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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함께 좋은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품성 중 어느 하나라도 쉽게 실천하기가 어렵지만, 긍휼은 특히 더 그런 듯합니다. 마음을 좀 더 열고 긍휼의 첫 단추를 채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2026-05-30 09:37:02 | 김지훈
오늘도 씩씩하고 바르게 살 수 있게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핍박 억울한 입장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진정이 돼요~^^ 먼저 실수투성이 보잘것없는 저를 빠르게 인정하기-상대는 지금 어떤 어려움에 갇혀 있고 그 원인은 뭘까 생각하기-저들이 극복할 수 있게 내기쁨(나의 하나님)으로 환경(좋은밭)되어주기 입니다.요즘은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결단! 하나님의 기쁨을 최우선 맨앞에 두기 작전으로 살고 있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장16~1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_cyHvoDNL-E?si=jM6TdUi7_wb0MLGt
2026-05-28 09:21:37 | 목영주
긍휼 : 급진적인 사랑, 파격적인 사랑   긍휼에 대한 경험(적용)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솔직히 말해 중언부언하는 사람, 동문서답하는 사람, 횡설수설하는 사람, 두서없이 말하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 성격이다. 대화가 답답하게 느껴지면 속으로 선을 긋는다. 이런 나의 모습이 늘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최근 정동수 목사님의 누가복음 설교를 다시 듣고 있다. 설교를 듣던 중 “긍휼”에 대한 말씀이 예전에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다가왔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동안 나는 긍휼을 그저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 정도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긍휼은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상대의 아픔을 바라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 팀원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6명이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 한 팀원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회식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대화를 하면 질문과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흐름과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해도 혼자 다르게 이해하는 일이 반복되고, 팀원들의 피로감도 점점 커져 갔다. 결국 팀 안에서는 “말이 안 통한다”, “함께 가기 어렵겠다”, “차라리 제외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사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결과도 중요하고 팀워크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난 후, 그 팀원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계속 저 사람의 문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저 사람의 마음과 아픔은 알려고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이 밀어내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가셨다. 사람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을 보호하셨다.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또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을 두려워하며 동네 밖으로 내쫓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찾아가 회복시켜 주셨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그분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으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기 때문이라.”(마태복음 9:36)   또 굶주린 무리들을 보시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가복음 8:2)   예수님의 긍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셨고, 들어주셨고, 만져주셨고, 회복시켜 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이번에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전에 먼저 긍휼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업무 이야기만이 아니라 무엇이 힘든지, 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운지, 어떤 상황에서 부담을 느끼는지를 천천히 들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판단하지 않고 계속 들어주자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 사람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먼저 달라지기 시작하니까 주변 팀원들의 시선과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같이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점차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공동체 안에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팀원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이번 일을 통해 나는 긍휼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배우게 되었다. 긍휼은 멀리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픔 가까이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해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 역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선을 긋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을 실제 삶 속에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주변에 “불편한 사람”,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한 사람을 긍휼로 품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을지라도, 한번 더 물어보고, 한번 더 들어주는 것이 긍휼한 마음을 품는 첫 단추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을 내어 목사님의 누가복음 강해 18편, 19편. 20편을 꼭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끝.
