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님 글을 쓰면서 정리가 되었겠어요. 사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이기에 독후감을 쓴다는 것도 자신에게도 아주 좋은 요약이 되지요. 자매님 독후감이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2026-08-06 09:35:12 | 이수영
고난이 기본값인 여기서의 삶은 천국에서의 영원하고 완전한 삶을 위해 잠시 거쳐가는- 짧은 성화의 삶. 그 삶을 위로하는건 (죽음을 염두하며 살면서)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기쁨 그것밖에는 없는것 같아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수치를 멸시하시며 십자가를 견디셨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쪽에 앉혀지셨느니라.-히브리서12장2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m.youtube.com/watch?v=51NdHASdFNs&t=2160s
https://youtu.be/3agYLZCvErA?si=PR8RF0DTmR6mKAUr
https://youtu.be/yIEhPP6EdeQ?si=del-VqD49Z62i0nE
2026-08-04 09:04:19 | 목영주
이 글은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글입니다.
2026-08-03 21:16:57 | 김영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2026-08-03 21:13:55 | 김지훈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은 단지 세상의 죄악이나 부끄러운 과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때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여기고 자랑하던 할례와 혈통, 종교적 지위와 열심, 율법에 따른 의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닌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인이었고, 종교적 열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섰으며, 율법 안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관심하거나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내세운 모든 항목이 똑같은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례와 혈통과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한 그의 열심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선하게 주어진 특권도 있었고 죄로 왜곡된 열심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바울 자신을 높이고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그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뒤, 자신이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그것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는 유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손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본래부터 무가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울이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근거로 붙들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할례와 혈통과 율법과 종교적 열심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신의 의가 되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 없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버린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경력과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려놓은 것은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며 자신을 높이던 마음, 곧 ‘육체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순서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자기 의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자랑하던 것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께서 이루신 일의 완전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비움이 은혜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자기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과거의 바울은 자신의 혈통과 행위와 열심을 바라보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만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 앞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무런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실제로 행한 금식과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문제는 금식과 십일조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했고,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를 진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의와 공로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가릴 수도 없었고 자신을 변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세리는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회심 전 바울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혈통과 율법적 행위와 종교적 열심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는 자신에게서 난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의가 있다고 믿던 확신과 자랑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문제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열심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떠난 열심,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열심이 문제였습니다.
열심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고, 열심의 크기는 의의 근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 열심은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기보다 오히려 자기 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 참석과 성경 통독, 필사와 암송, 찬양대와 주방 봉사, 헌금과 전도와 교회의 여러 섬김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여 행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순종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도가 힘써야 할 귀한 일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은 순종과 섬김을 멸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될 수 없지만, 구원받은 삶에서 맺혀야 할 열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아들여진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왜 하며, 무엇으로 여기고, 무엇을 기대하며 붙들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같은 성경 통독이라도 하나님을 더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할 수 있는가 하면, 통독 횟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안심하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봉사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을 낮추며 섬길 수 있는가 하면, 자신의 충성심과 헌신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은 메말라 있으면서도 외형적인 행위와 종교적 성취를 바라보며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안심한다면, 그것들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종교적 앞치마가 될 수 있습니다. 경건의 행위가 나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면, 선한 행위마저 자기기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은 그들의 수치를 실제로 없애거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음을 가려 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인간적인 시도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종교적 성취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영적 벌거벗음을 덮어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덮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눈앞에서 자신을 가릴 수 없습니다.
