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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따뜻한 봄날씨에 목요일 자매 모임이 열렸습니다. 교회 옆 장아산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함께 사진을 찍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 다룬 챕터들은 우리의 작은 왕국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왕국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7 현재가 아닌 영원에 투자하라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크기로 축소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 앙이 드쁘아가 군인들을 위해 고기를 보관하려고 고안해 낸 발명품 '압축 포장재'. 이것의 놀라운 점은 실패하는 법 없이 언제나 제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을 싸든 딱 그 크기만큼 수축된다. 군인들의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 이토록 모든 현대 소비자의 삶을 바꿔놓을지 몰랐을 것이다.  죄의 효력이 드쁘아의 고안품과 매우 흡사하다. 죽 그 영향력은 훨씬 광범위하다.  죄의 유전자는 이기심이고, 그 유전자는 우리의 우주를 우리만의 크기로 축소시킨다.또한 죄는 궁극적인 압축력을 만들어낸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삶의 크기를 우리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하게 된다. 축소된 자신만의 왕국 안에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망가진 자동차 모형과 이기적인 욕망들  어린 시절(폴트립 저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가지 이유로 테드 형에게 화가 났다. 내가 세운 규칙들을 형이 어겼기 때문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일을 해서 분품이를 할 참이었다. 곧장 형 방으로 가서 신발을 벗어 들고 형이 모아 놓은 자동차 모형들을 내리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았기에 기분이 좋았다.  한 어린이의 삶에 일어난 이 슬픈 사건이 모든 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받아들여지고, 섬김을 받고, 인정 받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가볍게 내는 화에서 폭력적인 분노까지 다양하다.  죄의 핵심은 이기심이다. 자기 안으로만 몰입하는 혼자만의 우주다. 죄는 사실상 궁극적인 압축 포장재다. 우리의 관심과 마음 씀씀이를 자기만의 삶으로 수축시킨다. 죄는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을 저지른다. 잠시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과 당신 주변에서 그러한 경향을 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은 우리만의 작은 왕국으로 자신을 축소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의 영광을 버리시거나 그분의 주권적인 계획을 거부하실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뿐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으실 것이다.  시편 145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깊어서 그 바닥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분의 영광은 그 정도로 깊다!  우리 삶의 크기는 그분의 위대하심에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우리의 삶을 그분의 영광이라는 거대한 텐트 안으로 확장할 때, 우리의 삶 안에 즉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생겨난다.  죄는 기능적으로 무신론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우리의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로 축소시키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를 갖고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든, 우리가 정말로 경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다가도 화요일에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그분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개인적으로 살아남고, 일시적으로 행복하고, 개인적 성공에 안주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과 계획 안에서 우리의 의미와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도록 창조되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넓은 삶으로 부르심받았다.  '하나님 닮은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실질적인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실제 삶에서 보물로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의 경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더 나은' 것은 바로 우리와 만물을 위한 그분의 계획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이야기가 은혜로 하나님의 이야기에 연결되는 것을 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은혜란 죄로 압축된 포장재를 찢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은혜가 들어와 우리를 끄집어내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롭고 의미 있는 장소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 장소는 그분의 사랑으로 산소가 공급되고, 그분의 능력으로 동력을 얻고, 그분의 영광으로 장식된 곳이다. 이 거대하고 멋진 장소가(우리는 이곳에서 살고, 이곳에서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하나님 나라다. -압축된 왕국의 윤곽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다른 왕국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슬프게도 죄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은사와 에너지를 쓰고도 기꺼이 만족하게 만든다. 죄는 인간 공동체를 각각 독립 왕국이 서로 충돌하는 왕들의 사회로 퇴보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갈등을 겪을 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전쟁을 겪고 있다! 우리가 서로 같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자기 왕국이 얼마나 좁은지 그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지금 여기서  압축 포장된 자기 왕국은 그 눈을 현재에 확고히 고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집중한다.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원하는 참을성 없느 왕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졌기에 영원을 보며 살도록 지음받았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영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지금을 그때를 위한 투자로 본다.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을 사고, 휴가를 즐기고,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맛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이 그 시스템을 이끄느냐다. 자기 왕국은 지금 여기서의 즐거움과 쾌락과 추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내것  축소된 왕국은 근시안적이다. 멀리 보지 못한다. 