2026-05-27 17:46:08 | 이규환
형제님글을 코팅해 마음속에 붙이고 다니고 싶어요~^^감사드립니다!  천성기질 자체가 염세적이라 불안 염려가 기본값인데다가 역량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까지 가진 저는 4,5번을 넘어 7,8,9번으로 가서-아버지와 마음으로 멀어질까봐..제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저의 변화를 보고 위 천사들은 놀라 자빠질지경이겠지만,하나님께서 6번같은 상황안에 저를 오랫동안 있게 하시는 이유가-단련할게 무지많다는걸 증명하고 있어요. 예수님..나라 살려주세요.오늘도 거룩한 일상을 위해 예수님께 무릎꿇고 기도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live/BCc_IbVx3rg?si=ukZWTE4AYlkhrLGr
2026-05-21 08:40:43 | 목영주
  바른 믿음생활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어지는 시대 살아가매, 오래전 언젠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의 공통적 심리 상태, 그것을 대표할 만한 단어로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불안, 실망, 두려움이 그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믿음이 적은 사람의 경우, 도래하지 않은 어떤 큰일이 발생하기 전에는 많이 불안해하고, 그 일이 발생한 후에는 많이 실망 또는 두려워할 것...이라는 결론 내려지더라는 뜻입니다.   그런 단어들을 찾아 나선 목적인즉 제 믿음생활의 충실도를 체크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만약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큰일에 대해 많이 불안하다면(스스로 판단하기에), 그 불안을 물리쳐줄 믿음의 분량을 대폭 늘리기 위해 더욱 빠른 속도로 하나님 향해 나아가겠다는 거죠.    어떻게? 성경말씀 더욱 열심히 읽고 기도 또한 더욱더 진지한 태도로 하고, 그렇게 말입니다. (성경말씀 엄청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오해하시는 분 안 계시기를... ^^)   그러던 중, 최근에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성경말씀 속 사람들의 수많은 행위들 대부분이 ‘믿음’의 분량 측면에서 이해 또는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다소 황당 또는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1. 두려워함 :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큰 폭풍으로 인한 파도에 배가 덮이게 되자 예수님을 깨우며 호들갑(^^) 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마8:26)   2. 불안해함 / 염려함 : 형 에서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여 크게 불안해한 야곱의 경우. “네 조상들의 땅으로, 네 친족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창31:3)라는 주 하나님 약속의 말씀 미리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3. 조급해함 :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손으로 번제 헌물을 드린 사울 왕의 경우.(삼상15) 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때를 못 기다리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 태어나게 한 아브람과 사래의 경우.(창16)   4. 의심함 / 미심쩍어함 : “오라”는 예수님 말씀 따라 물 위를 걸어가다 사나운 바람 만나매 결국 물에 빠진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너 믿음이 적은 자야, 네가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마14:31)   5. 실망함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계셨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라고 믿었노라”(눅24:21)라며 실망감만 드러내던 엠마오행 두 제자의 경우.   6. 답답해함 / 신경질적으로 변함 : 광야 생활 속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모세의 표현에 따르면 ‘반역자들’)의 원망과 압박에 시달리던 모세는 결국 불신+분심(憤心)에 반석을 두 번 쳐 버렸습니다. "이 반석에서 반드시 물을 내야만 하랴?"라면서 말입니다. “너희는 그들의 눈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민20:8), 주 하나님의 그 말씀 잠시 잊어 버렸을까요...?   7. 낙심함 :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말, 즉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았으니...”(민13:33), 그 말에 완전 낙심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8. 절망함 :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 후, 독오른(^^) 이세벨의 위협에 놀라 멀리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음을 구한 엘리야의 경우. 그는 말했죠. “오 주여 족하오니 이제 제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   9. 원망함 : 오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찾아오신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다”(요11:32)라고 말한 마리아의 경우.   10. 불평함 : 저녁에는 고기로 아침에는 빵으로 족히 배부르게 해주셨음에도 계속 불평 늘어놓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죠. “너희가 불평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주께 하는 것이니라”(출16:8)   11. 분노함 :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선 니느웨 백성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일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한 요나의 경우.(욘4:1)   12. 마음속에 응어리(?) 형성됨 :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의 원로들이 어두운 곳에서 저마다 자기 형상을 둔 방들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그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겔8:12), 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의 그 이스라엘 원로들의 경우.   