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으로 체꼐적으로 성경읽는 일을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겠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정작 말씀읽는 일들이 너무 소홀해 지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 안에서 움직이게 하옵소서!
2014-06-20 17:43:43 | 조양교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일인 것 같네요, 균형을 잡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 보아야 겠습니다. 사랑침례교회가 해야 할 일들이 균형을 잡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본질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2014-06-20 17:41:22 | 조양교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성경읽기 - 조지 뮬러 -
저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 4년 동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먼저 신앙 서적을 찾는 잘못에 빠졌습니다. 이전처럼 소설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설교집과 경건한 위인들의 전기를 주로 읽으면서도 성경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성경을 거의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 관계로 저는 성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지식에 있어서나 은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참 지식은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거의 4년 동안 믿음의 기초에 대해서조차 무지한 가운데 지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만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요 8:31-32).
1829년, 24세가 되어 비로소 말씀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제 삶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경보다 다른 책들을 더 좋아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쓴 책을 더 즐겨 읽는 사람이 있다면, 저의 사례를 통해 경고를 받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다른 책들에 더 매료되어 왔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성경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기 전(前)에,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뛰어난 선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가르쳐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그 뜻을 보여 주시기를 거듭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갖고 인내로써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3. 구약과 신약을 매일 일정량 읽어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각 성경기록의 연관 관계를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2) 영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체계적으로 성경 전체를 통독해 나감으로써 성경 전체의 개념을 균형 있게 파악하게 되어, 어떤 특정한 견해에만 치우치거나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 전체를 한 번도 통독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루 몇 장씩 읽으면 일 년에 성경 전체를 한 번 읽을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읽은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은 구절 가운데 몇 구절만 묵상하거나, 시간이 허락하면 읽은 내용 전체에 대해서 하루 종일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경의 한 책이나, 서신서, 복음서의 한 부분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배운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 깊이 새겨져서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조지 뮬러.
2014-06-18 20:08:38 | 박진태
옥성호 형제의"서초교회 잔혹사'를 읽고 허탈감에 빠졌었던 얼마전 때가 생각납니다.교회란 곳이 어쩌면 가장 안전한 불법의 온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균형감각은 커녕 시조에 밀려 부초처럼 떠 다니는 우리의 교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요?올바른 인성교육 대신 돈 많이 버는 법,출세 하는 법만 가르치는 세상의 풍조가 고스란히 밀려들어온 작금의 교회들에 중용의 도를 가르칠 분,어디 계신가요?
2014-06-18 17:09:53 | 유옥희
"중생한(다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을 통해 저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반성해 볼 수 있는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6-17 20:41:16 | 김대용
저는 넷째부분이 특히 약하네요~무거운 책가방이 계속 들고 있으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듯이 긴 연단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4-06-17 09:01:16 | 목영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대해서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는, "화산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과 같다"라고 표현 하면서, 그런 문명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범죄학자들은, 이 시대를 '인간성 상실 시대'라고 표현들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처럼 '위험사회', '인간성 상실시대'를 국면하게 된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극단으로 치우치려 하는 성향 즉, '균형감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우리 기독교도 지금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극단의 흐름을 타고 영적인 균형감을 잃어버린 채, 마치 부패경쟁을 하듯 추락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서초교회 잔혹사"와 같은 제목을 가진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는듯 합니다. 또 이처럼 영적 균형감을 잃어버린 교회는 당연히 영적 균형을 상실한 성도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금식을 하고,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되어 버린 상태에서는 오히려 그것은 영민한 사탄의 도구로 활용이 되어질 수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균형감 즉, 중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중용'에 대해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 바가 있는데, "잘 먹었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소화를 잘 시켜 배설을 잘 했는가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잘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영적인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잘 먹었다는 것은 많이 읽었다거나 많이 깨달았다가 아니라 얼마나 내것으로 소화를 잘 시켰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제 아무리 우리손에 들린 진리의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이라고 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된 채 지식으로만 알고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사탄의 영민한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우리 사랑침례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소유해야 할 것이 바로 '영적인 균형감'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신 28:14>, <수 1:7>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말 들 중의 어떤 것에서든지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지 말지니라"<신 28:14>.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심히 용감한 자가 되어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모든 율법대로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 1:7>.
