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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겸손해지면서 확실히 분명히 제 맘속에 박힌게 있어요.주변사람들 특히 가족을 더 사랑하다 가야겠구나..다짐했습니다.개인적으로는-믿음없이 눈앞의 불의를 보고 살아갈 애국자 국민들이 안쓰러운..이 슬픔만이라도 거둬가셨으면 좋겠어요.. -오,내 혼아,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그분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해 내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는도다.그가 넘어질지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떠받치시는도다-시편37편 23,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6-05 07:17:29 | 목영주
성도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로 인해 많은 분들이 당혹감과 실망, 분노, 좌절을 겪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바랐던 방향과는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며, 그 감정 속에는 이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뜻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의 주권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주의 뜻, 그것이 서리라.”(잠언 19장 21절) 또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칙령에 따른 것이요, 그 요구는 거룩한 자들의 말에 따른 것이니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고 또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그것 위에 세우신다는 것을 살아 있는 자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다니엘 4장 17절)   이 말씀은 지금의 현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 더 분명히 깨닫고, 공의와 진리를 향한 기도를 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담대히 진리 위에 서기를 원합니다. 상황이 우리를 낙심케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시기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때이며, 우리 모두가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이 나라 위에 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장 35절)
2025-06-04 16:46:20 | 이규환
예전에 자궁적훌 수술할 때 생각이 나네요. 죽으면 주님 품안이고  깨어나면 이땅에서 사는거라는  생각에 맘 편히 수술에 임했거든요. 오늘도 여러 자매님과 얘기 나누게 된 것이 죽음은 겁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일이다.  다만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일 없이 주님께  가기를 기도 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주께서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아요.
2025-06-01 14:24:15 | 이수영
가끔 죽는 순간("ㅇㅇ아~ㅇㅇ아~엄마 먼저 가 있을게 엄마는 너무 지금 좋다..")상상하면 오늘 하루 더 열심히 살게돼요. 매번 오늘까지만 나라걱정한다는 것이 6월3일까지 할 것 같아 부끄럽지만..사전투표 참관인으로 가는 기독교인 댓글(-저는 아무 힘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을 살려주세요-)보며 눈물로 함께 합니다..아버지! 창세기22장처럼 저도 아버지께 믿음의 고백을 한 그날을 기억해주시고 지금 제 마음도 깊숙이 보아주세요.. 고운꽃 한송이를 보더라도 나라걱정 안하고  만끽하고 싶어요.. -오 내 의의 하나님이여,내가 부를 때에 내 말을 들으소서.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주께서 나를 넓혀 주셨으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 기도를 들으소서-시편4편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5-30 15:55:01 | 목영주
수면 내시경과 부활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다녀왔다. 위와 대장을 함께 검사하는 수면 내시경을 하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와 회복까지 대략 5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편하게 주무시면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마취제가 들어왔다. 이내 나는 모든 감각을 잃었고, 시간도 공간도 의식도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흔들었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이 다시 느껴졌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내가 겪은 것이… 부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 시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내 생명을 맡긴 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에 다시 깨어났다. 잠시이긴 하지만 내 몸이 무력하게 의식 없이 있었던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누군가의 손안에 있었다.   갑자기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마취의 시간 동안, 마치 죽음을 지나는 듯한 고요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부활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은혜의 경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짜 죽음을 통과하셨다. 무덤 속에 머무르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부활은 단지 그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진 약속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기록대로 셋째 날 다시 일어나시고”   우리는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기에 부활은 막연한 종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진실이 된다. 부활은 소망이고,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오늘 내가 깨어났듯이, 언젠가 주님의 손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나는 50분 동안 세상을 잊고 잠들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고, 그분 스스로 다시 살아나셨다. 내게는 의사가, 간호사가, 장비가 있었지만, 그분께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신 그분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 말씀이 오늘 나를 다시 숨 쉬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도, 나는 다시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품게 한다. 