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2102개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6-01 17:47:46 | 관리자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송인규 교수의 한국교회 신앙진단).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6-01 17:44:41 | 관리자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6-01 17:33:21 | 관리자
오늘 아침에는 영혼까지 웃게하라(뉴스마 선교사 지음)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생을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치과 의사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한 대목이 좋아서 적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수많은 반대자에게 비난을 받을 때마나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다른 사람의 말이 내 마음의 화평을 흔들어 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고집을 피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기쁨과 성령님의 내적 평화와 기쁨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서 그리스도인 리더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링컨이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강 속에서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인간 실존의 문제가 다 풀리지는 않습니다.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구출받은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 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모세는 온유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화평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09-05-29 11:33:02 | 관리자
교회에 다니며 (나를 비롯한)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님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하고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기도한다.
2009-05-28 19:46:04 | 관리자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5-28 19:42:41 | 관리자
몸이 아파서 하루에 몇 백 번이나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그러나 진짜 노동자처럼 이와 같이 괴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그렇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비 오는 날이거나 바람 부는 날이거나,눈이 내리거나 번개가 치는 속에서도 망치를 내리치는 대장장이처럼 글을 썼다.   - 프랑스 소설의 거장, 귀스타브 플로베르   세계적인 문호 발자크 역시 자신의 작품생활을 되돌아보면서,"나는 굴이 무너져 갱 속에 갇혀 버린 광부가 목숨을 걸고 곡괭이를 휘두르듯 글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 이야기입니다.한 번은 한 열성 팬이 무대 뒤에 있는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크라이슬러 씨, 당신처럼 연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그러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부인, 전 이미 제 목숨을 내놓았답니다."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자세로 예수님을 따릅니까?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2009-05-25 10:09:03 | 관리자
오십이 되니 인생(life)이 이제 조금 보입니다. 지난 2달 동안 매우 바쁘게 지내다가 요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다가오는 말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것으로 끝인가?   어제는 우리나라에 독거 노인들이 100만명이 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들의 힘겨운 삶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사람답게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나의 숙제입니다.   주문한 책이 오지 않아 서문만 보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Total Truth'로서 총체적 진리라고 번역해야 더 잘 맞습니다.   기독교는 총체적 진리 체계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철학, 문학, 음악, 미술, 교육, 이웃 돕기, 인간답게 사는 것, 환경 보호 등 우리 인간과 관련이 있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아는 성경과 기독교는 총체적인 진리로 서야 하고 마땅히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주제입니다.   서문만 보아도 가슴이 뜁니다.   낸시 피어시의 작품입니다. 미국 아마존 서점에서 기독교인들이 읽어야 할 20권의 책 중에 하나로 마크되어 있습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총체적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의 총 주제와 우리의 삶이 매칭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무나 큰 주제인데 아마도 이런 것이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동일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이 모든 것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즉 총체적 진리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중에 어려운 분들을 먼저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이후에는 밖을 보면 좋겠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한 우리 성도들에게 총체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09-05-18 23:50:12 | 관리자
