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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6-02 17:46:36 | 관리자
조지 위필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키기로 주님과 약속하고 매일 이것을 점검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글은 특히 목사들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내 자신을 쳐서 낮추는 작업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끝없이 성화의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이런 약속들을 지켜봅시다. 책상에 붙여 놓고 매일 보기 바랍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했는가,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2009-06-01 18:03:15 | 관리자
다음은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대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9-06-01 18:00:54 | 관리자
요즘 목사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일생을 보낸 목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며 목사의 길을 가는 많은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 성도가 적은 한국 교회의 칠거지악이란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잘못된 목사에 대해 지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는 거기서 중간에 있는 한 부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갈구하면서 전체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도 양들에게 바른 꼴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목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타락   영적 지도자로서의 고결한 신앙 인격이 말씀과 함께 외쳐질 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권위가 저절로 드러날 터임에도 “더러운 이를 취하며(벧전5: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전6:5)” “군림(주장)하는 자세(벧전5:3)”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1,2)”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고귀한 직분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혼잡케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마치 포도주에 물을 타서 포도주를 변질시킨다는 의미를 뜻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고 곧 순전함을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서 혼잡이란 뜻은 값싼 물품이나 위조품 등을 교묘한 꾀와 속임수로 진짜처럼 팔러 다니는 엉터리 잡상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해 진리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담보 잡아 사사로운 잇속과 명예를 챙기는 불의한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절망하나 순종의 걸음을 통해서는 소망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음을 성도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외로운 씨름을 하며 그분의 말씀과 대면하며 처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강단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한 고독과의 싸움이 싫어질수록 강대상에서는 분칠한 설교가 나오게 마련이며 사람들의 구미에나 맞추는 백화점 식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 만나기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행6:4)보다 더 선호할 때 타락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는지, 바빠야 할 이유와 순위가 문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강조하는 만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근사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것이나 심방 가서 만나주는 것으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강조하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마음과 물질 모두로부터의 가난과 그 가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겠다는 실천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목사는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격려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부득이한 (벧전5:2) 의무로 변질시켜 버릴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고귀한 의무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먼저 떠오를 때 목사는 타락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영적 타락이 윤리적 타락보다 더 심각하며 영적 책무의 망각이 자신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6-01 17:56:50 | 관리자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6-01 17:47:46 | 관리자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송인규 교수의 한국교회 신앙진단).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6-01 17:44:41 | 관리자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6-01 17:33:21 | 관리자
오늘 아침에는 영혼까지 웃게하라(뉴스마 선교사 지음)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생을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치과 의사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한 대목이 좋아서 적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수많은 반대자에게 비난을 받을 때마나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다른 사람의 말이 내 마음의 화평을 흔들어 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고집을 피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기쁨과 성령님의 내적 평화와 기쁨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서 그리스도인 리더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링컨이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강 속에서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인간 실존의 문제가 다 풀리지는 않습니다.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구출받은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 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모세는 온유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화평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09-05-29 11:33:02 | 관리자
교회에 다니며 (나를 비롯한)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님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하고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기도한다.
