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방법으로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이정표가 되리라 믿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5-07-26 15:03:12 | 김지훈
위태로운 나라 사정으로 깊은 절망감을 찍고 올라오니 하나님만으로 기쁠 수 있게 된 요즘 저입니다.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이 제것이 되어진 듯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너희는 내게로 오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하시니라.-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거짓이 모두 드러나서 나라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는 시민들이 많아지게 해 주세요..
2025-07-25 17:35:01 | 목영주
시편 94편 9절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2025-07-25 16:25:47 | 최철호
우리 삶속에서 늘 말씀으로 묵상하면서 적용하시는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원한 이정표라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5-07-25 11:52:03 | 김영익
감정형과 사고형, 그 둘이 꿈의 배합비로 이루어진 성도님들 넘쳐나는 교회 되기를 빌어봅니다
2025-07-25 02:45:43 | 최영오
뒷동산(용인 법화산) 산길을 걷던 중 어떤 이정표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아침 지나치는 곳이라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는데, 그날은...그렇게 되었답니다. 세 갈래 길 한쪽 옆에 세워진 그 이정표 중의 어떤 안내 문구가 그날따라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안내 문구 내용인즉. ‘출입 금지 (길 없음)’ 이었답니다. (그 길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어떻게 되는지 등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
그 이정표 앞에서, 특별히 그 안내 문구에 시선 고정한 채로 이런 생각 했습니다. 길 없음...길 없음이라...너, 정말 대단한 이정표로구나. 그렇지, 그걸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다지 헷갈릴 것도 없는 갈래 길을 안내한답시고 온 팔 벌리고 서 있는 너를 본체만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갔던 내가 많이 무심했었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 없음...길 없음...지금의 이 나라 이 사회가 바로 그런 길, 그러니까, 길 아닌 길로 가고 있는 상황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는...어떤 군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길 아니다, 길 맞다, 논쟁 속에 그 길 계속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생각조차 없이 휩쓸려 들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역시 많은 사람들...그런 한 무리의 사람들 말입니다. 이 시대,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 모습인 듯하여...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아픈 마음 가다듬은 다음 다시 산길을 걸었습니다. 잠시 후, 조금은 엉뚱한 듯한 다른 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어쩌면 이 시대를...‘이정표 없는 시대’ 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정표 없는 시대...이정표 없는 시대...몇 번을 되뇌어봤습니다. 막마~ㄱ한 생각에 마음 한없이 울적했다고나 할까요. 길 아닌 길에 이정표까지 없으니 그 결말 정녕 파멸에 버금갈 정도로 참담할 것이 뻔하니까요. 하긴, 길 아닌 길에 웬 이정표가 있겠습니까만...
그날 이후, 그때 그 울적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길 아닌 길 걷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함께 걷는 수많은 사람들 돌려세울 수 있는 권능...그런 것과는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소위 필부의 심정, 어쩌면 많은 사람들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그런 날들 보내던 중...한 줄기 빛인 듯한, 또는 작은 위안인 듯한 한 생각이 일었습니다. 성경 말씀 읽던 중에 말입니다. 어떤 생각인고 하니, 비록 이정표 없는 시대, 그런 세상임에도,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더욱 선명히 드러나 보이는 ‘삶의 이정표’ 있음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삶의 이정표라 함은 매 순간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생각(mind), 바로 그 '생각의 이정표'로서, 지금 이 사회보다 더욱 암담했던 어떤 한 세상을 오히려 기쁨과 기도와 감사 함께 흔들림 없는 순례자의 거룩한 삶으로 살고 가신 많은 분들, 그분들 생각 속에 참으로 확고히 세워져 있었을 그 이정표 말입니다. 영원(eternity)에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세워두신, 말하자면, ‘영존하는 이정표’, 즉 성경 말씀 바로 앞에 두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생각이 그에 이르자, 읽어 나가던 곳에서 생각을 딴 데로 돌려, 수~~~없이 많은 이정표의 말씀들로 채워진 성경 말씀 속에서 특별히 몇 개 큰 이정표를 골라보고 싶었답니다. 말씀에 대한 얕은 지식 세계(세계랄 것도 없지만 ^^)를 더듬고 더듬어, 그리고 핸드폰 상의 ‘KJV성경암송’ 앱까지 훑고 훑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여...이정표 없는 암울한 시대 살아가는 제 생각 속에 특별히 드러나 보이도록 세워두고 싶은 이정표 몇 개를 골라본바, 다음과 같습니다.
