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청년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내일로 미루지 말라 대학생들은 대학 시절 ‘방종의 씨앗’을 뿌릴 권리를 주장하기로 유명하다. 어른이 되어 직업과 결혼과 자녀 양육이 있는 ‘진짜’ 세계에 들어서기만 하면 보다 진지하게 살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뒤로 미루는 태도는 나쁜 습관으로 굳어진다. 처음에는 첫 직장을 잡을 때까지 미룬다. 다음에는 결혼하여 아이들이 생길 때까지 두고 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는 안정된 중년에 이를 때까지 핑계를 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계속 연기할 것이다. 늘 지금이 아니라 항상 나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은 지금이다. 한 번도 나중이 아니라 항상 지금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 간에 서로 사랑하기란 적어도 처음에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연습을 통해서만 쉬워질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시작이 이를수록 좋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뜻대로 살도록 명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신하들이 아첨으로 자아를 추켜세워야 하는 못난 독재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구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가장 깊이 갈망하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미루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다. 완전한 복종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2013-06-26 16:20:57 | 관리자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의 역할에 대해 잘 보여 주며
이단 교회의 문제를 잘 보여 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선택에서 교회의 도움을 받을 때 바른 시각 유지하기
교회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활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조심하는 마음도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신실한 신자라도 동기가 얽혀있어 엉뚱한 조언을 줄 수 있다.
둘째,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권한 남용에 능한 자들이 있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권위를 주장하며 사실상 독재자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보수성이 강한 진영에서 특히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교인들에게 결혼 대상과 취직할 직장과 돈 쓰는 방식과 시간 사용 방식을 정해 줄 권리가 있는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기독교 교회는 어느 종교 집단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이단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신중하게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지도자는 양들을 지배하지 않고 섬긴다.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이단에 들어가는 이유를 연구했다. 이단의 영향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권위적 기독교를 경험하며 안전을 얻기 원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신약성경에 약속된 것 - 사랑, 봉사, 높은 기준, 진지한 헌신 - 을 실현하는 듯 보이는 단체에 들어간다. 그러나 머지않아 덫에 걸린다. 이미 심각한 피해를 당한 후에야 그 집단의 정체가 밝혀진다.
몇 년 전 어느 장례식에서 만난 한 여자가 나한테 말했다. “내 가까운 친구들이 다 죽었어요.” 깜짝 놀라 사연을 묻자 그녀가 들려준 내막은 이랬다. 캘리포니아 주에 살 때 그녀는 자기 말로 ‘지상 천국 같은’ 단체를 발견했다. 그래서 들어갔다. 몇 년 후 그녀는 너무 늦기 전에 그 단체를 나왔다. 지도자는 갈수록 철권을 휘둘렀고 단체는 점점 고립되었다. 마침내 사면초가의 심정에 빠진 그들은 남아메리카에 땅을 사 그곳으로 이주했다. 몇 년 후 900명이 넘는 멤버들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집단 자살했다. 지상 천국 같던 곳이 지상 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권위적인 교회는 여전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타인의 일을 대신 결정해 줄 만큼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도를 넘어선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공금을 횡령하거나 간음하거나 자녀를 홀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교회가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직업의 종류 - 교사가 아니라 의사 - 나 결혼 대상 - 철수가 아니라 길동이 - 에 있어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우리가 그분을 구하며 사는 한 우리가 이 땅에서 내리는 많은 결정들에 대해 하나님이 크게 개의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2013-06-26 16:18:01 | 관리자
다음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 2장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2
2장 때로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아빠, 제가 요즘 더 잘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사랑하는 네이트에게
데럴 할아버지도 그런 문제에 부딪혔던 적이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 캘리포니아 주 벤추라에 사셨어. 할아버지도 보통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야구였어.
어느 봄날, 시카고 컵스 야구단이 할아버지 동네에 시범 경기를 하러 왔어. 텔레비전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고, 미국 서부 전체에 메이저리그 야구단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그런 때였단다. 그러니까 그 야구단의 방문은 벤추라에 사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평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기회였던 거지.
