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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푸른 생명이 활짝 피어올랐던 4월이 점점 지나 이제는 더위를 느끼는 계절이 가까워 지네요.  A조 자매모임에서는 독서미팅 후 대공원으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리더 남윤수 자매님의 세심한 수고 덕분에 맛있는 묵밥도 먹고, 황톳길을 맨발로 체험하며 지체끼리 즐거운 교제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양한 꽃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예술성에 깊이 감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즐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래에 사진 공유하겠습니다.  독서미팅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탄식할 때 근원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나누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재즈로 탁월하게 비유한 내용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11 하나님 안에서 탄식하라 현실세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불만족할 수밖에 없다 - 캣의 이야기  현관에 서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원하던 걸 다 가지고 있었다.  3일 전 그녀와 브렌트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서 멋진 주말을 보내고 돌아왔다. 150년 된 그들의 농가 뒤편 정원에는 추수를 기다리는 채소들이 가득했다. 브렌트는 좋은 직업에 집 주변을 잘 돌보는 손재주도 있었고, 무엇보다 캣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캣은 어린 자녀를 둔 비슷한 나이의 친한 친구들도 있었다. 매주 화요일에 있는 자녀 동반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도시에서 위치가 좋은 곳에 콘도를 소유한 덕에 그곳에서 나온 수익으로 그들이 꿈꾸던 농가를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내 장식도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원을 매우 사랑했는데, 도시에서는 실내에서 화초만 겨우 가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자신들이 기른 야채를 먹고 있다!  캣과 브렌트의 관계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캣은 친구들의 결혼생활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비하면 자신에게는 감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중보기도의 소명 때문에 캣은 자신들이 살기로 결심한 그 작은 마을의 교회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매우 따뜻했고, 교회 위치도 그들이 다니기에 편리했다. 그녀는 유치부를 맡아서 방도 꾸미며 즐겁게 사역했다. 캣과 브렌트는 이런 작은 교회에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는 큰 도시 교회가 제공하던 프로그램과 행사의 공백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다 갑자기 브렌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러 도시로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해야 할 하루의 일과가 있었지만 캣은 자신의 삶이 참 복되다고 생각했다. -너무 쉬운 만족  얼핏 보면 캣과 브렌트의 삶은 매우 경건해 보인다. 하나님의 명령을 대놓고 어기는 일도 없고, 부부관계도 꽤 건강하다. 교회 일도 참여하고, 하나님의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끝없는 갈등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채도 많지 않다. 이웃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무언가 크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 겉으로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경건하지 않다.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찾으면서 끝없는 마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  캣의 문제는 너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캣은 자신의 작은 왕국의 꿈이 거의 실현되었다는 것에 기뻐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것도 탄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탄식할 시간  그리스도가 오셔서 마지막 왕국에 들어가시기까지 모든 기독교인의 기본 언어는 탄식이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2-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창조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것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바나다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약속되었지만 아직 받지 못한 것이 있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구원이 아직 모두에게 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물리적 세계의 일시적인 즐거움은 우리 마음에 늘 공허감을 남기며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죄가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기에 일어나는 모든 피해가 모든 상황과 여건 속에 보이므로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오직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고 오직 영원에서 성취될 수 있는것을 물리적 세계에서 찾으려는 유혹에 늘 빠진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탄식은 작은 왕국의 욕망을 큰 왕국의 관심으로 바꾼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난다. -축소와 만족  캣의 문제는 그녀에게 감사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쉽게 만족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캣의 삶에는 구속을 바라는 탄식(로마서 8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피맺힌 절규)이 철저히 빠져 있다. 그녀의 삶 내면의 만족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이것이 경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캣이 만족하는 것들을 한번 살펴보자 ◆물리적인 현실세계가 주는 일시적인 성취감  캣이 느끼는 성취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녀가 이 현실세계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획득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겉치장된 믿음의 속을 들여다보면, 캣의 만족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브렌트에게 뭔가 일이 생겨서 직장을 잃거나, 집을 팔아야 하거나, 아이들 중 한 명이 아프다면, 캣의 기쁨과 행복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이런 것들 안에서 누리는 그녀의 만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건하지 않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 비극적이고, 불완전하게,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문제다. ◆중도에 끝난 구속사역  캣의 삶에는 시험받고 고군분투하며 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이 그녀 안에 시작하신 일이 너무나 불완전한데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캣은 영적 성장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교회와 성경 공부에 참석한다. 그리고 기독교인 남편에 대해 감사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믿음에 가까이 이르고자 하는 열의는 거의 없다. 자신의 삶에서 구속사역이 중도에 끝났는데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사람들이 몹시 무례한 것과 정치적 부패와 도심 내부의 문제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때로는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실달리는 아이들의 보고서와 최근에 일어난 폭풍의 피해를 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캣은 작은 왕국의 시선으로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세상을 위해 울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서 8장의 큰 왕국의 탄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상호 만족을 주는 가벼운 공동체  그녀가 다양한 관계에 참여하는 데 있어 그들 중 아무도 건강하지 않거나 갈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꽤 의미 있는 관계들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캣에게 관계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녀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녀에게 시작하신 선한 일을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라기보다 개인 행복의 원천이었다. 때문에 캣은 수많은 가벼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너무 깊고 진지한 관계를 맺으면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이 이 정도 경계를 지켜주는 것에 감사한다. 그들은 서로 방해 받지 않는 낮은 수준에서 서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관계다.  초월적인 영광은 작은 왕국의 소망보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끌려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캣의 근시안적인 만족감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추구하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간절히 구하게 된다. -궁극적인 성취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진정으로 성취감을 누리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상의 일시적 즐거움에 만족하느라 바빠서 그분이 주시는 성취감을 발견하지 못한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것들 자체로는 악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지만, 그것들이 우리 마음의 만족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작은 왕국의 삶은 창조세계의 만족과 불만족에 온전히 좌우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채워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 즐거움은 나쁜 열매를 추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땅의 것들은 진정으로 우리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 살이 찌게 하고, 건강을 상하게 하고, 중독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다. 또한 결핍을 느끼게 만들고, 분노하게 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작은 왕국의 즐거움에 지배당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해치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맛보고, 듣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게 되면 마음과 행동으로 끝없이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날마다 깊은 감사와 탄식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향기와 잘 준비된 음식의 감칠맛에 대해 감사한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과 일몰과 강들, 산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도 감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고, 우리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이런 것들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심에 감사한다.  