...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1:1) /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마28:20) /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22:37) / 너는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9) /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니라 (잠1:7, 시111:10) /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엡2:8)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신다는 것과 또 그분께서는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하느니라 (히11:6) /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2:20)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라 (히12:15)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
그들이 배부르매 그들 마음(heart)이 높아졌으므로 그들이 나를 잊었느니라 (호13:6) / A /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 /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출하리니 네가 내게 영광을 돌리리로다 (시50:15) /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히13:5) /
너희가 악한 날에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그러므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을 입으며 화평의 복음을 예비함으로 너희 발에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해 그것으로 너희가 능히 그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며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엡6:13~17)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야만 할 것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고전8:2).
...
너무 많은가요...? ^^ 사실은, 하나 더 있답니다. 그 내용은 물론 표현 방법(대귀법(對句法)?)이 기막히게 멋지다 싶어서 따로 적어 봅니다. 귀를 심으신(planted) 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빚으신(formed) 분께서 보지 아니하시랴? (시94:9), 바로 그 말씀입니다. 위 ‘A’ 표시 자리에 넣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이정표 없는 시대’ 살아가매 더욱 선명히 드러나 보이는 ‘영존하는 이정표’, 성경 말씀...그것도,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보전된 킹 제임스 성경 있음에 새삼 무한한, 정녕 무한한 감사와 찬양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 끝 )
2025-07-25 02:40:59 | 최영오
너무도 맞는 말씀이고 공감가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이 둘을 반반씩 합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지체간 부딪힘이 있을 때
너무 감정적이거나 너무 이성적 이어서 더 큰 문제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배려하며 세워주는 좋은 성도들이 될거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2025-07-17 22:32:15 | 이명숙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고.......,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2025-07-17 21:48:57 | 최철호
각각의 약점과 서로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고 온유한 영으로 세워 주라는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2025-07-17 07:53:53 | 김지훈
감정형인 저는 돌이켜보니 그리스도인의 따뜻함을 계속 흘려보내면 상대 비난투의 말까지 좋아질까 기다린 시간도 있었네요. 사고형 상대에게 멋지다박수 쳐주는 마음 여전하지만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제발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말아주세요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계속 새로워져(혼합형?이 되어져서) 인간관계가 점점더 모두-함께-가 되는것 같아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청조물이라.옛것들은 지나갔으니,보라,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5장1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7-16 15:47:51 | 목영주
형제님 의견에 공감 합니다.
아이들이 블럭을 갖고 놀때보면 각기 다른 모양이 있어야 성도 만들고 공룡도 만들더라구요.
'아롱이다롱이'라는 단어도 생각이 나고요.
2025-07-16 14:00:29 | 이수영
감정형과 사고형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세워 주고 너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잘못은 개인의 특질 때문에 나오는 실수를 말한다. 이 실수를 온유한 영으로 바로 세워 주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무심코 범하는 실수에 대해서 감정형과 사고형의 예를 들어서 서로의 강점과 약점,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성격유형에서 자주 나오는 감정형(F)과 사고형(T). 이 둘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감정형은 사람의 감정과 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사고형은 논리와 사실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둘 다 나름의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1.1. 감정형의 강점
감정형은 타인의 감정을 잘 읽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누군가의 표정이 조금만 어두워도 그 감정을 눈치채고 다가가려 한다. 관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며, 갈등을 피하고 모두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회의 자리에서도 누군가 말에 상처받지 않았는지 살피고, 모임에서도 서로가 어색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감정형은 인간적인 따뜻함과 감성적인 소통에서 빛을 발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감정형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1.2. 감정형의 약점
하지만 감정형은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쉽다. 불편한 말을 피하려 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조용히 넘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문제가 장기화되거나, 감정형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얻게 된다.
또한 감정보다 사실을 우선시해야 할 상황에서도 관계나 분위기에 휘둘려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 피드백을 받을 때도 객관적인 지적임에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감정형은 공감에는 강하지만, 거리두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2.1. 사고형의 강점
사고형은 감정보다는 논리와 객관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상황을 구조화하고 분석하며,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문제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피드백을 받을 때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면 될까?”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태도 덕분에 업무 효율이 높고, 성장에 필요한 자기 반성이 잘 이루어진다.
