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걸 안다면 옳고,맞는 것만 따르면 되기 때문에 갈등이 없어 편안하다는 득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우리 몸 면역체계 하나만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창조주가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도 생각분별 잘 해야 덜 힘들텐데 점점더 생각의 부재가 심해지는 세상시스템에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많이 불쌍해요..
2023-07-10 16:02:26 | 목영주
안녕하세요?
7월1주차 성경읽기 퀴즈 정답을 올립니다.
샬롬~
본문 : 욥기22~42장
1. 괄호 채우기(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 )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 )같이 나오리라.길, 금
2. 땅을 허공에 매다시고(욥26:7)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뜻
3. 살아있는 사람이 코로 내쉬는 생명의 숨을 욥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27장)[하나님]의 영(욥27:3)
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주신 지혜와 명철은 무엇인가?(28장)[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욥28:28).
5. 엘리후가 욥에게 진노한 이유는 무엇인가?(32장)[하나님]보다 도리어 자기를 의롭다하였기 때문에(욥32:2)
6.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진노한 이유는 무엇인가?(32장)정확한 근거도 없이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에(욥32:3)
7. [하나님]께서 만드신 조류 중에서 지혜와 명철이 없는 대표적인 새는 무엇인가?(39장)타조(욥39:14~17)
8. 꼬리가 백향목 같은 [하나님]의 창조물은 무엇인가?(40장)베헤못(욥40:15)
9. 두려움이 없는 존재로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된 사탄마귀를 상징하는 창조물은 무엇인가?(41장)리워야단(욥41:1)
10. [하나님]을 만난 욥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42장)회개(욥42:6)
2023-07-10 10:33:01 | 관리자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해 졌음에도 풍요를 누리지 못한 가나한 삶'이란 말에 경종을 울리네요^^
이 땅에서의 염려와 복잡한 심정으로 영적인 기쁨을 누리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영과 육으로 풍성해지시는 자매 모임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3-07-10 08:46:54 | 김세라
-빠져 나올수 없는 심연속으로-
먼저 형제 자매님들 가정이 늘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혹시 여러분들은 '철학'하면 어떤게 떠오르시나요?더 없이 화창하고 푸근한 봄날 백주 대낮에 공원에서 다른 이들이 각자 거닐때 잘 차려입고 안경낀 신사가 곰방대를 물고 세상 가장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괴고 벤치에 앉아 고뇌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아니면 후줄근하게 보이는 청년이 야심한 밤 골방에 촛점없는 눈으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을 응시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떠오르시나요?이처럼 '철학'하면 우리가 그 정의를 명확히 몰라도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그러면 '철학'이란 대체 뭘까?20세기 위대한 지성으로 손꼽히는 버트런드 러셀이 '철학'의 정의에 대해 말한걸 한번 들어볼만 합니다.
Q:철학의 정의란?A:아직은 엄밀한 지식으로 정립되기 불가능한 문제들에 대한 추측들.Q:철학과 과학의 차이점 이란?A: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문제 들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지속적으로 이행해 가고 있음.Q:철학의 유용한 점은?A:첫째는 과학적 지식이 아직 다룰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활발한 추측을 지속하는 것이다.과학적 지식은 인류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만 할 문제들 중 일부분만을 다룸.오늘날 과학이 답변을 하지 못하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아주 많은 문제들이 있음.세계에 대한 상상의 영역을 가설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철학의 용도 중 하나인것.둘 째,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여겼던 문제들과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을 보여준다.우리가 앎에 이를 수도 있는 문제들에 대한 사유를 지속하게 해주며 앎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점에서 앎이 아닌 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것이다.Q.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의 시녀 같은 것이 되는 건가?A:철학은 과학의 일부이나 시녀는 아니다.과학이 다룰 수 없는 수 많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임.가치와 관련된 모든 물음들을 예로 들면, 과학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려주지는 못할 것 같음.Q:철학의 미래는?A:과학의 발전은 철학의 중요성을 불가피하게 약화시킬거라 생각 됨.Q:철학의 가치를 요약한다면?A:첫째, 현재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아주 광범위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는 점을 자각하도록 함.둘째, 사람들을 좀 더 지적으로 겸허하게 해준다는 것....저는 버트런드 러셀 만큼 철학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정의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또 그는 "언어가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꽃이 되지만, 철학자의 손에 들어가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가 되더라""사람들은 세상 무엇보다 생각을 두려워한다. 파멸보다, 심지어 죽음보다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이며 파괴적이고 잔인하다. 생각은 특권과 안정된제도, 익숙한 관습을 봐주지 않는다. 생각은 아무 두려움 없이 지옥을 깊숙이 살핀다. 생각은 위대하고 신속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빛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광이다""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매사를 의심하는데 바보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다는 것이다.""우리들은 모두 세상을 자신의 선입관에 맞춰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상반된 관점은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죠. "와 같은 생각하기를 기피하고 거부하는 불신자들과 sunday 크리스천들에게 해주고 싶은 주옥 같은말을 하기도 했습니다.물론 러셀은 대표적인 반기독교적인 인물입니다.그러면 우리는 버트런드 러셀의 인터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추론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철학 속에 어떤 '의도'가 내재 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혹은 어떤 '의도'로 철학을 전개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목적지와 활용 방법이 결정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저는 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되었다면 예외없이 그 누구라도 성경을 읽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철학자의 본분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맑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것을 넘어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습니다.과학 낙관주의가 붕괴된 세계 양차대전 후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러셀에게 편지로 문의 하였다고 합니다.이제까지의 전통적인 지침들(추측컨대 성경에서 말하는)을 올바른 행위로 받아들이길 그만두고 어떻게 스스로 행동해야 할지 이제는 완전히 모르겠다고 하는 내용들로 말이죠.그래서 러셀은 전적인 확신을 적대시하며 그가 추구하는 철학의 용도와 유용성은 확신이라는 것이 자리하는 것을 엄금하며완전환 확실성 없이 활력을 갖고 행위하도록 사람들을 북돋우는 것(도약)이라고 말이죠.이것은 바로 인본주의의 출발점인 '이성에서의 도피'와 '비(非)이성으로의 도약'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러셀을 비롯한 지성인들,사상가들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한 시대(modern times)가 저물고 또다시 이들의 헛된 철학(과학 낙관주의)이 처참히 실패했을때 우리는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으로다시 그들을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으나 하나님께선 자신의 전체 계획을 위한 직선적인 세계 경영통치를 그닥 늦추고 싶진 않으신것 같습니다.사탄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자신들이 승리했으며 지금같이 그들의 시대가 영원할거라고 착각할 동안우리는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끝나가고 있고 곧 심판이 닥치리란걸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도덕을 상실한 지금의 시대를 우리는 포스트 모던(post modern) 또는 포스트 포스트 모던(post post modern)시대라고들 합니다.그리고 현 시대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 철학은 실존주의(existentialism)입니다.대중문화와 사회 현상등을 통해 누구라도 인지 하고 있는 사실이지요.다음번엔 현재 만연한 포스트 모더니즘과 실존주의에 대해 많이 부족하지만 간략히 적어 보고자 합니다.