동시에 우리는 탄식한다. 이 세상이 상처를 입었기에 탄식한다. 어디를 보아도 상처투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다를 수 있는 온전한 존재가 아직 아니기에 탄식한다. 이 땅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킬수 없기에 탄식한다.  탄식이 하나님 자녀들의 기본 언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옳다. 당신의 삶이 닿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이 바로 이 탄식이다. 12 하나님과 구원의 음악을 연주하라 하나님은 매 순간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상호 교류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날 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난생 처음 재즈 공연을 들으러 테드 형과 함께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 갔다. 램지 루이스 트리오의 공연이었다. 나는 그날 밤 내가 경험하게 될 것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그날 밤 내 인생이 바뀌었다!  공연은 모든 관객에게 익숙한 램지 루이스의 피아노곡으로 시작됐다. 친숙한 곡 첫 번째 소절이 연주되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야! 이게 유명한 재즈란 말이야? 라디오 방송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곡이잖아!' 하지만 두 번째 소절로 넘어가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 명의 멤버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불협화음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조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각자 자신의 악기로 따로 연주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들은 상대편의 소리를 막거나 제멋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통일된 주제로 최선을 다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각자 연주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혼신을 다해 합주했다. 혼신을 다해 각자의 악기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음악은 섬세하면서도 예측불가능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재즈는 규칙을 버리고 멋대로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다. 위대한 재즈 연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불가능하고 창의적으로 연주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일련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날 밤 형식과 자유의 교차점에 대해 생각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날의 연주는 내가 경험해본 가장 자유롭고, 가장 고무적이고, 가장 즉흥적인 연주였다. 그것이 음악을 이루는 형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그날 톨레도대학 야외 공연장에서 경험한 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척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음악 왕국  하나님은 최고의 음악가이시다. 그분의 음악은 당신의 삶을 바꿔놓으신다. 구원의 음표들은 당신의 마음을 재배열하고, 당신의 삶을 회복시킨다. 용서, 은혜, 화해, 진리, 소망, 주권, 사랑을 노래하는 그분의 노래는 당신의 인강성을 되돌려주고, 당신의 정체성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음악을 혼자 연주하지 않기로 하셨다. 우리 한사람 하사람을 그분의 위대한 구원 밴드의 연주자로 부르신다. 우리의 음악을 내려놓고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과 조화를 이루며 그분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곡한 것을 칭찬하는 데 매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각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매우 치명적이 약점이 있음을 알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음악은 그분의 틀을 벗어나서 연주된다. 그래서 우리의 음악은 해롭고, 치유하지 못하고, 나뉘게 하고, 화해시키지 못하고, 저주하고, 용서하지 않고, 심지어 작곡가인 평화의 왕자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손에 든 악기를 부수지 않으시고, 음악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던지시지 않는다. 망상에 가까운 우리의 거창한 개인주의를 은혜로 용서하시고, 그분과 함께 연주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전에는 결코 연주할 수 없었던 음악을 연주할 능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귀가 속아 넘어가서 우리 음악이 그분의 음악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구원의 노래에 싫증을 내면서 우리가 쓴 음표들을 듣고자 갈망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위대한 작곡가의 제지가 필요하다. -재즈 왕국  당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하는 것은 그날 밤 그 트리오가 솜씨 좋게 적용했던 것 같은 형식과 자유의 원칙들(form and freedom principles)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된다면 어떤 형태의 삶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에게 맞는 형태와 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형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원칙들, 명제들, 명령들, 약속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가 삶으로 따라야 할 틀(형식)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 틀 안에서 연주할 때, 하나님 나라가 지극히 영광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그곳에 임한다.  이 깨어진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의 음악뿐이다. 모든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선율뿐이다. 구원의 음악은 모든 곳에 적용 가능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정하신 형식 안에서 연주할 때, 우리 삶은 자신의 삶이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거대하고 중요한 것의 일부가 된다. -불협화음이 내는 소음  조이는 일을 끝낸 후 집에 돌아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와 엠마 사이의 악감정은 너무도 극심해서 숨이 멎을 정도였다. 뭔가 잘못한 일(말을 잘못했거나 뭔가를 잊어버렸을 것이다)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일로 또다른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그와 엠마 사이가 매번 이렇지는 않았다.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는 상대방의 말을 포용했다. 그러나 결혼 후 처음 몇 달간 보인 표면적인 조화로움은 짧게 지나가버렸다.  소소한 불협화음의 순간들로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짧은 불협화음의 순간이 점점 늘어나자, 그들의 관계는 멋지게 연주된 듀엣곡이 아닌 자동차 경적 소리에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렸다. 조이와 엠마는 이런식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불협화음 같은 관계를 위해 예비된 은혜가 있다. 조이와 엠마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음악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음표들은 결과적으로 분열과 불협화음을 만든다. 그 음표들은 영혼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정을 깨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엉망으로 만든다. 정의를 왜곡하고 부패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치유 공동체가 되도록 계획하셨던 모든 공동체(가정, 교회, 정부)는 병을 앓게 되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치유를 제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재즈다!  하나님 나라의 조화로운 음악은 형식에 대한 것이면서 또한 자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저 연주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주할 악보에 모든 음표를 달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당신이 처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를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말을 미리 정해놓거나 미리 결정을 내려놓지 않으신다. 성경말씀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은 조표와 박자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엄마와 아빠들에게 자녀양육과 관련하여 주신 직접적인 명령을 공책 양면에 열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먹지 않으려는 어린 자녀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다투는 형제자매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십대 자녀를 그분의 시선으로 이끌기 위해 뭐라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각각의 상황에서 적용할 중요한 기준들이 들어있다.  하나님 나라의 재즈 같은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 자유다. 훌륭한 재즈 음악가는 연주만 훌륭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듣는 것도 매우 잘한다. 그들의 재즈는 언제나 주변과 상호 교류한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연주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자유가 하는 질문들이다. -목적을 가진 재즈  '그분은 매 순간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신다. 현상적으로 볼 때 완벽한 악보를 주시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잠시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다는 이런 생각이 왜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우리의 죄악된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편안하고, 쉽고, 성곡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문제는 이런 욕망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즐거워해야 할 한가지와 경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또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련의 기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 그 이상이다. 즉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다! 그분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딱 필요한 것만 주신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일생을 살며 즉흥 연주를 할 때 그분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이고 창의적이기 원하신다. 우리의 압축포장된 작은 세상의 경계를 초월하기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낱장 악보를 주지 않으시고 재량껏 하도록 하신 이유다. 그런 삶의 방식은 우리가 그분이 작곡하신 것과 그분이 현재 연주하고 계신 것에 집중할 때만 작동한다.                      
