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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자매모임- 문해력으로 읽는 성경 1조회수 : 1742
    • 작성자 : 박수현
    • 작성일 : 2024년 6월 17일 18시 58분 42초
  • 안녕하세요? 저는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곤 합니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연한 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제도 늘 그러한 것 같습니다. 6월 6일 공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하며 나누는 교제 시간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새 책으로 첫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재욱 저자의 [문해력으로 읽은 성경]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성경의 이해

    제2장 성경과 단어

    제3장 성경과 번역

    제4장 킹제임스 흠정역 변호

    이번 자매 모임에서 나누었던 제1장을 간략히 공유하겠습니다(문해력을 체크 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재미와 유익을 위해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성경 문해력 테스트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문해력이 많이 요구된다. 물건의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며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지하철의 안내판을 보면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등의 일도 다 이에 해당한다.

     성경에도 문해력은 꼭 필요하다. 문해력(literacy)은 유창성(fluency)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유창성은 어떤 문장이나 설명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므로 문해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기 편한 정보가 많은데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먹기 편한 초가공식품이 많아지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많은 성경 지식들은 사실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많다. 하지만 읽은 부분이 내 부족한 문해력을 통과하면서 엉뚱한 내용이 될 정도면 곤란하다. 마귀는 사람의 뇌를 망치고, 번역가를 망치며, 언어 자체를 붕괴시킨다. 그리고 계속 의미를 바꾸고 더하고 빼며 훼방한다. 우리에게 바른 문해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제 당신의 성경 문해력을 체크해보자.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많은 자들은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인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

    ● 이 구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을 다음에서 고르시오.

    ①웬만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②선생이 되면 정죄받는다.

    ③많은 사람이 선생이 될 필요는 없다.

    ④선생이란 엄중한 자리이니 선생이 되려는 자는 신중해야 한다.

     ④번이 정답이긴 하지만 ③번도 어느 정도 진실이고, ①번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반어법에 해당한다.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 부정적 메시지를 부풀려서 하는 말이다. 성경 구절에서 정답이 여러 개인 경우는 많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조심할 것은, 진실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그것이 전혀 거짓은 아니니까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쉽다. 광고에서도 이런 수법은 자주 쓰인다.

     "이 약으로 당뇨가 완전히 개선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저 약을 먹는 동안 병이 나았을 수 있지만 꼭 그 약 때문에 나은 것인지 알 수 없고, 광고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을 텐데도 이 약을 먹으면 누구나 나을 것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런 광고 문구는 일부분의 진실이면서 교묘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 구절에 담긴 정답 이외에 다른 보기에 담긴 일부분의 사실, 그 작은 가능성을 일반화해서 확대하고 그것을 진실이나 정설, 나아가 진리로 확정해선 안 된다.

     평균적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고 양극단화하는 세상이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는 각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돌아간다. 신앙적 성숙함에 더해 말에 대한 이해력과 최소한의 주변 지식을 챙겨 스마트하고 현명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제 말씀 한 줄을 읽어도 신중하게 대하고 주의를 기울여 보자.

    교훈이 아닌 '교리(doctrine)'를 가르치신 예수님

    교리는 딱딱한 것?

     종교란 본래 사람이 만들어 숭배하고 탐구하면 철학적으로 고고한 삶의 길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이런 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 정답이 없이 각자가 찾아가는 해탈과 도달의 과정이 아니라 절대자가 빈틈없이 짜 놓은 어떤 계획을 알려 준 대로 발견하고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통해 복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복이란 인생의 복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육신의 문제를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복이고 천국의 복이거늘, 성경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때때로 무척 종교적이며 두루뭉술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파악하고 순종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먼길을 돌아갈 수도 있고, 성화와 구원의 순서를 반대로 하느라 괜한 고생을 할 수도 있다.

     '교리' 하면 대게 딱딱하고 이론적인 것을 떠올리면서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 교훈과 체계적인 교리가 둘 다 중요한 것이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교리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개역성경에는 '교리'라는 단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는 조직 신학 등 후대에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은 신구약에 57회나 등장한다.

