왕국에서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외로움을 드러낸다. *그 사람을 생각하느라 가끔 집중하기 어렵다. *기회만 생기면 그 그 사람의 성품과 업적을 자랑한다. *향수와 간절한 기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경솔하게 이기적으로 상처를 주었던 순간들을 후회하며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가 보낸 모든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모든 말의 의미를 분석하고 희망을 주는 구절은 다 외운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에 그의 친구들의 공동체를 찾는다. *그를 향한 공격을 개인적으로 감당하고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누군가 가질 수 있는 오해를 명확히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왜 이 모든 일을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외롭기 때문이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으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마음의 고통을 완화시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을 끝없이 응시하고 다가올 놀라운 재회의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기독교인의 삶을 기다림의 삶이라 기록하고 있다(롬8:23-25, 갈5:5; 살전1:9-10; 히9:28 참조)  하나님 나라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삶과 같아야 한다. 그를 기다리면서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가올 재회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마음속에 고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다.                      
2024-05-13 19:55:26 | 박수현
안녕하세요, 이번 자매 모임에선 독서를 잠시 뒤로 하고 성경 퀴즈와 바자회를 진행하였습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부함으로써 꼭 필요한 곳에 물건이 쓰일 수 있게 바자회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뜻깊었습니다. 바자회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성경 지식들을 퀴즈를 내어 먼저 푸는 자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방식이었는데요, 매우 긴장감 있고 수준 높은 성경 지식들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퀴즈를 제공해주신 이은정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첨부 파일에 우리의 모습들을 편집한 영상을 올려두었습니다 (편집해주신 사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자매 모임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2024-05-05 22:21:32 | 박수현
평강기쁨은 하나님안에서만 찾을수 있고 다른곳은 모두 섬김의 가치의미밖에 없는 요즘이 다행감사인거네요~^^ 전도를 위한 알맞은 당근과 채찍이 핍박가운데에서는 쉽지않음을 깨닫게 되는 4월입니다. -..강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오 큰 산아, 네가 누구냐? 스룹바벨 앞에서 네가 평야가 되리라..-스가랴 4장 6,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4-30 09:51:16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