2024-04-29 17:13:00 | 박수현
독서 모임이 좋은 점은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024-04-25 07:32:15 | 이규환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자매님들과 성화를 향한 길에 올바른 지침을 주는 책 같아요. 정말 이 세상에 마음을 둘 수가 없으니 더욱 주님 오시길 기다리게 되지요. 온전히 마음을 삶을 주께 드리는 일을 향해 발걸음을 하고 있는 자매님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2024-04-24 07:13:21 | 이수영
이 땅에서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경험은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살고 싶은 강한 동기가 되기도 하는것 같아요. 그 경험은 노력해도 내려놓아지지 않는 것이 저절로 내려놓아지게끔 하는 역경일수도 있고 또 믿음때문에 받는 핍박은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끔 단련시키는 요소가 되어 결국 감사함으로 끝나요.. 자신의 계획을 따르는 데서 죽으라 라는 문구가 2024년도부터 완전 제것이 되었으면..주인이신 예수님께 기도 드립니다.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거의 없으나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다가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장 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4-22 20:12:01 | 목영주
 안녕하세요. 어느덧 4월도 중순이 지났습니다. 이번 달에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전성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평안이 생기곤 합니다. 이 책이 말하듯 작은 왕국이 주는 두려움은 큰 왕국이 주는 소망에 초점을 맞출 때 사라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마지막 때, 자매들이 서로 모여 교제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번 자매 모임에서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독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함께 읽은 챕터에서는 우리의 왕국을 떠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9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으로 부르시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진정한 삶을 주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육신적인 삶과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는 삶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일한다. 위험이나 상해, 고통, 어려움, 손실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이러한 본능은 모든 사람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생명의 창조주께서 사실상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요청이 갖는 심오한 논리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누가복음 9장 23-26절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살펴보자.  현실세계의 가장 큰 위험은 생명인 척하는 죽음이다. 죽음은 에덴동산에서 생명인 척했고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잠언 14장 12절은 죽음의 속임수를 잘 요약한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우리 죄인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생명은 거부하는 일을 매우 잘한다. 예를 들어 TV를 보면 간음이 생명으로 그려진다. 성적 욕망을 느끼는 순간이나 불법적인 성행위를 하는 순간이 처음에는 활력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간음은 몸과 영혼을 잔인하게 투자하는 것이다.(잠5:4-5)  혹은 폭식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좋은 것을 즐기는 것으로 무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삶을 빼앗고 몸과 영혼을 다 망치는 길이다. 물질주의는 감각을 만족시키는 좋은 것들로 자신을 에워싸면 매우 강력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물질주의는 우리는 약탈한다. 때문에 성경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은 생명은 물질적인 '빵' 그 이상의 것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인 척하는 죽음'이 반복해서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요청, 논리, 질문, 경고라는 네가지 항목으로 정리해보겠다. -죽어야 한다(요청)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이 세가지 요청은 진정한 생명의 삶으로 난 유일한 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우선시하는 데서 죽으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삶을 추구하는 것에서 죽으라 나를 따르라: 자신의 계획을 따르는 데서 죽으라 -영적 자살을 피하게 된다(논리)  그리스도는 왜 이리 어려운 요청을 하실까? 왜 아 세가지 죽음보다 더 쉬운 것을 주시지 않을 걸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의 속성과 관성을 아신다.  죄는 본성상 자기중심적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기꺼이 참여하도록 부르실 뿐 아니라, 그 부르심에 합당한 논리적 근거도 주신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눅9:24; 마16:25; 막8:35 참조)  다시 말하지만 작은 왕국은 생명을 약속하지만 죽음을 가져오고, 큰 왕국은 죽음을 요구하지만 생명을 준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생명이신 그분 밖에서 생명을 구하면, 결국 영적 자살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 우리 마음이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영적 산소는 주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의 공급과 즐거움을 위해 사는 것이 걱정과 근심으로 이끈다고 가르치신다. 걱정은 삶에서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걱정은 우리 영혼의 암이다. 걱정은 우리의 시간과 쉼과 힘과 용기와 소망과 인격과 관계와 목적과 예배와 즐거움과 만족을 갉아먹는다. 걱정이 우리의 삶을 지켜줄 거라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선한 것들이 죽는다.  당신에게 자신을 향한 사랑과 자기 삶을 위한 멋진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라. 우리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유지하고, 보존하고, 통치하려는, 개인적인 강한 욕망의 힘을 알고 계신다. 그 힘이 너무나 강해서 죽음만이 해결책임을 알고 계신다. -모든 것을 가졌다면?(질문)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은 채 살고, 일하고, 성취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자기 왕국에 투자하는 것만큼 형편없는 투자가 또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지만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분의 영광에 헌신하는 것이 빠졌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재물을 쌓는 것이 인격의 성숙보다 기능적으로 더 삶에 활력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 삶을 온갖 잘못된 보화를 얻는 데 낭비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임을 기억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작은 왕국을 더 선호하는 위험(경고)  누가복음 9장26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과 자기 아버지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속에서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세상과 세상이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그분은 우리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 혹은 너무나 좋아해서 동기를 부여하는 것, 그래서 그것에 따라 바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결정되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하신다. "나는 너희 삶에서 합당한 장소에 있게 하기를 거부하면 나도 영광 중에 너희를 나와 함께 있게 하지 않겠다." 쉽게 요동치는 마음을 가진 우리가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될 경고다.   당신은 주일에만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중에는 다른 보물들을 위해 열정과 시간을 다 투자하지 않는가? 물론 일하고, 먹고, 쉬고, 투자하고, 관계 맺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통치하고 있고, 무엇이 당신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느냐다. -달콤한 약속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정말 어려워 보인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지만 이 어려운 요청이 실제로는 은혜의 부르심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방편이다. 당신의 주님은 당신에게 자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아시기에 당신을 그냥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생명을 보면서 죽음이라 생각하고, 죽음을 보면서 생명이라 생각할 것을 아신다. 그분은 당신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꽉 쥐면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받지 앉으려 할 것을 아신다. 죽으라는 그분의 부르심은 당신이 추구하는 너무나도 무모함 꿈들을 넘어서 삶을 살라는 제안이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이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는 삶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을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시키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의 가면을 쓴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모든 부르심이 위로로 다가온다. 모든 명령은 환영이 되고 모든 호소는 긍휼의 빛을 띤다. 이사야 55장 1-2절의 초대를 들어보라.  오호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너희 혼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름진 것을 기뻐하게 할지어다.  당신이 스스로 성취하거나 계획할 때 느끼는 기쁨을 초월하는 기쁨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의 삶에는 초월적인 의미와 목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꽉 잡고 있는 한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하라. 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구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는 요청을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당신이 스스로 얻거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주신다. 그리고, 물리적인 창조세계는 절대 줄 수 없는 것을 당신에게 제안하신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영광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받을 최고의 상이다. 이것이 온 우주 최상의 식사다. 이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주고, 당신을 영원한 즐거움으로 채워줄 유일한 것이다. 10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나 중심적인 삶에서 구원받았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는 땅에 매인 보화와 걱정에 매인 필요에 지배받으며 살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뜻에 집중하여 새롭고 더 나은 방식으로 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고 더 이상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큰 왕국은 자신의 통치를 받는 수백만 개의 고립된 왕국이 되고 만다. 거듭 말하지만 큰 왕국의 삶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에 대해 앞 두 장에서 다루었지만, 이번 장에서 더욱 정확하게 정의 내려보려 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도식화된 유사 성경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의 유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이해를 못하게 가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 더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려 한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인격과 부르심과 은혜와 영광을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말하고, 행동하며, 소망하는 것의 중심 동기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살 때 의미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살게 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당신을 어디에 심으셨든 세상과 구별된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 삶  구약에는 큰 왕국, 즉 예수님 중심의 삶을 다른 어떤 것보다 명확하게 규명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교훈하시는 부분에 있다. 마치 대학에 입학하는 자녀와 부모의 대화를 읽는 것 같다. 자녀와 헤어지기 전, 부모는 지난 18년간 가르치려 한 모든 중요한 지침과 가치를 요약해서 자녀의 머릿속에 새기려고 노력한다. 