그런데다가 기적 중에 기적으로 할아버지가 컵스 팀의 배트 보이(경기 중에 선수들에게 야구방망이를 갖다 주는 소년-역주)로 뽑혔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참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 이상 좋은 증거가 어디 있겠니.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경기장으로 몰려들었어. 할아버지는 선수 대기석이 있는 곳에 계셨지. 아이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자랑스러움을 느끼면서 말이야.
경기 후반에 컵스 팀 투수가 타자로 나가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려나갔지. 그럭저럭 그 투수는 1루까지 나가게 되었어. 그때 어떤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잠바를 하나 던져주면서 “그거 투수에게 갖다 주고 와.”라고 했어.
할아버지가 메이저리그에서 공을 치고 나간 투수는 잠바를 걸친다는 걸 모르셨던 건지, 아니면 공을 치고 1루에 나가 서 있던 선수가 투수였다는 걸 모르셨던 건지, 아빠는 지금도 몰라. 어쨌든 할아버지는 1루로 달려가지 않고, 공을 던지고 있는 수비 팀 투수에게 달려가 잠바를 내밀었어.
그러자 그 투수는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고 할아버지는 어리벙벙해졌지. 그때 선수 대기석에 있던 어떤 사람이 다시 “투수에게 갖다 줘.”라고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어. 그래서 할아버지는 다시 그 투수에게 잠바를 내밀었지. 그러자 선수 대기석 뒤편 관람석에 있던 사람이들 “투수에게 주라니까!” 라고 소리를 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합세를 해서 금방 관람석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그리고 마치 온 마을이, 아니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투수에게 주라구! 투수에게 갖다 주라니까! 투수에게 갖다 줘!” 라고 외치는 것 같았어.
결국 선수 대기석에 있던 감독이 나왔어. 그리고 내야 중앙에 서있는 이 가련한 어린 소년에게로 걸어가서 아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1루를 가리키며 “저 투수에게 갖다 줘” 라고 귀에 속삭여 주었어.
어떨 땐 산다는 게 그래. 최선을 다하고,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거든. 투수에게 잠바를 갖다 주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모든 게 다 꼬여버리는 거야.
할아버지에게 어릴 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종종 있지.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는 이 세상일이 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는데 사실은 다른 방향일 때가 있거든.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이 많이 든 월급봉투를 가져다주면 가족을 잘 부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건 사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는 것 같은 거지.)
운이 좋다면, 그 감독처럼 다가와서 어깨를 감싸면서 우리에게 1루를 가리켜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사랑하는 아빠가
2013-06-26 16:14:3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저는 성서 유니온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싯처의 <하나님의 뜻>을 다 읽고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가장 우수한 책입니다.제 아이들과 사위와 친지들에게 꼭 읽어 보라고 권했습니다.인생의 소명과 바른 결정 등에 대해 참 잘 가르쳐 줍니다. 어젯밤에는 1시까지 <아이들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를 읽었습니다.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2
부모 아이 모두 좋아할 책입니다.이번 주일에 50권 판매합니다.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는 싯처의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보시기 바랍니다.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4 졸지에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저자의 고민과 고뇌가 들어 있습니다.성도든 목사든 고난을 겪어야 성장합니다. 저자는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의 변장된 은혜'로 이야기합니다.좋은 책입니다. 역시 이번 주일에 판매합니다. 이런 좋은 책들이 우리의 혼을 살찌웁니다(꽃게에 살이 가득한 것처럼).
책을 읽어야 성장합니다. 감사합니다. 패스터 (*) 주의 사항: 많은 저자들이 장로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 보니 천주교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점은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2013-06-26 11:23:26 | 관리자
이슬람이 몰려온다!
앞으로 천주교와 함께 이슬람이 온 세상을 장악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영상과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dNg8Dotovc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11&cate_name=%EC%9D%B4%EB%8B%A8+%EA%B5%90%EB%A6%AC
샬롬
패스터
2013-06-22 10:10:13 | 관리자
앞으로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두 단계로 되어 있고 총 7년의 기간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한 순간이 아니라 33년 반 동안에 이루어진 것처럼 재림도 7년의 기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자들이 휴거되어 영화로운 몸으로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들은 7년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혼인식을 거칩니다. 그 7년 동안 이 땅에는 창세 이후로 없었던 극심한 환난의 시간이 임합니다.