-벧후3:8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 벧후3:9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2023-07-09 21:09:05 | 박세원
2023년 7월 9일 (주일 오전)
https://youtube.com/live/nb9u6tns2lY?feature=share
2023-07-09 11:40:16 | 관리자
2023년 7월 9일 (주일 오전)
https://youtube.com/live/nb9u6tns2lY?feature=share
2023-07-09 11:40:16 | 관리자
2023년 7월 7일 (금요일 저녁)
https://youtube.com/live/sze2jFbrFqk
2023-07-08 12:35:02 | 관리자
글만 읽어도 부쩍 성화된 기분이에요. 잘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전,성장이란 단어를 품기 위해 요즘 두 딸과 노력중이라 그런지 성령충만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오네요.. 부어주시는 평강의 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세상능력도 키워 예수님을 드러낸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소년들이라도 기진하고 피곤하며 청년들도 완전히 쓰러질 것이나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서 40장 30,31절 말씀입니다.
2023-07-08 12:15:09 | 목영주
빌3: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또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이 예수님으로 인해 바뀌어야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어요.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고요.
맑은 정신을 가지고 혼란한 이 시기를 바르게 걸어가야지요.
우리 모두 힘을 내자고요.
2023-07-08 11:04:16 | 이수영
2023년 7월 6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한 믿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교제는 주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인 것 같아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칭의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나 선함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공로나 선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왔도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회심한 그 순간부터,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주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대면 할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죄 없는 완전함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범죄 할 때, 아버지께 우리를 변호해주실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는 비록 형편없는 기도를 드릴지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기도해주시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아버지, 우리는 날이 갈수록 우리의 죄책을 더 알게 되고
점점 더 우리의 죄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더욱 더
신실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주님
주께서 우리를 향해 하신 대속 사역은
우리가 우리의 섬김을 통해 주를 높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섬김을 결코 공로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을 보완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잘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섬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토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리스도만을 높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 10장 말씀을 묵상하라.
묵상은 적극적으로 성경을 되새기는 것이다. 시편에서 ‘묵상’대신 쓰인 표현으로는 ‘생각하다’와 ‘깊이 되새기다’를 들 수 있다. 묵상한다는 말은 스스로 진리에 관해 묻는 걸 가리킨다.
“지금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 걸까? 진리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거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진심으로 믿고 단단히 붙잡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성경 어느 본문을 묵상한다는 말에는 미리 치열한 연구와 해석을 거쳐 그 뜻을 파악한 상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슨 얘긴지도 모르는 말씀을 되새기거나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이끌어 간다.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성경 전체를 볼 때 본문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토대로 두고 성경을 읽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거기에 마음이 사로잡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정이나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아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분석과 성찰을 부추기고 그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영적으로 성경을 ‘소화’하는 작업이다.
삶에 적용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상태와 앞길을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어떻게 이끄는지 숙고하게 한다. 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 소망을 품게 하며, 스스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기억하게 한다.
성경의 진리들을 가슴에 단단히 품고 새겨야 한다.
초월 명상의 한 갈래로 요즘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만트라명상’은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적인 묵상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추상화하면 안 된다. 삶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여기면 안 된다.
성경 진리의 가르침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행동과다와 주의력결핍장애에 빠진 현대사회는 속도가 떨어지는 성찰과 묵상을 실종된 기술쯤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일의 앞뒤를 골똘히 생각하여 깊은 확신에 이르는 성품을 갖는다. 어려운 개념을 쉽고 간단한 말로 설명할 줄 알며, 무슨 일을 하든 이면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사를 건성으로 살피며,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고르고 선택하며 살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피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묵상하는 이들은 압력을 받아 내고 견딜 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쭉정이처럼 남들이 몰려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가식적이고, 공허하며, 진전성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데 실패하여 원래 모습과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희귀한 일을 두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믿음의 진리가 마음과 성품을 사로잡고 또 빚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이것저것 떼고 나면 몇 푼 안 될 것 같아 오래도록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와 달리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가 막혀 어쩔 줄 모를 게 뻔하다. 실제로는 갑부였는데 쪼들리며 살았다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만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쁜 습관에 시달리고, 걱정, 따분함, 낙담, 분노 등에 휩쓸리기 일쑤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맞서고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문제와 이슈들이 산더미 같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해졌으면서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사도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의 ‘화학처리’,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감동’을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진리에 동의하고 입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생활방식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성령님이 마음을 민감하게 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리의 빛에 노출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성령님은 현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쁨에 겨워 두려움을 잊고 과감하게 행동하게 하신다. 그러면 인생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복음 속에서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영적인 완고함, 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해야 한다. 얼룩덜룩 오점이 많은 선행 기록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 허다한 죄와 허물을 다 덮는 게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선택은 저마다의 몫이다. 두려움과 야심, 탐욕과 욕정, 중독과 내면의 공허감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배워야 한다.
