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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사역이 연기(공연, play)가 될 때에는 교회가 공연장으로 변하고 교인들은 관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예배는 연회가 되어버리고 사람의 환호와 갈채가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는 자는 항상 성소에 거한다. 그럴 경우, 비록 구원받지 못한 방문객일지라도 그의 면전에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고전14:25).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4:41 | 관리자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헌신적인 사역자는 자기가 스스로 교인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피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진실되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국 목사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때에는 목사와 교회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자신의 업적으로 인해 칭송받을 때 가장 위험하다.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0:18 | 관리자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라디오 고전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강사가 논어에 나오는 군자삼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1. 첫 번째 즐거움: 학습성 군자는 늘 배우기를 좋아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2. 두 번째 즐거움: 동지성 군자에게는 먼데 있든 가까운데 있든 친구들이 찾아와서 함께 지낸다. 3. 세 번째 즐거움: 독립성  군자는 남에게서 칭찬을 듣든지 비난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펴나간다.   이것을 들으면서 나는 독립침례교회가 바로 현 시대 크리스천 군자들의 모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학습성, 동지성, 독립성이 있고 사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가장 큰 특성입니다.   다음은 군자에 대한 정의입니다. '논어'에 의하면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고, 가까이 하면 부드러우며, 그 말을 들으면 엄숙한' 사람이 바로 군자이다. 우리는 이 단문 한마디의 정의를 충실히 해석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곧 군자인지를 모자람없이 가늠해볼 수 있다. 논어 자장편의 이 명언은 세 명제를 연결한 형태이므로, 낱낱의 단문으로 다시 읽어 보자.   첫째, 군자는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다. 둘째, 군자는 가까이 하면 부드럽다. 셋째, 군자의 말은 들으면 엄숙하다.   군자는 왜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한가. '군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논어)' 그러므로 군자는 하늘의 섭리와 대인의 모범,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한 즉 어찌 그의 언행이 씩씩하지 않을 것인가. 불의에 굽힘이 없고 현실적 이득에 흔들림이 없을 터이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저절로 씩씩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후에 이름이 남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논어)' 군자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 형상일 것인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상식인 셈이다.   또 어째서 군자는 가까이하면 부드러운가. 논어에 따르면 '군자의 마음은 늘 평정하면서도 넓고' '남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게 하되, 남의 악한 것을 선도하여 편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총명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재주 빛남을 뚜렷이 표시내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니' 군자가 어찌 부드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군자의 말은 왜 들으면 엄숙한가. '군자는 교제가 끊어져도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그 이름을 깨끗이 한다'(사마천 '사기')라고 했으니, 절교의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는 사람의 말이 엄숙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군자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듯하다.   ⊙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만 생각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 군자는 어느 경우나 태연자약한데 소인은 언제나 근심걱정으로 지낸다.⊙ 군자는 태연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고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 군자는 작은 일은 알지 못해도 큰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맡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은 알 수 있다.⊙ 군자는 쉬운 것에 처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일을 행하며 요행을 바란다.⊙ 군자를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쉽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남의 악함을 이루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괴롭게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의(義)로 바탕을 삼고 예로 행동하며 겸손함으로 나오고 믿음으로 이룬다. 독립침례교회 안에 크리스천 믿음으로 충만한 군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2009-05-06 14:09:48 | 관리자
하나 됨과 획일화   성경에는 Unity(하나 됨 혹은 하나 되게 함)라는 말은 있어도 Uniformity(획일화)는 없습니다. 영어로는 둘 다 비슷하지만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성령님은 Unity를 주시고 성도들이 Unity를 추구하게 하지만 마귀는 Uniformity를 줍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르지만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 Unity를 주시므로 모두가 달라도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생깁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여 서로 자연스레 존중하고 사랑을 하며 권위에 순복하고 지도자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대형 교회들과 이단들 그리고 극단적인 독립 교회들에서는 성도들에게 Uniformity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전횡과 수직적인 복종 관계 확립 등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성도를 징계하고 출회시키는 일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은 Unity와 Uniformity 중 어느 것을 원하시는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3-6절을 보기 바랍니다.   3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5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6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성령님은 Unity를 주십니다. Unity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반대로 획일화를 원하며 이를 위해 강압적으로 성도를 복종시킵니다. Uniformity가 대세인 교회에서 고생하는 성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벗겨 주려고 오셨는데 여전히 거기에 매여 있다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Unity를 추구합니까? 아니면 Uniformity를 추구합니까?