본인의 불순종, 반역 등에 대한 회개는 없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만이 쌓이고 쌓인 그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무엇, 그러니까, 성경 말씀 속 bitterness...비슷한(^^) 것...들의 결정체 같은 그 무엇을 ‘응어리’라고 표현해 봤습니다. 정확한 용어 선택인지는... ^^   어쨌든, 믿음 부족(아예 없음?)이 그 정도 상황까지 이르면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그 땅을 버리셨다’, 저런 말을 대놓고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응어리 관련하여 좀 더 말씀드리면, 마음속 응어리는 그 사람 본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으로써 삶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어쩌면 생각 없이 내뱉는 그런 말 듣는 다른 사람의 믿음까지도 헤치는, 말하자면, 더럽히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히12:15 말씀 중의 ‘쓴 뿌리가 돋아나 많은 사람을 더럽히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13. 무감각해짐 : 밧모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으로부터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계3:15)는 지적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14.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이 사라짐 : ‘그의 발에 병이 생겨 마침내 심히 중하게 되었으나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사들에게 구했던’(대하16:12) 아사 왕의 경우.   15. 마음이 강퍅해짐 :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어쩌고는커녕 아예 말씀 자체를 외면하고 멸시하기까지 한 여호야김 왕의 경우. 말씀 두루마리를 펜 칼로 찢어 화롯불에 태워 버리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니(렘36:23-24)...그 마음의 강퍅함이 거의 차돌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16. 흘려들음 :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던(창24:38-39)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의 경우.   17. 영적으로 눈멀게 됨 :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에서 시작하였으나 시간 지나가매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꾐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경우.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육체로 완전하게 되었느냐?”(갈3:3)   18. 육신적으로 행동함 : 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래 내려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이어서 그들은 육체적 만족과 감각적 종교를 즐기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죠.(출32)   19. 부인함 : 결국은 저주하여 맹세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경우.(마26:74)   20. 거부함 : “너를 위해 주 네 하나님께 한 표적을 구하라”(사7:11)라는 거룩하신 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저는 구하지 아니하겠고 주를 시험하지도 아니하겠나이다”(사7:12)라고 답한 아하스 왕의 경우. 제 하나님 아닌데요? 라는 것도 아니고...대책 없다는 생각 듭니다만.   다소 본론을 벗어난 말씀입니다만, 아하스 왕에 대한 심층분석(?) 한번 해볼까 싶은 생각 가끔 하곤 합니다. 왜냐? “그는 고난당할 때에 주께 더욱더 범법하였는데 이 사람은 그 아하스 왕이니라”(대하28:22), 바로 이 말씀 구절 때문입니다. 대~~~단한 인물 아닌가요...? ^^   21. 냉소적으로 반응함 : 주의 궤가 다윗의 도시로 들어올 때 그 앞에서 뛰며 춤췄던 다윗 왕에게 냉소로 업신여겼던 미갈의 경우.(삼하6)   22. 흔들리고 불안정함 : 예레미야로부터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 하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라. 그러나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열상18:21)라는 질타 받았던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생각을 품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 (약1:8)   23. 사람을 의식함 : 백성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주 하나님을 거역한 사울 왕의 경우. 사무엘이 남긴 말씀 일부, 그 의미가 참으로 뜻깊은 것 같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24. 물러서고 멀어짐 : 한때 바울과 함께 사역했으나 결국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떠난 데마의 경우.(딤후4:10)   글을 끝내면서, 믿음의 표본 정도로 알고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말씀 구절 하나를 옮겨 적어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앞에 선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한 말입니다.   오 왕이여, 일이 그리될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서 왕의 손에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으리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께서 세우신 금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께서는 아시옵소서, 하니라.(단3:17-18)     ( 끝 )          
2026-05-20 23:00:17 | 최영오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눈물이 나는건 아직도 온유함이 힘들어 애를 써야 하기 때문인것 같아요..여기서의 삶은 섬길대상일뿐이지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서 내맘을 흔들수 없다하며 씩씩한 날도 있는반면,억울해도 견디는 것밖에 할 수없는 상황일때 긍휼히 보는것만으로는 안되어서- 이상황을 허락하신 나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시다로 겨우 되는 저의 육신입니다.다행히 성화(온유)를 육신이 죽는날까지만 해도 되고 제가 휴거를 간절히 소망하는 큰이유에요~^^ https://youtu.be/DMUKuhnxWDE?si=3ubgS8eCJK1gYKhM