이때에 수많은 환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합니다. 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7년 환난기의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방의 올리브 산에 강림하셔서 왕좌에 앉아 친히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 민족을 나누어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을 환난기에 잘 대우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이 내 형제들은 양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친 백성/형제들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양/염소 민족의 심판 때에는 예수님 앞에 세 부류가 섭니다: 가운데에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오른쪽에는 양 민족에 속한 자들, 왼쪽에는 염소 민족에 속한 자들
이런 심판을 통해 염소 민족에 속한 자들은 마25:41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한편 양 민족에 속한 자들은 34절의 복을 받습니다.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왕국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채 7년 환난기를 끝까지 통과한 유대인들과 이방 민족(양)들이 육신을 입고 천년왕국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육신을 입었으므로 아기를 낳을 수 있고 또 낳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하나님께서 1000년 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어두시므로 마귀가 사람을 직접 유혹하지 못합니다.1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바닥없는 구덩이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2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바닥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차기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계20:1-3).
땅에는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수명은 다시 노아의 홍수 이전처럼 1000살까지 늘어납니다. 이사야서 65장 19-25에 이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9 내가 예루살렘을 기뻐하며 내 백성을 기뻐하리니 슬피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는 그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라. 20 날수가 많지 않은 어린 아기나 자기의 날들을 채우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거기에 없으리니 아이가 백 세에 죽으리라. 그러나 죄인은 백 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가 되리라. 21 그들이 집을 지어 거기에 거주하고 포도원을 세워 그것의 열매를 먹으리라. 22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수는 나무의 날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한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 23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려고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주}에게 복 받은 자의 씨요, 그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후손도 그와 같으리라. 24 그때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으리라. 25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모든 산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22절에 있듯이 사람들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이 길어집니다. 20절에 있듯이 백 세에 죽는 사람을 아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때에는 25절에 있듯이 처음의 에덴동산에서처럼 모든 짐승이 초식을 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상하게 하거나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10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2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3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 4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해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이며 5 의로 자기 허리의 띠를 삼고 신실함으로 자기 콩팥 주위의 띠를 삼으리라. 6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9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10 ¶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어서 그것이 만백성의 기로 설 것이요, 이방인들이 그에게 찾아오리니 그가 베푸는 안식이 영화로우리라.
자, 그러면 이때에도 사람이 죽을까요?20절에 보면 백 세에 죽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때에도 사람이 죽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처음 들어가거나 거기서 태어난 사람은 다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므로 죽음을 면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는데 이들이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처음에 거기 들어간 사람들은 100%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마귀의 직접적인 유혹이 없어도 그들은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므로 모든 시대의 사람들처럼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죽습니다. 마귀의 유혹이 없어서 조직적인 저항이나 범죄는 없다 해도 구원은 마음의 문제이므로 이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지 않으면 비록 유토피아에 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65:20은 “죄인은 백 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1000년이 흘러가는 동안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됩니다. 계20:7-10은 이들의 마지막 상황을 보여 줍니다. 마귀가 잠시 풀려나자 이 죄인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귀에게 붙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마귀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불 호수의 치욕을 당합니다.
7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8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10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환경만 좋으면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문제가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유토피아의 천년왕국에서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불 호수로 들어가는 자들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천년왕국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양 민족)만 들어갑니다.이들은 아이를 낳습니다.이 아이들 중에는 죄인들이 많고 또 천년왕국의 시민들 중에는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적어도 7년 전에 휴거 받거나 부활한 신약 성도들과 7년 환난기 끝에 부활할 구약 성도와 환난기 성도들은 영화로운 몸을 입고 - 아이는 낳지 못함 - 아마 이때에 왕국의 백성들과 함께 천년왕국(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을 누릴 것입니다.
샬롬
참고로 천년왕국에도 성전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있고 구약의 희생 예물을 드리며(겔40-48장, 말3:1-3) 또 장막절을 지킵니다(슥14:16-19). 이때의 희생 예물은 십자가 사건 이후의 신약시대 성도들이 지키는 주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013-06-15 15:41:49 | 관리자
사무엘기상 28장에 보면 사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영매를 찾아가 죽어 있는 사무엘을 불러오라고 이야기하고 그 영매는 사무엘을 불러옵니다(7-20절).
