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거듭남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성화는 그렇게 새로 태어난 사람이 주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시작되어 평생 계속 됩니다.
성화는 다음의 두가지 방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첫째, 옛사람을 매순간 단호하게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 둘째, 주님의 말씀에 매순간 순종함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늘 샘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되고,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이루는 장본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께서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화에 필요한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인내자로,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신 다음에,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분명하게 적용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은 이 말씀들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가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진리를 듣거나 읽고, 붙잡고 묵상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화는 진도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우리의 성화에도 진보가 나타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진리의 말씀을 꼭 붙잡으십시오.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늘 가까이 하십시오. 언제나 말씀에 푹 잠겨 사십시오.
당신의 성화는 당신이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스펄전의 묵상.
2014-07-16 23:22:18 | 박진태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네요,
형제님의 글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습니다.
같은 사물과 샅은 현상을 보아도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다르구요
인생의 깊은 장맛과 같은 글 감사합니다.
2014-07-16 08:55:29 | 조양교
“사랑이란 낯의 햇빛처럼, 밤의 달빛처럼 그렇게 스며들 듯
영원히 함께 같이 사는 것이다.”
형제님.. 마지막에 남기신 구절의 사랑을 소망하며..
그런 사랑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콩콩 뛰네요.
주님, 영원히 함께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7-14 22:38:16 | 태은상
샬~롬
형제님의 글을 읽고 어떤 분인지 궁금해 홈피 사진을 부지런히 살펴 보았습니다~
얼굴을 뵈니 아, 이분이구나 하며 스치듯 인사만 하고 지나갈때가 많았음을 기억 합니다~
오늘 아침 남편과 조그만 일로 다퉜는데 이글속의 새들 부부처럼 싸우지 않고 그냥 조잘대고 사랑하며
살순 없는건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해가 졌으니 마음의 분을 풀고 남편과 화해로 다시 사랑을 시작해야 겠습니다..
자연을 닮아가게 하는 좋은글 감사히 잘 읽고 나갑니다~^^~
2014-07-14 21:21:12 | 이명숙
짧지만 강하게 와 닿는 실제적인 말씀이군요. 생활속에서 계속 확인해 가는 것은 염려는 주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다는 말보다 신뢰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박형제님과 간단한 예기는 자주 나눴지만 좀 더 진지한 교제를 나눌 기회가 없었군요. 조만간 기대하겠습니다.
2014-07-14 15:32:19 | 임원섭
유 형제님!
주옥 같은 글 감사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다시 보게 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써 주세요.
나중에 책으로 엮어서 PDF파일로 만들어 모두에게 남겨주고 싶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4-07-14 12:13:55 | 관리자
형제님이 사시는 옥상 정원이 무척 궁금하네요.
나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꽃과 작은 나무가 우거진 아담하고 멋진 정원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봅니다.
글을 읽어 내려가며 제 얼굴엔 치아는 드러나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흐믓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참새 부부의 모닝콜로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실 형제님이 아주 많이 부럽기도 합니다.
낮의 햇빛처럼, 밤의 달빛처럼 그렇게 스며들 듯 영원히 함께 같이 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일상속에서 느끼고 또 그 사랑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사시는 형제님으로 인해 그 사랑이 제게도 시나브로 ~시나브로 전달되어 옵니다.^0^
2014-07-14 01:49:53 | 이정희
# 늦은 나이에 깨달은 사랑!
내가 살고 있는 집 옥상에는 이런저런 꽃들과 함께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이 숲에 반하여 자주 옥상으로 올라가 그것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즐깁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거진(?) 숲답게 날마다 새들의 잔치들을 봅니다.
또 내방의 창문틀 틈 사이에는 어느 참새부부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참새부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면 하루를 열지 못할 만큼
그 참새부부의 울음소리들을 즐기기도 합니다.
요즘엔 그 참새부부의 떠드는 소리에 아침잠을 깨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참새들의 조잘대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즐거운 짜증을 부렸습니다.
“하, 고놈들 참! 되게 시끄럽게 떠드네.......”
그리고는 침상에 앉아 그 참새부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저들 부부는 살아생전에 연애소설 한 권도 안 읽고 슬픈 영화 한 편도 안 보는 것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은 잘 해서 새끼들도 잘 낳고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잘 해서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내어.