가인의 헌물에서도 이와 관련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의 헌물이 단순히 저주받은 땅의 열매였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벨이 믿음으로 더 뛰어난 희생물을 드렸다고 말하며, 가인의 행위가 악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헌물의 재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이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가인의 마음과 행위 전체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사람이 많은 수고와 정성을 들여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가져왔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느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믿음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은 하나님의 방법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자신을 부유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존재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비참함과 가난함과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난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와 주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자기 의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 의는 단순히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한 것, 배운 것, 견딘 것, 드린 것, 섬긴 것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자신을 더 의롭고 가치 있는 신앙인으로 여기는 마음도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나의 열심을 비교하며 은밀히 자신을 높이는 순간, 나는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였느냐에만 있지 않고, 그것을 무엇으로 여기며 붙들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의와 공로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으려 하거나 자신을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려 한다면, 나는 온전히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것’, 곧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어느 정도 잘한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만을 채워 주는 보충물이 아닙니다. 내가 이룬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함께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는 내가 행한 선한 일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합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근거로 은밀히 붙든다면 실제 마음의 작동에서는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흐리게 됩니다. 자신이 이룬 것을 계속 바라보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얼마나 완전하고 충분한지 온전히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통독과 필사와 봉사를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자신의 의와 신앙적 자격으로 붙드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으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섬김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그것은 자랑할 이유가 아니라 더 많이 순종하고 더 낮아져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근거가 아니라, 오래 참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할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알고 있다면, 그것 역시 다른 사람을 멸시할 근거가 아니라 더 큰 책임과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회심 전 바울의 자기 의와 구원받은 성도 안에 남아 있는 자기 의의 성향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심 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를 자신의 혈통과 율법적 행위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칭의와 구원에 직접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반면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통독과 봉사와 헌신을 자랑하는 문제는 이미 받은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다시 얻거나 유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자랑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메마르게 하며, 성화를 방해하고, 다른 지체를 판단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의 증언과 장차 받을 보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성도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순종과 불순종이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충성스럽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그 순종을 기뻐하시고 평가하십니다. 다만 성도의 순종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공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신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가리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그리고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종교적 경력과 성취 가운데 무엇이 나의 영적 가난과 무능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 무엇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지,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지, 어떤 성경과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헌금했는지를 은밀히 자신의 가치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른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나를 겸손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게 한다면,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빛이 아니라 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하고 지적하는 일 자체가 나의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자랑과 교만을 보며 그것을 옳게 분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겸손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바리새인을 비판하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분별하거나 사랑으로 권면하는 일 자체가 모두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적 분별과 권면은 필요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나 자신도 동일한 말씀의 빛 아래 서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을 더 의롭고 영적인 사람으로 여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의가 보인다고 생각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를 판단함으로써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사랑(charity)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I am nothing)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진다는 것은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자학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순종의 열매까지 부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근거가 자신에게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선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할 권리가 내게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비우는 일 자체를 새로운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의를 내려놓았는지, 얼마나 겸손해졌는지를 바라보며 그것을 자랑한다면, ‘자기 비움’마저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내려놓았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붙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자신을 비우는 나의 결단에 있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자신이 붙들고 있던 자랑을 손실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내려놓았고,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유익은 더 이상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나 율법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가장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얻었으며, 자신의 자랑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이룬 것을 바라보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일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잘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했다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만한 사람으로 바라보며 육체를 신뢰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을 것이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행한 것을 계속 바라보는 동안에는 영적으로 가난하면서도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었으면서도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충분히 가렸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임에도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경력과 행위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살피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자신이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안심하고 있는가?
내가 행한 것 가운데 무엇을 은밀히 나의 가치와 자격으로 붙들고 있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높이게 만드는 나의 종교적 자랑은 무엇인가?
내가 배설물로 여기고 내려놓아야 할 ‘나의 자랑’은 무엇인가?”
이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2026-08-03 21:06:11 | 김영규
<비교 성경 출간 및 무료 배포 예정 안내 및 샘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저는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을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대조·비교할 수 있는 「비교/대조 성경」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앞으로 약 2~3주 정도면 모든 작업이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완성된 「비교/대조 성경」은 먼저 인쇄하여 서점에서 누구나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또한 무료 PDF 파일로도 제작하여 누구든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사랑침례교회 재정이 허락되는 대로 무료 신청 링크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신청 링크에 성함, 주소, 전화번호를 입력하시면 「비교 성경」과 김기현 성우가 낭독한 신약성경 및 구약 일부가 수록된 16GB USB(MP3)를 무료로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준비 수량은 1만 권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올려 드리는 샘플을 꼭 직접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왼쪽의 킹제임스 성경과 오른쪽의 개역성경을 한 절씩 차근차근 비교해 보십시오. 사본의 차이뿐 아니라 번역, 문법, 단어 선택, 생략된 표현, 문장의 흐름까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비교 작업을 계속하면서 저는 한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은 한국 성도들의 독보적인 성경이지만 오랜 세월 사용되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을 더 이상 살펴보거나 교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기회를 스스로 막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비교/대조 성경」은 개역성경을 비난하거나 폄훼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을 한 절씩 직접 비교하면서, 사본과 번역, 문법, 단어 선택, 생략된 표현 등이 본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확인하시도록 돕기 위해 제작하였습니다.