2009-05-06 13:54:59 | 관리자
사랑침례교회 창립, 문제는 없는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사랑침례교회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오신 여러 성도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함께 사랑침례교회 창립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오늘 처음 이 사랑침례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은 ‘송내역’이라는 랜드마크를 통해 이곳에 오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왜 송내역 근처에 교회가 또 세워져야 하나?”입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무려 50여 개의 교회가 이미 송내역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교회를 이곳에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지하철 1호선 역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2위인 곳이 송내역입니다. 하루 20만 명 이상이 유입되는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그리고 종교별 인구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1.4% 감소하여 861만6천 명으로 나타난 반면,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왕래하는 길목인 송내역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가 또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교파가 아니라 침례교회, 그것도 ‘독침’이란 약어로 회자되는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제가 지난 2월 1일 이 사랑침례교회 주일오전 예배 때 설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의 아이콘이 된 오바마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성경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곧 절대진리로 믿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어제가 석가탄신일이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석탄일을 맞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절에 가서 108배를 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부처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는 기독교회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최종권위로 믿는 독립침례교회가 창립되는 것은 매우 환영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매우 진부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까? 특히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거룩한(?) 성경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자칫 세상과의 타협을 암암리에 묵인하는 누룩과 같은 위험한 개념이 아닌가요? 물론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나오고 ‘사랑’은 488회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교회 안에서 거룩함과 사랑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22:34-40; 롬13:8-1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 사랑이기도 합니다(요13:35; 요일3:14).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요될 수 있습니다(고전13:4-7; 벧후1:3-6).   제 좁은 소견으로는 ‘독침’의 약점이 상대적으로 사랑과 구제의 부족이지 않을까 하는데, 이처럼 과감하게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그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쪼록 이 사랑침례교회를 통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서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이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벧전4:8).   감사합니다.    
2009-05-04 13:29:35 | 관리자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인 차한 박사가 이번에 국내 최대 일간지에 비타민 C에 관한 기사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면을 몽땅 차지하는 기사 내용으로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알립니다. 또 근본주의/킹제임스 성경 진영에 이렇게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온전한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에 알리고 싶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들 보느라 밤낮으로 수고하고 주일에 성경 공부 가르치고 헌신하는 형제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올린, 그분의 저서 똥 이야기와 비타민 C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보기 바랍니다.
2009-05-02 16:36:25 | 관리자
목회자 소개: 정 동 수    1959년 인천 출생   1982년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학사)   1984년 캐나다 뉴브런스윅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졸업(석사)   1988년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졸업(박사)   1988-1991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교수   1992-현재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2001년 미국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2001년 미국 Bible For Today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가족: 아내(오혜미)와 세 딸(미현, 아현, 현)   저는 제 행위나 인간적인 어떤 자랑거리와 상관없이 오직 전적으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23세의 나이에 유학을 갈 때에는 훌륭한 공학도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인류를 위해 무언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 인류 복지와 번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책들을 통해 종교와 복음의 극명한 차이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 믿음의 문제에서 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전통과 부모의 유산을 따르자니 양심이 저를 괴롭혔고 믿음대로 행하자니 세상과 친구와 친지와 교우들과 등을 져야 하는 괴로움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죽는 날까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순종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바로 믿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부터 ‘침례와 세례’ 그리고 ‘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에 팽배한 ‘칼빈주의(개혁주의)와 미국에서 우세한 세대주의’ 역시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믿으면 침례가 맞고 성경의 문제 구절들을 모두 비교하고 성경의 전달 과정과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킹제임스성경이 맞으며 또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말세의 일들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세대주의가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현실을 살펴보니 내 양심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소수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이단이라는 오명이 뒤따르는 악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부끄럼이 없이 회계보고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심을 하고 어려운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가 이 모든 과정에서 저와 함께 하며 잘 따라주었고 아이들도 복음의 핵심을 이해했고 부모님 역시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바른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작정한 뒤 우선 ‘침례를 다시 받아 뱁티스트’(Ana-Baptist)가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에 다시 와서부터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마음에 큰 부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나는 바른 성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른 교회였습니다. 