2026-05-16 07:18:35 | 목영주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온유”라는 말을 들으면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떠올린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힘이 없고, 자기 주장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의 온유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이 하나님께 통제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장 29절) 예수님은 온유하셨지만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으며, 위선자들의 죄를 담대하게 책망하셨다. 또한 원하셨다면 수많은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다. 그런데도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이다. 온유를 이해하려면 야생마를 떠올려 보면 좋다. 야생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달리며 아무도 쉽게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그 힘은 통제되지 않는다. 반면 잘 훈련된 말은 어떠한가? 그 말 역시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의 손길에 반응한다. 주인이 멈추라 하면 멈추고, 가라 하면 간다. 짐도 나르며, 사람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힘이 통제된 것이다.     성경적 온유도 바로 이와 같다. 온유한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화를 낼 수 있어도 하나님 때문에 절제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며, 자신의 힘과 감정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한다.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자기 자존심대로 행동하며, 자기 욕심대로 달려간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훈련시키신다. 말씀으로 다듬으시고, 고난으로 연단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어 가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온유는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이다.   또한 성경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때에도 온유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 주고 너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라디아서 6장 1절)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칠고 교만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강한 사람이 온유할 수 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드러내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귀하게 보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요,”(마태복음 5장 5절) 또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하며 넘치는 화평 속에서 기뻐하리로다.”(시편 37편 11절) 온유는 약함이 아니다. 하나님께 다스려지는 참된 강함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모습을 다듬으셔서, 주인의 손에 쓰임받는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고집만 붙들고 버티기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내 감정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가 되어야 하고, 내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맡기고,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사람을 이기려 하기보다 자신을 다스리려 해야 한다.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길들여질 때 비로소 귀하게 쓰임받듯이, 성도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 비로소 주님의 일에 귀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래서 온유는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다. 특히, 눈에서 힘을, 목에서 힘을, 어깨에서 힘을 빼야 하지 않을까? 내면에는 강함을 간직한 채.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쉽지 않다. -끝-
2026-05-15 19:34:16 | 이규환
긴 시간 영적전쟁 이제야 끝을 맺었군요. 자매님의 오랜기도와 어머니께 향한 사링의 헌신의 결과입니다. 어머니께서도 이제는 자유로우시고 행복하실 것입니다. 주어진 모든 환경속에서 하나씩 실천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되시는 자매님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2026-05-03 17:30:08 | 김경애
자매님의 활짝미소가 믿는사람임이 고스란히 드러나요!자매님 축하드리고 부럽습니다.평소 바른행실로 믿음드러내면서 그들이 낙심할땐 믿음으로 위로하면서..아직은 이렇게밖에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제게는 큰 산,벽이 있어요(그러나 맘속에는 언제든지 간결하게 적시적소에 꺼내 말할수 있는 믿음,복음을 장착하고 있습니다아~~^^) -오 큰 산아,네가 누구냐?스룹바벨 앞에서 네가 평야가 되리라.그가 그것의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크게 외치며 부르짖기를,은혜,은혜가 그 돌에 있을지어다,하리라,하셨느니라,하니라.-스가랴4장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5-03 08:16:57 | 목영주