부활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2025-05-30 07:57:23 | 이규환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던 제 잘못된 생각 하나를 우선 밝혀볼까 합니다. 이 글은 그 잘못된 생각에 대한 자백,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백인 동시에 바로잡아 주심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엡2:8 말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믿음(faith)은 마음(heart)의 상태 또는 그것을 채우고(가득 또는 덜) 있는 어떤 비물질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애당초 추상명사로서, 마땅히 일(work), 즉 행위가 아닌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다(believe), 그러니까, 믿는 것은 분명히 행위다. 믿는 행위,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행위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 견지하고 있었답니다.   어떤 생각 또는 묵상 말미에 반드시 되새겨보는 고전8: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야만 할 것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그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믿는 것(believe)은 일(work), 즉 행위임에 틀림없다...라는 생각은 하등의 문제가 없어 보였죠. 믿는 것은 정신적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 하고’ 어쩌고 할 그런 대상 자체가 아니다...라며 나름대로 확신까지 하곤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몇 번은(성경 전체를 그만큼 읽었다는 뜻은 아님. ^^) 지나쳐 다닌 것 같은 요6:29 말씀, 바로 거기서 저는 멈춰 섰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너희가 믿는 것(believe),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work)이니라”...라는 그 말씀에서.   한참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여기도 있잖아, 믿는 것은 일이라고’...라는 생각으로 평소의 그 확신을 재확인하매 일종의 영적 희열...비슷한 그 어떤 악한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만, 이내 다른 한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일하지 않더라도(work not),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believe)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라는 롬4:5 말씀 말입니다.   이어서 저는 평소의 그 생각, 그러니까, ‘믿는 것(believe)은 행위, 즉 일(work)이다’라는 그 확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틀렸다가 아니라 틀렸을지도 모른다 함은 위 요6:29 말씀과 롬4:5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앞(요6:29)에서는 믿는 것이 일이라고 하신 반면 뒤(롬4:5)에서는 믿는 것은 일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런 경우 저는 챗GPT의 자문을 받곤 한답니다. 한참 동안 토론을 이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죠.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믿는 것(believe)과 일(work), 즉 행위 관련하여 질문 및 토론을 좀 했답니다. 요6:29 말씀 중의 ‘하나님의 일’에 관한 두 종류의 주장들 그리고 어떤 논리적 모순 등등을...파헤쳐 보았다고나 할까요. (엄청 딸리는 실력으로 짜드라 얼마나 파헤쳐 봤겠습니까만. ^^)   한참 동안의 파헤치는 작업 끝에...저는 제 확신이 틀렸음을...역시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믿는 것(believe)은 일(work)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잘난(^^) 정신적 행위가 아니더라는 거죠.   구체적으로, 요6:29 말씀의 의미인즉, 믿는 것(believe), 그것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생명을, 빛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임에 따른 마음의 상태 변화 과정일 뿐이고, 말씀을, 생명을, 빛을 집어 넣으시는 일(work),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잖아...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요6:29 “너희가 믿는 것(believe),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work)이니라”, 그 말씀이 어찌 그리도 심오하게 느껴지던지요.   말씀을 받아들일 자, 죽어도(^^) 안 받아들일 자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았다는 거냐구요? 그런 뜻 절~~~대로 아니랍니다. 모든 인간을 그런 구조로, 그러니까, 일(work) 하나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말씀이 그대로 그들 마음에 들어가 안착되는 구조로 만들어 놓으셨지 않은가...싶더라는 거죠.   생각이 이에 이르자, 다소 생뚱맞은(^^) 듯한 다른 한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믿는 것(believe)은 일(work), 즉 행위가 아니다. 그동안의 내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믿는 게 행위가 아니니까 안 믿는 건 당연히 행위가 아니겠지...?’ 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 듦과 동시에 바로 답이, 놀라운 답이 떠오르더군요. 안 믿는 것(believe not), 그것이야말로 행위, 즉 일(work)이라고. 그 이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일(work), 그 일 하지 않았는가,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막는 일, 그 일보다 더 큰 일(work), 악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믿지 않음이 명백한 정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치가 바로 그것 아닐까 싶습니다만.   불현듯 마음(heart)의 커튼 생각이 났습니다. 빛이요 생명이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커녕 삼중 커튼 확실히 치고 살았던 지난날의 어떤 인간 생각도 났답니다.   교회 앞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서 다녔던 중죄인을 교회로, 그것도, 바른 하나님 말씀 함께하시는 우리 교회, 사랑침례교회로 불러주사 빛 또는 이상한 빛을 가려 커튼 제대로 여닫을 수 있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는...듯한 인간으로 키워주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감사합니다. 할렐루야!    ( 끝 )        
2025-05-28 17:19:41 | 최영오