이 둘을 놓고 생각해 보니 바른 성경이 있어야 바른 교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서 지난 15년 동안 마음의 부담을 떠안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오해와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 기간에는 성경 번역에 대한 부담이 마음에 자리 잡아서 이것을 끝내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 결과 이 일에 미쳐서 지난 15년을 거의 은둔 속에서 살았고 결국 읽을 만한 수준의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완역/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7-8년은 영어와 원어의 번역에 초점을 맞추었고 후반부 7-8년은 성경이 우리말답게 매끄럽게 읽히도록 다듬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어 결국 2001년도에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시작했으나 목사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목회 사역에 미숙하여 결국 2년 뒤에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 문제로 방황하고 마음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경과 책들을 통해 목사의 책무를 어느 정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5월부터 교회 문제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몇 가정과 함께 다시 바른 교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랑침례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자의 ‘영혼의 자유’(Soul liberty)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에게 자기가 믿는 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지옥에 가기로 작정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영혼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것이 바로 자유 의지이기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성경에 따라 자기 양심이 명령하는 대로 살며 믿음을 지켰고 심지어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모두 자유 교회였으나 AD 313년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국가 교회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중세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모든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가 교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우리만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시대 신정 정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종교/국가 연합 체제이며 신약시대에는 이런 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통제 체제하에서는 사람이 만든 신조나 법이 성경과 그리스도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엄청난 독재가 심지어 믿음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천주교회와 또 천주교회에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모두 국가 교회입니다. 이런 체제하에서는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믿을 수 없고 교단이나 교파의 창설자 혹은 최고 회의에서 결정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청교도들이 미국에 갔으나 여전히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만의 국가 교회를 형성하려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천주교, 장로교, 침례교, 루터교 등의 몇몇 교회만을 헌법을 통해 국가 교회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미국의 침례교 선조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사람의 영혼의 자유를 인정하는 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재 ‘종교의 자유’라고 부릅니다. 이 자유가 그렇게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근 1700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국가 교회 시스템에 의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 역사를 통해 저는 ‘자유 교회’(Free church)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모델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자유 교회를 형성하고 성경에 기초한 ‘근본적인 자유 교회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확고히 믿습니다. 사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부분의 이단들과 교리가 강하다는 교회들이 문자적 의미의 국가 교회는 아니지만 실행 면에서 국가 교회 체제를 형성하여 ‘우리만 교회다’라는 모토를 들고 성도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다만 교회들이 성경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보고 늘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데서는 결코 독단적 자만과 우월감과 배타적 독립성이 나오지 않고 자기의 부족함을 보고 고치는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과 주님을 높이고 성경을 따르는 일만 존재합니다.   이런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출발한 사랑침례교회는 성경의 완전함을 믿으며 영혼의 자유를 따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일을 기뻐하는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면 언제라도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제하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 갈급함을 느끼는 그 영혼의 영과 육의 필요를 채워줄 것입니다.   미천한 한 공학도가 성경을 번역하고 목회 사역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바울의 고백대로 정말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이런 번민과 갈등과 육체적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 저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다시 걸을 것입니다. 내 양심의 명령에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이 자기 아이들과 함께 이런 부담과 꿈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울 것입니다.   끝으로 세상 일과 교회 일을 동시에 하려니 대단히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로서 최우선 사명인 말씀의 선포를 위해 많은 시간을 내서 묵상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이 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성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와 격려로 또 좋은 제안으로 제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님의 능력이 제게 임하여 제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제 영과 혼과 육을 돌아서 위로 솟구쳐 나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05-02 16:13:54 | 관리자
Across the bridge   만나기만 하면 빨리 주님께서 오셔야지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하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환자들 돌보느라 불철주야로 뛰고 있지요. 그분의 아내도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만나서 구원받게 하느라 힘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즐겁고 그래서 이런 분들을 볼 때마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물질이 늘어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요?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 시대에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조차도 주님의 재림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살게 되니까 여기가 좋은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강남에는 예수님이 더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고 합니다. 곰곰히 시간을 내서 혼자 걸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를. 고린도전서 2장 6-16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거니와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없게 될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라.7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主)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11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2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다음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 우리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Across The Bridge   I have lived a life of sin, in this world I'm living in I have done forbidden things I shouldn't do I ask a beggar along the way if he could tell me where to stay Where I could find real happiness and love that's true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pain The sun will shine across the river and you'll never be unhappy again [ organ ] Follow the footsteps of the King, till you hear the voices ring They'll be singing out the glory of the Land The river Jordan will be new,and the sound of trumpet you will hear And you'll behold the most precious place never known to man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2009-05-02 15:49:46 | 관리자