2023-07-08 10:44:26 | 이은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뵐 날을 고대하는 마음은 최대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 복음전하고 사랑,희생이란 단어를 저절로 품게 되는 것 같아요..육신의 연약함(ex. 고정관념,급한성격)은 제가 영안실에 누워있다는 상상으로 극복-제일 빠르게 감사함으로 전환시키는 저만의 방법이에요~^^
2023-07-07 13:46:02 | 목영주
Begin with the End in Mind
(끝을 보고 시작하라)
Begin with the End in Mind는 ‘끝을 보고 시작하라’는 뜻인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원제목 : The 7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의 두 번째 습관이다. 여기서 End는 어떤 일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인생의 끝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래 내용을 읽으면서 ‘당신’의 자리에 ‘자기의 이름(이규환)’을 넣어 읽어 보자.
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가고 있는 자기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해 보라. 장례식이 거행되는 장례식장으로 차를 몰고 가서 주차하는 장면을 그려 보라. 당신은 그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줄지어 선 화환을 보고 은은하게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를 듣게 된다. 당신은 걸어가면서 친구들과 가족들을 마주치게 된다. 고인을 상실한 슬픔과 생전에 알고 지냈다는 자랑스러운 감정이 조문객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식장 앞으로 가서 관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란다. 그 관 속의 주인이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뒤에 치르게 될 당신의 장례식이다. 또 여기에 온 모든 사람들은 당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마지막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당신이 자리를 잡고 장례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들고 있는 식순을 들여다본다. 조사를 읽을 사람이 4명이다. 첫 번째로 읽을 사람은 가족과 친인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로 조사를 읽을 사람은 당신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친구는 당신이 한 인간으로서 어떠했는가를 말할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당신 직장이나 또는 같은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 번째 사람은 당신이 봉사하기 위해 몸 담았던 교회나 지역사회 단체에서 온 사람이다.
자, 이제부터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은 이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는가? 이들이 조사에서 당신을 어떤 종류의 남편, 아내, 아버지 혹은 어머니였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가? 어떤 종류의 아들, 딸 혹은 사촌이었다고 평해 주기를 바라는가? 또 어떤 종류의 친구였다고 회상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아가 어떤 종류의 직장동료였다고 회상해 주기를 바라는가?
당신은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어떤 성품을 보았기를 바라는가?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어떤 종류의 공헌이나 업적을 그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가? 이제 식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당신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과 도움을 주고 싶었는가?
약 20년 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꺼내 든 이유가 있다. 위 내용이 심판석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큰 흰 왕좌 심판석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 그때(end) 나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물어보실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다 그리스도 심판석 앞에 서리라. 그런즉 이처럼 우리 각 사람이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로마서 14장 10b절, 12절)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는데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해 물러가서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즉 생명책이 펼쳐져 있더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더라.(요한계시록 20장 11-12절)
최후의 순간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간직하면 어느 날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기준을 위반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전체적인 삶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된다. 인생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항상 유념하여 매일매일 실천으로 옮긴다면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크게 달라질 것이다.
2023-07-07 13:11:27 | 이규환
칭의는 ‘정당함을 입증받는 것’이 아니다(표준 킹제임스역의 심각한 교리 문제)
안녕하세요?
한 분이 표준역의 심각한 교리 문제를 알려주셔서 몇 자 적습니다.
표준 킹제임스 성경은 justify, justified 등을 ‘정당함을 입증하다’, ‘정당함을 입증받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5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refore being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표준: 그러므로 믿음으로 정당함을 입증받은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롬5:1).
표준역에 따르면 우리는 믿음으로 정당함을 입증받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입증하다’는 ‘어떤 증거 따위를 내세워 증명하다.’를 뜻합니다.
또 ‘정당하다’는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표준역처럼 justify를 ‘정당함을 입증하다’로 번역하면 ‘죄인이 원래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거를 내세워 증명하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러므로 표준역 식의 justify는 죄인인 사람이 원래 정당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칭의 사역을 완전히 뒤집는 것, 즉 정반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칭의는 죄가 있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신학적 정의이며 전 세계 영어권 사람들의 표준 사전인 옥스퍼드 사전 역시 동일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원래 죄가 없다고 그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증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래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칭의입니다.
칭의(옥스퍼드 사전):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칭의란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인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장점(선행 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통해 사람을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이것은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
Justification(옥스퍼드 사전),
4.4 Theol. The action whereby man is justified, or freed from the penalty of sin, and accounted or made righteous by God; the fact or condition of being so justified. Protestant theologians regard justification as an act of grace in which God accounts man righteous, not owing to any merit of his own, but through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as apprehended and received by faith.
라이프성경사전의 칭의[稱義, justification]
‘의롭다고 간주하다’는 뜻. 자연인은 누구든지 죄인이므로(욥 9:2; 롬 3:10)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롬 3:10, 23; 6:23).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게 하셨고(롬 3:25) 또 그 피 공로를 믿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죄 없다고 선언하셨다(롬 3:24-26; 4:3). 이것이 곧 칭의다. 칭의에는 예수로부터 전가된 의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소극적 요소가 있고(사 44:22; 롬 5:21; 히 10:14), 또한 하나님의 자녀되고 영생하는 적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요 1:12-13; 롬 8:15-16; 벧전 1:4). → ‘의’를 보라.