비가 내리는 오후에 설교를 작성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습니다. 몇 군데서 기도 요청이 왔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따듯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자매님 할머니의 건강과 아빠의 영적 회복을 바라는 자매님 자기라고 하는 틀을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자매님 닥쳐오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초조함을 이기고 싶어 하는 형제님 직장 문제로 애를 쓰는 형제님 남편과의 영적 문제로 갈등하는 자매님 아직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그냥 남편과 함께 교회에 오는 자매님 분노에 젖어서 사는 형제님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실천이 안 되어 고민하는 형제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분들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가 없어서 고민이 되고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돈 많고 학식 있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보다 이렇게 조그만 소망을 가슴에 품고 목사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며 예수님을 만나려고 추구하는 이들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나도 동일한 문제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요, 나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를 비롯한 이런 형제/자매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2009-05-16 13:51:47 | 관리자
현대의 교회들은 좋은 리더들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근본주의 교회들에는 바른 리더십이 매우 필요합니다. 최근에 읽은 '양치기 리더십'은 세상 사람이 기록한 글이지만 양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양들을 이끌 목자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인격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참조하기 바랍니다. 다음은 그 책을 간딘히 요약한 것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세상의 지도자 이상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양치기 리더십 (텍사스 대학 경영학 교수 노이만 박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제너럴 테크놀로지스 맥브라이드 회장의 인생수업 이야기, 케빈 리먼, 윌리엄 펜택 지음, 김영사 출간 ) 위대한 양치기에게 양떼를 이끄는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삶의 일부이다.지도자로 성공하려면 양치기가 양을 대하듯이 직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양들의 상태를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모든 사람을 직원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정기적으로 직원들과 어울리고 직원들을 진심으로 아껴야 한다. “양떼를 이끌 때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네. 흔히 지도자들은 지팡이가 아닌 막대기로 양떼를 이끌다가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곤 하지. 지팡이는 막대기보다 부드러운 도구라네. 양치기는 양을 살짝 찌르거나 툭툭 쳐서 방향을 잡을 때 지팡이를 이용하지. 지팡이는 고압적으로 휘두르는 도구가 아니야. 결국 양들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양치기를 믿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네. 자네가 직원들을 냄새나는 양떼로만 생각한다면 직원들은 결코 자네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야.” 양치기 원칙 1: 양들의 상태를 파악하라.1. 일의 진행 상황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다.2. 한 번에 한 마리씩 양들의 상태를 파악한다.3. 정기적으로 직원들과 어울린다.4.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질문을 던지며 직원들의 개인적인 상황에 계속 관심을 갖는다.---------------------------팀원이 될 사람들의 장점을 파악하는 것이 첫 단계이다.직원들 스스로 열정을 느끼는 분야에 배치한다면 아침마다 쏜살같이 일터로 달려올 것이다.태도가 좋은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들과 협력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양치기 원칙 2: 양들의 됨됨이를 파악하라.1. 어떤 양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양떼를 관리하기가 쉬어질 수도 있고 어려워질 수도 있다.2. 처음부터 건강한 양을 고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3. 양들이 제대로 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양들의 됨됨이를 파악한다.---------------------------지도자의 자리에 있다 보면 부하 직원들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위대한 지도자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를 개인적으로 각인시킴으로써 부하들에게 의미와 소속감을 불어 넣는다.부하직원들은 상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고 있다.“저 사람이 뭘 알고 일을 하는 걸까? 내가 저 사람을 믿어도 되나?”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가치관과 사명감을 끊임없이 부하들에게 전달함으로써 표식을 남긴다.리더가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부하들에게 표식을 남길 수가 없다. 양치기 원칙 3: 양들과 일체감을 갖도록 하라.1. 진정성, 성실성, 인정을 보여 줌으로써 부하직원들의 신뢰를 얻는다.2. 부하직원들에게 원하는 것의 기준을 높이 잡는다.3. 자신의 가치관과 사명감을 끊임없이 알린다.4.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부하직원들에게 가장 잘 맞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려준다.5. 위대한 지도자는 남을 이끄는 일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한다.---------------------------양들은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직원들한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이야기해 줘야 한다.모든 자리가 중요하다는 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두려움, 경쟁의식, 해충, 굶주림이 사라지지 않으면 양들은 편히 쉬지 못한다.양치기 곁에 있는 것만큼 양들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다.문제가 곪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양치기 원칙 4: 목장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라.1. 