2.2. 사고형의 약점
그러나 사고형은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데는 약한 편이다. 말의 내용은 맞을지 몰라도, 표현 방식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먼저 제시하려는 성향 때문에, 정서적인 지지가 필요한 순간에 거리감이 생긴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아, 상대는 “정이 없다”, “무심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감정형과의 관계에서는 사고형의 직설적이고 건조한 말투가 오해를 부르는 일이 잦다.
3.1. 감정형이 바라보는 사고형
감정형의 눈에 사고형은 때때로 너무 차가워 보인다. 분위기나 말투에 신경을 쓰지 않고,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표현은 감정형에게 상처가 된다. 감정형은 사고형이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옳고 그름에만 집착한다고 느낄 수 있다. 감정적인 위로나 공감을 기대한 순간에 “그건 네가 잘못했네” 혹은 “그럴 땐 이렇게 해야지” 같은 반응은 오히려 정서적인 소외감을 만든다.
감정형은 사고형을 ‘무정한 사람’,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으며, 감정적 거리감이 커지면 관계 자체가 단절될 가능성도 있다.
3.2. 사고형이 바라보는 감정형
반대로 사고형의 눈에는 감정형이 감정에 휘둘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감정형이 상처받거나 화를 내면, 사고형은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이건 논리적인 문제인데”라며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형이 갈등을 피하려는 태도도 사고형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빨리 끝날 일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고형은 감정형을 ‘비합리적인 사람’, ‘감정적인 사람’으로 단정 짓고 거리감을 둘 수 있다.
감정형과 사고형은 각자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감정형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고형은 사실과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기지만,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각각의 약점과 서로를 바라볼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고 온유한 영으로 세워 주라는 것이다.
감정형은 사고형에게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을 배울 수 있고, 사고형은 감정형에게서 관계를 섬세하게 살피는 배려심을 배울 수 있다.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에베소서 4장 16절처럼 각 부분이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함에 따라 모든 마디가 공급하는 것에 의해 꼭 맞게 함께 결합되고 꽉 차서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되지 않을까! 이것이 교회가 세워지는 비결이 아닐까!
2025-07-16 08:35:19 | 이규환
첫 언약, 상속 언약 등을 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2025-06-27 10:08:34 | 김지훈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고 지켜주신 나라
잘돼 나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
2025-06-25 22:26:29 | 최영오
개방과 피드백...가끔씩이라도 되새겨 보겠습니다 ^^
2025-06-25 22:24:01 | 최영오
주의 만찬 때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new testament)의 피니라”, 마26:28 그 말씀 말입니다. 그때마다 ‘이 포도즙이 새 상속언약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옛 상속언약 또는 첫 상속언약은 뭐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답니다. 그럴 때면, 언약(covenant) 그리고 상속언약(testament)에 대한 스스로의 부실한 개념 정립 상태로 인해 부끄러웠다고나 할까요.
그러던 중에 접한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새 언약의 위대한 예언과 성취’라는 제목의 목사님 설교 영상을 거듭 듣는 한편으로 관련 성경 구절들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름 깨달은 점들 그리고 일었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1) 시내산에서의 ‘첫 언약’, 즉 구약이 바로 ‘첫 상속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하 ‘이스라엘’이라 함)과 첫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24). 제시하신 율법을 그들이 지키면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이 땅에 속한 모든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의 조건부 언약이었죠. 일방적인 성격의 언약이지만, 이스라엘의 조건 수락에 의거하여 언약이 성립된 것입니다.
히9:18, 히9:20 말씀에서는 이 ‘첫 언약’, 즉 구약을 ‘첫 상속언약’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첫 언약’은 옛것이 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첫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애끓는(렘31:20) 심정으로 징계는 하시되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려는(렘31:36-37) 하나님께서는 둘째 언약을 구하셨죠(히8:7). 그러니까, ‘첫 언약’은 백성들의 흠(히8:8)으로 인해 사라질(히8:13)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피 흘려 죽으심(이하 '십자가 수난'이라 함)을 통해 ‘첫 언약’에 따른 율법을 완전 성취(마5:17)하사 그 언약을 쇠하고 낡은 것(히8:13)으로 만드심으로써 ‘첫 언약’을 대체할 둘째 언약의 성립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3) ‘첫 언약’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서의 둘째 언약이 ‘새 언약’이다
시내산에서의 그 ‘첫 언약’ 맺은 이스라엘에게서 흠을 발견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죠. “보라 날들이 오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 및 유다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31:31)”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 언약’을 대체할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거죠.