칭의의 교리는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칭의를 사람이 원래 정당한 존재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입증받은 것이라고 하니 이런 주장은 어느 면에서 심각한 이단 교리입니다.
대체 이런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 표준역 번역자들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샬롬
패스터
2023-07-06 15:40:04 | 관리자
여자들의 연설(?), 돕는 배필(?), 학관(?)이라 (표준킹제임스역의 문제)
1. 여자들의 연설(?)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표준역의 이상한 부분을 알려주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서 적습니다.
고전14:34는 다음과 같습니다.
Let your women keep silence in the churches: for it is not permitted unto them to speak; but they are commanded to be under obedience, as also saith the law.
교회들 안에서 너희의 여자들을 잠잠하게 하라. 이는 그들에게 연설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율법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만 그들은 순종 아래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느니라
그분이 말하는 요지는 지금까지 개역성경, 흡정역 성경 등이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잘못 번역해서 교회에서 여자들이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흠정역: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에서 잠잠히 있을지니 이는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
개역: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표준역을 번역한 사람들은 여자들의 이 답답함을 해결해 주려고 34절의 speak라는 말을 연설하다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어 사전을 보면 speak가 speech 즉 연설하다는 뜻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성경 번역이 이 정도 되면 이것은 궤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타 언어(방언)를 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이것은 ‘speak in tongues’라고 말합니다.
27-28을 보면 타 언어는 남자들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27 만일 어떤 남자가 알지 못하는 타 언어로 말하거든(If any man speak in an unknown tongue, )두 남자나 많아야 세 남자가 순서대로 하고 한 남자는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남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히 있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두 남자(two), 세 남자(three) 등을 그리스어로 가서 보면 모두 남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여자들이 타 언어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매님들도 얼마든지 말(say)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문맥은 남자들 위에(혹은 앞에) 서서 말로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어떤 특정 사례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면 성경의 교리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기의 핵심은 여자들이 연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타 언어를 말하면서 남자들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딤전2:11-12가 이를 잘 알려 줍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
그래서 미국침레교회에는 여자 목사가 없습니다.
speak를 연설하다로 바꾼다면 성경에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말이 매우 많이 나오는데 이것들도 모두 ‘연설하여 이르시되’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의 말씀하다는 모두 speak이니까요.
창8:1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연설하여?) 이르시되
And God spake unto Noah, saying,
2. 합당한 조력자인가, 돕는 배필인가?
창세기 2장 18절과 20절에는 help meet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And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n help meet for him.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help meet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영어를 자세히 보면 이것은 helpmeet, helpmate처럼 한 단어가 아니라 help meet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표준역을 번역한 사람들은 help meet을 helpmate로 설명하고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고 그것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들만의 억지입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으로 가서 helpmeet을 찾으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helpmeet(ˈhɛlpmiːt)
이것은 창2:18, 20에 나오는 두 단어 용어인 ‘help meet’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뜻은 ‘그를 위해 합당한 도움을 주는 자’로 번역되고 19세기경에 가서야 helpmeet이라는 한 단어로 굳어졌다.
A compound absurdly formed by taking the two words help meet in Gen. ii. 18, 20 (‘an help meet for him’, i.e. a help (help n. 2) suitable for him) as one word. Already in the 17th c. the Scripture phrase is found with the two words improperly hyphened; which led the way to the use of help-meet, helpmeet, without ‘for him’. But its recognition as a ‘word’ is chiefly of the 19th c.: it is unknown to Johnson, Todd, Richardson, and to Webster 1832. In the 17th c. they used more grammatically meet help, meet-help: cf. sweet heart, sweetheart.
뜻: 적합한, 합당한 조력자, 대개 아내나 남편에게 적용됨
A fitting or suitable helper; a helpmate: usually applied to a wife or husband.
용례: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1382년의 위클리리프 성경, 1535년의 카버데일 성경, 1611 킹제임스 성경에 용례가 있다.
[1382 Wyclif Gen. ii. 18 Make we to hym help like hym. [1388 an help lijk to hym silf]. Ibid. 20 an helper like hym. 1535 Coverd. ibid. an helpe, to beare him company. 1611 Bible ibid. I will make him an helpe meet for him (marg. Hebr. as before him). 1885 (R.V.) an help meet for (or answering to) him.]
이런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개역 성경이나 NIV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한편 한글 킹제임스는 ‘합당한’을 빼고 돕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한킹: 또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 하시며
심지어 카톨릭 성경이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바르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주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카톨릭: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내 생각을 버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거짓말을 피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3. 학관이 무엇인가?
대하 34장 22절에는 college라는 말이 나옵니다.
And Hilkiah, and they that the king had appointed, went to Huldah the prophetess, the wife of Shallum the son of Tikvath, the son of Hasrah, keeper of the wardrobe; (now she dwelt in Jerusalem in the college:) and they spake to her to that effect.
표준역은 college를 학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힐키야와, 왕이 임명한 자들이 여예언자 훌다에게로 갔는데, 그녀는 샬룸의 아내로, 샬룸은 의례복의 관리인이자 하스라의 자손이요, 틱왓의 아들이었더라. (이때 그녀가 예루살렘에 있는 학관 안에서 기거하였더라.)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요지로 그녀에게 말하였더라.
학관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표준국어대사전에 가서 학관이 무엇인지 보니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학관(學館): ‘학교’를 달리 이르는 말.
그러니까 표준역에 따르면 훌다는 학교에 기거한 셈이 됩니다.
이것은 college를 지금 식으로 대학교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가서 college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섬김을 위해 함께 모여 사는 성직자들의 공동체
3.3 A community or corporation of clergy living together on a foundation for religious service, etc. Now chiefly Hist.
영한사전에서 college를 보면 ⑧ 집합, 떼가 있습니다. ┈• a college of bees 벌떼.
