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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마음이 없으면 찾아지지 않아요. 가장 좋은 성경이라 말해도 듣지를 않죠.  진리를사는 건데 돈이 아까운지? 다른 건 잘  써도 유독 성경엔. 인색하고. 마귀의 자식이 주님의 자녀로 옮아가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죠.  
2025-11-02 08:35:56 | 이수영
'대책없음'이란 단어가 오늘은 참 친근하게 들리네요~^^ 제가 좋아하는 욥기시리즈를 듣는 요즈음-- 하나님을 깊이깊이 알지 못해 그렇게도 제 상황에 징징대었나 싶은게(자매님들은 저의 성화과정이라 봐주시지만..)-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만으로 기뻐해야지..에서 하나님만으로 기쁘구나,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너무 좋다..라는 일상고백이 감사합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굴리시는대로 제가 굴려지는 것이-점점더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말씀으로 그분을 더 많이 깊이 알아가야겠어요..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에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며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욥기 42장5,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11-01 16:01:00 | 목영주
  두어 달쯤 전이었던가, 어떤 장로교 목사님 설교 영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완전 본의 아니게, 그야말로 우연히 마주친 유튜브 영상이었다 보니, 중간중간 정지시켜 잠깐잠깐 보는 식으로 하여 불과 5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시청을 마쳤습니다.   그런데...훑어보듯 지나친 그 영상 속 한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답니다. 너무나 감명 깊은 말씀이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사람'이란 존재, 그 '속성'에 관한 서글픔 자아내는 그런 장면이었답니다. 이하, 그 장면부터 찬찬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상19:12(이세벨을 피해 굴속에 숨은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목) 관련 상황 설명하면서 그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중략)...여기서, 세~미한 소리란 어떤 소리냐? 바늘 하나 떨어질 때 나는 소리, 그런 미~세한 소리를 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바늘 하나 떨어질 때 나는 작~~은 소리를 엄청 비중 있게 강조하시더군요.   안 봐도 비디오라고, 50년 넘게 목회 활동 하신 목사님의 자못 엄숙한 표정, 그러니까, 미~세한 하나님 목소리 못 들을까 봐 무척 긴장한 듯한 그 표정과, 그리고 그보다 더한 긴장감 느껴질 정도의 엄숙함 속에서 조용히 숨죽여 아멘...!...역시 우리 목사님...!...하고 있는 성도들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그런 모습들 떠 올려본 다음...엥? 웬 바늘? 뜨개질용 대바늘도 아니고 바느질용 바늘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서 왜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나오지? 그리고 세~미는 또 뭐지? 수세미는 당연히 아닐 테고...라는 생각에 즉시 영상 시청을 멈추고 NIV 성경(비교 목적으로 곁에 두고 있는) 영어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A gentle whisper...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러니까, gentle whisper, 그 두 단어를 ‘세미한 소리’라고 번역한 거죠. 글쎄요...아무리 소리의 톤을 낮춰 표현한다손 치더라도, 부드러운 속삭임...정도라면 모를까, 세미한 소리...를 넘어 바늘 하나 떨어질 때 나는 소리, 그러니까, 들릴락 말락 한(거의 안 들리는) 그런 소리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번역 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뜻은 제대로 못 전하고, 대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어떤 말씀 선포자와, 그 선포자의 말과 분위기에 취해 있는 성도들...이 연출하는 허울뿐인 예배 현장, 경배 현장의 서글픔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도망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음은 물론 곧 잡혀 죽을 절박한 상황에 놓인 엘리야한테 하나님께서 바늘 하나 떨어질 때 나는 그런 미~세한 소리로 말씀하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생사의 갈림길 아니라 죽음 직전의 엘리야 청력 테스트 하실 일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   이제는 죽었다 하고 있던 엘리야의 마음 어루만져 주시듯, 하나님께서는 그냥 보통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셨을 뿐인데...미~세한 소리는 뭐고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는 또 뭐냐, 그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상식적인 차원을 벗어난 황당한 일...그러니까, 별다른 의미 없는 목소리(하나님 목소리를 두고 이런 표현 하자니 좀 그렇습니다만 ^^) 하나를 대단한 의미 있는 듯 꾸며놓고선 그에 감동하는 일...너무 황당한 그 일을, 결국은 자신을 포장하여 우매한 대중 앞에 드러낼 뿐인 그런 일을 저분은 감히 하나님 팔아서 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에서 답답~해지더군요.    그분이나 그 사람들이나 모두 그런 생각은커녕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 향한 경배의 일념으로 그러고 있음 생각하매...그 답답함이 참으로 큰 서글픔으로 느껴졌답니다.   이어서, 위와 같은 서글픈 장면이 발생하는, 아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근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생각해 본 결과, 사람...