이 말씀은 모든 신학, 윤리학, 변증론을 포함하여 평생에 가져야 할 성경적 세계관을 5분 내로 요약한 것이다. (신10:12-22을 찾아보자) -중요한 질문  이 구절은 큰 왕국의 삶을 살기로 헌신한 사람이 물을 수 있는 위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문제는 일련의 새롭고 다른 것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 삶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행하고 계신 일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 중대한 질문들에 대해 신명기에서 두려움, 걷는것, 사랑이라는 3가지 심오한 단어로 답변한 것을 살펴 보겠다. ◆두려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처럼 하나님을 편안하게 내 필요를 채워주는 친구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은 매우 시기적절한 요청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 거룩함, 지혜, 은혜를 깊이 자각하고 두려워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두려움을 소유하지 않으시면, 우리 삶도 소유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게 될 것이다. ◆걷는것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마음의 태도일 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 적용할 수 그분의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웃이 되고, 부모가 되고, 배우자가 되고, 친구, 동료, 그리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소유물, 재산, 슬픔, 화, 기회, 책임감 등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하나남은 말씀 속에서 매일의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 우리의 주된 일은 신비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이미 드러내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날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나오는 명령, 지시, 원칙들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지 다 알려준다. ◆사랑  큰 왕국과 작은 왕국의 근본적 차이는 우리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다. 나의 영적 상태가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드러낼 때, 내가 신경 쓰고, 걱정하고, 희생하고, 절제하고, 소망하고, 꿈꾸는 크기는 언제나 나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될 것이다. 반면 내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 자신만의 바람과 필요라는 경계를 넘어 광활한 하나님 나라로 끌어올려지게 된다. 그곳은 날마다 만물의 구원과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기억해야 할 것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의 모델에서 중요한 질문(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다음에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뒤따른다. 즉, 큰 왕국의 삶은 주님을 기억할 때 언제나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 죄인들이 늘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날 해야 할 일들, 직면한 어려움들, 주변 사람 등으로 꽉 차 있어서 우주를 향한 그분의 초월적인 목적으로 우리를 이끄신 영광의 주님을 의식하지 못한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왕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영적 활동이 아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다. 내 일정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신경 쓰는 것이다.  하루를 시작할 때 무엇이 마음의 눈을 채우고 있는지 자문해보라.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당신의 관심을 끌고 동기를 부여하는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당신의 하루가 그분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는가? 당신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주권이 깨달아지는가?  신명기 10장 14절은 "보라"로 시작한다(이 말에 해당되는 "Be hold"가 개역성경에서는 생략되었다). 관심을 집중시키려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단어다. 저자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 갖기를 바라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해 있다. 이 세상은 실제로 그분의 것이다. 세상이 마치 내 것인 양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2. 당신의 현재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신 10:15). 3.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통치자시다(신 10:17). 4.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과 긍휼의 주시다(신 10:18-19).  이와 같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예수님이 중심 되시는 큰 왕국의 삶을 사는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부르심  큰 왕국과 작은 왕국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전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음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사랑이 당신 삶을 이끌어갈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받게 된 밝은 약속이 바로 새 마음이라는 사실에 힘이 나지 않은가? 예수님이 사셨다가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기에 당신에게 마음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역사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왕국의 의도들을 버리라고 요청하는 이 말씀 구절은 당연히 삶을 바꾸는 마음 자세에 대한 요구가 된다.          
2024-04-22 13:40:00 | 박수현
안녕하세요, 자매님^^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자매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 중 좋은 이야기들이 정말 많아서 저도 자매님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핵심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기엔 이 광범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했고 아직은 제 필력이 부족해서 책 내용만 요약해서 올리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업데이트 하면서 제 필력이 조금 좋아지면 실제 나눈 이야기들도 정리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024-04-22 13:23:17 | 박수현
자기왕국 벗어나는것을 넘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받는 핍박,곤경에서도 순종할 수 있으려면 내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신지 말씀안에서 잘 알고 있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04-16 07:59:01 | 목영주
안녕하세요. 따뜻한 봄날씨에 목요일 자매 모임이 열렸습니다. 교회 옆 장아산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함께 사진을 찍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 다룬 챕터들은 우리의 작은 왕국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왕국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7 현재가 아닌 영원에 투자하라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크기로 축소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 앙이 드쁘아가 군인들을 위해 고기를 보관하려고 고안해 낸 발명품 '압축 포장재'. 이것의 놀라운 점은 실패하는 법 없이 언제나 제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을 싸든 딱 그 크기만큼 수축된다. 군인들의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 이토록 모든 현대 소비자의 삶을 바꿔놓을지 몰랐을 것이다.  죄의 효력이 드쁘아의 고안품과 매우 흡사하다. 죽 그 영향력은 훨씬 광범위하다.  죄의 유전자는 이기심이고, 그 유전자는 우리의 우주를 우리만의 크기로 축소시킨다.또한 죄는 궁극적인 압축력을 만들어낸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삶의 크기를 우리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하게 된다. 축소된 자신만의 왕국 안에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망가진 자동차 모형과 이기적인 욕망들  어린 시절(폴트립 저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가지 이유로 테드 형에게 화가 났다. 내가 세운 규칙들을 형이 어겼기 때문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일을 해서 분품이를 할 참이었다. 곧장 형 방으로 가서 신발을 벗어 들고 형이 모아 놓은 자동차 모형들을 내리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았기에 기분이 좋았다.  한 어린이의 삶에 일어난 이 슬픈 사건이 모든 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받아들여지고, 섬김을 받고, 인정 받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가볍게 내는 화에서 폭력적인 분노까지 다양하다.  죄의 핵심은 이기심이다. 자기 안으로만 몰입하는 혼자만의 우주다. 죄는 사실상 궁극적인 압축 포장재다. 우리의 관심과 마음 씀씀이를 자기만의 삶으로 수축시킨다. 죄는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을 저지른다. 잠시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과 당신 주변에서 그러한 경향을 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은 우리만의 작은 왕국으로 자신을 축소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의 영광을 버리시거나 그분의 주권적인 계획을 거부하실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뿐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으실 것이다.  시편 145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깊어서 그 바닥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분의 영광은 그 정도로 깊다!  우리 삶의 크기는 그분의 위대하심에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우리의 삶을 그분의 영광이라는 거대한 텐트 안으로 확장할 때, 우리의 삶 안에 즉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생겨난다.  죄는 기능적으로 무신론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우리의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로 축소시키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를 갖고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든, 우리가 정말로 경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다가도 화요일에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그분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개인적으로 살아남고, 일시적으로 행복하고, 개인적 성공에 안주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과 계획 안에서 우리의 의미와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도록 창조되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넓은 삶으로 부르심받았다.  '하나님 닮은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실질적인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실제 삶에서 보물로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의 경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더 나은' 것은 바로 우리와 만물을 위한 그분의 계획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이야기가 은혜로 하나님의 이야기에 연결되는 것을 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은혜란 죄로 압축된 포장재를 찢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은혜가 들어와 우리를 끄집어내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롭고 의미 있는 장소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 장소는 그분의 사랑으로 산소가 공급되고, 그분의 능력으로 동력을 얻고, 그분의 영광으로 장식된 곳이다. 이 거대하고 멋진 장소가(우리는 이곳에서 살고, 이곳에서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하나님 나라다. -압축된 왕국의 윤곽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다른 왕국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슬프게도 죄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은사와 에너지를 쓰고도 기꺼이 만족하게 만든다. 죄는 인간 공동체를 각각 독립 왕국이 서로 충돌하는 왕들의 사회로 퇴보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갈등을 겪을 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전쟁을 겪고 있다! 우리가 서로 같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자기 왕국이 얼마나 좁은지 그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지금 여기서  압축 포장된 자기 왕국은 그 눈을 현재에 확고히 고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집중한다.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원하는 참을성 없느 왕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졌기에 영원을 보며 살도록 지음받았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영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지금을 그때를 위한 투자로 본다.