이 구절에 나오는 college는 예복을 관리하는 성직을 맡은 자들이 거하는 공동체 혹은 구역을 뜻합니다. college는 결코 학교가 아닙니다.
흠정역: 힐기야와 또 왕이 지정한 자들이 여대언자 훌다에게 갔는데 그녀는 하스라의 손자이자 디그바의 아들로서 예복을 관리하는 자인 살룸의 아내였으며 (당시 예루살렘에서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구역에 거하였더라.) 그들이 그녀에게 그런 취지로 말하매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대학을 말할 때의 college도 공부하려는 같은 목적으로 모인 집합체를 말합니다. 학교가 아닙니다.
college of cardinals, 추기경들의 모임(추기경 대학이 아니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17세기 영어 그대로 번역하려고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영어 옥스퍼드 사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 현대 영한사전을 가지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오역을 무마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샬롬
패스터
2023-07-06 15:39:06 | 관리자
무덤인가, 음부(陰府)인가? 표준킹제임스역의 문제
표준킹제임스역이라는 불리는 번역본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무덤(grave)으로 표기된 단어들 가운데 상당수를 ‘성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인 음부(陰府)라는 불교 용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참고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grave는 단수로 67회, 복수로 21회, 총 88회 나옵니다. 사실 grave라는 단어는 중학교 아이들도 무덤으로 알고 있는 쉬운 말입니다.
일단 음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음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음부(陰府)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 저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저승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승이 이생[此生]에 어원을 두고 있듯이 저승은 차생[彼生]에서 유래하였다. 저승은 후생(後生) · 타계(他界) · 명부(冥府) · 음부(陰府) · 명도(冥途) · 명토(冥土) · 황천(黃泉) · 유계(幽界) · 유명(幽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가운데 명부와 음부는 이승의 관부(官府, 정부나 관철)와 같은 개념을 저승에 상정한 것이다. 저승에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관념은 도교와 불교의 저승관이 한국에 도입된 이래 통용된 것이고, 극락과 지옥은 저승의 하위개념이 된다.
종교마다 나름의 저승관을 갖고 있다. 한국종교는 다종교 공존의 특성을 지닌다. 여러 종교가 동시에 함께 사회에 존재하면서 신앙되기에 한국에는 여러 종류의 저승이 공존하는 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승
즉 우리말에서 음부는 죽은 뒤에 모든 사람의 혼이 가서 사는 것으로 알려진 불교의 저승을 말합니다.
다음 표에서 보듯이 음부는 개역성경(개정), 카톨릭 성경 등에 주로 사용된 단어인데 표준역 역시 이런 성경들과 궤를 같이 하며 음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성경도 표준역과 거의 동일하게 30여 차례나 음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글 킹제임스 창37:35: 그러자 그의 모든 아들들과 그의 모든 딸들이 일어나서 그를 위로하나 그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내 아들을 애도하며 음부로 내려가리라." 하며 그의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왜 grave를 무덤으로 하지 않고 이렇게 음부로 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카톨릭 교회는 사후 세계(공간)를 천국, 지옥, 연옥의 셋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과 함께, 특히 영어가 만국의 공용어로 발전하며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면서 사후 세계는 유대인들의 성경 개념대로 천국과 지옥, 단 두 곳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 두 개의 장소 말고 죽은 사람의 혼이 가는 데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후 세계입니다.
개역성경의 음부는 샤머니즘(불교)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후 세계를 셋으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42, 44장에는 야곱과 그의 아들 베냐민에 대한 기사가 있고 야곱이 베냐민이 죽을까 봐 염려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42장 3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if mischief befall him by the way in the which ye go, then shall ye bring down my gray hairs with sorrow to the grave.
표준: 만일 너희가 가는 도중에 그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면 그때 너희는 나의 백발들을 슬픔으로 무덤에 끌고 내려가리라 .
표준역은 여기서 grave를 무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4장 29절에는 동일한 내용을 두고 grave를 음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And if ye take this also from me, and mischief befall him, ye shall bring down my gray hairs with sorrow to the grave.
표준: 그런데 만일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빼앗고 그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면 너희는 나의 백발들을 슬픔과 함께 음부까지 데리고 내려가게 하리라.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표준 킹제임스 번역자들은 grave가 무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창세기 42장 38절에서만 이것을 무덤으로 번역하고 다른 데서는 음부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니면 부실한 번역으로 인해 같은 단어를 통일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야곱이 의인이며 분명히 구원받은 성도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표준역에 따르면 의인인 야곱은 음부로 갑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 31편 17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Let me not be ashamed, O LORD; for I have called upon thee: let the wicked be ashamed, and let them be silent in the grave.
표준: 오, 주여, 제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이는 제가 당신을 불렀기 때문이니이다. 사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들이 음부 가운데 잠잠히 있게 하소서.
표준역에 따르면 여기에서 다윗은 구원받지 못한 사악한 자들이 음부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의인과 악인 즉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동시에 거하는, 음부라는 공간이 있단 말입니까? 이런 데는 성경에 없습니다.
특히 표준역 시편 31편 17절을 그대로 읽으면 천주교의 연옥 교리가 되지 않습니까?
표준: 오, 주여, 제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이는 제가 당신을 불렀기 때문이니이다. 사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들이 음부 가운데 잠잠히 있게 하소서.
한글 킹제임스: 오 주여, 나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불렀나이다. 악한 자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카톨릭: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악인들이나 수치를 당하여 말없이 저승으로 사라지게 하소서.