필요하고, 중요하고, 가치 있고, 생명과 관련이 있고, 긴급하고, 보람 있고,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들이 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돌봄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하고 가까이 있는 친구와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내 삶 경계 밖에 있는 광대한 우주에 대해 신경을 쓰고 돌보는 일을 위해서는 시간이나 힘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삶의 정책을 결정하느냐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느라 하나님 왕국의 더 큰 관심에 쓸 시간이 없는가? ◆육체적 경험과 물리적 생성물  압축 포장된 왕국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만져지고, 맛볼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육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균형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육체적인 인간이고, 아름답게 창조된 물리적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우리 배를 채워주는 많은 것을 주셨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삶이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보이는 것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자기 왕국은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것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느 것에 더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격과 권리  자기 왕국은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을 때 더 기뻐하는 왕국이다. 여기서는 내가 공격을 받을 때 가장 슬퍼한다. 여기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주목하고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는 자기의 재산, 위치, 권리를 명확히 한다.   그렇다고 짓밝히고도 가만히 있거나 기꺼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려고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그 시스템을 이끄는 것이 무엇이냐다.  죄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이 갖는 물리적인 영광들을 보여주며 오직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반면 은혜는 '자기 초점', '자기 방어', '자기 보호'라는 울타리를 허물어서 당신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준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진정한 영광을 경험할 뿐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8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생각하고, 바라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중심에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세계의 중심에서 살고 싶어 하도록 만든다. 죄는 나 자신에게 집중 조명이 비추기를 원하게 만든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땅에 매인 보화와 근심에 매인 필요에 모든 힘을 쏟게 만든다. 그렇다. 죄는 확실히 우리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시킨다. 이것이 바로 작은 왕국이다. 작은 왕국에서는 자신이 늘 중심에 있다. 큰 왕국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심에 자아가 절대 있을 수 없다. 두 왕국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누가 중심에 있는지를 보면 드러난다.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은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중심을 비워둔다. 이번 장은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내용이다. -왕의 이야기  앞서 말했듯이 성경은 두 왕국, 즉 자기 왕국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전쟁 이야기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왕의 이야기다.  구약은 실패한 인간 왕국들의 연대기로서, 구약이 가장 소망하는 것은 한 왕이 나와 그의 나라를 세우고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는 것이다(사9:6-7, 32; 겔37:24이하; 슥9:9-10 참조).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왕을 기다리고, 찾고, 소망하면서 끝이 난다.  반면 복음서는 기다리던 그 왕이 왔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한다. 기다리던 왕이 드디어 이 땅에 오셨다. 모든 성경은 진실로 왕이신 그리스도 이야기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기에 합당하고 유일하신 분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의미다.  초월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하려는,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할 때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기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할 때만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초월성을 회복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초월적인 삶을 살 때만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때만 우리의 삶이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인간성은 스스로 발견하거나 스스로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세상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삶을 투자하고,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삶을 투자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분의 영광을 위해 이곳에 심겨졌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스스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 살 때,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기 시작한다.  큰 왕국을 위해 사는 것은 삶의 모든 국면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3-23절 바울의 기도에서 모든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이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드러내도록 지음받았다.  두 번째로 고린도전서 1장18절-2장5절 말씀을 보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 자신의 사역에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는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기도교인의 삶 모든 영역 중심에 두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두 개의 성경 본문을 간단하게 해설하면서 몇 가지 원리로 요약해보겠다. ◆창조세계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도록 만들어졌다  당신의 결혼은 주로부터 나왔고, 당신의 결혼생활을 그리스도 위에서 행해지고, 당신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존속된다. 