이와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좋은 글이 있어서,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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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균형감
A. W. 토저
1. 도덕적 이중성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위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우리는 흔하게 듣게 된다. 종교 사상가들은 이런 불균형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처방을 내렸다. 공자는 “중용(中庸)”을 가르쳤고, 석가는 “금욕주의와 육신의 안락을 피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는 것이 덕스러운 생활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도 이런 도덕적 불균형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리는 처방은 “새 철학”이 아니라 “새 생명”이다. 기독교의 이상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끌고 가려는 힘과 그를 죄로 끌고 가려는 힘이 자기 안에 병존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아담의 자녀요 흙의 아들이다. 이런 도덕적 이중성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그러나 참된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그를 성장시키려고 활동하신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육신과 싸우려고 할 때 그의 전투는 때때로 그로 하여금 금단적인 것들을 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성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령님의 활동은 무의식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에 순종하여 협력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양 극단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도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뒷짐지고 기다린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언급한 불균형이다. 우리의 도덕적 반응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고 절제의 훈련을 하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인정하여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발전은 없다.
2. 영적인 기형의 상태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다.
둘째, 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발견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도 사랑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벧전 4:8 참조>.
셋째, 깨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오류와 싸우다 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쫒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긴다.
넷째,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울해질 수 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다섯째,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성도의 양심을 파괴하여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실패 할 때 그는 반대적인 전술을 써서 신자의 양심을 병들게 한다. 이것은 신자가 양심적으로 너무 예민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까봐 늘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신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들의 수를 줄여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3. 끝맺는 말.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만난 자신만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분의 진리와 그 진리를 체험적으로 사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도?.., 그리고 그 충만한 경험으로 인한 평안이 마음에 넘치고 있는가? 이 경험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 줄 수 없으며, 이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참된 성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살아있는 이들 80호
2014-06-17 05:37:23 | 김상진
형제님이 올려주신 글이 저에게도 참 도움이 많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2014-06-11 16:44:09 | 임성희
제 아이들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실패를 두려워 하지말고 도전하고 부딪혀 보라고 멋진말은 다 가져다 쓰면서도 정작 제 자신은 어려움과 부담을 싫어하고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은 것처럼 저도 다윗의 믿음의 삶을 따르는 씩씩하고 멋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싶습니다.
꾸준히 올려주시는 글 감사합니다.
2014-06-11 15:33:57 | 이정희
이번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던 중 감동받은 글이 있어 올립니다.
시련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그 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엡 1:1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시련을 당하든 늘 그렇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장차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음을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은 당신이 이미 구원 받아서 그 구원을 드러내면서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아직도 이전과 다름이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앞에 고난들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쳐 나가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훈련과정들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12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는 말씀대로 당신을 연단하기 위한 시련이 오면, 가슴을 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연하게 맞이하십시오.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나의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시 18:29) 고 한 다윗의 고백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싸우십시오.
절대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씩씩하고 멋진 자녀가 되십시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그 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2014-06-09 23:57:03 | 박진태
언제 어디서나 나를 만나주시는 주님이 계심이 행복하네요.
지금 이시간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맞으러 가겠습니다.
2014-06-09 14:21:01 | 이정희
자매님 어쩜 저랑 너무 비슷하시네요.
저도 제 실수에는 관대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혹 실수라도 하면 온갖 타박과 짜증을 부리지요
제가 한 실수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전가시켜 화를 낼때도 많고요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반성하게도 되네요.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자매님의 모습이 너무 귀하네요.
자매님의 글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저에게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쳤을때 떠올리겠습니다.
거울앞에선 제 모습과도 같은 자매님의 글 감사해요.
2014-06-09 13:56:04 | 이정희
깊고 진한 묵상이 담긴 글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해묵은 성품의 허물과 약점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자매님의 글을 읽으며 오히려 한없이 부실한 제 성품을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약점을 드러내어 보여주시는 것이 그만큼 성숙을 이루셨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본받아 자신을 다듬는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잔잔하면서도 예리한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4-06-03 11:06:17 | 김대용
목사에 관한 귀한 글 감사합니다.
여러 지역에서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목사들과 교회들이 굳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6-02 11:16:25 | 관리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 절로 답글을 쓰게 되네요^^
저는 워낙 글 쓰는 것을 싫어하고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티나 모임을 조금을 꺼려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사람들이 제가 조용하고 차분한(?)줄 아시지만
알고보면 욱~하는 다혈질 성격에 까칠한 면이 많아 인간관계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쳐볼려고 노력을 안하는게 문제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꺼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습성이 오래 베어서인지 오히려 편한거 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참 그렇습니다.
요즘은 제자신이 바뀌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쉽지가 않네요!!