많은 이들이 이때에 올라온 사무엘은 가짜라고 이야기합니다.영매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로 모든 영매나 소위 ‘귀신 쫓는다는 목사’들이 불러올리는 처녀 귀신, 할아버지 귀신 등은 사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거짓 영인 마귀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진짜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목소리를 내니까 이들은 자기들이 진짜로 죽은 사람을 불러올린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또 그것을 보는 이들도 그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목소리도 같고 말하는 게 같기 때문에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다 마귀들의 장난에 속아 넘어갑니다. 김기동 목사 등의 베뢰아 귀신들도 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매일 귀신/사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마귀의 종들입니다. 다락방이라는 데도 늘 마귀 이야기하만 하지요. 이런 단체가 사실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단체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매나 ‘마귀 들려 축사하는 목사’는 결코 죽어 있는 사람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은 더러 특별한 일을 허용하십니다.
사무엘기상 28장에서는 분명히 사무엘이 올라왔습니다. 영매는 자기가 사무엘을 불러올린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 일은 사실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매 자신도 놀라고 맙니다(12-13절).사무엘기상 28장의 앞뒤 문맥 상 땅 속에서 올라온 이 존재가 사무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존재는 분명히 땅속의 낙원에 있던 사무엘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였고 그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싸움터에서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근거로 영매가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예외적인 기적입니다.
민수기 22장 22-35절에는 나귀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일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면 안 됩니다. 이 일 역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일과는 거리가 먼 특별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만 이런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간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어떤 단회적 사건을 가지고 보편적 해석을 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도 단회적 사건입니다. 지금 이 시간 또 다른 오순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사건이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매일 매일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보편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다마스쿠스(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보편적인 방법으로 섭리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단회적 특수 상황을 가지고 보편적 교리를 만들려고 하면 여기서 이단 교리나 잘못된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식과 이성과 논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의 틀 안에서 바르게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법을 늘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다음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07&page=
샬롬
패스터
2013-06-15 14:41:28 | 관리자
구약 시대 성도(의인)들의 거처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땅속의 낙원에서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엡4:7-10). 비록 이들 중 극소수가 예수님 부활 당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부활하였으나(마27:51-53) 대부분은 부활하지 않은 채 처소만 옮겼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과 환난기 성도들은 7년 환난기가 끝난 뒤에 부활할 것입니다(욥19:1-27; 사26:16-21; 단12:13 등 참조). 그러므로 비록 그들의 거처가 지금 셋째 하늘의 낙원이라도 그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기 전에 구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9 이 사람들은[구약 성도들]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40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신약 성도들]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
또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빌1:23; 고후5:8). 그런데 이곳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낙원이 이제는 옮겨져서 셋째 하늘에 있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셋째 하늘에,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낙원이 아니라] 셋째 하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거기 있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거기로부터 그분과 함께 와서 부활한 몸과 연합할 것입니다(빌3:20-21). 빌3:20-21에서 사도 바울은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 교인들은 신약 시대 성도가 죽으면 대피소에 있다가 나중에 주님을 만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대피소를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십자가 옆의 강도가 간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대피소 같은 데 가지 않고 직통으로 셋째 하늘에 갑니다. 이것인 신약 시대 성도들의 더 나은(better) 특권입니다.
샬롬
2013-06-15 14:11:52 | 관리자
이런 내용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알고 있어야 하는 말씀인데 그동안 너무 이 한시적인 세상과 육신에 관한 지식에만 관심이 있었네요.
뼈 한줌으로 남는 이 장막을 하나님께서 영화로운 몸으로 만들어 주실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2013-06-15 09:04:52 | 오혜미
요즘 저희 교회 자매님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여전히 몸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먼저 영/혼/몸에 대해서는 노영기 형제님이 잘 정리해 놓으셨으니 그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315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실 때부터 영/혼/몸을 동시에 가진 3중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이 땅에 있든, 지옥에 있든, 천국에 있든, 부활하기 전이든, 부활한 후든 언제나 3중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언제 어디서든 몸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나사로와 아브라함은 지옥(지하세계)의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낙원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지하세계)의 불타는 뜨거운 부분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한 부류는 천국에, 한 부류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다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입, 눈,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은 지상에서 그들이 쓰던 몸이 아닙니다. 그 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2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썩어서 없어졌거나, 부자나 나사로처럼 그 당시 무덤 속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 부활할 때까지 어떤 형태의 중간 단계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몸을 혼적인 몸(soulish body)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6장 9-11절을 보면 죽임당한 혼들이 나오는데 그 혼들 역시 말도 하고 옷도 입습니다. 몸이 없다면 이런 것들이 다 불가능합니다.