당신의 자녀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당신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고, 당신의 자녀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서만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이다.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손에서 나오고,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께서 속한 것이고,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보호로 보존될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 그분께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다  진정한 인간성은 자기 혼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창조주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그리스도는 그분이 창조한 모든 사람의 삶에서 중심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패러다임이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는 언제나 십자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집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이 회복되고 그리스도가 마땅히 계셔야 할 우리 삶의 모든 중심에 서시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다. -어떤 모습일까?  샘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의 신앙에느 열정과 방향성이 부족했다. 행동은 곧았지만, 공허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직장에서 그의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즉 매우 긍정적이고, 추진력이 있고, 의사소통도 잘하고, 열정이 넘쳤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열정이 없어 보였지만 직장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뭐가 빠져 있는 걸까?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앉을 때, 그 사람의 신앙은 늘 신학이나 규율로 축소될 것이다. 신앙이 삶의 중심에서 원리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다른 더 강력한 동기에 자리를 내주고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기독교 신앙을 신학이나 규율로 갖게 되면 자아가 중심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빠진 기독교는 아름답지도 않고 능력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만이 모든 죄인을 파멸로 이끄는, 자신을 향한 강한 사랑을 무력화시킬 능력이 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그 사랑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  기독교 행동주의, 율법주의, 형식주의, 감정주의, 신조주의, 외식주의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작은 왕국이 큰 왕국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다 큰 왕국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이것들이 갖는 위험성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위장하여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큰 왕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원천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로 소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다 그분의 손에서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분의 지속적인 은혜 없이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없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지혜와 힘과 사랑과 이내와 참을성과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늘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은혜를 구한다. 말씀을 읽고, 교제하고,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고, 사역에 동참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고, 영적 리더들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구한다. 이 모든 것을 의무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원천이고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하기에 그렇게 한다. ◆동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분이 정말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이유가 되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그분을 알기 원한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목적을 우리 스스로 우리의 목적이라 규정한다. 그분의 나라에 동참하도록 선택박은 것에 감격하고, 그 나라의 목적, 가치, 목표에 맞는 방법으로 살고자 한다. ◆목표  우리 삶의 목적은 그분의 영광과 존귀다. 이제 더 이상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 살거나,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행하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 훨씬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그분이 우리 삶에 방향을 주고 기쁨을 주신다. ◆소망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는가? 어떤 바구니에 당신의 달걀을 전부 넣었는가? 그리스도가 당신의 소망인가? 그분이 당신의 삶이 서 있는 견고한 바위인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될 때, 그분은 우리가 확신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신다. 우리는 그분의 지혜로 행동하고 그분의 은혜에 의지한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거나, 누군가를 통제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그분이 우리의 소망이다.                      
2024-04-15 20:32:18 | 박수현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살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의 왕국을 쌓지않기 위해서뿐 아니라 시련을 견디기 위해서도 예수님과의 교제로 가득한 하루되게 해주세요.. -내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좋으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위로가 되는 하나님말씀입니다~
2024-04-06 22:14:41 | 목영주