자매님 글을 통해 제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자주 부탁해요~~
2014-06-02 08:01:53 | 김세라
글을 읽으며 동지 한명을 만난듯 기쁜마음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드네요.
찬양곡
주님을 따른다는 건 멀고도 험한 길.
그러나 주님 바라보면 쉽고도 평화로운 길.
내 생각대로 가고자 하면 언제나 실패뿐이지만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때로는 유혹이 따르며 내 갈 길 험하여도
주님의 신실한 약속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거룩한 주의 말씀 따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따라가세.
홀로 한 분이신 주님, 복되시고 전능하신 분.
주 명령 따라 흠도 없이 책망도 받을 것 없이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만물을 살게 하신 주, 주께서 명령하네.
주님 오시기까지 이 명령 지키라.
자매님, 우리 이런 이 되도록 주님만 바라봐요~
2014-06-01 23:30:49 | 태은상
아름다운 간증의 여운을 느끼며 묵상하게 되네요...
크지도 작지도 않는 너무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에서
쉽게쉽게 재연되는 현상이 아니가 싶기도하네요.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투사"(남탓)를 하지않고
성숙한 모습으로 삶의 예배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지체들을 권면하심에 감사애요 경민자매님!
2014-06-01 15:07:59 | 이춘옥
아침 일찍 일 때문에 출근한 남편과 방과 후 수업이 있어 학교에 간 큰 아이 때문에 모처럼 막내 아이와 단둘이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아침을 먹여야 했기에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야채와 햄을 이용해 볶음밥을 해 보려고 야채다지기를 꺼냈습니다.
평소 제가 아끼는 것 중에 하나가 이 야채 다지기입니다. 사이즈는 작고 수동이지만 독일의 유명한 주방용품 회사에서 만든 아이디어 상품인데, 재료를 넣고 손잡이가 달린 줄만 서너 번 잡아당기면 여기저기 튈 염려 없이 원하는 만큼 골고루 다져 나와 요리를 손쉽게 도와줍니다. 뒤처리도 간단해서 잘 이용하고 있는데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리한 칼날이 들어 있어 늘 주의를 기울여 아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상자 채 그대로 넣어서 보관을 잘 해야 합니다.
오늘도 무심코 야채와 햄을 넣고 줄을 두어 번 당기려던 찰나 뚜껑을 너무 가볍게 누른 상태에서 줄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통을 놓쳐 저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야채다지기와 그 안에 있던 미처 썰어지지 않은 온갖 재료들, 그리고 문제의 그 위험한 칼날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쏟아지면서 주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칼날은 다행히 제 발 앞에 떨어져 아찔한 위기도 모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처 다 다지지 못한 재료들은 온통 주방위에 흩어져 순간 몇 초간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평소 다지기를 사용 하면서 주의하여 사용하던 터라 오늘의 사고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침 아이는 거실에서 놀고 있어 ‘이 상황을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치더군요.
그런데 저의 그 다음 반응에 저도 사실 놀랐습니다.
만약 평소 남편과 큰아이가 같은 상황에서 제 곁에 있었다면 분명 저는 그들이 들으라는 듯 더 호들갑을 떨며 온갖 짜증을 부리며 분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이는 웃으며 다가와 치우는 것을 도와주며 “그냥 나가서 먹자.” 그랬을 테지요. 그런데 지금 제 곁에는 누군가 저의 짜증을 받아 줄 사람도 없었지만 이 황당하고 짜증난 상황이 오히려 쉽게 체념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치워야할 상황이고, 아직 3살 밖에 안 된 둘째 아이에게 이 상황이 알려져야 좋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와 저는 지금 배가 고픈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떨어진 재료들을 주어 담았습니다. 그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고, 주어 담은 재료를 물로 씻어 다시 다지기에 넣고 곱게 다져 프라이팬에 쏟았습니다. 아이와 조용히 완성된 볶음밥을 먹으면서 30분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그동안 자의이든 타의이든 벌어졌던 분노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 했었는지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랐고 지금 현재 제가 했던 대처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불안과 갈등에 대처하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방어 기제들이 있는데 이 중 용납할 수 없는 자기 자신 내부의 문제나 결점이 자기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투사’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남을 탓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유독 완벽하고 꼼꼼하며 불같이 화를 잘 내고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하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이런 태도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에 좋은 태도였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부족한 누군가를 속으로 멸시한다거나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오는 좌절감 같은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나는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런데 20대 초반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난 이후부터 이런 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고 고쳐보려고 부단히 애써 본 결과 저의 노력이 10 이라면 나머지 90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제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저도 모르게 제 속의 이 쓴 뿌리들을 서서히 제거 해 주셨습니다. 이 쓴 뿌리들은 어찌나 생명력이 강하고 질긴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저는 물론 가장 가깝게 제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고는 합니다. 아직 어려 연약한 저희 아이들과 저와는 반대로 온유한 성품의 남편이 가장 가까운 피해자인 셈입니다. 저를 교회에서 아시는 분들은 그러시겠지요. ‘아니 자매처럼 얌전하고 조신한 사람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믿을 수 없어요.’ 하시겠지만 그 분들께 부끄럽게 고백하건데 ‘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혹은 이런 모습을 벗어버리고 싶어 나름 노력한 결과이지요.’ 라고 솔직히 고백하려합니다.