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을 사고, 휴가를 즐기고,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맛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이 그 시스템을 이끄느냐다. 자기 왕국은 지금 여기서의 즐거움과 쾌락과 추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내것  축소된 왕국은 근시안적이다. 멀리 보지 못한다. 필요하고, 중요하고, 가치 있고, 생명과 관련이 있고, 긴급하고, 보람 있고,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들이 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돌봄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하고 가까이 있는 친구와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내 삶 경계 밖에 있는 광대한 우주에 대해 신경을 쓰고 돌보는 일을 위해서는 시간이나 힘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삶의 정책을 결정하느냐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느라 하나님 왕국의 더 큰 관심에 쓸 시간이 없는가? ◆육체적 경험과 물리적 생성물  압축 포장된 왕국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만져지고, 맛볼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육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균형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육체적인 인간이고, 아름답게 창조된 물리적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우리 배를 채워주는 많은 것을 주셨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삶이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보이는 것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자기 왕국은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것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느 것에 더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격과 권리  자기 왕국은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을 때 더 기뻐하는 왕국이다. 여기서는 내가 공격을 받을 때 가장 슬퍼한다. 여기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주목하고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는 자기의 재산, 위치, 권리를 명확히 한다.   그렇다고 짓밝히고도 가만히 있거나 기꺼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려고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그 시스템을 이끄는 것이 무엇이냐다.  죄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이 갖는 물리적인 영광들을 보여주며 오직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반면 은혜는 '자기 초점', '자기 방어', '자기 보호'라는 울타리를 허물어서 당신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준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진정한 영광을 경험할 뿐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8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라  하나님 나라의 삶은 생각하고, 바라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중심에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세계의 중심에서 살고 싶어 하도록 만든다. 죄는 나 자신에게 집중 조명이 비추기를 원하게 만든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땅에 매인 보화와 근심에 매인 필요에 모든 힘을 쏟게 만든다. 그렇다. 죄는 확실히 우리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시킨다. 이것이 바로 작은 왕국이다. 작은 왕국에서는 자신이 늘 중심에 있다. 큰 왕국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심에 자아가 절대 있을 수 없다. 두 왕국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누가 중심에 있는지를 보면 드러난다.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은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중심을 비워둔다. 이번 장은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내용이다. -왕의 이야기  앞서 말했듯이 성경은 두 왕국, 즉 자기 왕국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전쟁 이야기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왕의 이야기다.  구약은 실패한 인간 왕국들의 연대기로서, 구약이 가장 소망하는 것은 한 왕이 나와 그의 나라를 세우고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는 것이다(사9:6-7, 32; 겔37:24이하; 슥9:9-10 참조).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왕을 기다리고, 찾고, 소망하면서 끝이 난다.  반면 복음서는 기다리던 그 왕이 왔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한다. 기다리던 왕이 드디어 이 땅에 오셨다. 모든 성경은 진실로 왕이신 그리스도 이야기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기에 합당하고 유일하신 분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의미다.  초월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크기를 자신만의 삶의 크기로 축소하려는,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할 때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기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할 때만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초월성을 회복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초월적인 삶을 살 때만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때만 우리의 삶이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인간성은 스스로 발견하거나 스스로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세상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삶을 투자하고,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삶을 투자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분의 영광을 위해 이곳에 심겨졌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스스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 살 때,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기 시작한다.  큰 왕국을 위해 사는 것은 삶의 모든 국면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3-23절 바울의 기도에서 모든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이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드러내도록 지음받았다.  두 번째로 고린도전서 1장18절-2장5절 말씀을 보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 자신의 사역에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는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기도교인의 삶 모든 영역 중심에 두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두 개의 성경 본문을 간단하게 해설하면서 몇 가지 원리로 요약해보겠다. ◆창조세계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도록 만들어졌다  당신의 결혼은 주로부터 나왔고, 당신의 결혼생활을 그리스도 위에서 행해지고, 당신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존속된다. 당신의 자녀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당신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고, 당신의 자녀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서만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이다.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손에서 나오고,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께서 속한 것이고, 당신의 소유는 그분의 보호로 보존될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 그분께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다  진정한 인간성은 자기 혼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창조주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그리스도는 그분이 창조한 모든 사람의 삶에서 중심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패러다임이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는 언제나 십자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집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이 회복되고 그리스도가 마땅히 계셔야 할 우리 삶의 모든 중심에 서시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다. -어떤 모습일까?  샘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의 신앙에느 열정과 방향성이 부족했다. 행동은 곧았지만, 공허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직장에서 그의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즉 매우 긍정적이고, 추진력이 있고, 의사소통도 잘하고, 열정이 넘쳤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열정이 없어 보였지만 직장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뭐가 빠져 있는 걸까?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앉을 때, 그 사람의 신앙은 늘 신학이나 규율로 축소될 것이다. 신앙이 삶의 중심에서 원리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다른 더 강력한 동기에 자리를 내주고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기독교 신앙을 신학이나 규율로 갖게 되면 자아가 중심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빠진 기독교는 아름답지도 않고 능력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만이 모든 죄인을 파멸로 이끄는, 자신을 향한 강한 사랑을 무력화시킬 능력이 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그 사랑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  기독교 행동주의, 율법주의, 형식주의, 감정주의, 신조주의, 외식주의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작은 왕국이 큰 왕국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다 큰 왕국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이것들이 갖는 위험성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위장하여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큰 왕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원천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로 소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다 그분의 손에서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분의 지속적인 은혜 없이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없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지혜와 힘과 사랑과 이내와 참을성과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늘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은혜를 구한다. 말씀을 읽고, 교제하고,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고, 사역에 동참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고, 영적 리더들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구한다. 이 모든 것을 의무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원천이고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하기에 그렇게 한다. ◆동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분이 정말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이유가 되신다는 의미다. 우리는 그분을 알기 원한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목적을 우리 스스로 우리의 목적이라 규정한다. 그분의 나라에 동참하도록 선택박은 것에 감격하고, 그 나라의 목적, 가치, 목표에 맞는 방법으로 살고자 한다. ◆목표  우리 삶의 목적은 그분의 영광과 존귀다. 이제 더 이상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 살거나,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행하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 훨씬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그분이 우리 삶에 방향을 주고 기쁨을 주신다. ◆소망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는가? 어떤 바구니에 당신의 달걀을 전부 넣었는가? 그리스도가 당신의 소망인가? 그분이 당신의 삶이 서 있는 견고한 바위인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될 때, 그분은 우리가 확신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신다. 우리는 그분의 지혜로 행동하고 그분의 은혜에 의지한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거나, 누군가를 통제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그분이 우리의 소망이다.                      