    안녕하세요, 이번 주 자매 모임은 교회 주차장 공사로 인해 조별로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한 B조는 이은정 자매님께서 집을 제공해 주셔서 편안하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조 자매님들과 만나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의 만남도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번 독서 모임도 두 챕터로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5 왕의 문명 건설에 참여하라 우리는 늘 어떤 문화로 문명화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문명화한다 -문명화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폴트립 저자) 우리 모두가 왕국 건설자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문명 건설자들(civilizers)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왕국 문화로 '문명화되고' 있고, 다른 사람을 문명화시키고 있다. (예를들어)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길이 막혔는데 아버지가 앞에 있는 차를 저주한다면, 아이들은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반응하도록 문명화된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어떤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고, 언제나 그 문명의 규칙과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폐쇄공포를 일으킬 만큼 작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 왕국의 규칙을 지키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변 사람들을 자기 문화에 따르도록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분간하기 힘들다  문제는 이처럼 심오하고 삶을 형성하는 왕국 건설의 모든 행위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서 사소하고 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난 지금 왕국을 건설하고 있어. 나랑 관계를 맺고 싶으면 내 왕국의 규칙들을 지켜야 해."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죄로 인해 눈이 가려진 채 소소한 순간들을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왕국 건설은 많은 부분 의식적인 의도 없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큰 왕국의 규칙들(하나님의 왕국)과 작은 왕국의 규칙들(자기 왕국)이 혼잡하게 뒤섞여 형성된다.   우리가 어떤 왕국을 짓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고 혼동되어 있다. 초월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실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관심의 영역으로 우리의 삶이 축소된다.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날마다 살고 일하는 왕국은 한 사람만의 왕국이다. -자기 문명의 특징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으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두 왕국의 정책이 위험하게 뒤섞인 채 살고 있다. 왕국 간의 갈등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작은 왕국의 특징을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부터 한 가지씩 소개하며 논해보겠다. ①자기 초점: 작은 왕국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유력한 초점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에게 무엇이 '좋으냐'가 이 작은 왕국의 법이다. 당신의 대화와 결심과 행동은 누구의 '유익'을 구하는가? ②자기 의: 자기 의는 나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나의 죄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더 크게 보게 만든다. 작은 왕국은 하나님의 계시보다 나의 내면의 대화에 지배되므로 나 자신을 겸손하고 정확히 보도록 장려하지 않는다. ③자기만족: 작은 왕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가?'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만 묻는다. '나 자신과 내 삶이 만족스러운가?' 이 질문에 만족한다면 자신만의 왕국은 잘 돌아갈 것이다. ④자기 의존: 자기 의는 언제나 자기 의존으로 이어진다. 내가 의롭다고 확신하는 만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다. ⑤자기 통치: 작은 왕국에서 최고의 법은 나의 법이다. 이 왕국에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인생을 위한 최고의 계획을 세운다. ⑥자기 영광: 우리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영광의 정의를 내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는 신념을 따르고 교회라는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이다. 당신은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싸우는 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은혜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왕국들 간의 싸움을 감당하도록 충분히 대비해두셨다. 그분의 은혜로 나로 채워진 당신의 왕국에 구멍을 내고,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당신을 끌어낸다. 왕국 간의 싸움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살펴보자. ①작은 왕국의 권세를 깨트리셨다(롬6:1-14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이상 작은 왕국의 지배 아래 살지 않는다. 십자가는 창조물의 그늘진 영광이 당신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당신의 마음이 오직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영광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②이기적인 욕망, 생각, 말, 행동에 대한 모든 빚을 갚으셨다(골2:13-14)  당신 대신 당신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은 분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시는 은혜로 우리는 어둠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부와 죄의식과 두려움, 부끄러움의 짐을 벗게 되었다. 그 용서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도록 초청받았다. ③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을 복종하게 할 능력을 얻으셨다(골2:15, 엡3:20)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작은 왕국의 권세가 무너지긴 했지만, 작은 왕국의 생각과 욕망들은 여저히 당신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매일 당신의 삶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제 당신은 작은 왕국의 자기중심적인 정책에 대해 "아니!"라고 맞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결과 중 하나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신은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당신이 직면하는 엄청난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④왕국 간의 갈들이 끝날 것이다.  평화의 때가 오고 있다. 최고의 전쟁은 결국 끝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이길 것이다! 그때까지는 왕국 간의 전쟁이 계속된다. 이 전쟁은 무엇보다 초점을 차지하려는 전쟁이다. 데이빗 핸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에서 자아가 설 수 없는 유일한 자리가 바로 중앙이기 때문이다. 중앙은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다."   6 욕심을 섬김으로 위장하지 말라  자기 왕국의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 왕국인 체하는 것이다  작은 왕국(자기 문명)의 문제는 큰 왕국(하나님의 왕국)처럼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의롭고 선한 것들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 가장 위험한 자기 초점을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들로 변장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두려워해야 한다! 