아침마다 시끄럽게 내 단잠을 깨게 하는지 그것이 매우 궁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사랑하는 일마저도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하며 까다롭기까지 한 것일까?
도대체 여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끈한 커피까지 한 잔 타놓고 홀짝이며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들처럼 저렇게 단순하면서도 날마다가 잔칫날인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을까?
도대체 저놈들은 어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배운 것일까?
한국 남자들은 사랑을 잘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느냐하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영화배우들조차도 입맞춤하는 장면이 나오면
무슨 벌레 씹은 표정이 되곤 할 정도로 사랑을 잘할 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미국 남자들은 아무 데서나 침 한 방울 안 튀기고도
뒷머리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아이 러브 유”소리를 너무나도 잘 합니다.
그러나 한국 남자들은 평생에 한 두어 번쯤이나 “사랑해”소리를 했을까요?
“꼭 말로 해야만 아느냐?”며 핀잔 아닌 핀잔을 앞세우고
그 한 마디마저도 마지못해 “그래~, 사랑해~~. 별걸 다가지구~~~”
이렇게 말 해 놓고는 돌아앉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잘 한다는 미국남자들도 어째서 이혼율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판이라 하니 이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난감합니다.
세상의 각종 인종들이 사랑하는 모습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하는 법에는 정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모두가 다 잠깐 좋아하다가 결국엔 길게 울고 짜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랑에는 과연 정도가 없는 것일까?”
세상의 대중가요는 사랑이란 슬픈 것이라고 밤 낯없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는 마치 사랑이란 슬퍼하기 위해서 있는 것처럼
깨어져서 슬프고, 갈라져서 슬프고, 버림받아 슬프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 슬프고,
내 마음을 몰라주어서 슬프고 온통 슬픈 사연들뿐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사랑이란 즐거운 것이다."이렇게 노래했다면
대중가요의 배신자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대중가요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뿐인가요?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는 사랑이란 어쨌든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어야만 합니다.
만날 듯 이루어질 듯 남의 애간장을 있는 대로 다 태우다가
"아, 이제 조금만 더~" 하게 되면
"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여~" 하고는 살짝 옆으로 비껴 지나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한참 삼천포로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만 그렇게 끝장나고 마는가?" 이렇게 종지부를 찍으려할 때,
이 무슨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꿀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두 사람 중 하나가 그만 불치의 병으로 눈 깜작할 사이에 세상을 떠나고
소설책의 이야기는 어느 듯 마지막 뒷장만 남깁니다.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래는 슬픈 노래일수록 더 잘 불려지고
소설책도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일수록 그 기구한 운명처럼 더 잘 팔리니
인간이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사랑이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복음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낯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해의 햇빛이란 무엇이고 달의 달빛이란 무엇일까?
햇빛 과 달빛은 뜨겁기와 밝기는 서로가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똑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낯의 햇볕이 따뜻한 까닭은 햇빛이 우리 몸속에 스며들기 때문이고
밤의 달빛이 은은한 까닭도 달빛이 우리 눈에 그 은은함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햇빛과 달빛은 이렇게 만물 가운데 스며들어 만물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만물 속에 스며들어 만물의 생명력이 되어 주는 햇빛과 달빛!
풀 한 포기 나무 한 잎에 스며들어 삶의 힘이 되어 주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스며들어 반짝이는 즐거움이 되어 주며,
꽃 한 송이 속에 스며들어 빵긋 웃는 웃음으로 위로해주는 햇빛과 달빛!
낯엔 그런 햇빛처럼 밤엔 그런 달빛처럼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슴속에 스며들어
영원토록 그렇게 같이 살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슬픈 영화가 왜 슬픈가?
시나 소설책의 주인공들은 왜 그들의 운명이 기구한가?
그토록 사랑하던 두 사람이 끝내 같이 살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기 때문에
슬프고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슬픈 영화의 주인공들보다도 그런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보다는
차라리 내 집 옥상의 새들이 얼마나 더 행복한가!
차라리 내 창문 위에 둥지를 튼 참새부부가 얼마나 더 행복한가!
새들은 생전 슬픈 영화 한편도 안보고 슬픈 유행가도 안 부릅니다.