저는 제 견해를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제 말을 믿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두 본문을 직접 비교해 보시고 독자 여러분께서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모든 성도들이 쉽고 정확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원문의 의미를 더욱 충실하게 전달하는 우리말 성경이 계속해서 나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또한 대한성서공회와 각 교단에서도 기존 번역을 성역화하기보다, 원문과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1세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 문법에 맞는 성경, 더욱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성경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부디 목회자와 성도 여러분께서도 열린 마음으로 이 비교 자료를 살펴보시고, 더 정확한 성경 번역을 위한 건강한 논의에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호소
저는 지난 몇 달간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을 신약 전체에 걸쳐 한 절씩 대조하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제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우리는 같은 번역을 되풀이하여 인쇄하고 배포해 왔습니다. 그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번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번역 자체를 절 단위로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문법이 맞는지, 원문의 뜻이 온전히 전달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래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여겨져 온 것은 아닌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 중고등학생들이 펴 들었을 때 문법에 맞고 뜻이 분명하여 스스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 성경입니다.
이 비교 자료를 만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 주장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온 번역을 성도 여러분께서 직접 한 절 한 절 눈으로 확인하시고, 우리에게 더 정확하고 더 분명한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함께 공감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열린 마음으로 이 비교 자료를 살펴봐 주시고, 더 정확한 우리말 성경을 향한 이 간절한 호소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2026-08-01 10:20:10 | 관리자
전창영 형제님 !
오랜만에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왔더니 사진 모습이 역시 교회 밖에서는 멋있는 사장님 모습 그대로내요
사랑침례교회 출석하신지는 한참 오래 되셨지요?
그때 저와 대화 나눈지가 엊그제 같은데
주일 정동수 목사님 설교 들을때마다 더욱 깊은 영적세계를 탐험 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샬롬 !
2026-07-31 20:16:39 | 오승록
<창세기 강해 안내>
안녕하세요?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입니다.
‘창세기’라는 이름 자체가 ‘기원’을 뜻하듯이, 이 책은 우주와 생명, 인간과 죄, 구원, 민족들과 언어들과 국가들의 기원을 다룹니다.
창세기는 창조와 타락, 홍수와 민족들의 분산,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이삭과 야곱, 나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형성까지 기록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주요 교리와 핵심 주제들을 응축하여 보여 줍니다.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 역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하면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선명하게 연결되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창세기의 사건들을 실제 역사로 인용하셨으며, 사도 바울과 베드로, 히브리서의 저자 등 신약의 기록자들 역시 창세기를 신학적 논증의 중요한 기초로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창세기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토대입니다.
지금부터 13-14년 전에 교회를 시작하면서 창세기를 강해하였지만 비디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신학원 필수 과목이고 성경 기초 과목이기에 오늘부터 금요일(저녁 8시)에 다시 30시간 정도 강해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시간을 내서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강해> 책이 2주 내로 나오니 같이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운데 건강 관리 잘하시고 주일에 기쁜 얼굴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 약 3주 내로 창세기 강해 책(약 630쪽)을 무료 PDF로 올리겠습니다.
2026-07-31 16:35:53 | 관리자
형제님의 글을 읽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믿음은 분명 행위와 상관없지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면 예수님 옆의 강도는 구원 받을 수 없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어떤 종교의 배경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요. 주님이 보시기에 어떤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판단하는 일이 대부분이지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있는가? "
라는 질문에 들고 나갈 것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2026-07-29 20:25:14 | 이수영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순간,나 자신이 또다른 형태의 자기 의에 빠질 수 있다는 형제님의 글을 마음속에 잘 새기겠습니다! 나라걱정에,제가 할 수 하나님의 뜻을 위해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는 하루하루입니다. 이렇게라도해야 나라위해 앞장서 애쓰는 애국시민들에 대한 미안함이 줄어들까 싶어서요..먼저 제상황에 징징거리지않게 영주야.구원받았으면 다받은거야..하고 위로달래줍니다. 그다음 대화를 하기전에 (충돌핍박을 피하고 싶은 저를 향해)머리속으로--성령님의 마음으로 (진리 옳은것 바람직한것을)예수님이 말씀하신다..라고 훈련시킵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4장1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Lhz5exzPCFc?si=egoVPKSJl-59mpDX
2026-07-28 17:02:05 | 목영주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신 형제님에게 한번 놀라고, 김영규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고 마음속에 새기고 있나 돌아보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 정말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나 돌아보며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나태한 생각에 몸을 편히 쉬고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제 혼의 연약함을 부인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을 공유해 주신 형제님, 고맙습니다.