변장 왕국의 왕 사탄에 의해 기만적으로 선전되고 있다. 이기심은 섬김으로 가장할 때 가장 위험하다. -변장 왕국의 열매  다이어트를 한다고 겉으로는 규칙을 잘 지키며 몰래 많은 양의 초코칩 쿠기를 먹고 있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몸무게가 빠지기는거녕 늘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과 동료 기독교인들의 삶을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영광을 위해 기쁘게 헌신할 때 얻는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들이 보일 것이다. 겉으로는 왕을 위해 살아가는 척해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섬길 때 얻는 열매들이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일이 예배와 순종과 사역의 형태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변장한 자기 왕국의 세 가지 열매를 함께 살펴보자. ①복음에 대한 열정과 감격이 부족해진다: 진짜 목적(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다른 목적(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②하나님과 기독교에 실망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경의 가르침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구체적인 일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편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이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함을 믿으라고 요청하고, 죄악으로 엉망이 된 이 세상 속에서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내라고 요청한다. 우리가 주님의 언약적 사랑에 소망을 두고 그분의 영광을 우리 삶의 목표로 정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 ③작은 왕국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닮아간다(시115:1-8): 시편 115편의 제일 중요한 원리는 '네가 바라는 보물처럼 될 것이다.'이다.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며 추구할 때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라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들의 자질이 자라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 안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는 것이다. -가면 벗기  자기 왕국이 무서운 것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변장 왕국과 진정한 왕(눅4:18-19)  삶 속에서 작은 왕국의 실체를 드러내 물리치려는 싸움은 당신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 메시아께서 이 싸움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작은 왕국이 우리를 얽매이기에 그분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다른 왕국에서는 우리의 소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운 왕국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왕이시다. 그 왕은 우리를 위해 오셨고,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분을 구하라! 그러면 도움을 발견할 것이다!  현재 매일의 삶에서 사실은 당신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2024-04-05 14:03:21 | 박수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요!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저절로 느껴지는 교회가  되면  좋겠지요. 오래 함께 하면 닮아가는 것 같아요. 자매 모임에 참여해 마음을 나누는 모든 자매들의 모습이 아름다워요.
2024-04-04 13:37:35 | 이수영
-넌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계속해-글귀가 2024년 마지막달에도 제것이 되었으면 싶네요. 하나님계심이 기쁘고 전능자예수님이 저의 주인되심으로 (걱정근심이 묻히고) 신나는 하루하루가 되길 기도 드립니다..
2024-04-02 21:29:50 | 목영주
안녕하세요, 따뜻한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은 비가 오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자매들이 모여 교제하고 음식을 나눴습니다. 독서 모임에서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우리는 죄가 일으킨 모든 창조 세계의 대재앙과 죄로부터 나오는 결과로 하나님의 왕국을 떠나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이 책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 죄가 일으킨 대참사를 기억하라 죄가 모든 것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원하신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중심된 초월을 저버리고 사탄이 제시한 거짓 희망인 나 중심의 초월을 택했을 때의 결과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재앙이었다. 그 재앙이 얼마나 컸는지(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큰지) 말해보겠다. 아담과 이브가 죄에 빠졌을 때 온 우주가 함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것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안에 두신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예술성은 매우 매력적이고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자연은 풍성히 자라나 산물을 냈다. 어디를 보든 오염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동물들의 왕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었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사람은 즐거워 하며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들은 창조주를 예배했고 창조세계를 잘 관리했다. 창조물을 경배하거나 창조주를 다루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확연히 드러나는 반역도 없었고, 미묘한 불순종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거나 상상하든,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의 세상은 비교 불가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참사 앞에서  로마서 8장 22절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의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것이다. 고통, 아픔, 수고, 질병, 죽음은 이제 모든 피조물이 늘 경험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쉬웠던 것들이 더 이상 쉽지 않아졌다. 단순했던 것이 매우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공짜였던 모든 것을 이제 큰 대가를 내야만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 간의 화합이 깨져버렸다. 수치, 두려움, 죄의식, 비난, 탐욕, 시기, 갈등, 상처가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했다. 사람보다 물건이 더 귀하게 되었다. 인간 사이의 화합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곡조가 이제는 인간의 싸움으로 인한 슬픈 애도곡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죄가 자연세계와 인간 공동체에 초래한 이 모든 해악 말고도 또 다른 끔찍한 결과가 있었다. 