사무엘기상 2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통해 단 한 번 낙원에 있던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사무엘도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의 몸은 그 당시 그의 무덤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에게 잠정적인 중간 단계의 몸을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실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사망을 예수님 스스로 이기시고 또 모든 성도들도 그분의 피로 사망을 이겼음을 입증하시고자 함입니다. 중간 단계의 몸으로는 성도들이 사망 권세를 이긴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곡식의 알갱이입니다. 이 알갱이를 뿌린 뒤 이것이 죽어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나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고유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15:35-39).
이 영화로운 몸을 가져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먹기도 하고 마음대로 제약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과 우주)에 영원히 살게 될 사람들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땅에서 제약 없이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 중간 단계의 몸은 이런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주 예수님처럼 순식간에 영화로운 몸을 입을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큰 평강을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06-14 18:49:58 | 관리자
요즘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 가운데 안수 복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50세가 넘도록 교회를 다녔어도 안수 복음이라는 말은 처음 듣기에 그게 무어냐고 물으니 네이버 등에서 찾아보면 된다고 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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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 박옥수 목사의 안수 복음의 정의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개역성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수 복음은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세례 요한의 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원래 글에 세례라고 되어 있기에 일단 세례라고 썼지만 세례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책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영원한 속죄 편)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풀 때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이 안수가 전 인류의 죄를 세례 요한이 대표해서 예수님께 넘기는 그 과정입니다.알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지요?"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왜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니까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1권 218쪽).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게 안수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겨졌고,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이었고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세례 요한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가장 큰 자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대표자란 의미입니다((기쁜소식지 2001년 8월지. 김성훈)
여러분 모두 여자가 낳았지요. 여자도 여자가 낳았고, 남자도 여자가 낳았어요. 온 세상은 여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인간 중에 제일 큰 자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이유는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이 두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는 거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잘 돼야 저나 여러분이 잘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뚜벅뚜벅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궁금해 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아, 내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왔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이 죄 사함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그 예수님이시구나. 구원자시구나.” 그것을 세례 요한이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한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안수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 세례 요한아, 너 나한테 안수해.” 하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안수를 합니까? 내가 받아야지.” 근데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교만한 사람이구나.”“네가 내게 안수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이틀 전에 예수님에게 넘겨준 죄는 세상 죄입니다. 즉 이틀 전에 세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할 때 세례 요한의 죄만 넘어갔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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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자 요한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2. 침례자 요한이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게 안수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3. 그 안수에 의해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4. 더욱이 예수님은 머리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온 몬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안수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 이방인들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하니라(요1:31).
6. 세상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심지어 그분 자신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7. 침례자 요한의 안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기소선의 안수 복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창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개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데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8. 침례자 요한이 안수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회개의 침례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복음으로 즉 다른 복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선포하였습니다.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 8-9).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이런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구원이 과연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기소선을 세운 대표 목사의 성경 해석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면 한 가지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신학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골병들어 고칠 수 없게 됨을 보여 줍니다. 즉, 오류는 오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오류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입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만의 하나라도 사람의 행위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 같은 사람을 높이는 안수 복음은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아, 이런 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탐구해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5:39).
2013-06-07 17:38:31 | 관리자
이 글을 읽으며 구구절절히 동감하고 또 앞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류는 목회자이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목회자를 바라봐야 하는 성도들에게 더욱 지침이 되는 글이기에 우리 사랑침례교회가 건강하고 바르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긴~~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목사의 세속적 야망이 죽어야 하고 성도의 이기적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저는 준비되지 않고 사모의식없는 사모이지만 교회의 타락은 목사와 성도이전에 사모의 비겁함과 무분별 그리고 가족이기주의가 교회를 타락하게 하는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든지 저에게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말아주시되 고정관념에서는 벗어난 사랑침례성도들이 제 주위에 많이 있었음 좋겠습니다...♥
2013-06-06 09:29:20 | 오혜미
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목사가정이 평안해야 교회가 좋은 꼴을 먹 을 수 있기에
가정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모와 자녀들과 주변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하지요.