다음의 글은 1년 반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 정호걸 장로님이 이 땅에서 쓰시던 몸 앞에 숙연히 서 있습니다. 아버지는 1930년에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학산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산골에서 조금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10살이 되기도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할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이끌었습니다. 고향에서 기독교를 접해서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다가 1950년에 육이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차출되어 전쟁을 치르다가 UN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로 지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공산주의가 싫어서 홀로 이남 땅에 머물기로 하셨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다시 군대에 입대해서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이남 땅에서 삶의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이북 청년이 빈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이기에 투쟁이라 하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토리묵도 팔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습니다. 또 석유도 팔아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지만 술에 빠져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고향을 잃은 설움과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혼자 노 저어 가야한다는 고독과 중압감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술이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29세에 어머니와 결혼하여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도 하고 인쇄도 했으나 돈이 생기면 모두 술 먹는 데 써서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탕진한 뒤에 용현동으로 이사 와서 콩나물 장사, 고물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물론 그때도 술을 끊지 못해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용현 교회를 다니면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는데 이때에 일이 잘못되어 정신적인 문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박점덕 목사님께서 심방하셔서 회개하고 주 예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시자 아버지는 그 순간에 눈물을 쏟고 회개하시고 바로 그 날부터 술 담배를 완전히 끊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일은 제가 10살 쯤 되었을 때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께서 술을 먹고 들어오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저와 동생의 일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때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병이 들었으나 돈이 없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해 죽어서 자신의 손으로 송도 앞의 산에다 묻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때에는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아버지는 굳게 믿음을 붙잡고 온 가족의 믿음의 대장으로 가정을 인도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복으로 다시 막내아들을 하나 더 얻으셨습니다. 그 뒤 용현 시장으로 집을 옮겨서 아버지는 잡화 가게, 연탄 가게, 고추 가게, 닭 장사 등을 해서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연탄을 나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특히 독쟁이 언덕으로 자전거로 연탄을 나를 때는 저나 동생을 불러 뒤에서 밀게 했습니다. 그때에는 그 일이 좀 부끄러웠고 하기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열심히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는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궂은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어머니가 석유난로를 사용하다가 온 몸에 화상을 입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을 이끌며 아이들 교육을 시켰습니다. 또 어머니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인하대학교 뒤로 이사를 해서 식당을 하면서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부천제일병원에서 매점을 경영했는데 이때부터 아버지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소변에 단백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몸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약을 써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젊을 때 술에 빠져 산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9월에 캐나다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몇 달째 병상에 누워서 몸이 좋지 않았지만 비행기 표와 얼마의 돈을 준비하고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유학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아버지는 “네 인생은 네가 사니 내 걱정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유학 가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엉겁결에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신장병으로 고생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한약을 드시고 몸의 붓기가 모두 빠지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아버지는 하나님이 덤으로 허락해 주신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삶 자체가 야곱의 삶처럼 험난했지만 아버지는 홀로 피난 나와서 아들 셋 모두 대학 교육시키고 떳떳한 사회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명은 공학 박사가 되어 각자의 분야에서 부지런히 살고 있고 또 하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이남 땅에 나온 우리 아버지는 무엇보다 먼저 믿음에서 성공했고 이 정도면 세상적인 것에서도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 성공했습니다.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매일 성경을 10장 이상 읽으며 어머니와 함께 새벽 기도를 다니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세 아들과 손자 1명, 손녀 6명을 위해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날마다 기도해 주셨기에 저희 아들들과 자손들은 믿음에서, 세상의 일에서 잘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들과 며느리 셋, 그리고 일곱 명의 손자들이 모두 주 예수님을 알고 주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니 이것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는 마땅히 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번에도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제가 미국에 8일 동안 출장 갔는데 아버지는 이것도 참아내시고 결국 제가 돌아온 뒤 아들을 보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호흡이 가쁘고 온 몸의 장기들이 제대로 활동을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디 한 군데 아픈데 없이 말 그대로 평안의 극치 속에서 아름답게 별세하는 아버지가 저는 부럽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사람의 복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임종 시의 평강의 복이 가장 큰 복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야곱처럼 자식들의 복과 임종 시의 복을 모두 받았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믿음의 영웅들의 영접을 받으며 당당하게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의인으로 섰습니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거기로 들어가 주를 찬양하리로다. 이것은 주의 문이니 의로운 자들이 거기로 들어가리로다. 주께서 내 말을 들으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를 찬양하리이다(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시118:19-21). 아버지, 지금까지 너무 잘 싸웠습니다. 어려운 고통의 순간들을 인내로 잘 참으셨습니다. 아버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온 가족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시지만 아버지의 믿음의 후예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아버지, 조그만 기다리세요. 어머니와 우리 아들들과 자손들이 모두 같이 아버지 가신 데로 갑니다. 영원히 병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곳으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그런 것들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히11:13-1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딤후4:7-8).