결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gave를 다 정직하게 무덤으로 통일해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성경 내장 사전(Concordance)이 작동을 하면서 무덤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라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같은 단어 grave를 무덤과 음부로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나누면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해집니다. 이것은 특별히 사후 세계 같이 교리적으로 중요한 단어들에 대해 번역자가 일관성 있게 지켜야 하는 번역의 원칙입니다.
물론 무덤은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이지만 은유로는 사망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grave를 그대로 무덤으로 번역하고 독자들이 앞뒤 문맥을 통해 스스로 이런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3-07-06 15:37:47 | 관리자
2023년 7월 2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xWRedN4JlNs
2023-07-06 14:54:43 | 관리자
2023년 7월 2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esR4A1Wuvss
2023-07-06 14:48:25 | 관리자
<비둘기, 나귀, 개미 등은 여자이고 등잔대, 언약궤, 까마귀 등은 남자인가? 표준역의 문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것도 자유이고 읽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번역을 하면 모든 사람에게 킹제임스 성경 자체가 우스갯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납득할 만 한 수준의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말로 된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종의 서비스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게 번역하고 이것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니 다른 번역은 틀리고 자기들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대다수 성경 신자들을 조롱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서문에서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겼습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이처럼 번역은 글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통해 글에 생명력을 넣으려면 문맥에 따라 단어들의 뜻을 잘 고려해서 합당하고 적절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이번에 표준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이 나왔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이 너무나 비상식적인 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은 한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비둘기, 나귀, 개미 등은 여자이고 등잔대, 언약궤, 까마귀, 돌출 단 등은 남자인가? 표준역의 문제>
창세기 8장에는 노아가 방주 밖으로 비둘기를 내보내는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표준역은 비둘기를 그 여자 즉 그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준역: 이윽고 저녁 때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더라. 그리고 보라, 그녀의 입안에는 뜯겨진 올리브 잎사귀 하나가 있더라(창8:11).
And the dove came in to him in the evening; and, lo, in her mouth was an olive leaf pluckt off: so Noah knew that the waters were abated from off the earth.
표준역은 이 비둘기가 암컷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그녀의 입안에는’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표준역만이 보여 주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에 대해 지적을 하면 이것이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표준역은 이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민수기 19장 25절에는 붉은 암송아지로 정결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표준역은 암송아지를 그 여자(그녀)로 번역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일러 그 위에 결코 멍에를 메지 아니히였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그들이 너에게 데려오게 하라.
3 그리하면 너희는 제사장 엘르아잘에게 그녀를 주어 그가 그녀를 진영 밖으로 데려가게 하고, 한 명이 그의 얼굴 앞에서 그녀를 도살하게 할지니라.
4 그러고 나서 제사장 엘르아잘은 그의 손가락으로 그녀의 피를 취하고, 회중의 앞을 향하여 똑바로 그녀의 피를 일곱 번 뿌릴지니라.
5 그런 다음에 한 명이 그 암송아지를 그의 목전에서 태울지니, 그는 그녀의 가죽과 그녀의 고기와 그녀의 피를 그녀의 똥과 함께 태울지니라.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의 나귀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표준역은 나귀를 그 여자(그녀)로 번역하였습니다.
25 그런즉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자 그녀가 자신을 벽에 밀어붙여 발라암의 발을 벽에 맞대어 뭉갰더라 . 이에 그가 그녀를 다시 쳤더라.
27 그런즉 그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자 그녀가 발라암 아래에서 엎드렸더라 . 이에 발라암의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그가 그 나귀를 한 지팡이로 쳤더라 .
과연 아이들과 함께 이런 성경으로 같이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요?
성경 번역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작업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이 한글로 읽어서 이해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내용이라야 합니다.
비둘기, 나귀, 암송아지 등을 다 그 여자(그녀)로 번역하고 이것만이 옳고 ‘그것’으로 번역하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일입니다.
다음은 등잔대 등을 그 남자(그)로 번역한 사례입니다.
출애굽기 25장 31절을 보면 표준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31 다음으로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 하나를 만들지니라. 그 등잔대는 두들겨 펴진 작업물로 만들어져야 하리라. 그의 대와 그의 가지들과 그의 대접들과 그의 꽃받침들과 그의 꽃들을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게 할지니라 .
And thou shalt make a candlestick of pure gold: of beaten work shall the candlestick be made: his shaft, and his branches, his bowls, his knops, and his flowers, shall be of the same.
등잔대가 어떻게 그 남자(그)가 될 수 있습니까?
⚫ 킹제임스 성경 문법 초급 내용: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his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his와 its. 즉 his는 남성 대명사의 소유격이거나 중성 대명사의 소유격입니다.
셰익스피어(킹 제임스) 시대 영어에는 아직 its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5절에 단 한번 its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등잔대를 가리키는 his는 수컷(남자)을 의미하는 his가 아니라 중성 대명사 it의 소유격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밑에서 설명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꽃들”이 아니라 “그것의 꽃들”로 해야 합니다.
에스겔서 43장 17절도 동일합니다.
표준역: 그리고 그 단은 길이가 십사 큐빗이요 … 그리고 그것의 바닥은 주위가 일 큐빗이 되리라 . 그리고 그의 계단들은 동쪽을 바라보리라
And the settle shall be fourteen cubits long and fourteen broad in the four squares thereof; and the border about it shall be half a cubit; and the bottom thereof shall be a cubit about; and his stairs shall look toward the east.
여기서도 ‘his stairs’는 돌출된 단이 수컷(남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thereof 또는 his는 둘 다 중성 대명사의 소유격이며 따라서 “그것의 바닥…그것의 계단들”로 번역해야 합니다.
즉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거나 개인적으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안에 5,001번 나오는 his, 1,994번 나오는 her가 남성 대명사나 여성 대명사의 소유격인지, 중성 대명사의 소유격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의 증거
영어 옥스퍼드 사전은 his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his는 대명사 he와 그것(it)의 소유격이다.