직원들에게 정보를 알려준다.2. 모든 직원에게 각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불어 넣는다3. 습관적인 선동자를 제거한다.4. 정기적으로 양들을 신선한 풀밭으로 인도한다.5. 항상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들을 안심시킨다.6. 문제가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양을 지팡이로 가볍게 찔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면 양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흔희 지도자들은 지팡이가 아니라 막대기로 양떼를 이끌다가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다. 직원들이 울타리를 넘어서면 직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의를 주는 것도 리더의 책임이다.훌륭한 양치기는 가끔 잊지 않고 부하들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 양치기 원칙 5: 방향을 가리키는 지팡이1. 자신이 가려는 곳이 어딘지 파악하고 앞에 나서서 계속 양들을 움직이게 한다.2. 방향을 가리킬 때 강압 대신 설득을 이용한다.3. 직원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허락하되 울타리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경계선과 굴레를 혼동하면 안 된다.4.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직원들을 구출한다.5. 실패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일깨워 준다.---------------------------지팡이가 부하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의 책임을 상징한다면 회초리는 부하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상징한다.직원들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리더의 의무이다.직원들의 능력이 발전하지 않는 것은 직원들의 성장을 막는 양치기 때문이다. 양치기 원칙 6: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회초리1. 보호: 공격자와 양 사이에 끼어들어서 자신의 양을 위해 싸운다.2. 바로잡기: 기강을 잡는 것을 교훈을 가르쳐 줄 기회로 생각한다.3. 감독: 직원들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물어본다.---------------------------지도자 노릇을 하려면 지도자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양치기의 원칙은 양떼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의 생활방식이다.양치기가 대가를 치르려하지 않는 건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들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는 돈을 위해 양을 돌보지만 바른 리더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돌본다.양치기를 양치기로 만드는 건 지팡이나 회초리가 아니라 바로 마음이다.양들은 때로 아주 멍청하게 굴지만 누구 목소리에 대답해야할지 결정할 때는 신중해진다.양들이 리더를 자기들의 양치기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녀석들한테 리더는 단지 낯선 사람일뿐이다. 양치기 원칙 7: 양치기의 마음을 품어라1. 위대한 지도력은 기교가 아니라 생활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2. 자신과 부하들 중 누가 지도력의 대가를 치를 것인지 매일 결정해야 한다.3. 무엇보다 양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009-05-08 17:21:46 | 관리자
기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목사의 기도만으로는 사역을 완수할 수 없다. 그에게는 배후에서 기도하는 교회의 힘이 있어야 한다. 한 방문객이 스펄전에게 그의 사역의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 교인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지요." 사역자가 이것보다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7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사랑침례교회 성도님,   부족한 목사와 목사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말입니다. 부탁합니다. 매일 시간을 정하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 DSJ 
2009-05-06 23:15:38 | 관리자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계획한 헌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죄인,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종,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심령이 갈급한 예배자로 말이다. 지성소에서는 우리 모두 아마추어이다. 그곳에는 전문가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신임장에 감명받지 않으신다.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7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3:10:23 | 관리자
크리스천의 사역이 연기(공연, play)가 될 때에는 교회가 공연장으로 변하고 교인들은 관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예배는 연회가 되어버리고 사람의 환호와 갈채가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는 자는 항상 성소에 거한다. 그럴 경우, 비록 구원받지 못한 방문객일지라도 그의 면전에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고전14:25).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4:41 | 관리자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헌신적인 사역자는 자기가 스스로 교인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피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진실되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국 목사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때에는 목사와 교회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자신의 업적으로 인해 칭송받을 때 가장 위험하다.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0:18 | 관리자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라디오 고전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강사가 논어에 나오는 군자삼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1. 