2009-05-02 15:15:18 | 관리자
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라(Make Them Learn) by Dr. Tom Vogel   모세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이전에 보거나 행하지 못했던,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못했던 일들을 보았고, 또 그러한 일들을 행했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철학이 있다.  그들은 위대한 일들을 믿는다.  그들이 그것을 믿기에, 그들은 그것을 이룬다. 모세의 위대한 철학 중 하나가 출애굽기 18장 16절에서 발견된다.  "내가 …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규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I do make them know the statutes of God, and his laws.)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게 하나이다"(make)이다.  모세는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거나 그분의 진리를 알려 주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반드시 그것들을 배우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게 만든다.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교실로 들어선다.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사는 반드시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윌리엄 클락(William Clark)은 대륙횡단을 그저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아니었다.  미조리 강에 노를 담그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그 위험한 항해를 끝마치고 다시 돌아오든지 아니면 도중에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해서 어떤 변명을 미리 준비해 놓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일말의 주저함이나 후회도 없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게 만든다.  그들은 높은 기준을 세우고는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를 매 순간 확인한다.  형편없는 교사는 주어진 커리큘럼을 끝마치는데 만족한다.  그들은 정해진 수업을 진행하지만, 학생들이 배운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일 학생들이 배우는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그 교사가 가르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도대체 왜 자기 자녀가 그 과목에서 낙제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모가 학교에 달려와서는, 모두가 그 아이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는 선생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교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아이가 배우도록" 만드는데 그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학교에서 하는 일이다.(저자는 미국 인디애나 주의 해몬드 시에 위치한 한 중학교(Hammond Baptist Junior High School)의 교장이다. - 역자 註)   우리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만든다. 학교 교육의 참된 목적은 가르침을 받는 이들로 하여금 진리를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만들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사들은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하면 그들이 진리를 습득했다고 간주한다.  학생들 또한 그저 시험에만 통과하면 자신들이 뭔가를 배우고 익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좋은 학점을 받았을 뿐이다. 젊은이들이 배우도록 이끄는 것은 교사가 매일 자신의 인격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강력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그 교사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읽기를 미처 배우지 못한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다음 학년으로 진급시키는 것은 죄악이며 범죄행위이다.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교사의 의무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직업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다.  그리고 그 의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단순히 학생들에게 삶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교실에서 무엇을 배운 후에는 그 삶이 변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놓여진 하나의 위대한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는 것"이다.
2009-05-02 09:50:52 | 관리자
세상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마도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의 공통된 문제일 것입니다. 모두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들고 전도 사역만 해야 하나, 아니면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거기 묻혀 살면서 조금씩 시간을 내어 주의 일을 해야 하나, 이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저 역시 아직 여기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모두 전자처럼 행할 수도 없고 후자처럼 행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레미야, 에스겔 등과 같은 전임 대언자가 있었고 다니엘과 이사야 등과 같이 세상 일을 하면서 주의 대언자로 일한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는 양쪽을 다 체험한 것 같습니다. 아마 요셉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르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극단적인 사람들은 대개 세상의 것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학교도 검정 고시로 마치고 직업도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로 하고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친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합당한 것일까요? 성경 학교(특히 미국의)가 이 세상 최고의 학교로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더럽고 추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 성도들은 알게 모르게 자아 도취와 교만에 빠져 자기 교회 외에는 바른 교회가 없고 자기 목사만 바르고 자기만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한다고 믿게(세뇌 당하게) 됩니다. 또 다른 극단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모든 일에서 뛰어나게 잘 해야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일류만을 고집하고 거기로 자녀를 집어넣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 경우를 보니 대개 아이들이 마귀와 세상에 넘어가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디. 미국에서 10년간 이민 생활도 해 보고 국내에서 이런 저런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어느 것이 바른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혹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저는 균형 잡힌 크리스천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모두 전도자나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전임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대부부은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세상과 싸우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런 것을 전혀 모르므로(고고하게 교회 안에 갇혀 있으므로) 성도들의 고통에 대해 피상적인 대답만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까지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28세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천국 다음으로 좋다는 미국의 좋은 것을 10년 이상 누렸습니다. 이것은 다 좋은 아내를 얻은 덕이었습니다. 좋다는 목사들을 만나고 교회들도 방문해 보았습니다. 또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또 아내 덕에 세 딸을 낳아 잘 키웠고 큰 아이와 둘째 아이는 소위 명문 대학이라는 Johns Hopkins 대학을 졸업했고 또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강의를 잘 하여 교육상도 수상하고 국내 학회에서는 그 해의 학술상도 받고 연구비도 많이 있어서 여러 가지 연구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또 학문적으로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 될 수 있는 직책도 맡았습니다(관련 기사 참조). 그런데도 마음에는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것에서 앞서도 고통이 되고 뒤쳐져도 고통이 됩니다. 이 세상 일에서 행복을 찾은 것이 허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이 정말 진리입니다(전1:2-4).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요?  한 세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요즘 보름째 제 아버지가 입원해서 매일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제 막내와 그 사이의 저를 보며 "한 세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저도 어느 정도 세상의 것에서 성공을 했지만 결국 솔로몬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전12:12-14).   내 아들아, 또한 이 말씀들로 권고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육체를 피곤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을 심판하시리라.   두서없이 글을 썼습니다. 오늘 글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도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 교회에서 이런 문제로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저의 사례가 조금이라도 이런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너무나 세상의 성공만을 외치고 그쪽으로 사람을 몰고 갑니다.  이 경우 역시 저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성공만 좇으면 주님을 잃습니다. 거의 100% 확실합니다.    균형잡힌 크리스천이 됩시다. 모두 전임 사역자가 될 수 없음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노력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이것만 강조하면 주님 없는 성공이 옵니다. 부모와 목사가 이것을 잘 파악해서 아이들을 잘 지도해야 합니다. 경쟁력 없는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교회의 사람이나 목사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되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상의 성공은 우리에게 영혼의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주님 안에서 이루기 위해 정진하기 바랍니다.