늘 사탄은 흔들고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일에 관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목사가정을 위하여 주님께 날마다 아뢰는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한 일, 교회를 위한 일입니다.
2013-06-05 21:35:58 | 이수영
아현이도 번역에 수고해 줘서 참 고맙고
이렇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주께서 기뻐하실것 같군요^^
2013-06-05 21:26:26 | 이수영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할까, 다른 사람과 할까?
이 직장으로 할까, 더 기다릴까?
무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실 줄로 생각하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까요?
"하나님이 이번에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겠어요. 그분의 뜻을 알아보려고요.'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그라미 안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가 가능한 거대한 강과도 같습니다.
그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의 대안적 선택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빨간 색 글은 피터 블룸필드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itempage3.auction.co.kr/DetailView.aspx?ItemNo=A553518626&frm3=V2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필독서입니다.
이번 주일에 10권을 가져다 놓을 테니 빌려다가 읽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악순환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믿음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기 바랍니다.
이 책은 너무 좋은 내용을 좋은 예와 함께 잘 가르쳐 줍니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맹목적 신앙이 문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주된 문제는 주관주의의 문제다. 사람의 지각과 주관적 경험들은 증명할 수 가 없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우리는 입증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반증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냥 경험일 뿐이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나 ‘내가 꿈을 꾸었다’는 말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두 가지 모두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누군가가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빙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 그 말을 믿어야 하는가? 객관적인 사실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맹목적 신앙일 뿐이다.
참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 선지자들의 신분증이었다. 하나님이 그 위에다 인증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하셨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모세의 기적, 사도들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들이 이제는 멈추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일들을 하시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의 ‘표적’이 아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 전달자임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흔히 오용되는 현상에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잭과 질이라고 하는 두 교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번 상상해 보자.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잭.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멈추었어.
잭 : 내가 직접 들은 말도 모르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것처럼 확실하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니까.
질 : 잭, 네가 무언가를 경험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건 잘못 해석한 거야.
잭 : 어떻게 네가 감히 나더러 틀렸다고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안다니까! 나한테 일어난 일이라고! 어쩜 너는 그렇게 독단적일 수가 있니? 무슨 근거에서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건데?
질 :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정통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야.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완전하게 다 말씀하셨다고 했어. 역사적인 증거도 보았고, 성경적인 증거, 그리고 신학적인 증거도 다 보았어. 참교회는 언제나 지속되는 계시를 부인해 왔대. 지속되는 계시는 영지주의자나, 몬타누스파나, 신비가들이나 퀘이커들 같은 분파나 이교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야.
잭 : 그것 참 안 됐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말씀하셨고, 나는 무슨 이교를 믿는 게 아니거든!
질 : 좋아, 그렇다면 개신교 신조들이 어떤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나한테 설명해 봐! 그리고 목사님이 어느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보여줘 봐. 왜냐하면 핵심적인 본문들을 예로 들어서 나를 납득시키셨거든. 목사님의 강해를 하나하나 짚어볼 테니까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말해 봐.
잭 :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질. 너는 너무 지적이야. 너는 너무 논리적인 게 탈이라니까. 기독교는 원래 그렇게 교리적으로 정확한 게 아니야. 너는 성경이 마치 모든 행동과 견해의 최종적 판단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을 대해. 마치 칼처럼 그것을 휘두른 다구! 긴장을 좀 풀고 그 책에만 머리를 박고 있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열어봐.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 하나님이 네게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게 해드려! 성경과 정통 신학의 역사로 나를 판단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 모든 위대한 신조들과 신학자들이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상관 안 해.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는 거야.
질 : 그러니까, 잭, 네 말은 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는 거니? 그거 좀 걱정되니 않니?