이 비극은 창세기 3장 8-10절의 평범해 보이는 대화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그날 서늘한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의 얼굴 앞을 떠나 동산 나무들 가운데 숨으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하매"  인간은 지극히 광대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정체성과 의미와 목적을 얻도록 창조되었다. 창조주를 피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피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따 자기 자신의 삶만큼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망각한 채 하나님 밖에서 삶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그들이 찾은 것은 죽음이었다. -자율과 초월  사탄은 그들에게 독립의 영광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자율이다. 여기 사탄의 거짓말이 있다(지금도 매일 사람들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율은 언제나 초월을 파괴한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그 끔직한 순간 이후 모든 인간은 자율과 초월을 혼동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죄가 우리 마음에 거하는 한, 자율은 초월과 싸움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독립과 초월 간의 싸움이 끝날 것이고, 우리는 영광 가운데 영원히 열광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아직 일을 완성하지 않으셨음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증거가 남아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① 삶을 오직 자신의 것으로만 보려는 경향  우리는 늘 어떤 영역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는 것보다 물건을 얻을 때 더 기뻐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싸우려 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필요 이상으로 먹고 소비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일요일 일정 정도로 치부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고 우리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개인적인 삶의 관심으로 축소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영역에 관심을 갖기 원하신다. 우리만의 왕국이 아닌 그보다 훨씬 큰 왕국에서 기뻐하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② 타락으로 인한 총체적인 재앙  세상의 타락이 갖는 이러한 총체성을 기억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의아할 수 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지 기억할 때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행하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삶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초월적으로 살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상황과 위치와 관계 속에서 회복을 이루며 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창조물에 반사되어 있다면, 죄의 결과가 온 창조물에 미친다면, 그리고 구속의 목적이 온 창조물을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당시과 나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모든 것이다! 구속의 관건은 우리의 왕국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훨씬 크고 훨씬 나은 왕국으로 환영하여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삶에서 구원받았는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끔찍한 삶에서 옮겨져 좋은 삶을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엄청나게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간과한다." 4 자신만의 왕국을 벗어나라  삶은 하나님 나라와 자기 왕국의 싸움이다. 우리는 모두 왕국 건설자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의 왕국을 짓고 있느냐다. 사탄은 이브에게 '더 나은' 왕국을 속여 팔고 있었다. 그 왕국은 이브 마음대로, 이브의 방식대로 통치될 것이다. 사탄은 이브에게 자기가 주는 것이 더 크고 좋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사탄이 준 것은 훨씬 작고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 운명의 날 이후 인간의 삶과 역사는 왕국들의 충돌로 점철되었다. 작은 왕국과 큰 왕국의 싸움, 이 세상 왕국과 천국 왕국의 싸움, 인간 왕국과 하나님 왕국의 싸움.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왕국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일하러 가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아침 신문을 읽는다. 의도나 충성심 같은 준비된 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큰 왕국이 관심 갖는 일들을 추구해야 하는가? 작은 왕국을 구하도록 유혹받는 바로 그곳이다. 즉 우리가 살고 매일 일하는 같은 장소다. -보물과 백합화  자기 왕국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마태복음 6장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자기 왕국의 삶은 두 가지에 집중한다. 먼저 땅에 매인 보물을 구한다. 보물이란 소유하기에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보물들'은 두려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나의 정체성과 의미와 목적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야지."라고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물질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야지."라고 말하지 않지만 점점 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살게 된다. 이런 것들을 자신의 보화로 삼아야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지 않음에도,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가치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구속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뜨겁게 열망해야 할 보물이 어떤 것인지 겸손히 찾아보라고 하신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 내가 구했던 보화는 무엇이었는가?  작은 왕국의 삶이 두 번째로 중요시하는 것은 걱정에 이끌린 필요다(마6:2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생명이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오직 우리의 필요만 보게 되면, 하나님과의 유대와 다른 사람들과의 경건한 교제로 세워지는 진정한 인간성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여긴다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사실상 너무나 좁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늘 걱정과 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것은 필요를 확장하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필요를 채우는 것을 주요 관심에 둘수록 삶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으로 규정된다. -왜 나는 작은 왕국에 끌릴까?  