2009-05-02 09:43:55 | 관리자
절대 포기하지 마라 2       오늘 아침에 전주의 김재근 형제가 나를 위로하려고 잭 하일스 목사님의 시 Don't Quit(절대 포기하지 마라)을 보내왔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그 형제님과 성경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힘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2        잭 하일스   당신의 잔에 쑥물이 가득 차고 그 쑥물이 담즙으로 변했어도 걷다가 걸려서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다가 곧 넘어져도 높은 산의 정상에 올랐으나 아직도 거칠고 험준한 알프스가 치솟아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구부러졌고 그 길을 걷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도 식탁 위의 가장 좋은 것이 슬픔의 빵으로 바뀌었어도 험난한 바다를 건너 왔는데 마라의 쓰디 쓴 물이 여전히 앞에 놓여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사나운 독수리가 내려와 안락한 보금자리를 어지럽혀도 달콤한 열매가 엉겅퀴로 바뀌고 가시덩굴이 당신의 쉼을 방해하여도 심연의 깊음만이 소리치고 실패만이 최선으로 보일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주님께서 식탁을 치우시고 기름진 것들을 다 제거하셨어도 최고의 포도즙을 다 빼앗기고 빈 통만 남았어도 한때 뽐내면 앉았던 그 화려한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건강은 병약함으로 느껴지고 약에서조차 해로움을 맛보게 되어도 고독하고만 사귐을 나누며 슬픔만이 당신의 행복이 되어도 당신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며 태양 빛은 구름 속에 가려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손실만이 유일한 승리고 부족함만이 당신에게 이득이 되어도 나쁜 일들이 결코 혼자서 오지 않고 괴로운 일들이 짐짝처럼 떼를 지어 몰려와도 유혹하는 자의 거센 공격으로 당신의 혼이 상하고 지쳐서 초라해 보이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라. 정하신 때가 되면 거둘 것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헛되이 달리지 않는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야 만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2009-05-02 09:42:40 | 관리자
절대 포기하지 마라 1      웨이트 부인   지난 해에 Mrs. Waite이 내 생일에 카드와 함께 시를 보내 주었습니다. 시의 제목은 Don't Quit(절대 포기하지 마라)이었습니다. 패배 속에 살던 내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 나의 삶이 또 다시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사무엘기를 통해 사울이 '다른 마음'을 받아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처럼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성도들을 위해 이 글을 드립니다. 우리 같이 힘을 내 봅시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1          가끔씩 그러하듯 일들이 잘못되어 갈 때 힘겹게 걷고 있는 길이 늘 오르막처럼 보일 때 가진 돈은 부족하고 갚을 돈은 늘어날 때 웃고 싶지만 한숨만 나올 때 염려가 당신을 짓누를 때 필요하다면 쉬어라.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마라.   삶이란 뒤틀리고 뒤집히는 것들로 이상하게 얽혀 있다. 모두가 가끔씩 배우고 있듯이 수많은 실패들도 돌고 돌므로 끝까지 실패를 붙잡고 늘어졌으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걸음이 느리게 보이더라도 한 번 더 시도하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성공이란 실패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의심의 구름 속의 은빛 조각처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멀리 있어 보이지만 훨씬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크게 얻어맞을 때에도 싸움은 계속해라. 일들이 최악일 때야말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될 때이다.  