2009-05-28 19:46:04 | 관리자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5-28 19:42:41 | 관리자
몸이 아파서 하루에 몇 백 번이나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그러나 진짜 노동자처럼 이와 같이 괴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그렇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비 오는 날이거나 바람 부는 날이거나,눈이 내리거나 번개가 치는 속에서도 망치를 내리치는 대장장이처럼 글을 썼다.   - 프랑스 소설의 거장, 귀스타브 플로베르   세계적인 문호 발자크 역시 자신의 작품생활을 되돌아보면서,"나는 굴이 무너져 갱 속에 갇혀 버린 광부가 목숨을 걸고 곡괭이를 휘두르듯 글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 이야기입니다.한 번은 한 열성 팬이 무대 뒤에 있는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크라이슬러 씨, 당신처럼 연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그러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부인, 전 이미 제 목숨을 내놓았답니다."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자세로 예수님을 따릅니까?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2009-05-25 10:09:03 | 관리자
오십이 되니 인생(life)이 이제 조금 보입니다. 지난 2달 동안 매우 바쁘게 지내다가 요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다가오는 말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것으로 끝인가?   어제는 우리나라에 독거 노인들이 100만명이 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들의 힘겨운 삶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사람답게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나의 숙제입니다.   주문한 책이 오지 않아 서문만 보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Total Truth'로서 총체적 진리라고 번역해야 더 잘 맞습니다.   기독교는 총체적 진리 체계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철학, 문학, 음악, 미술, 교육, 이웃 돕기, 인간답게 사는 것, 환경 보호 등 우리 인간과 관련이 있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아는 성경과 기독교는 총체적인 진리로 서야 하고 마땅히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주제입니다.   서문만 보아도 가슴이 뜁니다.   낸시 피어시의 작품입니다. 미국 아마존 서점에서 기독교인들이 읽어야 할 20권의 책 중에 하나로 마크되어 있습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총체적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의 총 주제와 우리의 삶이 매칭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무나 큰 주제인데 아마도 이런 것이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동일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이 모든 것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즉 총체적 진리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중에 어려운 분들을 먼저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이후에는 밖을 보면 좋겠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한 우리 성도들에게 총체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09-05-18 23:50:12 | 관리자
비가 내리는 오후에 설교를 작성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습니다. 몇 군데서 기도 요청이 왔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따듯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자매님 할머니의 건강과 아빠의 영적 회복을 바라는 자매님 자기라고 하는 틀을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자매님 닥쳐오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초조함을 이기고 싶어 하는 형제님 직장 문제로 애를 쓰는 형제님 남편과의 영적 문제로 갈등하는 자매님 아직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그냥 남편과 함께 교회에 오는 자매님 분노에 젖어서 사는 형제님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실천이 안 되어 고민하는 형제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분들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가 없어서 고민이 되고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돈 많고 학식 있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보다 이렇게 조그만 소망을 가슴에 품고 목사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며 예수님을 만나려고 추구하는 이들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나도 동일한 문제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요, 나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를 비롯한 이런 형제/자매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2009-05-16 13:51:47 | 관리자
현대의 교회들은 좋은 리더들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근본주의 교회들에는 바른 리더십이 매우 필요합니다. 최근에 읽은 '양치기 리더십'은 세상 사람이 기록한 글이지만 양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양들을 이끌 목자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인격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참조하기 바랍니다. 다음은 그 책을 간딘히 요약한 것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세상의 지도자 이상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양치기 리더십 (텍사스 대학 경영학 교수 노이만 박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제너럴 테크놀로지스 맥브라이드 회장의 인생수업 이야기, 케빈 리먼, 윌리엄 펜택 지음, 김영사 출간 ) 위대한 양치기에게 양떼를 이끄는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삶의 일부이다.지도자로 성공하려면 양치기가 양을 대하듯이 직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양들의 상태를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모든 사람을 직원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정기적으로 직원들과 어울리고 직원들을 진심으로 아껴야 한다. “양떼를 이끌 때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네. 흔히 지도자들은 지팡이가 아닌 막대기로 양떼를 이끌다가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곤 하지. 지팡이는 막대기보다 부드러운 도구라네. 양치기는 양을 살짝 찌르거나 툭툭 쳐서 방향을 잡을 때 지팡이를 이용하지. 지팡이는 고압적으로 휘두르는 도구가 아니야. 결국 양들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양치기를 믿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네. 자네가 직원들을 냄새나는 양떼로만 생각한다면 직원들은 결코 자네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야.” 양치기 원칙 1: 양들의 상태를 파악하라.1. 일의 진행 상황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다.2. 한 번에 한 마리씩 양들의 상태를 파악한다.3. 정기적으로 직원들과 어울린다.4.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질문을 던지며 직원들의 개인적인 상황에 계속 관심을 갖는다.