2026-07-28 16:27:01 | 김지훈
이 글은 제가 초안을 작성하고 뼈대를 세운 후, ChatGPT 5.6의 도움을 받아 문장과 흐름을 더욱 매끄럽게 다듬은 글입니다.
(사실 AI가 글을 거의 완성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지분 비율을 따지자면 약 5 대 5 느낌?)
회개나 믿음을 경험할 수 없는 AI의 도움을 받아 성경과 신앙에 관한 글을 다듬는 일이 혹시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대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잠시 들었습니다. 그러나 AI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성경 교사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의 가르침 아래에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점검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돕는 - 더 나아가서는 'Quantum Lift' 하게 만드는 - 매우 유용한 보조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명의 도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기준 아래 사용하느냐일 것입니다. AI의 답변 역시 언제나 성경 말씀에 비추어 확인하고 분별해야 하며,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어느 한 지체의 자기 의를 지적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지체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오히려 제 안에 숨어 있던 교만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백하며 경계하기 위해 쓴 글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저 자신이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교만과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는 지난 날 - 또한 최근 및 지금에도 - 저로 하여금 지체를 판단하게 했으며 내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지체의 눈 속 티만을 지적하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가 참 부족했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저를 정말 부끄럽게 여깁니다.
2026-07-28 15:48:07 | 김영규
축하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채아가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며
지혜 자매님도 빨리 회복하셔서 다시 교회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2026-07-28 15:36:27 | 이남규
2주 전 주일 예배를 마친 뒤, 한 어르신께서 제게 다가와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분(형제님)이셨습니다. 그날은 제가 처음으로 회중 대표기도를 한 날이었는데, 어르신께서는 아침에 대표기도를 한 사람이 맞느냐고 물으시며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다른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드린 뒤 곧바로 우리 교회에 오셔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우리 교회에서 침례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전화번호와 이름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다음 주일, 어르신께서는 제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개역 성경을 190회 이상 통독했으며, 사랑침례교회를 알게 된 뒤로는 킹제임스성경을 약 7회 통독했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통독한 뒤에는 킹제임스성경도 필사할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약 15년 전에 개역 성경으로 세 차례 필사를 마친 경험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 다시 만난 어르신은 여러 자료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을 190회 통독했다는 사실이 기록된 교회 주보, 성경 전체를 필사한 자료, 성경 구절을 이미지로 만들어 암송한 자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오랜 세월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먼저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을 읽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이 어르신을 내게 보내셔서 나를 부끄럽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향한 갈급함과 열심과 끈기는 참으로 귀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빌립보서 3장의 바울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를 신뢰할 만한 수많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에 속했으며,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해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얻는 일과 비교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마침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들이 본래 아무런 가치도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근거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적 경력과 의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일을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르신께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알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자기 의가 남아 있는 사람은 빈손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제 말을 듣고 계셨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제가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이셨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의 마음을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만남을 통해 제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는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암송하는 일도 귀합니다. 새벽기도, 금식, 헌금, 전도, 봉사, 교회 출석, 신학 공부 역시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모두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을 190회 읽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자기 안에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세 번 필사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와 무능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천 구절을 암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임을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크게 보인다면 그것은 위험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알아 갈수록 하나님은 더욱 크고 거룩하게 보이며 자신은 더욱 작고 가련하게 보인다면, 그 말씀은 사람을 은혜 앞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헌물이 거절된 사건도 이 원리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땅을 갈며 땀 흘려 얻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고와 정성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나아오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필사와 통독 자체가 가인의 헌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의와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종교적 행위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대신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자기 의의 헌물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는 범죄한 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스스로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앞치마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수치와 죄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든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도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와 도덕성을 들고 섰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이 얼마나 나은 사람인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많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으나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까닭은 그에게 선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자신을 부자라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가련하고 비참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난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파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파산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잘 가렸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을 말합니다. 청교도 토머스 왓슨은 회개와 믿음을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큰 은혜라고 하였고, 성도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두 날개에 비유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단지 몇 가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가 무능하며, 자기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기준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선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를 변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읽고, 얼마나 오래 기도하고, 얼마나 충성스럽게 봉사했는지를 하나님께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게 됩니다.