2009-05-02 09:41:41 | 관리자
무엇에 미쳤는가?   시카고 무디 교회의 목회자며 저명한 라디오 설교자였던 폴 레이더는 평소에 이 예화를 종종 듣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소년이 길가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그 아이는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그 사람은 ‘도데체 무슨 일인데 저 애가 저렇게 난리지?혹시 저 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야?’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그 애는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그 구멍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애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칠 때마다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행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던 그 애는 행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는 분입니다!-[세상과 충돌하라]/ A.W 토저   다음의 주소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cgntv.net/cgn_player/player.htm?vid=34984
2009-05-01 18:07:19 | 관리자
인생은 짧고 죄는 현실이기에 인생은 허비할 것이 못되노라. 사람의 연수는 나뭇잎의 떨어지는 것, 떨어지는 빗방울이기에 허비하며 소일하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이라. 이 세상에선 오직 진실해야 할 뿐이다. 많잖은 인생, 오직 한 번이 있을 뿐. 그렇다. 오직 한 번, 오직 한 번뿐이라. 그 한 인생, 그 좁은 막간, 아, 얼마나 성스러워야 할까! 축복된 수고로 채워져야 할 나날들, 시간 시간은 새로운 생산을 낳아야 할 뿐이라! (호레이셔스 보나르)
2009-05-01 18:06:29 | 관리자
크리스천의 인격과 세상살이 그리고 하나님   한번은 싱가포르 항공의 비행기 좌석을 구하지 못해 홍콩에서발이 묶인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생길지도 모를 취소 표를 기다리며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내 옆에는 여행 중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도 나와 같은 처지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항공사 직원에게 다가갔습니다.두 사람 사이에 상당히 거친 말들이 오가는 듯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손에 탑승권이 들려 있었습니다.“비결을 말씀드리죠. 나는 저곳으로 가서 내가 아는 모든 욕설을 늘어놓으며 다시는 당신네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당장 비행기 좌석을 내놓으라고 우겼더니 탑승권을 주더군요.”그는 탑승권을 과시했습니다. “선생님도 가셔서 똑같이 하세요.”물론 나도 그 항공사 직원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정말 치사하고 야비하게 굴면 탑승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무시하고 욕설을해대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좀 도와주시겠어요?”결론은 그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홍콩에서 하루 반을 더 보냈습니다. 이 사건에서 얻은 교훈은 인격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성숙한 인격을 가지려는 이유는 득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고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편리하게 풀리건 말건 우리는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날드   이 땅에서는 인격의 변화가 예수 믿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갚이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다음을 보기 바랍니다.   http://www.cgntv.net/cgn_player/player.htm?id=37687&mode=content_view&gotopage=&txtprogram=&bit=medium
2009-05-01 18:05:42 | 관리자
요즘 어떤 책들을 보고 있습니까? 성경 이 외의 책들 말입니다. 혹시 '나는 성경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의 한계가 이런 데서 드러나기 쉽습니다. 성경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격 성장과 세상의 이해, 사람의 죄성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경건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글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3년 후, 10년 후 어떤 사람이 될지는 어떤 책을 읽느냐라는 중요한 요소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 - 마더 말러 앞으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읽는 책에 의해 결정됩니다. 본 사이트에 접속하는 많은 분들이 '나는 보수 신앙인이다. 나는 근본주의자다'라고 자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책들을 읽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요, 완고한 사람 - 바리새인 - 이 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간직하려면 책을 많이 보기 바랍니다. 주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올해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사회학자 벤저민 바버는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고 말합니다. 독서와 끝없는 학습, 이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강조되어온 성공의 첩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크리스천이 되는 첩경 역시 좋은 책을 읽는 데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홈페이지에 가서 토저, 김남준 등이 지은 책들을 보기 바랍니다. 또 부흥과 개혁사의 책들을 보기 바랍니다. 주로 장로교 저자들의 글이라 교리 면에서 조금 다른 부분이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 생활을 위해서 읽기 바랍니다. 이제는 조금 다른 부분도 이해하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역시 과거에 인격이 바르게 수양되지 않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물론 지금도 어려움이 많지만 바르게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비례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종종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속의 글자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글자에 갇히면 안 됩니다. '나는 킹제임스 성경을 본다'고 자랑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의 글자에 갇혀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 완고한 고립주의자가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 애를 쓰기 바랍니다. 토저는 이것을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날이 갈 수록 새로워지는 창조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9-05-01 17:45:55 | 관리자
올해 저는 우리나라 나이로 50이 되었습니다. 23세에 유학갈 때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진실로 주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감사할 것을 많이 생각하고 아침마다 차를 타고 오면서 감사 찬송을 듣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에 그의 심경을 가장 잘 그린 것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성도들이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는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고린도후서를 적어 나갔습니다. 요즘 저도 이래 저래 저를 잘 아는 분들로부터 악성 편지와 댓글 그리고 비방의 글을 받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속에서 불이나고 화가 치밀어올랐을 텐데 요즘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면서 항상 사랑과 격려만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철이 들면서 사도 바울의 심정을 미약하나나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보다 지혜로운 제 아내는 이미 그것을 터득하였지만 저는 이런 것에서 좀 늦습니다. 그래도 일단 깨달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 살겠기에 남을 욕하고 또 욕을 먹었다고 흥분하고 열을 내며 지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공과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가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맡은 위치에서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서 마음 속의 부담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악한 글이 와도 오히려 그 글을 보낸 분을 위해 기도하고 저의 잘못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일에서 제게 인내의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런 저런 반대가 있을 때 한 번 고린도후서 6장 말씀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처럼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배반당하는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2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3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며4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고난과 궁핍과 곤경과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6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8 영예와 치욕으로 그리하고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으로 그리하였나니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며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며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11 오 고린도 사람들아,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려 있고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나니12 너희는 우리 안에서 좁혀지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속 중심에서 좁혀졌느니라.13 (내가 내 자녀에게 하듯 말하노니) 이제 너희도 같은 것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을 넓게 열라.  