첫 번째 즐거움: 학습성 군자는 늘 배우기를 좋아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2. 두 번째 즐거움: 동지성 군자에게는 먼데 있든 가까운데 있든 친구들이 찾아와서 함께 지낸다. 3. 세 번째 즐거움: 독립성  군자는 남에게서 칭찬을 듣든지 비난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펴나간다.   이것을 들으면서 나는 독립침례교회가 바로 현 시대 크리스천 군자들의 모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학습성, 동지성, 독립성이 있고 사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가장 큰 특성입니다.   다음은 군자에 대한 정의입니다. '논어'에 의하면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고, 가까이 하면 부드러우며, 그 말을 들으면 엄숙한' 사람이 바로 군자이다. 우리는 이 단문 한마디의 정의를 충실히 해석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곧 군자인지를 모자람없이 가늠해볼 수 있다. 논어 자장편의 이 명언은 세 명제를 연결한 형태이므로, 낱낱의 단문으로 다시 읽어 보자.   첫째, 군자는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다. 둘째, 군자는 가까이 하면 부드럽다. 셋째, 군자의 말은 들으면 엄숙하다.   군자는 왜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한가. '군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논어)' 그러므로 군자는 하늘의 섭리와 대인의 모범,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한 즉 어찌 그의 언행이 씩씩하지 않을 것인가. 불의에 굽힘이 없고 현실적 이득에 흔들림이 없을 터이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저절로 씩씩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후에 이름이 남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논어)' 군자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 형상일 것인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상식인 셈이다.   또 어째서 군자는 가까이하면 부드러운가. 논어에 따르면 '군자의 마음은 늘 평정하면서도 넓고' '남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게 하되, 남의 악한 것을 선도하여 편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총명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재주 빛남을 뚜렷이 표시내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니' 군자가 어찌 부드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군자의 말은 왜 들으면 엄숙한가. '군자는 교제가 끊어져도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그 이름을 깨끗이 한다'(사마천 '사기')라고 했으니, 절교의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는 사람의 말이 엄숙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군자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듯하다.   ⊙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만 생각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 군자는 어느 경우나 태연자약한데 소인은 언제나 근심걱정으로 지낸다.⊙ 군자는 태연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고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 군자는 작은 일은 알지 못해도 큰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맡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은 알 수 있다.⊙ 군자는 쉬운 것에 처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일을 행하며 요행을 바란다.⊙ 군자를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쉽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남의 악함을 이루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괴롭게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의(義)로 바탕을 삼고 예로 행동하며 겸손함으로 나오고 믿음으로 이룬다. 독립침례교회 안에 크리스천 믿음으로 충만한 군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2009-05-06 14:09:48 | 관리자
하나 됨과 획일화   성경에는 Unity(하나 됨 혹은 하나 되게 함)라는 말은 있어도 Uniformity(획일화)는 없습니다. 영어로는 둘 다 비슷하지만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성령님은 Unity를 주시고 성도들이 Unity를 추구하게 하지만 마귀는 Uniformity를 줍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르지만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 Unity를 주시므로 모두가 달라도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생깁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여 서로 자연스레 존중하고 사랑을 하며 권위에 순복하고 지도자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대형 교회들과 이단들 그리고 극단적인 독립 교회들에서는 성도들에게 Uniformity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전횡과 수직적인 복종 관계 확립 등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성도를 징계하고 출회시키는 일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은 Unity와 Uniformity 중 어느 것을 원하시는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3-6절을 보기 바랍니다.   3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5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6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성령님은 Unity를 주십니다. Unity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반대로 획일화를 원하며 이를 위해 강압적으로 성도를 복종시킵니다. Uniformity가 대세인 교회에서 고생하는 성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벗겨 주려고 오셨는데 여전히 거기에 매여 있다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Unity를 추구합니까? 아니면 Uniformity를 추구합니까?
