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을 믿으면 전도가 필요없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2023-11-08 23:01:29 | 이수영
구원받을 사람들, 못 받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 그러니까, 임의로 – 결정, 즉 예정해 두셨다는 주장, 즉 예정론과 그 사람들의 미래를 미리 아시고 예정해 두셨다는 주장, 즉 예지예정론을 처음 접할 당시, 솔직히 별다른 느낌(?) 같은 게 없었답니다.
‘아니, 예정이나 예지예정이나 그게 그것 아닌가? 왜냐? 공의의 하나님께서 완전 마구잡이로(^^) 얘는 구원!, 얘는 불호수! 하는 식으로 배정하시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구원 여부를 예정하시기 앞서 그 미래를 어련히(^^) 알아보셨을 테지. 결국, 예정이나 예지예정이나 그게 그것...맞잖아...?...?’ 라는 생각들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의 자유에 따른(^^) 위와 같은 혼자만의 생각을, 솔직히 말씀 드려서, 상당히 오래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어느 날...어떤 계기였는지는 기억 안 납니다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 예정과 예지예정은 그게 그것,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정론과 예지예정론, 그 둘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 달라도 보통 다른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큰 깨달음인 듯 들더군요.
생각이 어떻게 그토록 확 바뀌게 되더냐구요? ^^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더군요.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이 아니라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예정과 예지예정은 그게 그것...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그것인 것 같은 반면에...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서로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예정론 아닌 예지예정론에 따르면, 구원받고 못 받고는 하나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 제 하기 나름이더라는 거죠.
생각이 그에 이르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이란 존재에게 구원에 관한 선택권을 전적으로 일임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벅찬 느낌이 들었답니다.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믿음, 거룩하신 하나님의 믿음을 보여주신 거잖습니까. 나는 너를 믿는다, 내 안에서 네 마음대로 함 살아봐라...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 동시에 감사 드릴 일인가, 이 말씀입니다.
그에 이어서, 사람이라는 존재의 속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더군요. 무슨 뜻인고 하니...
‘왜? 도대체 왜? 사람인 니(저 말입니다 ^^)가 애당초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했냐고? 니가 왜...감히 하나님 입장에서 그게 그것 아닌가 어쩌고 하며 시건방진 생각 했냐고 글쎄. 애당초 니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던 거라고. 그게 피조물로서의 기본 도리 아냐...? 그리고,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까 바로 명쾌한 답이 나왔잖아. 얼마나 큰 차이, 어~~~~~~~~ㅁ청나게 큰 차이가 있잖아!’라는 생각들
바꾸어 말씀 드리면, ‘사람,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차~암 사악한 존재...예를 들면, 조금만 알아도 바로 하나님 입장 어쩌고 하며 하늘 쳐다보는, 그런 희한한(^^) 속성의 존재...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만 그럴지도 모름 ^^) 그날 이후로, 하늘 바라보기가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럽던지요.
그리고 또 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에 입각하여 예정론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결정권, 선택권을 받아 들고서도 '전적으로 하나님껌니다' 라고 우기는 사람들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심정이 과연 어떠실까...?...어휴 속터져, 쟤들은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니까 ㅉㅉ...라고 하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
...
주님...사악하여 더욱 불쌍한 이 인간을 부디 버리지 마시고 내내 바른길로,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끝)
2023-11-08 22:10:30 | 최영오
지금 바로 묵상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2023-11-02 08:53:50 | 최영오
감사합니다
주님 은총 충만한 하루 보내세요 ~ ^^
2023-11-02 08:46:13 | 최영오
감사합니다
주님 은총 충만한 하루 보내세요 ~ ^^
2023-11-02 08:45:33 | 최영오
말씀 한 장을 읽더라도 여기서의 하나님 의도 뜻 마음은 뭘까?하고 한번쯤은 생각,정리해 보는 습관은 좋은 것 같아요.하나님을 좀 더 알면 알수록 평강과 성화되는 감사한 하루로 잠들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낼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2023-11-01 21:39:02 | 목영주
예수님의 사랑의 부피를 구해보자!