천주교를 다니시는 어머니는 명절에  차례를 늘 지내신다. 어머니가 정정하셨을 때에는 명절 며칠 전부터 장을 보러 다니시며 준비하셨고, 상에 다 올리지 못하실 정도로 차례 음식을 장만하셨다. 몇 년 전 몸이 안좋아지셔서 요양병원에 다녀오신 뒤로도 어머니의 차례상 음식은 대폭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계속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몸이 조금씩 좋아지시자 음식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앴다.   지난 설 때.... 나는 설 연휴에 휴가를 더해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찍 어머니에게 갔다. 어르신들은 밤새 안녕이라는데 올해 93세이신 어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  함께 더 보내기 위해서이다. 어머니는 좋아하셨고, 식구들이 오기 전에 이야기도 많이 하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아구찜도 둘이 먹으러 갔다.   어머니집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안방에는 어머니와 성당에 다니는 큰오빠, 목사인 셋째오빠 그리고 내가 있었다. 어머니와 오빠들은 그동안의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는 좀 피곤해서 돌침대에 잠시 누었는데 바닥이 따뜻하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잠이 막 들 무렵 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뭔가 이상해서 귀를 기울이니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슬며시 침대에서 내려와 셋째오빠 옆에 앉았다. 영적전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셋째 오빠는 우리는 하나님만 믿기 떼문에 하나님께서 하지말라고 하는 것은 하면  절대  안된다며 제사는 귀신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하니 어머니는 여태까지 해 온 것이고 성당에서 제사는 지내도 된다라고 하셨다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라고 하셨다.. 셋째 오빠는 조선 후기에 천주교도 제사금지로 인해 순교당한 사람들과 장소가 있는데 지금은 그곳이 성지가 되었다며 제사는 나중에  허용해 준 것이다라고 하니 어머니는 말문이 막히셨는지 자식이 부모를 이기려고 한다며 역정을 내셨다. 셋쩨오빠는 똑같은 어조로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참수당한 천주교인들은 왜 그랬겠냐며 자신의 목숨을 신앙과 바꾼 것이라고 하니 어머니는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김수환 추기경이 죽어봐야 안다고 했다하셨다. 죽어봐야 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한마디 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거기에 대해 대꾸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나는 이 말씀 귀절을 그동안  어머니한테 여러번 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고....  예수님을 믿고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마리아는 창조물이라고.....   어머니는 결정을 내린 듯 그래도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시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목사인 셋째 오빠는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정 그렇게 하시겠다면 저희 가족들은 내일 아침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때에 셋째오빠의 단호함을 보고 나도 말했다.   "오빠가 가면 나도 올라가겠습니다."   어머니는 역정을 크게 내시며 혼자 지낼테니 다 가라고 하셨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성당에 다니는 큰오빠가 말했다.   "어머니, 연세도 생각하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동생들이 저렇게 하니  저도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큰오빠의 말에 더이상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큰오빠는 어머니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거의 들어주는 편인데다 어머니는 아마도 큰오빠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네 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각자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힌침 후 어머니는 일어나서 나가셨고 남은 셋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도  어머니가 들어오시지 않자 날씨도 추운데 걱정이 되어  나가서 여기저기 살펴보니 어머니는 주방 베란다 문쪽에 앉아 가로등 빛이 어슴푸레 비친 바깥문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작고 굽어진 어머니 등을 한참동안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시는지 가끔 손이 얼굴로 가기도 했지만 그 동작이 끝나면 목석같이 앉아계셨다. 한참 후 인기척을 느껴지셨는지 갑자기 뒤를 힐긋 돌아 나를 발견하시고 들어가라는 듯  손을 저으셨다. 나는 어머니랑 함께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계속 서있었다. 한참이 지나니 어머니가 일어서시고 우리는 안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명절 날 아침.... 차례는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차례에 대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조카들도....   나는 가족들이 모두 떠난 뒤 어머니와 함께 읍내에 있는 카페에 가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시장가서 어머니가 입고 싶어하시던 옷도 사드리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모자도 2개 사 드리고... 다육이도 보고 ... 예쁜 꽃 화분도 사드리고...  그리고 남은 휴가 다 쓰고 돌아왔다. 엄마~~사랑해요~ (딸랑딸랑)    제사.... 그 질기고 질긴 끈 어찌 그리 사람의 약한 부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지.... 에베소서 6장 10 주 안에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또 그분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그리하라. 11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대적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2026-05-03 07:49:29 | 이정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자신도 언제 어디서든 쉽게 넘어질 수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친한 지체들 간이라도 간혹 말실수를 하게 되지만, 온유하게 받아주는 지체들에게 또한 감사함을 느낍니다^^
2026-05-02 18:58:48 | 김지훈
다시 한번 환기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충돌이 일어난 후에야 돌아보고 조심할걸..하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또 한번 다짐하게 하는 글입니다^^
2026-05-02 14:56:36 | 최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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