2009-05-06 13:54:59 | 관리자
사랑침례교회 창립, 문제는 없는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사랑침례교회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오신 여러 성도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함께 사랑침례교회 창립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오늘 처음 이 사랑침례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은 ‘송내역’이라는 랜드마크를 통해 이곳에 오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왜 송내역 근처에 교회가 또 세워져야 하나?”입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무려 50여 개의 교회가 이미 송내역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교회를 이곳에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지하철 1호선 역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2위인 곳이 송내역입니다. 하루 20만 명 이상이 유입되는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그리고 종교별 인구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1.4% 감소하여 861만6천 명으로 나타난 반면,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왕래하는 길목인 송내역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가 또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교파가 아니라 침례교회, 그것도 ‘독침’이란 약어로 회자되는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제가 지난 2월 1일 이 사랑침례교회 주일오전 예배 때 설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의 아이콘이 된 오바마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성경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곧 절대진리로 믿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어제가 석가탄신일이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석탄일을 맞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절에 가서 108배를 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부처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는 기독교회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최종권위로 믿는 독립침례교회가 창립되는 것은 매우 환영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매우 진부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까? 특히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거룩한(?) 성경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자칫 세상과의 타협을 암암리에 묵인하는 누룩과 같은 위험한 개념이 아닌가요? 물론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나오고 ‘사랑’은 488회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교회 안에서 거룩함과 사랑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22:34-40; 롬13:8-1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 사랑이기도 합니다(요13:35; 요일3:14).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요될 수 있습니다(고전13:4-7; 벧후1:3-6).   제 좁은 소견으로는 ‘독침’의 약점이 상대적으로 사랑과 구제의 부족이지 않을까 하는데, 이처럼 과감하게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그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쪼록 이 사랑침례교회를 통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서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이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벧전4:8).   감사합니다.    
2009-05-04 13:29:35 | 관리자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인 차한 박사가 이번에 국내 최대 일간지에 비타민 C에 관한 기사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면을 몽땅 차지하는 기사 내용으로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알립니다. 또 근본주의/킹제임스 성경 진영에 이렇게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온전한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에 알리고 싶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들 보느라 밤낮으로 수고하고 주일에 성경 공부 가르치고 헌신하는 형제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올린, 그분의 저서 똥 이야기와 비타민 C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보기 바랍니다.
2009-05-02 16:36:25 | 관리자
목회자 소개: 정 동 수    1959년 인천 출생   1982년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학사)   1984년 캐나다 뉴브런스윅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졸업(석사)   1988년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졸업(박사)   1988-1991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학 기계공학과 교수   1992-현재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2001년 미국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2001년 미국 Bible For Today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가족: 아내(오혜미)와 세 딸(미현, 아현, 현)   저는 제 행위나 인간적인 어떤 자랑거리와 상관없이 오직 전적으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23세의 나이에 유학을 갈 때에는 훌륭한 공학도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인류를 위해 무언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 인류 복지와 번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책들을 통해 종교와 복음의 극명한 차이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 믿음의 문제에서 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전통과 부모의 유산을 따르자니 양심이 저를 괴롭혔고 믿음대로 행하자니 세상과 친구와 친지와 교우들과 등을 져야 하는 괴로움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죽는 날까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순종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바로 믿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부터 ‘침례와 세례’ 그리고 ‘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에 팽배한 ‘칼빈주의(개혁주의)와 미국에서 우세한 세대주의’ 역시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믿으면 침례가 맞고 성경의 문제 구절들을 모두 비교하고 성경의 전달 과정과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킹제임스성경이 맞으며 또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말세의 일들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세대주의가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현실을 살펴보니 내 양심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소수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이단이라는 오명이 뒤따르는 악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부끄럼이 없이 회계보고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심을 하고 어려운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가 이 모든 과정에서 저와 함께 하며 잘 따라주었고 아이들도 복음의 핵심을 이해했고 부모님 역시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바른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작정한 뒤 우선 ‘침례를 다시 받아 뱁티스트’(Ana-Baptist)가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에 다시 와서부터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마음에 큰 부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나는 바른 성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른 교회였습니다. 