2024-04-15 20:32:18 | 박수현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살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의 왕국을 쌓지않기 위해서뿐 아니라 시련을 견디기 위해서도 예수님과의 교제로 가득한 하루되게 해주세요.. -내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좋으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위로가 되는 하나님말씀입니다~
2024-04-06 22:14:41 | 목영주
    안녕하세요, 이번 주 자매 모임은 교회 주차장 공사로 인해 조별로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한 B조는 이은정 자매님께서 집을 제공해 주셔서 편안하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조 자매님들과 만나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의 만남도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번 독서 모임도 두 챕터로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5 왕의 문명 건설에 참여하라 우리는 늘 어떤 문화로 문명화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문명화한다 -문명화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폴트립 저자) 우리 모두가 왕국 건설자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문명 건설자들(civilizers)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왕국 문화로 '문명화되고' 있고, 다른 사람을 문명화시키고 있다. (예를들어)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길이 막혔는데 아버지가 앞에 있는 차를 저주한다면, 아이들은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반응하도록 문명화된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어떤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고, 언제나 그 문명의 규칙과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폐쇄공포를 일으킬 만큼 작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 왕국의 규칙을 지키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변 사람들을 자기 문화에 따르도록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분간하기 힘들다  문제는 이처럼 심오하고 삶을 형성하는 왕국 건설의 모든 행위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서 사소하고 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난 지금 왕국을 건설하고 있어. 나랑 관계를 맺고 싶으면 내 왕국의 규칙들을 지켜야 해."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죄로 인해 눈이 가려진 채 소소한 순간들을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왕국 건설은 많은 부분 의식적인 의도 없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큰 왕국의 규칙들(하나님의 왕국)과 작은 왕국의 규칙들(자기 왕국)이 혼잡하게 뒤섞여 형성된다.   우리가 어떤 왕국을 짓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고 혼동되어 있다. 초월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실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관심의 영역으로 우리의 삶이 축소된다.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날마다 살고 일하는 왕국은 한 사람만의 왕국이다. -자기 문명의 특징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으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두 왕국의 정책이 위험하게 뒤섞인 채 살고 있다. 왕국 간의 갈등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작은 왕국의 특징을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부터 한 가지씩 소개하며 논해보겠다. ①자기 초점: 작은 왕국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유력한 초점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에게 무엇이 '좋으냐'가 이 작은 왕국의 법이다. 당신의 대화와 결심과 행동은 누구의 '유익'을 구하는가? ②자기 의: 자기 의는 나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나의 죄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더 크게 보게 만든다. 작은 왕국은 하나님의 계시보다 나의 내면의 대화에 지배되므로 나 자신을 겸손하고 정확히 보도록 장려하지 않는다. ③자기만족: 작은 왕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가?'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만 묻는다. '나 자신과 내 삶이 만족스러운가?' 이 질문에 만족한다면 자신만의 왕국은 잘 돌아갈 것이다. ④자기 의존: 자기 의는 언제나 자기 의존으로 이어진다. 내가 의롭다고 확신하는 만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다. ⑤자기 통치: 작은 왕국에서 최고의 법은 나의 법이다. 이 왕국에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인생을 위한 최고의 계획을 세운다. ⑥자기 영광: 우리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영광의 정의를 내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는 신념을 따르고 교회라는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이다. 당신은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싸우는 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은혜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왕국들 간의 싸움을 감당하도록 충분히 대비해두셨다. 그분의 은혜로 나로 채워진 당신의 왕국에 구멍을 내고,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당신을 끌어낸다. 왕국 간의 싸움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살펴보자. ①작은 왕국의 권세를 깨트리셨다(롬6:1-14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이상 작은 왕국의 지배 아래 살지 않는다. 십자가는 창조물의 그늘진 영광이 당신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당신의 마음이 오직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영광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②이기적인 욕망, 생각, 말, 행동에 대한 모든 빚을 갚으셨다(골2:13-14)  당신 대신 당신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은 분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시는 은혜로 우리는 어둠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부와 죄의식과 두려움, 부끄러움의 짐을 벗게 되었다. 그 용서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도록 초청받았다. ③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을 복종하게 할 능력을 얻으셨다(골2:15, 엡3:20)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작은 왕국의 권세가 무너지긴 했지만, 작은 왕국의 생각과 욕망들은 여저히 당신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매일 당신의 삶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제 당신은 작은 왕국의 자기중심적인 정책에 대해 "아니!"라고 맞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결과 중 하나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신은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당신이 직면하는 엄청난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④왕국 간의 갈들이 끝날 것이다.  평화의 때가 오고 있다. 최고의 전쟁은 결국 끝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이길 것이다! 그때까지는 왕국 간의 전쟁이 계속된다. 이 전쟁은 무엇보다 초점을 차지하려는 전쟁이다. 데이빗 핸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에서 자아가 설 수 없는 유일한 자리가 바로 중앙이기 때문이다. 중앙은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다."   6 욕심을 섬김으로 위장하지 말라  자기 왕국의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 왕국인 체하는 것이다  작은 왕국(자기 문명)의 문제는 큰 왕국(하나님의 왕국)처럼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의롭고 선한 것들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 가장 위험한 자기 초점을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들로 변장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두려워해야 한다! 변장 왕국의 왕 사탄에 의해 기만적으로 선전되고 있다. 이기심은 섬김으로 가장할 때 가장 위험하다. -변장 왕국의 열매  다이어트를 한다고 겉으로는 규칙을 잘 지키며 몰래 많은 양의 초코칩 쿠기를 먹고 있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몸무게가 빠지기는거녕 늘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과 동료 기독교인들의 삶을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영광을 위해 기쁘게 헌신할 때 얻는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들이 보일 것이다. 겉으로는 왕을 위해 살아가는 척해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섬길 때 얻는 열매들이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일이 예배와 순종과 사역의 형태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변장한 자기 왕국의 세 가지 열매를 함께 살펴보자. ①복음에 대한 열정과 감격이 부족해진다: 진짜 목적(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다른 목적(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②하나님과 기독교에 실망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경의 가르침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구체적인 일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편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이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함을 믿으라고 요청하고, 죄악으로 엉망이 된 이 세상 속에서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내라고 요청한다. 우리가 주님의 언약적 사랑에 소망을 두고 그분의 영광을 우리 삶의 목표로 정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 ③작은 왕국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닮아간다(시115:1-8): 시편 115편의 제일 중요한 원리는 '네가 바라는 보물처럼 될 것이다.'이다.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며 추구할 때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라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들의 자질이 자라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 안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는 것이다. -가면 벗기  자기 왕국이 무서운 것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변장 왕국과 진정한 왕(눅4:18-19)  삶 속에서 작은 왕국의 실체를 드러내 물리치려는 싸움은 당신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 메시아께서 이 싸움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작은 왕국이 우리를 얽매이기에 그분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다른 왕국에서는 우리의 소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운 왕국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왕이시다. 그 왕은 우리를 위해 오셨고,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분을 구하라! 그러면 도움을 발견할 것이다!  현재 매일의 삶에서 사실은 당신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2024-04-05 14:03:21 | 박수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요!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저절로 느껴지는 교회가  되면  좋겠지요. 오래 함께 하면 닮아가는 것 같아요. 자매 모임에 참여해 마음을 나누는 모든 자매들의 모습이 아름다워요.