그런데, 그 언약 내용이 참으로 놀랍게도,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 다시는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31:33-34)”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날들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은혜...너무나도 큰 은혜의 언약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 날들은 언제일까요? 예수님 재림하신 후 펼쳐질 천년왕국의 때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떤 때인 거죠.
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첫 언약'과 '새 상속언약'의 동시 성취라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다른 측면에서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바, ‘첫 언약’, 즉 ‘첫 상속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이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히9:15)된 결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믿는 이스라엘 포함, 롬 8:28)에게 영원한 상속유업(inheritance)의 약속(히9:15)이 주어지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또 하나의 언약, 즉 ‘새 상속언약’(마26:28)의 성취 및 효력 발생으로 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으로 인해 '첫 언약'은 제거(히10:9)된 반면 '새 상속언약'은 세워져(히10:9) 효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5) ‘새 상속언약’과 ‘새 언약’은 명백히 서로 다른 언약이다
마26:28 말씀의 그날 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니, 선언하신 ‘새 상속언약’, 그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로 죄들의 사면(롬3:25)을 비롯한 영원한 상속유업의 약속(히9:15)을 주시겠다는 내용의 은혜...역시 너무나도 큰 은혜의 언약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새 상속언약’은 바로 효력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그분을 믿는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인정받았음은 물론입니다. 그분의 그 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주의 만찬’을 시행하고 있죠.
이처럼, ‘새 상속언약’은 ‘첫 언약’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서의 ‘새 언약’과는 언약의 적용 대상자들과 그 내용, 그리고 효력 발생의 때 측면에서 명백히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 언약하는 자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상속언약'이다
역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첫 언약'의 성취 행위로서, 그 언약 자체를 제거(히10:9)하는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언약하는 자가 죽은 뒤에라야 효력 있는 언약은 ‘상속언약’이라는(히9:17) 성경 말씀에 따르면, ‘첫 언약’은 본질적으로 ‘상속언약’의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그 ‘첫 언약’을 ‘첫 상속언약’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상속언약’(마26:28)의 경우 애당초 ‘상속언약’으로 선언된 동시에 언약하는 자의 죽음이라는 효력 발생 조건 또한 정확히 충족하기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릴 만한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7) '새 언약', '새 상속언약' 등은 하나님 구속 사역의 일환이라
'첫 언약', ‘새 언약’ 그리고 ‘새 상속언약’이 왜 생겨났을까, 어떤 일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결국...이들 언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과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더군요.
그러니까, 아무리 갇을리(godly)하게 살아봤자 도저히 구제 불능의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창조물, 즉 인간을 차마 버리지 못해 살려주시기 위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그것도...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몸을 화해 헌물(롬3:25)로 삼아 행하시는 가히 초월적 차원의 구속 사역, 그 진행 과정에서 ‘첫 언약’, '새 언약' 그리고 ‘새 상속언약’이 차례로 드러나 보인 결과...아니겠는가 싶더라는 거죠.
8) '새 상속언약'의 피, 그 은혜의 거룩함을 지워 버린 성경들 바라보매
비교 목적으로 옆에 두고 있는 NIV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마26:28 말씀의 경우 ‘언약의 피’(KJV : 새 상속언약의 피)로, 히9:15 말씀의 경우 ‘새 언약의 중보자’(KJV : 새 상속언약의 중재자)로 각각 기재되어 있더군요. 게다가, 히9:16-17 말씀의 경우 어처구니 없게도 ‘유언(will)’(KJV : 상속언약(testament))으로 기재되어 있더군요. 그러니까, NIV 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 성경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거한 ‘새 상속언약’은 아예 사라져 버리고 없는 거죠.
별 의미 없는 뭔 '언약' 또는 '유언' 정도로 알고 넘어가자는 건지...아니면,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을 적용 대상으로 성취될 ‘새 언약’을 미리 앞당겨 기리며 ‘주의 만찬’ 어쩌고 하자는 건지...