죄의 유전자는 이기심이다. 죄는 재가 원하는 때에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관성은 늘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자기 자신을 향한다. 우리의 구속자는 우리를 바로 이것으로부터 구해내려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협소한 작은 왕국이 갖는 제한된 속박에서 풀어내고, 은혜로 더 나은 왕국의 광대한 영광들로 맞아들이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받고도 그분의 지혜의 원리와 은혜로운 약속들을 나만의 작은 왕국을 잘 돌아가게 하는 데 적용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광대한 삶의 방식은 내 왕국이 갖는 협소한 테두리 안으로 구겨넣을 수 없다.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살기   8년간 나(폴트립 저자)는 그 학교의 교장이자 위원회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그 학교에 돈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정말 충격적이게도 나는 투표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사역에 너무나 소중했던 그 학교에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 끔찍해서 아내와도 나눌 수 없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테드 형에게 전화를 할 때까지는 말이다. 형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겪은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 학교가 네 것은 아니잖아. 그 학교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거야. 네가 너의 왕국을 세웠던 것이 아니잖아. 하나님께서 그분의 학교를 세우는 데 너를 사용하셨던 거야. 넌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계속해.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와 사람들을 섬기되 하나님 나라의 번영은 그분 손에 맡겨드려." 내가 느낀 슬픔의 대부분은 학교를 위해 최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쫓겨났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음을 겸손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왕국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큰 왕국의 사역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그 일이 내 작은 왕국의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마태복음 6장 33절 "오히려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오히려"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다. 옛날 방식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자녀들에게 그분의 왕국을 위해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작동한다. 아버지를 잊은 채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반면 새로운 방식은 위대한 하나님 난라의 목적이 갖는 초월적인 영광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크게 살도록 창조되었고 부름받았다. 그런데 왜 자기만의 작은 왕국으로 후퇴하려 하는가?              
2024-04-02 14:50:08 | 박수현
안녕하세요, 지난 목요일엔 폴트립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로 자매모임을 열었습니다. 3개의 팀으로 나누어 진행하였으나 지난주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모여서 팀을 나눴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교제 시간을 갖게 되어 참 신기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성령님께서 물 위를 움직이시듯 우리 공동체에 넘실넘실 움직이시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라 2 정말 중요한 일에 헌신하라 3 죄가 일으킨 대참사를 기억하라 4 자신만의 왕국을 벗어나라 5 왕의 문명 건설에 참여하라 6 욕심을 섬김으로 위장하지 말라 7 현재가 아닌 영원에 투자하라 8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라 9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10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라 11 하나님 안에서 탄식하라 12 하나님과 구원의 음악을 연주하라 1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14 예순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 15 예수님 외의 모든 보물을 내려놓으라 16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라 17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 18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질문들 자매 모임에서 나눈 1,2 chapter를 이곳에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쓴소리 책'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1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라  우리는 더 큰 것의 일부로 창조되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이 책에서는 초월의 욕구라고 지칭한다.)는 우리가 더 큰 것의 일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우리가 누구인지, 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이곳에 우리를 심어 놓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이곳에서 뭔가 더 큰 것의 일부가 된다.  모든 인간은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것을 넣어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람만을 위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자기 자신만 아는 하찮은 왕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규모를 자기 생존으로만 축소시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더 높고 더 나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더 거대하고 더 중요한 것 안에 들어가도록 이끄는데 성경에선 이것을 오직 한 단어로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영광'이다.  우리는 모두 영광에 목매는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창조자께서 우리가 영광에 강하게 이끌리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 본능으로 창조 세상의 그늘진 영광들만을 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닌 초월적 영광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도록 창조되었다. 이 영광을 맛 볼 때 우리 인생을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 창세기 1장과 2장을 본다면 네 가지 초월적인 영광이 나온다.  ⑴ 하나님의 영광  우리 삶은 창조세계보다는 창조주에 귀속 될 때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고 다른 모든 영광이 그분의 영광에 복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높고 더 나은' 삶을 발견하게 된다. ⑵ 직분의 영광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도록 만드신 수많은 놀라운 것들을 보살피는 사명을 받았다. 인간은 주변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인간의 초월성이 드러난다. 