2024-04-04 13:37:35 | 이수영
-넌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계속해-글귀가 2024년 마지막달에도 제것이 되었으면 싶네요. 하나님계심이 기쁘고 전능자예수님이 저의 주인되심으로 (걱정근심이 묻히고) 신나는 하루하루가 되길 기도 드립니다..
2024-04-02 21:29:50 | 목영주
안녕하세요, 따뜻한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은 비가 오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자매들이 모여 교제하고 음식을 나눴습니다. 독서 모임에서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우리는 죄가 일으킨 모든 창조 세계의 대재앙과 죄로부터 나오는 결과로 하나님의 왕국을 떠나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이 책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 죄가 일으킨 대참사를 기억하라 죄가 모든 것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원하신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중심된 초월을 저버리고 사탄이 제시한 거짓 희망인 나 중심의 초월을 택했을 때의 결과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재앙이었다. 그 재앙이 얼마나 컸는지(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큰지) 말해보겠다. 아담과 이브가 죄에 빠졌을 때 온 우주가 함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것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안에 두신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예술성은 매우 매력적이고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자연은 풍성히 자라나 산물을 냈다. 어디를 보든 오염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동물들의 왕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었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사람은 즐거워 하며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들은 창조주를 예배했고 창조세계를 잘 관리했다. 창조물을 경배하거나 창조주를 다루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확연히 드러나는 반역도 없었고, 미묘한 불순종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거나 상상하든,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의 세상은 비교 불가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참사 앞에서  로마서 8장 22절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의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것이다. 고통, 아픔, 수고, 질병, 죽음은 이제 모든 피조물이 늘 경험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쉬웠던 것들이 더 이상 쉽지 않아졌다. 단순했던 것이 매우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공짜였던 모든 것을 이제 큰 대가를 내야만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 간의 화합이 깨져버렸다. 수치, 두려움, 죄의식, 비난, 탐욕, 시기, 갈등, 상처가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했다. 사람보다 물건이 더 귀하게 되었다. 인간 사이의 화합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곡조가 이제는 인간의 싸움으로 인한 슬픈 애도곡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죄가 자연세계와 인간 공동체에 초래한 이 모든 해악 말고도 또 다른 끔찍한 결과가 있었다. 이 비극은 창세기 3장 8-10절의 평범해 보이는 대화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그날 서늘한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의 얼굴 앞을 떠나 동산 나무들 가운데 숨으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하매"  인간은 지극히 광대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정체성과 의미와 목적을 얻도록 창조되었다. 창조주를 피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피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따 자기 자신의 삶만큼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망각한 채 하나님 밖에서 삶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그들이 찾은 것은 죽음이었다. -자율과 초월  사탄은 그들에게 독립의 영광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자율이다. 여기 사탄의 거짓말이 있다(지금도 매일 사람들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율은 언제나 초월을 파괴한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그 끔직한 순간 이후 모든 인간은 자율과 초월을 혼동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죄가 우리 마음에 거하는 한, 자율은 초월과 싸움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독립과 초월 간의 싸움이 끝날 것이고, 우리는 영광 가운데 영원히 열광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아직 일을 완성하지 않으셨음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증거가 남아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① 삶을 오직 자신의 것으로만 보려는 경향  우리는 늘 어떤 영역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는 것보다 물건을 얻을 때 더 기뻐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싸우려 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필요 이상으로 먹고 소비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일요일 일정 정도로 치부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고 우리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개인적인 삶의 관심으로 축소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영역에 관심을 갖기 원하신다. 우리만의 왕국이 아닌 그보다 훨씬 큰 왕국에서 기뻐하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② 타락으로 인한 총체적인 재앙  세상의 타락이 갖는 이러한 총체성을 기억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의아할 수 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지 기억할 때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행하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삶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초월적으로 살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상황과 위치와 관계 속에서 회복을 이루며 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창조물에 반사되어 있다면, 죄의 결과가 온 창조물에 미친다면, 그리고 구속의 목적이 온 창조물을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당시과 나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모든 것이다! 구속의 관건은 우리의 왕국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훨씬 크고 훨씬 나은 왕국으로 환영하여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삶에서 구원받았는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끔찍한 삶에서 옮겨져 좋은 삶을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엄청나게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간과한다." 4 자신만의 왕국을 벗어나라  삶은 하나님 나라와 자기 왕국의 싸움이다. 우리는 모두 왕국 건설자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의 왕국을 짓고 있느냐다. 사탄은 이브에게 '더 나은' 왕국을 속여 팔고 있었다. 그 왕국은 이브 마음대로, 이브의 방식대로 통치될 것이다. 사탄은 이브에게 자기가 주는 것이 더 크고 좋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사탄이 준 것은 훨씬 작고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 운명의 날 이후 인간의 삶과 역사는 왕국들의 충돌로 점철되었다. 작은 왕국과 큰 왕국의 싸움, 이 세상 왕국과 천국 왕국의 싸움, 인간 왕국과 하나님 왕국의 싸움.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왕국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일하러 가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아침 신문을 읽는다. 의도나 충성심 같은 준비된 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큰 왕국이 관심 갖는 일들을 추구해야 하는가? 작은 왕국을 구하도록 유혹받는 바로 그곳이다. 즉 우리가 살고 매일 일하는 같은 장소다. -보물과 백합화  자기 왕국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마태복음 6장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자기 왕국의 삶은 두 가지에 집중한다. 먼저 땅에 매인 보물을 구한다. 보물이란 소유하기에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보물들'은 두려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나의 정체성과 의미와 목적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야지."라고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물질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야지."라고 말하지 않지만 점점 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살게 된다. 이런 것들을 자신의 보화로 삼아야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지 않음에도,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가치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구속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뜨겁게 열망해야 할 보물이 어떤 것인지 겸손히 찾아보라고 하신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 내가 구했던 보화는 무엇이었는가?  작은 왕국의 삶이 두 번째로 중요시하는 것은 걱정에 이끌린 필요다(마6:2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생명이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오직 우리의 필요만 보게 되면, 하나님과의 유대와 다른 사람들과의 경건한 교제로 세워지는 진정한 인간성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여긴다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사실상 너무나 좁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늘 걱정과 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것은 필요를 확장하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필요를 채우는 것을 주요 관심에 둘수록 삶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으로 규정된다. -왜 나는 작은 왕국에 끌릴까?  죄의 유전자는 이기심이다. 죄는 재가 원하는 때에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관성은 늘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자기 자신을 향한다. 우리의 구속자는 우리를 바로 이것으로부터 구해내려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협소한 작은 왕국이 갖는 제한된 속박에서 풀어내고, 은혜로 더 나은 왕국의 광대한 영광들로 맞아들이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받고도 그분의 지혜의 원리와 은혜로운 약속들을 나만의 작은 왕국을 잘 돌아가게 하는 데 적용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광대한 삶의 방식은 내 왕국이 갖는 협소한 테두리 안으로 구겨넣을 수 없다.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살기   8년간 나(폴트립 저자)는 그 학교의 교장이자 위원회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그 학교에 돈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정말 충격적이게도 나는 투표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사역에 너무나 소중했던 그 학교에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 끔찍해서 아내와도 나눌 수 없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테드 형에게 전화를 할 때까지는 말이다. 형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겪은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 학교가 네 것은 아니잖아. 그 학교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거야. 네가 너의 왕국을 세웠던 것이 아니잖아. 하나님께서 그분의 학교를 세우는 데 너를 사용하셨던 거야. 넌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계속해.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와 사람들을 섬기되 하나님 나라의 번영은 그분 손에 맡겨드려." 내가 느낀 슬픔의 대부분은 학교를 위해 최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쫓겨났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음을 겸손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왕국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큰 왕국의 사역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그 일이 내 작은 왕국의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마태복음 6장 33절 "오히려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오히려"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다. 옛날 방식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자녀들에게 그분의 왕국을 위해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작동한다. 아버지를 잊은 채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반면 새로운 방식은 위대한 하나님 난라의 목적이 갖는 초월적인 영광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크게 살도록 창조되었고 부름받았다. 그런데 왜 자기만의 작은 왕국으로 후퇴하려 하는가?              