    교훈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것

     마가복음에는 공생에 초기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부정한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있다(막1:22, 27). 제자들과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교리에 권위가 있고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로 부정한 영들까지 내어 쫓으셨다. 개역성경은 '교리'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번역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doctrine(독트린, 교리)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현대 역본은 티칭(teaching, 교훈, 가르침)으로 바꿨다. '교훈'이란 가훈, 급훈처럼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좋은 얘기 정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는 현대 역본 번역자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 번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라고 보는 그들은 '독트린'을 '티칭'으로 바꿔 예수님의 사역을 편하하고, 성경의 묘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

     교훈과 가르침은 성인군자나 철학자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리는 다르다. 기독교 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면 놀랍도록 흥미롭고 쉬운 것이 교리다. 그러나 대다수의 강단에서 그저 주제식 교훈이 선포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에도 많은 교훈이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경륜이자 로드맵에 관한 필수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신비(mystery)다. 이것은 보편적 교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진리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교리 안에 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마13:11)

     교리적 신비의 특징은 말 그대로 비밀이라는 점이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 마음이 강퍅한 자들, 목이 곧은 자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은다. 성도가 마음을 열고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로 나아가면 유익이 있다.

     우리가 올바른 교리를 알아 갈수록 기독교를 여타 종교의 틀에서 뭉뚱그려 생각하는 습성도 점차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조물주(造物主)인가?

    창조자 vs 조물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Creator)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겼느니라.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니라. 아멘. (롬 1:25)

     영어로 creator가 아니 Creator라고 이니셜을 대문자로 쓰는 것은 단순한 제조자가 아니라 신적 창조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로마서의 '창조자'를 '조물주'로 번역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롭 1:25, 개역)

     물론 '조물주'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조물주라는 말은 좀 더 중립적인 용어다. 세간에 떠도는 유행어 중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듯이 불신자들도 조물주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물론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물주는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제인 먼저 원불교 용어 사전의 설명이 등장한다. 원불교에서는 조물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라고도 한다니, 이런 사상이야말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창조물을 창조자와 뒤바꾸는 개념이 아닐까.

     창조(創造)와 조물(造物)은 다른 말이다. '창조'는 무언가 새롭게, 또 창의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개념인 반면에, '조물'은 글자 그대로 무언가 만든다는 뜻만이 들어 있다. 또한 조물주라는 말은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주(主)'로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타 종교의 잡신을 '주'로 인정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다.

     성경은 문학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이므로 단어의 기계적 중립성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주관적으로 번역해야 오히려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라는 단어는 오역이 아닐지 몰라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조물주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 편에 서라!

    공정성과 객관성의 문제

     법원이나 언론은 늘 객관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고, 자기 이득을 위해 게편을 드는 가재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는 돈이 있다. 돈이 왕이며 맘몬이 최고신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인간의 갈대 같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객관성에도 종류가 있고 대상이 있다. '자로 잰 듯한 중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론이라면 감정을 빼고 양쪽의 의견을 글자 수까지 동등하게 보도할 정도록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양쪽 말을 똑같이 다룰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중립은 공평일지는 몰라도 공정은 아니다. 사안의 경중이나 정의에 대한 기준이 빠진 중립을 비꼬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판단할 때도 이런 갈등에 부닥칠 때가 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객관적인 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가장 공정하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불공정이며 횡포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그들의 비판을 수용해야 할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성경

     누군가 권력가나 대기업과 소송 중인데 판사가 내 편이 아니면 낭패일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이 해석하거나 번역하거나 설교하면 제대로 된 것일 수 없다. 특히 성경은 무조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고 쓰는 성경이 거의 전부인데, 물론 그것이 문법적으로나 어법상 맞는 것이지만 과연 잘하는 일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 27:26, 개역)

     바라바도 바라바, 예수님도 예수다. 문법이란 세상의 약속이지만 하나님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은 예수라 쓰지 못하겠다 하면 그만이다.

     그때에 그가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니라. (마 27: 26, 흠정역)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고유 명사에 '님'을 붙이면 안 되는 어법을 그렇게 잘 따지려면 모든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어법상 회중기도 중에 타인에게 존칭을 붙여선 안 된다. 대화하는 대상인 하나님보다 더 낮은 존재를 언급할 때는 내게 아무리 높아도 존칭을 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기독교용어연구회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시정을 교육해 왔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몰라서도 그렇지만 알아도 면전에서 담임 목사를 김 목사, 이 목사 이렇게 지칭하는 대표기도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하는 기도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가? 물론 사람도 듣기 때문이고, 어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존칭을 빼기도 어렵다. 어법은 알아도 존중의 의미이며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면서 어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존중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경은 왜 굳이 어법대로 예수님을 '예수'라고 표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책은 애지중지하면서도 안에 있는 표현이 하나님을 깍아내리고 폄하하는데도 무감하다면 말씀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엔 하나님 쪽으로 기우는 것이 낫다. 실패할 수 없는 공평한 길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고 하셨다. 사람도 그럴 텐데 당연한 이치 아닌가…

     타 종교와 기계적 균형을 맞추는 자들, 마치 남 얘기하듯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나열해 놓고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 자체인 말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편파적이어도 지나치지 않은 하나님 편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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