잭 : 내가 걱정되는 건, 질 네가 너무 객관적이어서 하나님의 영을 거절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거야. 너는 객관적이고 문법적인 성경적 사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열려’ 있지가 않아. 네게는 신앙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
질 :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고 거기에서 제대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어. 참된 신앙은 합리적이지 너처럼 맹목적이지가 않아. 잭, 너는 너의 감정과 경험이 네 신앙을 지배하게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지속되는 계시 같은 걸 믿는 거야. 잭, 내가 보기에 너는 신비주의자 같아. 네가 이미 논리적 추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너를 설득 할 수가 없어. 가장 유능한 사상가와 저자들이 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 교회사에서 가장 학식 있는 종교 회의와 위원회가 네 견해가 틀렸다 해도 너는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아. 너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들여서 그들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했는지를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 너는 하나님이 너한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확신 때문에 교만해져서 경건을 가장하는 거만한 태도로 식견 있는 교회를 깔보고 있어. 그들이 네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너한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씀하셨다면 이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 너는 속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짐작하다시피 대화는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모든 논쟁을 아주 빨리 끝내 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질에게는 있다.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나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는데, 네가 그 말을 할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네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적이 없다고.
불에는 불로 맞서라! 주관적인 허튼 소리는 더한 허튼 소리로 맞서라.
이제 잭은 자신이 촉발시킨 것과 비슷한 종류의 신비주의적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질의 주장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질은 잭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맹목적 신앙’의 반응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잭이 질이 받은 ‘계시’를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잭은 질에게도 그가 받은 ‘계시’를 부인 할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2013-06-05 17:50:12 | 관리자
대신 죽은 윌리 리어(Willie Lear the Substitute)
위틀 소령(Major D. W. Whittle)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노라(요한복음 15장 13절).윌리 리어는 미국 미주리 주 팔미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때였고, 그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남부를 지지하였습니다. 북부의 세력은 팔미라 도시를 점령하고 그 구역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양쪽 세력 모두 끔찍한 폭동들을 행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 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수두룩이 기록되었습니다. 북군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집에서 쫓겨나 부당한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이런 일들을 복수하고 적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부의 지휘관은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잡힌 시민들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게릴라 부대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리어도 그중에 한 명이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장군은 총살형을 받은 사람 중 열 명을 뽑았고, 나머지 시민들은 폭동이 그친 후 사면이나 추후 형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즉시 사형 받을 이 열 명은 제비뽑기로 뽑혔는데 다행히 리어는 거기에 들지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어의 이웃은 즉시 총살형을 받을 무리의 한명으로 뽑혔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이웃은 대가족의 가난한 가장이었는데 사형된 뒤 두고 떠날 처자식들 걱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이웃의 상황을 지켜본 리어는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어는 자기가 그 이웃을 대신하겠다고 장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열 명을 뽑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열 명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법률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 대신 대리자가 되어 죽겠다는 제의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삼 자 즉 사형 선고를 내린 자와 선고 받은 자 그리고 선고받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동의함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자신의 이웃 대신 사형장에 나선 리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나머지 아홉 명과 함께 “발사!” 라는 외침과 더불어 소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리어가 흘린 피, 그리고 찢기고 망가진 그의 몸을 안으며 리어가 대신 죽어 준 그 이웃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빚졌구나. 나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해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까!” 라고 생각했을까요?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에게 떨어진 사형을 모면하였나요?” 라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는 대신 죽겠다는 사람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 자기가 행한 멋진 일들이 더 중요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무시하고자 했을까요? 또는 “아, 나는 나의 믿음과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인해서 살아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믿음과 나의 인격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고자 했을까요?
만약에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그 대리자의 값진 희생을 생략한 채 대답을 한다면, 그는 대신 죽어 줄 가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은 결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친구의 희생을 그렇게 무심히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살려 주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자기를 살렸다는 소식을 쉬지 않고 퍼뜨리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므로 당신의 모든 죄들이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서 당신은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삶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의 소유인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인한 구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구속자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떼놓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이루신 ‘대신 속죄의 죽음’ 이외의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다른 형태’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권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와 그분의 피 즉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그분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은 분’입니다.
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느니라(요10:11).
Taken from Gospel tract distributed by Pilgrim Tract Society, Randleman, N.C.
By Major D.W. Whittle
초역: 정아현
2013-06-05 14:06:25 | 관리자
아침에 제 아내가 읽으라고 준 글입니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같이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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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
(목회와 신학, 2004년 7월호)-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 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 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수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함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 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 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 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원본 글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4062?boardType=M®dt=20130604115719&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
2013-06-05 11:50:19 | 관리자
교회에서도 장례를 감당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을 자유롭게 써야하므로 대부분 은퇴하신 분이나 자유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원하여 장례팀을 구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자ㅒ님 가족들에게도 빛이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함께 수고하신 성도들의 수고에 감사합니다.