2024-04-02 14:50:08 | 박수현
안녕하세요, 지난 목요일엔 폴트립의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로 자매모임을 열었습니다. 3개의 팀으로 나누어 진행하였으나 지난주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모여서 팀을 나눴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교제 시간을 갖게 되어 참 신기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성령님께서 물 위를 움직이시듯 우리 공동체에 넘실넘실 움직이시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라 2 정말 중요한 일에 헌신하라 3 죄가 일으킨 대참사를 기억하라 4 자신만의 왕국을 벗어나라 5 왕의 문명 건설에 참여하라 6 욕심을 섬김으로 위장하지 말라 7 현재가 아닌 영원에 투자하라 8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라 9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10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라 11 하나님 안에서 탄식하라 12 하나님과 구원의 음악을 연주하라 1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14 예순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 15 예수님 외의 모든 보물을 내려놓으라 16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라 17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 18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질문들 자매 모임에서 나눈 1,2 chapter를 이곳에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쓴소리 책'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1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라  우리는 더 큰 것의 일부로 창조되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이 책에서는 초월의 욕구라고 지칭한다.)는 우리가 더 큰 것의 일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우리가 누구인지, 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이곳에 우리를 심어 놓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이곳에서 뭔가 더 큰 것의 일부가 된다.  모든 인간은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것을 넣어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람만을 위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자기 자신만 아는 하찮은 왕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규모를 자기 생존으로만 축소시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더 높고 더 나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더 거대하고 더 중요한 것 안에 들어가도록 이끄는데 성경에선 이것을 오직 한 단어로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영광'이다.  우리는 모두 영광에 목매는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창조자께서 우리가 영광에 강하게 이끌리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 본능으로 창조 세상의 그늘진 영광들만을 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닌 초월적 영광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도록 창조되었다. 이 영광을 맛 볼 때 우리 인생을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 창세기 1장과 2장을 본다면 네 가지 초월적인 영광이 나온다.  ⑴ 하나님의 영광  우리 삶은 창조세계보다는 창조주에 귀속 될 때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고 다른 모든 영광이 그분의 영광에 복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높고 더 나은' 삶을 발견하게 된다. ⑵ 직분의 영광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도록 만드신 수많은 놀라운 것들을 보살피는 사명을 받았다. 인간은 주변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인간의 초월성이 드러난다. 아담과 이브는 보호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⑶ 공동체의 영광  우리는 겸손히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를 늘 추구하며 살도록 지음받았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관계망은 우리를 고립과 단절로부터 벗어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집중할 때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공동체의 영광을 경험하게 해준다. ⑷ 진리의 영광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자마자 다른 창조물에게는 하지 않았던 일을 행하셨다. 바로 그들과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담과 이브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해석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창조주만 가질 수 있는 전체를 보는 관점(origin to destiny)으로 살아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진리를 점진적으로 열어 보이신 것은 그들이 깨닫고, 그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소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현실을 어떠한가? 타락한 세상에는 우리 삶의 규모를 현실적인 일들로 축소시키려는 강력한 압박이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음에도 열등한 상태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2 정말 중요한 일에 헌신하라 죄로 인해 우리는 더 나은 삶에 대해 말하면서 덜 중요한 것에 안주한다. 정말 중요한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들다.   매일 이런저런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언제나 오래된 속임수에 걸려든다. 대적이 어떻게든 당신을 속여서 당신의 삶이 개인적으로 꿈꾸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크기만큼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이 바로 대적이 원하던 바다. 대적이 당신을 유혹하여 당신이 창조된 목적인 하나님 중심의 더 나은 삶을 버리고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앞에 어른거리는 수없이 많은 나 중심의 '더 나은 것'들을 택하게 할 때마다 대적이 승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사소한 일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면 피조물이 갖는 일시적 그림자 영광을 위해 초월을 저버리는 꼴이 된다. 일시적으로 얻는 만족과 기쁨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영적 균열과 같아서 즉각적인 감정적, 혹은 영적 흥분을 주지만 곧 다시 허해져 또 다른 흥분을 찾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영광을 찾기 원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영광, 직분의 영광, 진리의 영광에 헌신하기 원하신다. 아담과 이브의 그 한 번의 비극: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만큼 넓어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앙으로 인해 경계를 극단적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 한 번의 비극으로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은 영광에 이끌리는 인간이 절대 살아서는 안 되는 유일한 곳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초월에 다시 참여시키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분의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고,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를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게 하여, 즉 피조물에게 지배당하지 않게 하여 우리는 우리의 사명인 직분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분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 안에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진리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되고 재창조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러한 영광을 누리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다. 어떤 때는 믿음과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미끼를 물고 덜 중요한 것을 마치 더 중요한 것인 양 따르기도 한다. 은혜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의 경계가 넓혀졌는데도, 여전히 우리 삶의 경계를 자신만의 삶으로 축소시킬 때도 있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면 그 싸움의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싸움을 잘 하도록 돕기 위해 쓴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질문은 '매일 어떤 영광을 구하며 살 것인가?'이다.  당신의 관심을 끌기 쉬운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랑침례교회 모든 성도님들과도 이 책의 내용을 나누며 어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덜 중요한 일에 매몰된 일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나아갔던 일 등 우리가 싸웠던 흔적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샬롬      
2024-03-25 12:07:09 | 박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