아담과 이브는 보호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⑶ 공동체의 영광  우리는 겸손히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를 늘 추구하며 살도록 지음받았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관계망은 우리를 고립과 단절로부터 벗어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집중할 때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공동체의 영광을 경험하게 해준다. ⑷ 진리의 영광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자마자 다른 창조물에게는 하지 않았던 일을 행하셨다. 바로 그들과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담과 이브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해석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창조주만 가질 수 있는 전체를 보는 관점(origin to destiny)으로 살아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진리를 점진적으로 열어 보이신 것은 그들이 깨닫고, 그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소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현실을 어떠한가? 타락한 세상에는 우리 삶의 규모를 현실적인 일들로 축소시키려는 강력한 압박이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음에도 열등한 상태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2 정말 중요한 일에 헌신하라 죄로 인해 우리는 더 나은 삶에 대해 말하면서 덜 중요한 것에 안주한다. 정말 중요한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들다.   매일 이런저런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언제나 오래된 속임수에 걸려든다. 대적이 어떻게든 당신을 속여서 당신의 삶이 개인적으로 꿈꾸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크기만큼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이 바로 대적이 원하던 바다. 대적이 당신을 유혹하여 당신이 창조된 목적인 하나님 중심의 더 나은 삶을 버리고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앞에 어른거리는 수없이 많은 나 중심의 '더 나은 것'들을 택하게 할 때마다 대적이 승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사소한 일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면 피조물이 갖는 일시적 그림자 영광을 위해 초월을 저버리는 꼴이 된다. 일시적으로 얻는 만족과 기쁨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영적 균열과 같아서 즉각적인 감정적, 혹은 영적 흥분을 주지만 곧 다시 허해져 또 다른 흥분을 찾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영광을 찾기 원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영광, 직분의 영광, 진리의 영광에 헌신하기 원하신다. 아담과 이브의 그 한 번의 비극: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만큼 넓어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앙으로 인해 경계를 극단적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 한 번의 비극으로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은 영광에 이끌리는 인간이 절대 살아서는 안 되는 유일한 곳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초월에 다시 참여시키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분의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고,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를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게 하여, 즉 피조물에게 지배당하지 않게 하여 우리는 우리의 사명인 직분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분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 안에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진리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되고 재창조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러한 영광을 누리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다. 어떤 때는 믿음과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미끼를 물고 덜 중요한 것을 마치 더 중요한 것인 양 따르기도 한다. 은혜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의 경계가 넓혀졌는데도, 여전히 우리 삶의 경계를 자신만의 삶으로 축소시킬 때도 있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면 그 싸움의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싸움을 잘 하도록 돕기 위해 쓴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질문은 '매일 어떤 영광을 구하며 살 것인가?'이다.  당신의 관심을 끌기 쉬운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랑침례교회 모든 성도님들과도 이 책의 내용을 나누며 어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덜 중요한 일에 매몰된 일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나아갔던 일 등 우리가 싸웠던 흔적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샬롬      
2024-03-25 12:07:09 | 박수현
안녕하세요. 기나긴 방학을 끝으로 설레이는 자매모임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 첫 자매 모임은 30여 명의 자매들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로 시작하여 교제로 맺음을 하는 아름다운 목요일이었습니다. 날씨 또한 푸근한 봄이 오려 하고 있어서 옷차림도 비교적 가벼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선정도서는 폴 트립 저자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 (사소하고 허무한 일상을 넘어 더 크고 의미 있는 삶 추구하기)'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구원을 넘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위대한 삶을 살도록 되어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나눌 이 책과 함께 우리 자매들이 성화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게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사랑침례교회 출석하시는 자매님들이 더 많이 자매 모임에 참석하여 극진한 자매 사랑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작품이 되어가는 일에 동참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책을 살펴보며 생각나는 하나님의 말씀 구절을 나눠봅니다.   차주 자매 모임은 그룹을 나누어 진행해 볼 예정입니다. 인원이 많은 관계로 그룹별로 독서 미팅을 진행하게 되면 정해진 시간 안에 조금 더 많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듭니다.   봄꽃이 흐드러지는 날에 그룹별로 소풍도 다녀올 예정입니다. 함께 하길 원하시는 자매님들께서는 언제든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어제 함께 했던 우리의 모습들을 공유합니다. 평안한 한주 보내시길 바라며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2024-03-15 15:34:34 | 박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