주께서 기쁨으로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2013-05-30 08:08:22 | 이수영
어제, 성당을 다니시던 고모님이 지병으로 별세하셔서 천주교식(?)으로 행하는 장례식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도 함께 하게 되었는데 비록 염불처럼 반복한다든가 제사와 흡사했지만 고모님처럼 가족이 얼마되지않는 사람에게는 이일을 감당하고 있는 성당사람들이 참 의지된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하는데 안타까운 이 현실을 뒤로 하고요, 우리교회도 연세있으신 분들, 혹은 형제님들께서 함께 해주시면 형제자매들에게 위로도 되고 사랑을 나눌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몇자 적습니다.
2013-05-30 01:22:46 | 이청원
일산에서 오시는 김옥림 자매님은 1년 반 전에 박미선 자매님을 통해 구원을 알기 원한다고 하시며 송내의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구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고백하고 6개월 정도 다니시다 교회가 인천으로 옮겨지면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주 전에 다시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남편께서 갑자기 백혈병으로 쓰러져서 입원해 있다고 하시면서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중환자 무균실에 있어서 환자 방문이 어려운 가운데 지난 주일에는 자매님이 오시지 않아서 지인을 통해 목사가 방문해서 위로하며 기도하려 한다고 전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워낙 건강하던 분이라 아무도 그렇게 빨리 별세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상을 당했으므로 제가 와서 입관 예식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흔쾌히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된 지는 10년이 넘었고 이 교회를 담임한 지 5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장례식을 치른 적이 없어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입관 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요일 저녁 5시에 여러 성도님들이 반포의 장례식장으로 와 주셔서 - 천안에서도 올라오심 - 은혜롭게 잘 마쳤습니다.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자매님을 위로하고 제가 더 도와드릴 것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다음 날 발인과 하관 예식도 해 달라고 해서 흔쾌히 허락하고 저는 곧바로 인천으로 내려와서 다시 발인과 하관 예식을 공부하고 인쇄물을 만든 뒤 수요일 새벽에 깨서 6시 30분부터 발인 예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아침에 갑자기 이번에는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면서 화장 예식도 해야 한다고 하기에 양재의 화장터에 가서 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안 한 것이라 스마트폰으로 급히 자료를 찾아서 보고 예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석으로 가서 납골당에 안장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제와 오늘은 장례식 공부를 하며 목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실 장례식 공부를 하면서 찬송가를 모으고 성경 구절을 찾고 간단한 권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제게 큰 복이 되었고 아내와 함께 시간을 내서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보내게 되어 기뻤습니다.
올해 초에 유준호/김소윤 부부 결혼식을 치렀고 이번에 장례식을 풀코스로 치르면서 이제야 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목사로서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김동구/박미선 자매님 부부께서 장례식 3일 동안 오셔서 유족들을 위로해 주셨고 오늘도 하루 종일 저희 부부와 함께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새벽에는 정명도 형제님이 오셔서 모든 순서지를 나누어주고 도와주셔서 역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 화요일 저녁 5시의 입관 예식, 8시의 저녁 모임에도 30여 명의 형제/자매님들이 오셔서 위로를 전하고 가셨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여건이 안 돼서 오지는 못하셨지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기도로 염려하고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앞으로 장례식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여러 성도들이 함께 의논해서 질서 있게 품위 있게 모든 절차를 잘 진행하여 모인 분들에게 덕을 끼치면 좋겠습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롬12:15).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 가정에 우리 주님의 부활의 위로가 충만히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함께 모여 위로하고 형제의 사랑을 더 많이 나누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하루이기도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내가 속히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예수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 형편을 알게 되어 나도 좋은 위로를 받으려 함이니 20 같은 마음으로 너희 형편을 자발적으로 돌아볼 자가 내게 아무도 없느니라. 21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일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추구하지 아니하되 22 오직 디모데의 증거를 너희가 아나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듯 그가 나와 함께 복음 안에서 섬겨 왔느니라.
2013-05-30 00:07:0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