<우리 마음 깊은 동기>라는 말에 생각나는 걸 몇자 적을게요~^^평소 제 마음동기를 살펴보면서 은근 찔린것이--상대를 긍휼웃음여유로 바라보는 횟수보다 납득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본게 더 많은것 같아 회개했습니다. 요즘 감기로 끙끙앓아서 그런지-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무지 감사하고 사랑침례교회가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며..무엇보다 거짓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해주시는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긍휼의 마음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들어주는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나라도 저도 다시 세워주셔서..(댓글이 댓글답게 짧게 써지길(^^)=국민들이 나라걱정하며 살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끈기있게 주를 기다렸더니,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편40편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5-24 20:44:31 | 목영주
발람의 길 : 순종인가, 탐욕인가   성경에 짐승이 말하는 장면은 두 군데다. 창세기에서 뱀이 이브에게 말하는 장면과 민수기 22장에서 나귀가 말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귀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나귀가 말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이다.   민수기 22장은 성경 속에서 독특하고도 교훈적인 인물인 ‘발람’을 조명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대언자였지만, 실상은 그 마음속에 숨겨진 탐욕과 야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인물이다. 겉과 속이 달랐던 그의 행보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모리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다. 그는 이스라엘이 마치 들의 풀을 핥아먹는 소처럼 자신과 자기 민족을 삼켜버릴까 봐 염려하였다. 이 두려움에 그는 점술로 명성이 높았던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다. 발락은 말한다. “그대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대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줄 내가 아노라”(민 22:6).   처음 발람은 이 요청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발람은 이를 그대로 전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직한 대언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과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며 두 번째 사절단을 보낸다. 이때 발람은 다시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가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하라”고 허락하신다(민 22:20). 허락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호한 금지가 아닌 ‘조건부 허락’이었다. 발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발람이 출발하자 곧바로 분노하신다. “그가 갔으므로 하나님의 분노가 타올라서 주의 천사가 대적이 되어 그를 치려고 길에 서니라”(민 22:22). 이는 발람이 순종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보상과 존귀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을 흥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의 길을 “비뚤어진 길”이라 판단하셨다(민 22:32).   그 결과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길을 세 번 피하고, 결국 발람의 매를 맞은 뒤 입을 열어 말한다. “내가 주인께 무슨 일을 하였기에 주인께서 나를 이같이 세 번이나 때리시나이까?”(민 22:28).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통해 발람의 영적 눈을 열게 하시고, 자신이 걷는 길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이후 발람은 발락을 만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주관하셔서 축복의 말씀만 나오게 하신다. 그는 총 네 번에 걸쳐 대언하였고,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형통,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대언까지 포함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제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였다. 그러나 그 말의 전달자였던 발람의 마음은 여전히 두 마음을 품은 상태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발람의 모습은 신약 성경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드로후서 2장 15절은 그를 “불의의 삯을 사랑한 자”로 규정하고, 유다서 1장 11절은 그가 “대가를 따라 달려간” 자로 언급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뜨린 장본인임을 폭로한다.   그런데, 민수기 2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압과의 행음이 발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22장을 아무리 읽어봐도 나오지 않는다. 31장 16절을 보면 발람의 짓이라는 것이 나온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조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유혹하여 브올의 사건에서 주께 범법을 저지르게 하였고, 이로써 주의 회중 가운데 재앙이 있었느니라.’   결국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언자의 외형을 지녔으나, 내면은 세상의 영광과 보상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을 ‘미친 자’로, 그의 길을 ‘비뚤어진 길’로 규정하신다. 이는 단지 당시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이 경고하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발람처럼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속으로는 세상의 명예와 유익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척하지만, 이미 마음은 세상의 제안에 기울어 있는 것은 아닌가?   발람의 길은 결국 파멸(칼에 맞아 죽음)과 책망의 길이었으며, 그 이름은 영적 타락의 대명사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동기까지도 순전하기를 바라신다고 믿는다. 발람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겉과 속이 하나인,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참된 순종의 길을 다시 묵상하게 한다.
2025-05-22 09:02:56 | 이규환
많이 뜨끔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가르침을 쉽고 분명하게 주고 있는데도 세상의 작은 것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니 너무 부끄럽습니다. 순종, 자기 부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올바르게 따르는 삶을 살도록 다짐해 봅니다.