우리 모두는 예전에 면적을 구하는 공식을 외우고 면적을 구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좀더 나아가 부피 구하는 공식도 외우고 부피를 구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피를 구하는 공식은 아래와 같다. 부피를 구하려면 가로, 세로, 높이를 알아야 한다. 가로, 세로, 높이만 알면 아무리 큰 물체라도 부피를 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의 부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부피를 계산하면 된다. 그 공식이 에베소서에 나온다. 예수님의 사랑의 부피를 구하는 공식은 좀 다르다. 4가지를 알아야 한다. 아래 구절을 보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며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장 17절-19절)
예수님의 사랑의 부피를 구하려면 먼저 너비를 알아야 한다. 너비는 폭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비는 동쪽에서 서쪽 끝가지일까? 그 다음으로 길이를 알아야 하는데, 길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깊이와 높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깊이는 바다 밑 끝까지일까? 높이는 셋째 하늘 끝까지일까? 성경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 사랑의 너비, 길이, 깊이, 높이를 인간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사랑의 부피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사랑의 부피를 알기 위한 힌트를 준다. 첫째 힌트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풀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리 구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힌트는 그 값을 구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부피는 3차원 공간의 용적이다. 인간의 3차원적 지식으로는 예수님 사랑의 부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사랑을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한다. 말로 표현하기는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공식으로 부피를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사랑을 어찌 계산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고 한다. 이 무한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는 묵상하고 묵상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묵상하는 양만큼 성도가 흘리는 눈물의 양이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2023-11-01 16:22:29 | 이규환
이웃이라고 다 이웃이 아니고 친구라고 다 친구가아니지요.
요즘 교회라서 찾아다니는 뜨내기 꾼이 있는것 같아요.
제가 직접 본 일도 있고요.
작은 교회는 금방 드러나지만 큰교회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이웃도
있어 지혜가 필요하고 문명의 기기도 필요해요.
2023-10-30 09:29:55 | 이수영
평소 자주 떠올리는 단어 support서포트가 생각나요.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걸 알리기 위해 또는 성경말씀 한줄 전할 수 있을까..그런 사심?으로 바라보면 공감도 저절로 되어지는 듯하구요.요즘은 마음 아픈사람들이 많아 참평안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선 공감이 필수가 된 것 같아요~^^
2023-10-26 18:45:54 | 목영주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말씀하셨음에도 이판사판으로 원수 갚으려 드는 건 믿음 부족? 사랑 부족?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머리 아파서 이쯤에서 생각 접을게요 ~ ^^
2023-10-25 22:27:20 | 최영오
감사합니다
형제님 ~ ^^
2023-10-25 22:20:27 | 최영오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 ^^
2023-10-25 22:19:33 | 최영오
마19:19, 눅10:27 에 기록된 말씀 “너는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 그 말씀은 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말씀으로서 레19:18에 기록된 바로 그 말씀이더군요.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가 채워 주어야 할 필요를 지닌 사람이 곧 우리의 이웃이다’ 라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저자 : 존 맥아더 목사) 라는 책에서 그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눅10:27-37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말입니다.
위 ‘이웃의 정의’ 를 접하는 순간, ‘엥?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정의를 그렇게 내리지 않으셨...잖아...?’ 라는 엉뚱한 건지...생뚱맞은 건지 모르겠지만...^^...어떤 이의를 품게 되었답니다.
그래서...반론 한 번 제시해 보려고(감히 ^^) 눅10:25-37 해당 구절들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상황을 파악컨대, 딴에는 상당히(매우?) 의롭게 살아가던 어떤 율법사가 마치 누가 이웃인지 몰라서 이웃 사랑 못 하는 듯 하면서 은근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가다가 강도 만난 어떤 사람과 그를 치료해준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드신 다음 “너는 누가 강도들 만난 자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죠.