그러나 평생 울고 짜고 하는 일없이
아침마다 내 단잠을 깨울 정도로 사이좋게 조잘대며 늙도록 같이 살아갑니다.
새들이 헤어지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포수들의 산탄 총알에 의해 기구한 운명이 되기 전에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사랑이라 할지라도 같이 살지 못하면 슬퍼집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같이 사는 것이라고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같이 살면 됩니다.
같이 사는 것 빼 놓고 사랑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모든 노력을 다 바쳐서 어떻게든 같이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들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토록 같이 살기 위함이 그 모든 목적이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헤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제일 미워하셨나봅니다.
헤어지는 것은 같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한 문장을 남겨 놓고 싶습니다.
“사랑이란 낯의 햇빛처럼, 밤의 달빛처럼 그렇게 스며들 듯
영원히 함께 같이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2014년 7월 12일(토)
유 용수.
2014-07-12 22:54:15 | 유용수
우리가 하는 이 세상의 염려는 항상 사소한 것들이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곰곰히 제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을 생각해보니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먼 장래의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에 관한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네요.
심히 부끄럽습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마6.34)
2014-07-07 14:54:48 | 이정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7-07 14:53:16 | 관리자
이제 히브리서 강해는 2번 더 하면 끝납니다.
그 이후에 적당한 시간에 소그룹 모임을 다시 한 번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7-07 14:49:20 | 관리자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당연히 염려하는 것을 가리켜 불신앙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에서 주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디에 있느냐? 이번 휴가 계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느냐? 네가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부분 주님 아닌 다른 것을 맨 앞에 놓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미리 염려하느라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지 마십시오.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돌보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세세한 일들로 늘 염려를 달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시는 말씀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마귀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세상의 염려는 항상 사소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보거나 손에 쥐지 못하면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불신앙의 시작입니다.
이 불신앙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2014-07-05 23:02:11 | 박진태
형제님의 글을 읽고 나니, 한 마디로 "주님만 바로보는 삶"이라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어떻게? 보다는 왜? 라는 외 글자가 마치 돌처럼 저에게 날라오는듯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애정결핍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삶. 하늘의 보상만 바라보는 삶. 그런 삶이 아직까지는 추상적이라고 느껴져서 제 자신이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실제적으로 제 삶에 다가오고, 느껴질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07-04 10:41:55 | 김상진
많은 공감을 합니다.
'나는 알아~' 또는 '너보다 많이 알아~'
라는 식의 위선의 모습이 제 안에도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공식이 제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길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겸손한 복음전도자가 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07-04 10:34:34 | 김상진
참 요목조목 잘 말씀해주셔서 그날의 교제가 생생합니다.
인생선배님들의 조언으로 월요일은 다 찾아들으며 폭우를 만난듯하였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보면볼수록 왜이리 말씀이 달콤한지요.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2014-07-04 00:03:48 | 이청원
형제님의 글을 통해 이 시대의 여러 모습에 대해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같은 성도이지만 소명을 받고 양떼(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바르게 이끄는
목회자(목자) 혹은 설교자의 직무는 직업이 아니라는 언젠가 들었던 어떤 목사님의 말씀에
저도 100%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천만 가지 직업보다 열등해서가 아니겠지요.
"이렇게 슬프고도 악한 시대에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직무 중에 가장 위대한 직무"라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명쾌한 말처럼 그 어떤 직업이나 직무가 소유할 수 없고 비교 조자 불가한
육중한 가치를 지니기에 직업 혹은 돈벌이 수단이라 감히 칭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목회의 직무가 이렇게 타락하고 그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진 현실을 보며
목회자와 성도들 모두는 양방향에서 입체적으로 사안을 보며 성경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자칫 현시대의 타락을 피하고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면
구더기가 생길까 무서워 장을 못 담그거나 목욕물만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4-07-03 21:16:30 | 김대용
왜 바른것을 알면서 바르지 않은것들을 버리지 못할까?
바른것을 알았으면서 왜 떠나는것일까?
정말 공감하는 왜?입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해온 분 일수록 자연스레 몸에 습관화 되어 있는 것이 많지요.
바르지 못한 것을 알면 버리기가 필수인데 그게 안되면 어려움에 처하는 것 같아요.