저는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 스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체념하면서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그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수습하는 것도 내 몫이 되어 버렸으니 화내서 뭘 해. 어서 치우고 밥이나 먹자.’ 하고 차분히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이전의 제 모습이 얼마나 주님께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닥을 다 닦고 나서 잠시 무릎 꿇고 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지금 벌어진 일을 통해 제 자신의 지난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그동안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제 자신을 용서해 주시고 저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으로도 같은 상황에서 제가 화내기를 멈추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누군가나 아직 3살 밖에 안 된 저희 아이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저게 무슨 시츄(situation)인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평안하더군요.
혹시 지금 저와 같은 경험으로 이미 벌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계시거나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해결점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인식하고, 부족하고 연약함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의지하여 우리를 능히 사망에서 건져 내신 그 분의 권능을 믿고,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닮아가도록 각자가 기도하고 서로 권면하는데 있다고 여겨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를 성도님들께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 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 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그런즉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신 줄 알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자.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 (히 4:12~16)
2014-05-31 18:35:14 | 김경민
자기 이익의 시험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창 13:9).”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삶을 시작하면 우리 앞에는 광활한 땅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다 보면 때로는 오히려 이 권리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양도하게 됩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이는 그런 자리에 우리를 두십니다. 이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육신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영적 통찰력이 무뎌져 주님과의 교신에 차질이 생깁니다. 믿음의 삶에서 가장 큰 적은 죄가 아니라 선, 최선이 아닌 어설픈 차선입니다. 우리는 죄는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어설픈 선은 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난한 선은 최선의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최선을 요구하시는 주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우리가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차선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롯과 땅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아브라함을 바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2014-05-31 15:25:24 | 박진태
그러나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4:7~12)
목사(목자; Pastor)는 그리스도의 양떼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고 보호하는 직무를 가진 자로서 감독과 장로와 같은 사람입니다.(벧전5:2) 어떤 분들은 위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목사, 교사 등이 직분이 아니라 개별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선물)라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목사 겸 교사라는 사람을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결코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알 듯이 목사는 집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신약 교회에 주신 직분(office)입니다.(딤전3:1~7)
그렇다면 목회에 대한 소원을 품은 형제가 자신이 과연 목사로 부르심(소명; Calling)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지침은 무엇이 있을까요? 영국의 대표적 청교도 목회자인 리차드 백스터, 설교의 황태자로 불렸던 찰스 스펄전,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마틴 로이드 존스 이 세 분이 제시했던 항목들 중 중요한 것 위주로 추려 몇 가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
목회에 대한 자발적이고 강력한 소원이 있어야 한다.
목회에 대한 떨쳐 버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정신을 짓누르는 강한 부담감이며 목회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목회에 대한 열망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목회에 대한 열망에 사심이 없어야 한다. 세상적인 야망으로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사역에 적합지 않다.
목사가 될 사람은 보통 수준 이상의 영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진리를 확고히 알고 이해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어야 한다.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중요한 교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서 공적인 설교 기회를 통해 경건한 성도들에게 검증받아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진리로 능히 인도할 만한 출중한 언변을 타고나야 한다.
목회에 부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경건한 사람이어야 하며 동시에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열심은 뛰어나지만,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사 되기 전에 지금까지 복음 사역에 대한 자신의 수고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지 점검해 보라.
구원받은 이후에 너무 쉽게 잘못된 교리나 행동에 빠지는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그의 믿음과 가르침에 배치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역에 대한 여러 자격 요건을 갖추는 일에 게으르고 그것을 꺼리는 사람은 적합하지 않다.