---------------------------팀원이 될 사람들의 장점을 파악하는 것이 첫 단계이다.직원들 스스로 열정을 느끼는 분야에 배치한다면 아침마다 쏜살같이 일터로 달려올 것이다.태도가 좋은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들과 협력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양치기 원칙 2: 양들의 됨됨이를 파악하라.1. 어떤 양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양떼를 관리하기가 쉬어질 수도 있고 어려워질 수도 있다.2. 처음부터 건강한 양을 고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3. 양들이 제대로 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양들의 됨됨이를 파악한다.---------------------------지도자의 자리에 있다 보면 부하 직원들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위대한 지도자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를 개인적으로 각인시킴으로써 부하들에게 의미와 소속감을 불어 넣는다.부하직원들은 상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고 있다.“저 사람이 뭘 알고 일을 하는 걸까? 내가 저 사람을 믿어도 되나?”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가치관과 사명감을 끊임없이 부하들에게 전달함으로써 표식을 남긴다.리더가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부하들에게 표식을 남길 수가 없다. 양치기 원칙 3: 양들과 일체감을 갖도록 하라.1. 진정성, 성실성, 인정을 보여 줌으로써 부하직원들의 신뢰를 얻는다.2. 부하직원들에게 원하는 것의 기준을 높이 잡는다.3. 자신의 가치관과 사명감을 끊임없이 알린다.4.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부하직원들에게 가장 잘 맞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려준다.5. 위대한 지도자는 남을 이끄는 일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한다.---------------------------양들은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직원들한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이야기해 줘야 한다.모든 자리가 중요하다는 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두려움, 경쟁의식, 해충, 굶주림이 사라지지 않으면 양들은 편히 쉬지 못한다.양치기 곁에 있는 것만큼 양들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다.문제가 곪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양치기 원칙 4: 목장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라.1. 직원들에게 정보를 알려준다.2. 모든 직원에게 각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불어 넣는다3. 습관적인 선동자를 제거한다.4. 정기적으로 양들을 신선한 풀밭으로 인도한다.5. 항상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들을 안심시킨다.6. 문제가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양을 지팡이로 가볍게 찔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면 양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흔희 지도자들은 지팡이가 아니라 막대기로 양떼를 이끌다가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다. 직원들이 울타리를 넘어서면 직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의를 주는 것도 리더의 책임이다.훌륭한 양치기는 가끔 잊지 않고 부하들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 양치기 원칙 5: 방향을 가리키는 지팡이1. 자신이 가려는 곳이 어딘지 파악하고 앞에 나서서 계속 양들을 움직이게 한다.2. 방향을 가리킬 때 강압 대신 설득을 이용한다.3. 직원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허락하되 울타리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경계선과 굴레를 혼동하면 안 된다.4.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직원들을 구출한다.5. 실패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일깨워 준다.---------------------------지팡이가 부하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의 책임을 상징한다면 회초리는 부하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상징한다.직원들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리더의 의무이다.직원들의 능력이 발전하지 않는 것은 직원들의 성장을 막는 양치기 때문이다. 양치기 원칙 6: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회초리1. 보호: 공격자와 양 사이에 끼어들어서 자신의 양을 위해 싸운다.2. 바로잡기: 기강을 잡는 것을 교훈을 가르쳐 줄 기회로 생각한다.3. 감독: 직원들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물어본다.---------------------------지도자 노릇을 하려면 지도자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양치기의 원칙은 양떼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의 생활방식이다.양치기가 대가를 치르려하지 않는 건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들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는 돈을 위해 양을 돌보지만 바른 리더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돌본다.양치기를 양치기로 만드는 건 지팡이나 회초리가 아니라 바로 마음이다.양들은 때로 아주 멍청하게 굴지만 누구 목소리에 대답해야할지 결정할 때는 신중해진다.양들이 리더를 자기들의 양치기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녀석들한테 리더는 단지 낯선 사람일뿐이다. 양치기 원칙 7: 양치기의 마음을 품어라1. 위대한 지도력은 기교가 아니라 생활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2. 자신과 부하들 중 누가 지도력의 대가를 치를 것인지 매일 결정해야 한다.3. 무엇보다 양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009-05-08 17:21:46 | 관리자
기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목사의 기도만으로는 사역을 완수할 수 없다. 그에게는 배후에서 기도하는 교회의 힘이 있어야 한다. 한 방문객이 스펄전에게 그의 사역의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 교인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지요." 사역자가 이것보다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7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사랑침례교회 성도님,   부족한 목사와 목사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말입니다. 부탁합니다. 매일 시간을 정하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 DSJ 
2009-05-06 23:15:38 | 관리자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계획한 헌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죄인,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종,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심령이 갈급한 예배자로 말이다. 지성소에서는 우리 모두 아마추어이다. 그곳에는 전문가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신임장에 감명받지 않으신다.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7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3:10:23 | 관리자