알고 - 결단하고 - 실행하기 까지 자기부인의 길이지요. 우리 모두가.
2014-07-03 20:23:28 | 이수영
샬~롬
사랑침례교회에 와서 유독 이 의문들을 많이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왜, 사람들은 바른성경을 외면할까?
왜, 사람들은 바른걸 알려줘도 듣지 않고 들을 생각도 못하는걸까?
왜, 바른걸 알면서도 떠나는 걸까?
왜, 바른걸 믿으면서도 바르지 않은것들을 버리지 못할까?
왜, 왜일까요?
2014-07-03 16:59:50 | 이명숙
"왜? 저의 삶은 변화하지 않나요?"
제 첫 질문에서 킹제임스성경과 사랑침례교회를 통해 답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통해, 늘 질문하고 배우는 모범생의 모습으로 믿음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2014-07-03 12:27:04 | 태은상
과학 문명의 발달은 저장매체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하우를 자신만 갖고 있다가 죽으면 후손은 그 노하우를 알길이 없습니다. 그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기면 후손들은 기록을 바탕으로 더 발전된 형태를 통해 더 나은 기능과 편리성을 강구하게 됩니다. 역사시대에는 대부분 종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메모리와 랜칩의 개발로 용량이나 처리속도 또한 방대하고 과거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이용하고 특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죠?
어떻게? 라는 의문을 해결해 나가면서 불편했던 것들이 편리하게 되고, 성능이 개선되고, 세분화, 전문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능을 잘 활용하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들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으로 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빨리갈까? 마차,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이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에 이길까? 칼, 화살, 총, 대포, 미사일, 핵무기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일상의 편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삶의 질과 양이 풍성해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을 해결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선진국보다는 원시부족과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더 높게 나옵니다. 사람은 먹고, 입고, 자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왜?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왜? 라는 문제에 대해 나름 해결책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사람들을 보통 성자나 현자, 사상가, 철학자라 부릅니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등등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고민하던 때도 있었고, 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한 차원높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나름 고상한 척 해보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전도라는 매체로, 요즘에는 유투브라는 매체로 성경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 생기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왜? 라는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됩니다. 왜 성경을 읽어야 하나? 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야 하나? 왜 교회를 나가야 하나? 왜 예배를 드려야 하나? 왜 기도를 해야 하나? 왜 암송을 해야 하나? 믿음의 본질적은 문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바른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고 합당한 행실이 우리 삶속에 배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회복과 경건한 삶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갖고 다양한 종교 시스템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침례교, 등 개신교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름으로 자기만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물과 조직과 사람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왜? 라는 본질적인 질문보다는 어떻게? 라는 현상적인 질문이 더 중요해지게 됩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해결하면서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사람이 없는 교회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끌어 모을까? 궁리합니다. 연예인 간증집회를 하면 될까? 두 날개 운동을 하면 될까? 건물의 편의성을 증대시켜 볼까? 등등을 강구합니다. 큰 교회는 나름대로 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큰 덩치를 유지해야 할까?
교회안에서도 속성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양산합니다. 성경 속독법, 기도하는 법, 예배드리는 법, 등 등, 사역자들에도 일어납니다. 직업으로서의 목사, 전도사, 직원 등 자신의 삶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헌신적 섬김에 따라 일정한 보상차원의 사례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사례 자체를 목적으로 교회에 봉사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학교도 목사나 성경교사가 되려는 사람이 훈련 차원에서 들어가야 하는데 신학교가 목사나 교사 양성기관으로 전락해 버리면 일자리 없는 목사나 교사는 교회나 그 당사자에게도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학교는 신학교를 유지해야 하니까 검증안된 사람까지 학생을 유치를 할 수 밖에 없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왜?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도 설교중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라는 화두를 종종 던지십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봉사하십니까? 왜 교제를 하십니까? 왜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덧글을 다십니까? 왜 헌금을 하십니까? 왜 학생부 교사를 하십니까? 왜 주방 봉사를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일에 분주했던 마르다보다는 주님의 무릎옆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를 향해 네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보고 돈을 보고 했을 때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라는 질문에 진솔한 답변을 찾을 때 비로소 마음과 행함이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순환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합니다. 두서없는 글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2014-07-03 10:34:39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