믿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자기 의가 남아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말씀을 붙들지 않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완전한 무능함을 발견하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아무 가능성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선한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 읽기와 필사와 암송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에게는 매우 귀한 순종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습니다. 봉사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봉사합니다.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습니다.
행위가 은혜를 사는 값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위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열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자신의 성취를 펼쳐 보이는 사람보다 빈손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자기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보다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는 사람을 의롭다 하십니다.
그 어르신과 헤어진 뒤 잠시 그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 어르신을 제게 보내신 이유가 단지 그분의 자기 의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제가 성경을 얼마나 게을리 읽었는지를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제 안에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많이 읽은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자랑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필사 횟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바르게 안다는 사실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처럼 금식과 십일조를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리새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은밀히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는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비판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느 한 어르신을 향한 글이기 전에 제 자신을 향한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눈물과 열심도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여러 차례 필사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값없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의 두 손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한 손에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한 무화과나무 잎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손에 자신의 땀과 수고로 얻은 가인의 헌물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경력과 행위를 담은 주보나 필사 노트나 봉사 기록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의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부족한 의에 그리스도의 의를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의와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와 구원과 소망의 전부이심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말씀을 읽을수록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하시고, 많이 알수록 높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낮아지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통독과 필사와 암송과 봉사가 자기 의의 벽돌이 되지 않고,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랑의 열매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자랑할 것은 단 하나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2026-07-28 15:28:21 | 김영규
유태종 형제님, 이지혜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특히 자매님께서 출산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은이도 동생이 생기니 엄청 좋아할 듯하네요^^ 우리 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채아가 밝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소망합니다.
2026-07-27 21:51:09 | 김지훈
축하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귀한따님을 선물로 주셨군요.
두 따님 시은과 채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가정되시기를 바라며
온 가족위에 하나님의 크신은혜와 축복하심이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07-27 21:43:14 | 김경애
안녕하세요?
인천 부평구에서 출석하시는 유태종 형제님, 이지혜 자매님 부부에게 건강한 둘째 딸이 태어났습니다.
2026년 7월 25일에 태어난 유채아입니다.
새 생명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드리며
채아가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영과 육이 건강하게 자라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귀한 아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2026-07-27 16:27:18 | 관리자
형제님을 먼저 떠나 보내신 자매님께 위로드립니다.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크시겠지만 정해진 때가 되면 우리 모두 반갑게 다시 만나리라 믿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가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2026-07-24 19:34:06 | 김지훈
안녕하세요?
인천 남동구에서 출석하시는 백상흠 형제님(김인옥 자매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 빈소: 서울성모장례식장 2호실
*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22
* 발인: 2026년 07월 26일 오전 5시 00분
* 장지: 인천가족공원
【부의금】
농협 3560619569923 김인옥
저희 교회에서는 몇몇 성도들이 내일 오후 5시에 조문할 예정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기억해두셨다가 위로의 마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을 당한 가정에 우리 주 예수님의 큰 평안을 기원하며 로마서 12장 10, 15절 말씀을 드립니다.
(롬12: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롬12:15)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
샬롬.
애경사 위원회 기형섭 형제 (010-3712-4046)
2026-07-24 13:50:17 | 관리자
영솔형제가 엊그제 결혼 한 것 같은데 벌써 아들을 낳았다니 참 세월이 빠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진솔형제도 또 올라오겠죠~
부모와 한 교회 나오니 이런 경사를 글로벌하게 알게 됩니다.
축하하고 모쪼록 산모와 아이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2026-07-23 17:47:52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