이 둘을 놓고 생각해 보니 바른 성경이 있어야 바른 교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서 지난 15년 동안 마음의 부담을 떠안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오해와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 기간에는 성경 번역에 대한 부담이 마음에 자리 잡아서 이것을 끝내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 결과 이 일에 미쳐서 지난 15년을 거의 은둔 속에서 살았고 결국 읽을 만한 수준의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완역/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7-8년은 영어와 원어의 번역에 초점을 맞추었고 후반부 7-8년은 성경이 우리말답게 매끄럽게 읽히도록 다듬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어 결국 2001년도에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시작했으나 목사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목회 사역에 미숙하여 결국 2년 뒤에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 문제로 방황하고 마음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경과 책들을 통해 목사의 책무를 어느 정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5월부터 교회 문제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몇 가정과 함께 다시 바른 교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랑침례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자의 ‘영혼의 자유’(Soul liberty)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에게 자기가 믿는 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지옥에 가기로 작정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영혼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것이 바로 자유 의지이기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성경에 따라 자기 양심이 명령하는 대로 살며 믿음을 지켰고 심지어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모두 자유 교회였으나 AD 313년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국가 교회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중세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모든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가 교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우리만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시대 신정 정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종교/국가 연합 체제이며 신약시대에는 이런 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통제 체제하에서는 사람이 만든 신조나 법이 성경과 그리스도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엄청난 독재가 심지어 믿음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천주교회와 또 천주교회에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모두 국가 교회입니다. 이런 체제하에서는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믿을 수 없고 교단이나 교파의 창설자 혹은 최고 회의에서 결정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청교도들이 미국에 갔으나 여전히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만의 국가 교회를 형성하려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천주교, 장로교, 침례교, 루터교 등의 몇몇 교회만을 헌법을 통해 국가 교회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미국의 침례교 선조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사람의 영혼의 자유를 인정하는 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재 ‘종교의 자유’라고 부릅니다. 이 자유가 그렇게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근 1700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국가 교회 시스템에 의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 역사를 통해 저는 ‘자유 교회’(Free church)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모델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자유 교회를 형성하고 성경에 기초한 ‘근본적인 자유 교회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확고히 믿습니다. 사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부분의 이단들과 교리가 강하다는 교회들이 문자적 의미의 국가 교회는 아니지만 실행 면에서 국가 교회 체제를 형성하여 ‘우리만 교회다’라는 모토를 들고 성도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다만 교회들이 성경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보고 늘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데서는 결코 독단적 자만과 우월감과 배타적 독립성이 나오지 않고 자기의 부족함을 보고 고치는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과 주님을 높이고 성경을 따르는 일만 존재합니다.   이런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출발한 사랑침례교회는 성경의 완전함을 믿으며 영혼의 자유를 따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일을 기뻐하는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면 언제라도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제하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 갈급함을 느끼는 그 영혼의 영과 육의 필요를 채워줄 것입니다.   미천한 한 공학도가 성경을 번역하고 목회 사역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바울의 고백대로 정말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이런 번민과 갈등과 육체적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 저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다시 걸을 것입니다. 내 양심의 명령에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이 자기 아이들과 함께 이런 부담과 꿈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울 것입니다.   끝으로 세상 일과 교회 일을 동시에 하려니 대단히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로서 최우선 사명인 말씀의 선포를 위해 많은 시간을 내서 묵상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이 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성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와 격려로 또 좋은 제안으로 제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님의 능력이 제게 임하여 제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제 영과 혼과 육을 돌아서 위로 솟구쳐 나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05-02 16:13:54 | 관리자
Across the bridge   만나기만 하면 빨리 주님께서 오셔야지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하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환자들 돌보느라 불철주야로 뛰고 있지요. 그분의 아내도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만나서 구원받게 하느라 힘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즐겁고 그래서 이런 분들을 볼 때마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물질이 늘어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요?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 시대에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조차도 주님의 재림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살게 되니까 여기가 좋은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강남에는 예수님이 더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고 합니다. 곰곰히 시간을 내서 혼자 걸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를. 고린도전서 2장 6-16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거니와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없게 될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라.7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主)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11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2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다음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 우리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Across The Bridge   I have lived a life of sin, in this world I'm living in I have done forbidden things I shouldn't do I ask a beggar along the way if he could tell me where to stay Where I could find real happiness and love that's true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pain The sun will shine across the river and you'll never be unhappy again [ organ ] Follow the footsteps of the King, till you hear the voices ring They'll be singing out the glory of the Land The river Jordan will be new,and the sound of trumpet you will hear And you'll behold the most precious place never known to man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2009-05-02 15:49:4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