크리스천의 사역이 연기(공연, play)가 될 때에는 교회가 공연장으로 변하고 교인들은 관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예배는 연회가 되어버리고 사람의 환호와 갈채가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는 자는 항상 성소에 거한다. 그럴 경우, 비록 구원받지 못한 방문객일지라도 그의 면전에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고전14:25).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4:41 | 관리자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헌신적인 사역자는 자기가 스스로 교인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피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진실되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국 목사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때에는 목사와 교회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자신의 업적으로 인해 칭송받을 때 가장 위험하다.   "건강한 사역자입니까?"의 6장에서 (위어스비 지음, 도서출판 디모데)  
2009-05-06 22:40:18 | 관리자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라디오 고전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강사가 논어에 나오는 군자삼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1. 첫 번째 즐거움: 학습성 군자는 늘 배우기를 좋아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2. 두 번째 즐거움: 동지성 군자에게는 먼데 있든 가까운데 있든 친구들이 찾아와서 함께 지낸다. 3. 세 번째 즐거움: 독립성  군자는 남에게서 칭찬을 듣든지 비난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펴나간다.   이것을 들으면서 나는 독립침례교회가 바로 현 시대 크리스천 군자들의 모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학습성, 동지성, 독립성이 있고 사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가장 큰 특성입니다.   다음은 군자에 대한 정의입니다. '논어'에 의하면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고, 가까이 하면 부드러우며, 그 말을 들으면 엄숙한' 사람이 바로 군자이다. 우리는 이 단문 한마디의 정의를 충실히 해석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곧 군자인지를 모자람없이 가늠해볼 수 있다. 논어 자장편의 이 명언은 세 명제를 연결한 형태이므로, 낱낱의 단문으로 다시 읽어 보자.   첫째, 군자는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다. 둘째, 군자는 가까이 하면 부드럽다. 셋째, 군자의 말은 들으면 엄숙하다.   군자는 왜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한가. '군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논어)' 그러므로 군자는 하늘의 섭리와 대인의 모범,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한 즉 어찌 그의 언행이 씩씩하지 않을 것인가. 불의에 굽힘이 없고 현실적 이득에 흔들림이 없을 터이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저절로 씩씩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후에 이름이 남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논어)' 군자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 형상일 것인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상식인 셈이다.   또 어째서 군자는 가까이하면 부드러운가. 논어에 따르면 '군자의 마음은 늘 평정하면서도 넓고' '남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게 하되, 남의 악한 것을 선도하여 편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총명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재주 빛남을 뚜렷이 표시내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니' 군자가 어찌 부드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군자의 말은 왜 들으면 엄숙한가. '군자는 교제가 끊어져도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그 이름을 깨끗이 한다'(사마천 '사기')라고 했으니, 절교의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는 사람의 말이 엄숙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군자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듯하다.   ⊙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만 생각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 군자는 어느 경우나 태연자약한데 소인은 언제나 근심걱정으로 지낸다.⊙ 군자는 태연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고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 군자는 작은 일은 알지 못해도 큰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맡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은 알 수 있다.⊙ 군자는 쉬운 것에 처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일을 행하며 요행을 바란다.⊙ 군자를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쉽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남의 악함을 이루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괴롭게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의(義)로 바탕을 삼고 예로 행동하며 겸손함으로 나오고 믿음으로 이룬다. 독립침례교회 안에 크리스천 믿음으로 충만한 군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2009-05-06 14:09:48 | 관리자
하나 됨과 획일화   성경에는 Unity(하나 됨 혹은 하나 되게 함)라는 말은 있어도 Uniformity(획일화)는 없습니다. 영어로는 둘 다 비슷하지만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성령님은 Unity를 주시고 성도들이 Unity를 추구하게 하지만 마귀는 Uniformity를 줍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르지만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 Unity를 주시므로 모두가 달라도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생깁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여 서로 자연스레 존중하고 사랑을 하며 권위에 순복하고 지도자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대형 교회들과 이단들 그리고 극단적인 독립 교회들에서는 성도들에게 Uniformity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전횡과 수직적인 복종 관계 확립 등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성도를 징계하고 출회시키는 일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은 Unity와 Uniformity 중 어느 것을 원하시는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3-6절을 보기 바랍니다.   3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5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6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성령님은 Unity를 주십니다. Unity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반대로 획일화를 원하며 이를 위해 강압적으로 성도를 복종시킵니다. Uniformity가 대세인 교회에서 고생하는 성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벗겨 주려고 오셨는데 여전히 거기에 매여 있다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Unity를 추구합니까? 아니면 Uniformity를 추구합니까?
2009-05-06 13:54:5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