[OE. his (hys), genitive of personal pron. he and it.
(위의 그림(옥스퍼드 사전) 오른쪽 박스에서 세 번째 줄을 보면 파랗게 He와 It이 표시되어 있음)
또 his의 용례를 보면 생명이 없는 물체의 중성 명사를 언급한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출39:33을 예로 듭니다.
3.B.3 Referring to neuter nouns or things inanimate.
(위의 그림(옥스퍼드 사전)에서 밑에서 다섯 번째 줄 1611 Bible Exod 39:33을 보기 바람)
출39:33 And they brought the tabernacle unto Moses, the tent, and all his furniture, his taches, his boards, his bars, and hiss pillars, and his sockets,
즉 출39:33의 his는 그 남자의(그의)가 아니라 ‘그것의’라고 옥스퍼드 사전 자체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된 표준역은 오역입니다(사실 있을 수 없는 번역임).
천막과, 그의 모든 용구와, 그의 걸쇠들과, 그의 판자들과, 그의 가로대들과...
her에 대해서도 옥스퍼드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해, 혼, 책, 사랑 등과 같이 문법적으로 여성인 것들에 적용된다. 또 땅, 달, 나라, 도시, 배, 교회, 대학, 학교처럼 여성으로 언급되는 명사에 사용된다.
Used of things whose names were grammatically feminine, e.g. sun, soul, book, shire, love. Obs. c.2.c Of things personified or spoken of as female; esp. the earth, the moon, countries, cities, ships, the Church, a university, a school, the arts, sciences, passions, virtues, vices.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옥스퍼드 사전은 1534년의 틴데일 성경 눅14:34와 1535년의 커버데일 성경 대하5:7을 보여 줍니다.
틴데일 눅14:34 Salt is good: but if salt have lost her saltnes what shall it be seasoned therewith?
커버데일 대하5:7 And the priests brought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into her place,
틴데일 성경과 커버데일 성경의 her는 다음에서 보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KJV에서는 모두 his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들의 her나 his는 그 여자나 그 남자가 아니라 그것입니다.
KJV 눅14:34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easoned?
KJV 대하5:7 And the priests brought in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unto his place,
그러므로 KJV 눅14:34의 his savour를 그의 맛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표준역은 여기서는 '자기 향미'라고 썼습니다.
눅14:34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easoned?
대하5:7 And the priests brought in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unto his place,
그러므로 눅14:34의 his savour를 그의 맛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표준역은 여기서는 '자기 향미'라고 썼습니다.
또한 대하5:7의 경우 표준역처럼 “제사장들이 주의 언약궤를 그의 위치로 들였다”고 번역하면 오역입니다.
또한 옥스퍼드 사전은 성에 상관없이 고양이, 토끼, 쥐 등에 대해서는 her를 사용한다고 기록하며 그 예로 1535년 커버데일 성경의 잠언 6장 6절을 보여 줍니다.
Of animals regarded as feminine, irrespectively of sex; e.g. a cat, hare, rabbit, mouse, etc.
영어 킹제임스 성경, 잠6:6 Go to the ant, thou sluggard; consider her ways, and be wise:
이것도 표준역처럼 “개미에게 가서 그녀의 길들을 숙고하라”로 하면 오역입니다.
이렇게 사실을 이야기해도 이미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것들이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혹세무민입니다. 이것은 의인화가 아니라 치명적인 오역입니다.
확증 편향: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의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말한다. 다른 말로 자기 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히브리어와 영어(또는 우리말)는 구조가 많이 다릅니다.
1. 히브리어는 자음(22)만으로 글자가 구성된다(영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다).
2. 히브리어는 관사(the)는 있지만 부정관사(a, an)가 없다(영어는 정관사와 부정관사 모두 있다).
3. 히브리어는 대문자 소문자 구별이 없다(영어는 대문자와 소문자 구별이 아주 중요하다. 뜻이 달라진다. God와 god. 그러나 히브리의 ‘엘로힘’은 대소문자 구별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된다).
4. 히브리어는 “be” 동사가 없고 다만 “존재하다”는 특별 동사가 있다(영어는 be 동사가 없이 문장을 구성할 수 없다. Ex) I am Ruth. Be 동사가 없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은 am, are, is를 이탤릭체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존재의 의미를 표현해야 할 때에는 그대로 사용했다. ex) I AM THAT I AM.
5. 히브리어에는 현재형이 없다. 오직 “완료”와 “미완료”밖에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시제” 자체가 없다. 동작의 속성이나 성질에 따라서 완료와 미완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I AM THAT I AM”은 현재형을 나타내는 “am”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히브리어의 완료와 미완료를 영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영어는 12가지 시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리되지만 히브리어의 시제는 동작의 상태나 속성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이다.
6. 히브리어는 소유(have) 동사가 없다. 그래서 항상 누구누구에게 속했다는 표현을 쓴다.
7. 히브리어는 단어의 기본형은 항상 3인칭이다.
8. 히브리어의 명사에는 남성과 여성은 있지만 중성이 없다.
9. 히브리어에는 복수 대명사도 남성과 여성이 구별되어 있다(영어로 they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지만 히브리어로는 알 수 있다).
10. 히브리어에는 하나의 접속사밖에 없다. 그 하나가 “and”도 되고 “but”도 되고 “therefore”도 된다. 문장의 상황에 따라서 접속사의 의미가 달라진다.
11.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명사 안에 2차적인 뜻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ex) 코는 단순히 코가 아니라 분노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여기서 8번 항목을 유의해서 보기 바랍니다.
다음 링크에서 보듯이 히브리어 명사는 격이 없으므로 따라서 문맥에서 판독해야 합니다. 또한 성과 수만 있는데 성은 중성은 없고 남성과 여성만 있고 명사 자체가 성을 타고납니다.