2009-05-01 17:45:17 | 관리자
―사는 데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자신감이지요. 얼마 전에 키신저가 한국 왔을 때 한번 보자고 해서 만났어요. 그 나이에 그 먼 여행을 다 다니고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일정이 빡빡한 것 같더라고요. 자신감 있고 부지런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자꾸 나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봐야 해요. 그래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인터뷰에서   대우 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 나온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느 면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72세의 노구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실패를 경한 사람 -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 이기에 존경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뢰합니다.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보리 십자가가 먼저 있고 그 뒤에 왕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하고 그것을 고난을 돌리면 어리석은 일이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실패가 없을까요? 나도 한 때는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한다고 뛰어들었다가 큰 실패를 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깊이 생각해 보니까 인생의 깊이가 더 깊어졌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또 다시 뒤를 돌아다보게 되었고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보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제가 목사가 어떤 사람이지 모르고 교회를 시작한 데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 채 이론만으로 일을 하다 보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 교회를 하겠다고 나선 형제/자매들에게는 정말로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알지 못하면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요2:23-25). 주님 안에서 큰 뜻을 품으려는 젊은이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이 일로 고통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와 제 아내에게는 이 일이 오히려 약이 되어 큰 반성과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이제 터널을 빠져 나오려 하면서 뒤를 돌아다보면 우리 주님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입니다. 그분의 의도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황하며 고뇌하는 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다보면 그것이 유익했지만 당하는 순간에는 전혀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이집트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일을 당하는 그 순간에 너무 기뻐서 울었을까요? 그 역시 나와 여러분 같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청나게 원망도 하고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원통함과 어려움을 소망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보게 되었지요.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갑자기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또 거기로 들어가려는 나를 바로잡기 위해 그냥 적어 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진대,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일진대 내게 닥친 일들이 모두 우리의 복이 되리라고 믿으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감을 회복합시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2009-05-01 17:44:14 | 관리자
감사하고 싶을 때- 아침에      2008년 03월 08일 (토)  이번에 미국에 갔다 오면서 Jeem Reeves의 노래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아는 노래들이 여럿 있었지만 요즘에는 더욱 더 노래들의 가사가 와서 닿습니다.  나는 음악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침에 차를 타고 직장에 가면서 매일 이 노래를 듣습니다. 감사하고 싶어서입니다. 특히 중간에 보면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가사가 나옵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그렇더군요. 감사를 잊기 쉬운 세상에서 다시 하번 깊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영어 발음도 정확하니 영어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We thank Thee   We thank Thee each morning for a newborn day where we may work the fields of new mown hay We thank Thee for the sunshine and the air that we breathe Oh Lord we thank Thee We thank Thee for the rivers that run all day we thank Thee for the little birds that sing away we thank Thee for the trees and the deep blue sea Oh Lord we thank Thee Oh yes we thank Thee Lord for every flower that blooms birds that sing, fish that swim and the light of the moon. We thank Thee every day as we kneel and pray that we were born with eyes to see these things. We thank Thee for the fields where the clovers grow we thank Thee for the pastures where the cattle may roam We thank Thee for Thy love so pure and free Oh Lord we thank Thee. Oh yes we thank Thee Lord for every flower that blooms birds that sing, fish that swim and the light of the moon. We thank Thee every day as we kneel and pray that we were born with eyes to see these things. We thank Thee for the fields where the clovers grow we thank Thee for the pastures where the cattle may roam We thank Thee for Thy love so pure and so free Oh Lord we thank Thee.  
2009-05-01 17:43:2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