그러니까, 죄성을 지닌 ‘사람’이란 존재의 어떤 속성 때문이라는 결론 내려지더군요.   그렇다면 그 속성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바로 떠 오르는 ‘속성’이 뭔고 하니...‘대책 없음’ 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대책 없음’이 사람이란 존재의 속성이다...사람은 좌우지간 대책 없는 존재, 그 자체다...!...라는 결론에 이르더라는 말씀입니다. ^^   원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인지라...대책 없음, 그 속성의 근원은 또 뭘까...?...그러니까, 어떤 근원적 속성, 즉 진짜 속성으로 인해 사람은 대책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자아도취, 헛똑똑이, 자기만족, 인생의 자랑, 기타 등등...수~없이 많은 단어, 표현들이 제법 한참 동안 뇌리를 스쳐간 끝에 한 단어가 결론처럼 드러났답니다. 교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결국은 그것, ‘교만’을 속성으로 지닌 사람이란 존재는 유튜브 영상 속 그런 서글픈, 일종의 가증한 장면 연출할 수밖에 없는 거다...라는 결론 내려지더군요.   바꿔말씀드리면, 그런 장면이 결국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말씀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는 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답니다. 그렇다면...사람은 정녕 대책 없는 존재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잠6:16-19) 중 첫 번째로 명시된 ‘교만’을 숙명적 속성으로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그것이었습니다.   역시 한참 동안 머리 굴린 끝에...결론...제법 그럴 듯한 결론 하나를 찾았답니다. 교만...그것이 사람이란 존재의 숙명적 속성인 만큼 그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그러나 거의 그 속성 없는 듯한 사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그곳에 가면...이라는 결론 말입니다.   그곳이 어디냐구요? ... 하나님 말씀 온전히 보존된 바른 성경, 성경 속 하나님 말씀 온전히 전하는 말씀 선포자, 그리고 하나님 뜻에 따른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는 성도들로 구성된 지역교회, 거기가 바로 그곳...아니겠는가...라는 결론 내려봤습니다.    늦가을로 접어들 11월 둘째 날 찾아갈 사랑침례교회, 그곳을 그려봅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 끝 )          
2025-10-31 19:03:33 | 최영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톨릭은 그저 역사속의 일반인을 교부라고하며 체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 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요한일서 5장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10-02 17:20:42 | 정예준
  서신 또는 칼럼 등의 글을 읽을 때면, 글 쓰신 분의 의도와 당시 상황까지도 곰곰이 짚어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즉 성경 구절들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는 그런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글 쓰신 분의 의도와 당시 상황을 곰곰이 짚어보게 되는 때가 언제냐 하면, 글 다 읽고 나서 다른 일 할 때인 것이 보통이죠.   다른 일 하던 중 불현듯 생각난 말씀 한 구절에 붙잡혀 일련의 점검 및 재확인 끝에...그렇구나...!...그것이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때면...가까운 듯했던 진리가 아직 멀리 있음에 대한 부끄러움 느끼는 한편, 나름 정확히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온 죄(?)와 그 용서까지를 구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뒤늦게나마 말씀이 지닌 참된 의미 알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곤 하죠.   그런 말씀 한 구절, 그러니까, 제대로 아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다 뒤늦게 참된 의미 깨닫고서 죄와 그 용서, 은혜 그리고 감사에 이르게 된 경우의 일례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새삼 회개하는 의미에서라고나 할까요. ^^   1. 요일5:7, 바로 그 말씀   위 일례의 그 말씀은 요일5:7 말씀인바, 우리 성경, 즉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 요일5:6~8 말씀을 우선 적어봅니다.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분은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 땅에 증언하는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또 이 셋은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명쾌히 설파한 위 말씀이 NIV 성경, 개역 개정 성경 등의 현대 역본 성경에는 없습니다. 똑같은 요일5:7이되 서로 다른 내용이라는 거죠.   참고로, NIV 성경 요일5:6~8 말씀의 경우,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로 기록된 반면   개역 개정 성경 요일5:6~8 말씀의 경우,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하셨고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착각 속의 단편적 이해   위 킹 제임스 성경 요일5:7 말씀을 접한 이후 한동안 상당한 자긍심 느끼며 지냈답니다. 기독교 기본 중의 기본 교리라 할 만한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가 참으로 명확 명쾌히 규명된 성경, 즉 킹 제임스 성경으로 믿음 생활 하고 있음에 대한 자긍심, 충분히 가질 만하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 명확히 규정한 성경 구절은 없다느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 혹시 만나 우리 성경 보여줄 날 있으면 좋겠다...