2025-05-09 08:04:47 | 김지훈
 (중간에 쳇gpt가 생각날 정도로)정리를 너무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전하고 저도 제것이 되게 여러번 읽어보겠습니다.나라염려로 저는 저의 두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저의 믿음약함 그리고 그렇게 더디던 성화가 마음결단 하나로 꽤 진척되어짐 입니다. 나라위한 눈물기도와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것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서 일상이 그전보다 더 바람직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하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말라.흔들리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나니 그 사람은 자기가 주께 무엇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야고보서 1장6.7절 하나님말씀으로 위로받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되어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되고-골로새서 1장 11절 모든 인내를 기쁨으로 할 수 있게 하나님말씀을 품겠습니다.
2025-05-08 22:50:54 | 목영주
신앙은 버리는 것이다!   우리 사랑침례교회는 기도 제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각자의 기도 제목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집 근처에 한 교회에서 기도 제목을 공유하는 보고 참 답답했다. 기도 제목은 공개하지 않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들은 공개하고 있다. 이들의 기도 제목을 보면 온통 소유의 복이다. 건강하게, 부동산 오르게, 자식 잘 되게, 부족한 것 채워 해달라는 기도 제목이 대다수다. 심지어 기르던 개가 죽었는데 명복을 빌어달라는 기도 제목도 있다. 대체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물어보고 싶다.    아래 내용은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구절들이다. 신앙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하는 이들의 결단과 용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과연 이들의 기도는 어떤 내용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1.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것 (창세기 12장 1절, 4절)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을 떠나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주께서 전에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났고롯도 그와 함께 갔는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는 칠십오 세였더라. 버린 것: 고향, 친족, 아버지 집 – 당대 사회에서 이는 곧 정체성, 안전, 경제적 기반, 유산을 의미한다. 의미: 자기 삶의 근본을 떠나는 일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의 결정이었다. 교훈: 하나님의 인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따를 때 새로운 언약과 축복의 길이 열림을 보여준다. 2.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결단 (마태복음 4장 19-22절)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이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즉시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두고그분을 따르니라. 그분께서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자기들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 안에서 자기들의 그물들을 고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즉시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그분을 따르니라. 버린 것: 그물, 배, 아버지 – 직업과 가족이라는 일상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의미: 생계와 가족 의무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반응한 것으로, 대단한 헌신을 뜻한다. 교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즉각적이고 전적인 결단을 요구하며, 이는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사명으로 이어진다. 3. 수가성 여인의 물 항아리 (요한복음 4장 28-29절) 그때 여자가 자기의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자기 길로 가서 도시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되, 와서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버린 것: 물 항아리 – 당시 일상생활에서 물은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품이었다. 의미: 자신의 물리적 필요보다 더 큰 영적 발견에 몰입했음을 상징한다. 교훈: 예수님을 만난 자는 더 이상 옛 삶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으로 전환된다. 4. 마태의 부르심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버린 것: 세금 받는 자리 – 당시 로마 제국 하의 수입원이자 안정된 직업이었다. 의미: 돈과 권력, 세속적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름. 교훈: 부르심 앞에서는 과거의 불의한 삶까지도 내려놓고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5. 바울의 고백 (빌립보서 3장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던 것들,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손실로 여겼고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손실을 입었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기나니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버린 것: 유대교적 엘리트로서의 모든 자부심과 경력 (율법, 혈통, 학문적 위치 등) 의미: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종교적·사회적 위치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행위. 교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 어떤 가치보다 뛰어나다는 고백은,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자기 부인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은 버림을 통해 얻음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각기 다른 배경과 상황 속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즉각적인 순종, 자기 부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단이었다.    버리면 기도 제목이 바뀐다! 이들은 다 버렸다.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버린 이들이 자꾸 뭘 더 달라고 기도했을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했다.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한 사도 바울이 제발 살려만 달라고, 오래동안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제발 집 값 좀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 버리면 기도 제목이 바뀌고, 제목이 바뀌면 기도 내용이 달라진다.
2025-05-08 13:29:18 | 이규환
안녕하세요?   아주 중요한 글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침례교에 대해 잘 분석한 글이고 양심의 자유 및 자유 민주주주의에 대한 침례교의 공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침례교 정신이 현시대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고 이것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샬롬   패스터    
2025-05-02 10:01:51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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