모든 일에 무능한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회 사역에 대해 자만하는 사람도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목사로 부르신 사람은 때와 장소 등의 환경이 차츰 갖춰지고 본인이 준비되면 대개 목회할 사역지가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에게 대입해 점검하면 과연 자신이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 이런 검증의 기간은 사람에 따라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때로 수년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검증은 선배 목회자와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현재 교회의 모든 문제와 배교 현상은 결국 목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어떤 분의 말에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성경 신자들 사이에도 목사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더라도 ‘목사는 반드시 타고나야 한다.’는 선명한 명제나 목사의 직무에 대한 부르심(소명)을 강조하는 것에 은근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목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선정된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은 받는 대상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선물은 선물로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선물로서의 자격과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반대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을 하찮게 여기고 선물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면 선물을 받지 못했던 초라한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알 듯 구약의 대언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활동은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복음 전도자의 활동 영역까지 목사의 직무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 목사 겸 교사는 사실상 성도들을 목양하고 말씀을 선포하며 영적 전장(戰場)에서 주님의 군단을 앞장서 이끄는 신약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입니다.
한국 TV 드라마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재벌들의 일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재벌 집안에 그것도 총수인 회장이 편찮을 때 항상 가방 하나를 들고 황급히 등장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재벌가의 주치의인 대학병원 교수입니다.
아쉬울 것 하나 없고 거만함이 자연스러운 재벌가 사람들조차 이 주치의 선생에게는 깍듯이 대하며 갖은 예의를 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우리가 보도를 통해 접하듯 억만장자도 건강을 잃으면 만년 동안 쓰고 남을 재산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바르게 이끌고 그들의 영적 장애와 병을 고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 주치의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꼭 받아야 할 선물을 거부하면 그 피해는 거부한 당사자에게 돌아갑니다. 자! 여러분 역사상 가장 탁월하게 사역했다는 거의 모든 목사들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명제는 결국 이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는 교육받고 훈련받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 물론 이 말은 부르심을 확인한 목사후보생에게 교육과 훈련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일단 위 명제에 동의한다면 목회 사역의 현장에는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소명이 있는)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로 양분된다는 엄정한 현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소명을 받은 목사는 과연 얼마나 되고 그렇지 못한 목사들의 사역은 무가치한 것일까요? 감히 저는 이 무거운 주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목회를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 옥한흠 목사님의 이야기를 빌려 보겠습니다. 이 분은 분명히 여러 문제와 한계를 지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목회자와 목회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발췌해 올립니다. 옳은 것을 취하고 잘못된 것은 걸러내어 중요한 교훈으로 삼는 것에 문제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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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목사는 앞으로 한국교회 내에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걸출한 영적 리더들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시대를 선도하는 리더들이 나온다면 한국교회의 상황은 다시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목회자는 말씀에 온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옥 목사는 강조한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피와 땀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 그렇다면 한 시대에 쓰임 받는 설교자(목사)는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옥 목사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설교자들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타고난다고 말한다. 찰스 스펄전, 필립스 브룩스,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루터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타고난 설교자들이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에서 ‘설교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목사들도 무언가 타고난 특성이 있다. 설교자에게 유리한 선물(은사)가 있다. 그런 은사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설교 분야에서 앞서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어눌한 사람보다는 능변인 사람, 전달력이 좋은 사람이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효과적인 설교를 하게 마련이다. 영적 파워가 남다른 사람들도 있다. 인격과 개성 자체가 특별히 영성과 관련된 사람들도 있다. 디모데전서 3장에는 감독의 여러 가지 자격이 나온다. 그러나 선물(은사)는 오직 한 가지만 제기된다. 바로 가르치는 재능이다. 선물(은사)는 타고난 것이다. 옥 목사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타고난 은사, 하나님이 주신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땅의 많은 설교자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스스로 타고난 설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교회 중 95%, 아니 99%에선 타고난 설교자가 아닌 평범한 설교자들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세계 역사입니다. 우리는 뛰어난 사람들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은 1% 미만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탁월한 설교자뿐 아니라 99%의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요. 실제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왔습니다. 그들의 인도 아래 수많은 성도가 구원받고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은 실은 영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이용해 성공하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순수하지 않은 야심입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라면 99%의 평범한 설교자보다는 1%의 비범한(타고난) 설교자의 범주에 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에 그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진정 타고난 설교자는 타고난 것만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 가운데 성령님으로 무장하게 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포할 말씀을 주시고,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설교자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시대적 섭리가 있을 때에만 그런 위대한 설교자가 나옵니다. 따라서 거기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지요. 비록 타고난 설교자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설교자의 생명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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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처럼 목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혹독한 검증을 거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타고난 설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가지고 목회 사역에 헌신하게 되는 처절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현대 교회들의 영적 어려움은 갈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의 바른 설교자 그리고 한 사람의 바른 목회후보생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지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며 중대한 직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까?