라는 다소 거시기한 생각 할 때도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   그런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 말씀, 즉 요일5:6~8 말씀 기록할 당시 상황을 알아본바, 그분 말씀의 주된 의도, 목적은 그게 아니었더군요. 그분은 반영지주의적(反靈智主義的) 선언 차원에서 그 말씀 하셨던 거죠.   말하자면, 성령님께서는 예수님 십자가 수난에 앞서 이미 떠나신 결과, 예수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피가 아니라는 영지주의자들을 입틀막(^^)하려는 의도였더군요.   그런 것도 모른 채, 오히려 아는 척 자긍심에 젖어 있었던 자신을 돌이켜보매 솔까말 많이 부끄러웠답니다. 그래, 너는 아직 멀었다...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3. 단편적 이해로 그친 원인   이처럼 단편적으로 알고 지내게 된 원인을 짚어보았습니다. 구절 하나를 흘려들었기 때문 – 엄밀히 말하자면, 흘려읽었기 때문 - 이라는 답이 바로 나오더군요.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바로 그 구절 말입니다. 증언? 무엇을 증언한다는 건가? 라는 생각 한 번만 했더라면...그랬더라면 그 말씀의 의미 정확히 알았을 것 아닌가...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한 글자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성경 읽어 내려가기야 좀 그렇다 치더라도, 어느 한 구절 대충 지나쳐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 참된 의미를 찾아서   이어서...한때 상당한 자긍심의 근원이었던 요일5:7, 그 말씀의 근원이라 할 만한 요일5:6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요일5:7 말씀이 지닌 참된 의미를 찾아 나섰다고나 할까요.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신 분이라는...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그 말씀이더군요. ‘성육신(Carnation)’ 교리가 바로 그것이잖습니까.   요일5:7 말씀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보다 ‘성육신’ 교리 확고히 해 놓으려는 사도 요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은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요일4:3 말씀이 결국 요일5:7 말씀, 즉 세 분 인격체 한 하나님의 증언으로 확증되고 있음 새삼 알아차리매 그 의도,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한편으로는...3개 절에 걸쳐 그토록 확실히 ‘성육신’ 교리 세워두고자 했던 당시 상황을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알아본바, 먼 옛날의 한 이단 사상으로 대충 알고 있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의 실체가 제법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더군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곧 죄들의 용서(마26:28, 엡1:7, 골1:14 등)를 전면 부정하다니, 그리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 즉 그노시스(Gnosis)를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진다니...영지주의자들, 세상에 이단도 그런 이단이 없겠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요일5:7 말씀이, 그 말씀이 지닌 참된 의미...랄까, 그 가치가 어찌 그토록 거룩하게 느껴지던지요.   사도 요한 그리고 그분의 제자 분들, 또 그 제자 분들의 제자 분들...그분들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영지주의자들에 맞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펼쳤었고, 그 확실한 전승(戰勝) 기록처럼 보존된 정녕 귀한 말씀, 그것이 바로 요일5:6~8 말씀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5. 그분들에 관한 일화   검색 과정에서 알게 된 위 그분들 관련 일화, 그러니까, 육체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제대로 지켜 전하는 일에 모든 것 바쳤던 그분들의 거룩하신 삶을 되새기고 싶어서 관련 일화 하나를 옮겨 봅니다.   폴리카르포스(Polycarp, 사도 요한의 제자)의 제자인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 약 130~202)는 그의 저서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에서, 자신의 스승(폴리카르포스)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어느 날 에베소 공중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시린투스(Cerinthus) 라는 영지주의 지도자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단자와 함께 무너질까 두렵노라!”   시린투스는 “예수님은 단지 인간이었고, 그리스도의 영이 일시적으로 임했다가 십자가 직전에 떠났다”라는 이단적 주장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가르침을 극도로 가증스럽게 여겨 함께 있는 것조차 거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 그분의 그 말씀으로 인한 생각 기타 일련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하면서,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말씀 떠올려 봅니다. 아는 것...정확히 아는 것을 뜻하시겠죠...?      ( 끝 )        
2025-09-30 21:53:50 | 최영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 간다는 소식은 반가운데 어떤 교회로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네요.. 국내에선 챨리를 대항하기 위해 마귀언론이 윤×× 같은 인물을 내세워 자기의 남자  며느리가 이쁘고 사랑스럽다고 대놓고  동성애 아들을 선전하고  다니니 마귀의 순발력은 참 대단합니다..