참고로 격이란 문장 속에서 체언이나 체언 구실을 하는 말이 서술어에 대하여 가지는 자격을 뜻하며 주격, 서술격, 목적격, 보격, 관형격, 부사격, 호격 따위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특징
표준역은 자기들이 성을 모두 살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위에 있는 것처럼 히브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혹시 안다고 해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영감을 받았기에 무조건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난센스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깁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은 원어의 단어들을 그대로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영감은 자필 원본에만 한 차례 주어졌고 그 뒤에는 보존이 됩니다.
그래서 표준역에서는 위에서 보여 준 대로 비둘기, 나귀, 개미 등은 그 여자(그녀)가 되고 등잔대, 둘출 단 등은 그 남자(그)가 됩니다.
창8:11에서서 표준역은 이 비둘기가 암컷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그녀의 입안에는’으로 번역하였고 바로 이것이 표준역만이 보여 주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성경으로는 하나님이 내보내신 비둘기가 암컷임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위(창8:7)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여기의 까마귀는 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남자(수컷)를 보내셨을까요?
8:6 사십 일이 끝날 때에 노아가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8:7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그 까마귀가 물들이 땅에서 떠나 바싹 마를 때까지 이리저리 나다녔더라.
까마귀( 스트롱 번호 6158,)는 구약 성경에서 단수로 6회, 복수로 4회 나옵니다. 물론 모두 남성입니다.
자, 그러면 다음을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수컷 까마귀에게만 먹을 것을 주실까요?
욥38:41, Who provideth for the raven his food? when his young ones cry unto God, they wander for lack of meat.
표준역: 누가 까마귀를 위하여 그의 양식을 제공하느냐? 그의 어린 짐승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울고 그들이 방황할 때 ..
표준역에서 '그 남자'를 뜻하는 '그의'는 오역입니다.
그리고 어린 짐승들이 영어 본문 어디에 나옵니까? 까마귀는 날짐승입니다. 더욱이 맨 뒤의 they는 그것들이지 그들이 아닙니다.
‘They’를 ‘그들’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표준역에는 짐승, 날짐승, 나무 같은 것들의 대명사 They를 ‘그것들’이 아니라 ‘그들’로 한 데가 여기 말고도 많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번역한 것이 옳습니다. 우리말의 모든 성경이 이런 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흠정역: 까마귀 새끼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 헤맬 때에 누가 까마귀를 위해 그것의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느냐?
창세기 8장 말씀에서는 까마귀나 비둘기의 성을 알려주는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까마귀라는 새와 비둘기라는 새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창1:21의 고래들을 보기 바랍니다. 고래들은 히브리말로 남성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수컷 고래들만 창조하셨단 말인가요?
1:24절에 보면 '땅은 살이 있는 모든 창조물'을 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창조물'은 여성 단수입니다. 그러면 땅은 암컷들만 내어야 할까요?
1:24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24, And God said, Let the earth(여성 단수) bring forth the living creature(여성 단수) after his kind(남성 단수), cattle(여성 단수), and creeping thing(남성 단수), and beast(여성 단수)of the earth after his kind(남성 단수): and it was so.
마지막 부분을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짐승은 여성 단수인데 그것의 소유격은 남성 단수(his)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his kind는 표준역처럼 '그의 종류'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그것의 종류'로 해야 맞는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성은 중성이 없고 남성과 여성만 있으며 명사 자체가 성을 타고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의 이런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한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말로 번역할 때는 히브리어의 특징 및 히브리어를 제대로 반영한 영어의 특징을 고려해서 번역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시온, 이스라엘, 바빌론 등은 여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다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단 말인가요?
다음 구절을 보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이미 제물이 숫양(Ram)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의 his blood는 ‘그것의 피’로 번역되어야지 ‘그의 피’로 번역하면 명백한 오역입니다. 우리말은 ‘그’(남자)와 ‘그것’의 차이가 명백하므로 ‘그의 피’를 ‘사람의 피’로 읽을 확률이 거의 100%입니다. 그러면 그의 피의 ‘그’는 누구인가요? 앞에 있는 아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아론의 피를 뿌린단 말입니까?
15 Thou shalt also take one ram; and Aaron and his sons shall put their hands upon the head of the ram.
16 And thou shalt slay the ram, and thou shalt take his blood, and sprinkle it round about upon the altar.
표준역: 15 너는 또한 숫양 한 마리를 취할지니라.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얹을지니라. 16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숫양을 도축할지니, 너는 그의 피를 취하여 그것을 제단 위 둘레에 뿌릴지니라(출29:15,16).
결론
그래도 표준역 같은 번역이 옳다고 하고 그것을 따라가면 누가 그것을 막겠습니까? 그 사람의 자유인데...
하지만 과연 이런 번역을 가지고 아이들과 같이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요? 강단에서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같이 낭독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에 현혹되어 넘어가도 어쩔 수 없지만 63세를 먹은 제가 그런 분들과 그분들의 아이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 그냥 앞이 캄캄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헛된 말장난입니다.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욱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에 이르리라(딤후2:.6)
영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말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한 나라의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야만 한다.”
표준역처럼 어처구니없는 번역만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완전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23절 말씀처럼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자들이 다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한 곳에 함께 모여 모두 타 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끝으로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오히려 악한 일에는 너희가 아이가 되더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되라(고전14:20).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지니라(고전14:40).
2023-07-05 15:11:26 | 관리자
2023-07-04 09:39:47 | 조민수
환영합니다. 신앙의 여정가운데 우리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진리의 말씀과 교제가운데 은혜가 넘치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샬롬^^
2023-07-03 23:14:10 | 오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