갈1:8 말씀, 즉 “하지만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어떤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그 말씀 떠오르매 착잡~한 심정에 잠겨 보았습니다. ( 끝 )
2025-06-25 21:58:32 | 최영오
좋은 글 뿐만 아니라, 목영주 자매님과 이수영 자매님의 댓글 역시 주옥같아서 두세번 읽게 됩니다^^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2025-06-22 22:30:12 | 김지훈
개방영역을 넓히고, 맹점과 은폐영역을 줄이고 미지영역을 탐색해 가는 과정=자기성장 과정이다.
내가 나를 열고,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라.
좋은 관점이에요.
결국은 하나님 눈 앞에 살아가는 것이지요.
2025-06-20 19:19:37 | 이수영
제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게 꿈이라 저부터 제것이 되게 하려하는데 쉽지가 않아요.피드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면 <도움받는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있어야하고 선하게 이끌어주실 하나님을 믿고 평소에는 열심히 살아야 그런 건강한 생각이 들수 있다고 가르치고는 있습니다.제경우 은폐영역 줄이는 방법은 하나님 귀가 따갑도록 고하는 거구요~^^오늘도 전능자 하나님께 순종하며 낙심않고 남은 하루 잘 살아내겠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더라-창세기 1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6-20 15:38:01 | 목영주
조하리 창 & 개방과 피드백
우리는 친밀함의 7단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7단계에 다다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더 깊은 친밀함을 원한다. 상대를 더 잘 알고, 나 자신도 더 진실하게 드러내며, 관계 속에서 더 따뜻한 연결을 이루기 위해서다. 오늘, 그 깊은 친밀함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조하리 창(Johari Window)’을 소개한다.
조하리 창은 인간의 자기인식과 대인관계를 설명하는 직관적인 심리학 모델이다. 이 모델은 1955년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 고안했다. 두 사람은 인간관계 훈련과 집단 역학 연구를 하던 중,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인식이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조하리(Johari)’라는 명칭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Joseph+Harry =Johari).
조하리 창은 내가 나를 알고 있는가? 타인이 나를 알고 있는가? 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4개의 창으로 나뉜다. 각각은 아래 그림처럼 열린영역, 맹점영역, 은폐영역, 미지영역으로 구성된다.
1. 열린 영역
나도 알고 있고, 타인도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내가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타인도 알고 있다면 그것은 개방영역에 해당한다. 이 영역은 조하리 창에서 가장 건강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넓을수록 대인관계가 원활하고 신뢰 형성이 쉽다. 개방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자기개방이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때, 타인은 나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피드백에 대해 방어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수용하면, 개방영역은 점차 확장된다.
2. 맹점 영역
타인은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괜찮은 말투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에게는 날카롭게 들릴 수 있다.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심코 자주 끊는 습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은 피드백 없이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피드백을 얼마나 잘 듣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맹점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나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가 말할 때 혹시 불편한 점이 있었어?” 같은 질문이 그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드백을 들을 때 방어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3, 은폐 영역
나만 알고 있고, 타인은 모르는 나의 내면이다.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나 상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실패 경험, 불안감, 열등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은폐영역은 심리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수록 더 커진다. 타인에게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의 깊이는 완벽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보여주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은폐영역을 줄이는 방법은 자기개방이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조금씩 열어볼 때, 공감과 수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은폐영역은 작아지고, 개방영역은 넓어진다.
4. 미지 영역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다. 즉,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 가능성, 무의식적인 감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조용한 사람이 위기상황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극한 상황에서 뜻밖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경험도 이 영역의 예이다. 미지영역은 새로운 경험이나 도전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낯선 환경에서 내 안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코칭이나 상담,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특성을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이 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기성찰, 새로운 역할에의 도전, 그리고 타인의 진심 어린 질문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나는 더 입체적이고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조하리 창은 단순한 심리 모델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실제적인 도구이다. 개방영역을 넓히고, 맹점과 은폐영역을 줄이며, 미지영역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은 곧 자기성장의 여정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는 개방과 피드백이다. 내가 나를 열고,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들을 때, 진짜 나와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2025-06-20 06:43:58 | 이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