2025-09-25 19:30:04 | 최철호
세상시스템속에서-하나님계심을 말하는 사람,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사는 사람,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니라.-히브리서10장36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산물이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하박국3장17,1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m.youtube.com/watch?v=Na43taBsK5s
2025-09-17 23:08:13 | 목영주
진리를 외친 자의 죽음, 그 뒤에 있는 영적 전쟁   이미 알고 있는 바와같이, 2025년 9월, 미국의 젊은 보수운동가이자 신실한 크리스천인 찰리 커크는 공개 강연 도중 총격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그는 Turning Point USA라는 단체를 이끌며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성경적 가치와 진리, 생명의 소중함, 자유의 정신을 담대히 외쳤던 사람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증오를 퍼뜨렸다.”라는 이유로, 한 청년에 의해 공개적으로 암살당했다. 진리를 선포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내, 에리카 커크의 반응이었다. 남편을 잃은 아픔 속에서도 그녀는 담담히 일어나 이렇게 선언했다. "제 남편의 운동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커지고, 더 담대해질 것입니다. Turning Point는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성경을 믿는 교회(Bible believing Church)에 참여하라고, 그곳에 뿌리내리라고 권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지금 우리가 맞서야 할 어둠에 대한 영적 전쟁의 분명한 선언이었다.   요한복음 3장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정죄의 근거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들이 악하므로 빛보다 오히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찰리 커크는 빛을 외쳤고, 어둠은 그 빛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빛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한 사상의 충돌이나 정치적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마귀와의 전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대적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11), “너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에베소서 4:27),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예전에도 지금도 복음을 외치는 자들은 공격받고, 진리를 말하는 교회는 조롱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진리를 미워하고, 복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에리카 커크는 남편을 향한 이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선포하며, 이렇게 외쳤다. "그들은 제 남편을 죽였지만, 그분이 외치던 복음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촉발시킨 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각성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세우십시오. 교회로 돌아오십시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통찰을 준다.   첫째, 복음을 외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진리를 전하는 삶은 때로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나”고 말한다.   둘째, 교회는 피난처이자 전진기지이다. 에리카가 말한 “Bible-believing Church”는 단지 건물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의 방주이며 영적 전쟁의 중심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더 그리하자.”라고 권면한다.   셋째, 마귀는 실제로 역사하며,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10장 4절은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체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강한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며,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덧입어야 한다.   마귀는 육신을 해할 수는 있어도, 진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찰리 커크의 피는 땅에 떨어졌지만, 그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세상 속으로 퍼지고 있다. 복음은 살아 있고, 죽음을 이긴 능력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그 빛 가운데 거하며, 그 빛을 전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한다. 에베소서 6장 13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악한 날에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2025-09-17 16:22:51 | 이규환
첫째,(제가 안 튀어나오게)예수님은 오늘도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다음, 급진적인 사랑을 하기위해 저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이렇게해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잘 안되는 저의 천성입니다..상대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도 내것을 표현할때 예의를 갖추어서 전한다면,그것만으로도 건강한 의사소통이라고 점수를 주고 싶네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마귀를 대적하라.그러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야고보서4장7,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9-06 15:45:20 | 목영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예전에 간증할 때, '이공제공'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말이지요. 이공제공을 응용하며 '이킹제임스 성경 제 여타 성경'하면 됩니다. 킹제임스성경으로 여타 성경을 물리친다는 말입니다.
2025-09-04 22:53:42 | 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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