한없이 부족한 제가 보기에 침례교회 그중에서도 독립된 지역 교회를 이루고 있는 침례 성도들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 지식의 면에서 비교적 뛰어납니다. 또한, 분명히 바른 교리라 할 목사와 목사가 아닌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차등 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될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을지라도 사람은 항상 바른 원리를 뒤틀어 버릴 수 있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성경 신자들이 모였다는 지역교회 안에서 목사(목자)와 회중(양떼)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 어떤 경우에는 양떼 중에 목자의 목자요, 설교자의 선생이 된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성경 지식이 일종의 지적 허영을 일으킬 위험에 바른 교회를 추구하고 성경을 많이 배우는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더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성도 자신이 큰 영적 해악을 초래할 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알리며 그를 기반으로 해서 성경적인 바른 신약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던 형제님들도 모두 목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 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과 목사의 직무에 대한 중대함을 서로 구분하여 지혜롭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휴거 받는 그날까지 킹제임스 성경을 더 널리 알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한국 땅에 마지막 참된 부흥을 앞장서 이끌 사람들도 결국 목사입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이 땅의 성경 신자들은 이런 강렬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이 적은 변두리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가 자신들만의 우물을 파고 고고하게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독립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아쉬움이 생길 겁니다. 서울의 5대 상권과 각 지방의 중심도시 한복판, 사탄의 전략적 요충지에 담대하게 개척의 깃대를 꽂고 영적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탁월한 전사들이 우리 사이에서 속속 배출되길 소망해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선한 사역은 헌신된 목사 한 사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중국에 지음(知音)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존재가치와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에 거문고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백아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아 옆에는 그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만 들어도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연주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종자기가 옆에 있으므로 해서 백아의 연주는 비로소 빛을 발하고 그 존재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백아에게 종자기라는 친구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그가 죽은 후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바른 지역교회에서 이렇게 백아와 종자기처럼 지음(知音)의 관계를 맺는 바른 목사와 조력자들이 배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바른 목사 못지않게 신실한 조력자들도 우리에게는 매우 절실합니다. 요즈음 저는 한 발 물러서 좋은 목사의 사역을 응원하는 소박한 조력자의 삶을 사는 것이 제 분량에 맞고 참 귀하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는 지역교회들은 바른 교리들을 굳건히 수호하면서 한국의 상황에 맞는, 이 땅의 잃어버린 혼들을 얻을 수 있는 젊은 교회들로 큰 폭의 환골탈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룩한 성과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그에 안주하지 않고 진취적인 자세로 담대하게 전쟁터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 영적 리더들이 배출되지 않는다면 단언하건대, 조국과 이 땅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대단히 암울합니다.
젊은이들이 친구의 생일 케익에 촛불을 켜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축하곡으로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어? 사랑하는 아무개 왜 태어났니?’라는 매우 짧은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나서 구원받고 천상의 삶에 비하면 구차하기 짝이 없는 지상에 아직 남겨져 살고 있습니까?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이 지상에 왜 태어났는가 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볼 때 성경 신자라 하고 성경을 남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데 판단은 칼처럼 잘하지만 정작 행위의 열매는 부실하기 그지없지 않습니까? 만약 복음을 알리는 것에 대한 열심이 오순절 은사주의 교인이나 장로교인보다 훨씬 못한데 머리만 잔뜩 커져 있다면 이것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팔짱을 끼고 자신의 지식으로 판단부터 하려 하기 전에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르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모든 열정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이 믿음과 그에 따른 행위가 함께 성장하는 참된 성경 신자입니다.
또한 내가 주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더라.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사6:8)
이사야의 이 고백처럼 영적으로 대단히 척박한 오늘날 분연히 일어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목사와 일생을 그와 함께 기쁘게 헌신할 조력자들이 여기저기서 속속 일어나야 합니다. 사막에서 탈진해 쓰러진 사람에게 한 모금의 물이 목숨을 구하듯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이 일을 주님께서 반드시 성취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05-30 16:32:09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