어떻게 한 번 잘난 체해 보려던 율법사는 바로 답하죠. “그 – 강도 만난 자 – 에게 긍휼을 베푼 자이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명색이 율법사한테 뭔 그런 쉬운 질문을 하십니껴?’ 라는 듯이 대답했을 율법사 표정이 보이는 듯합니다만. ^^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율법사는 걸려든(?) 거죠.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라는 말씀, 지극히 간단명료한 그 말씀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이웃인지 몰라서 이웃 사랑 못 한다는 그런 말 같잖은(^^) 말, 어리석은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뜻이니까요.
...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우선 들더군요. ‘이웃은 그런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이들 중 누가 이웃이게~?’ 라고 물어보사 질문자 스스로 답하도록 하는 교육 방식 말입니다. (주입식 교육, no! ^^)
2,000년 전 그때 이미 초현대식 교육 방식으로 가르치셨다니... ^^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질문자, 즉 잘난 체하는 율법사한테 과제를 주고 계시잖습니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고 말입니다. 답은 질문자, 제 입으로 말하도록 하시면서 과제를 주시는 그 특별한 교육 방식이 놀랍다는 생각 듭디다만.
그리고 또...그냥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가 아니라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고 하시잖습니까. 말씀인즉, ‘이웃이 누군지 이제 알았겠지? 어서 가서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이웃들 열심히 찾아봐’ 라는 뜻 같습니다만. 율법사를 더이상 얼쩡거리고 있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 것...아닌가요...? ^^ 질문자를 기분좋게 돌려세워 버리시는 답변 방식, 놀랍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또...생각 하나가 더 있습니다 (허접한(^^) 생각이지만) 뭔고 하니, 나름 잘난 맛에 살던 그 율법사가 돌아가면서 어떤 생각 또는 말을 했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괜히 말 한번 잘못했다가 어쩌고 저쩌고’ 라며 궁시렁거리지는 않았을까...?...싶기도 합디다만.
...
본론 외적인 다소 생뚱맞은(^^) 생각들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위 책 속에 적힌 ‘이웃의 정의’, 즉 ‘우리가 채워 주어야 할 필요를 지닌 사람이 곧 우리의 이웃이다’ 라는 표현과, 눅10:25-37에 기록된 예수님의 ‘누가 이웃인가’ 관련 말씀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이랄까, 고백 같은 것을 이하에서 밝혀보겠습니다.
우선...이웃이란 ‘우리가 채워 주어야 할 필요를 지닌 사람’, 그 정의가 정확히 옳다는 결론이 내려지더군요. 애당초 품었던 제 이의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래, 네가 말했듯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도와주는 그 사람(A)이 바로 이웃(B)이다 (A=B)’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A가 되라)” 고 하신 예수님 말씀...그 말씀에 담긴 뜻이 바로 그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의미입니다.
고백컨대...눅10:25-37 구절들의 말씀 속에 ‘이웃의 정의’, 정확한 정의가...그런 의미로 내려져 있었음을...큰 뉘우침과 함께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주님의 그 말씀인즉, 이웃은 너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라기 보다는 네가 가서 도와줄 필요 있는 그 사람이다...가서 이웃이 되어 주라...라는 뜻임을...이제서야...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알았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 끝 )
2023-10-25 22:01:36 | 최영오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는 조카 사탄이 믿는 성도들을 무너뜨리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삼촌 사탄에게 쓰는 편지로 인간의 나약함과 믿음의 강함이 대비 되거든요.
스쿠르테이프가 삼촌 사탄에게 질문하면 노련한 삼촌 사탄은 인간은 이러하니 이렇게 공략하라고 조언을 해주죠.
" 애국자가 되게 하라"는 처방을 해요.
애국자가 되면 왜 넘어지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 국수주의가 되기 쉬운 인간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음에 놀 랐지요.
인간은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니까.
2023-10-19 05:42:53 | 이수영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보기 흉하게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하나님말씀입니다. 불법을 불법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분별, 사람과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믿음으로)모든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훈련만이 그런 용기도 나올 수 있게 하는게 아닐까..소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10-18 14:49:15 | 목영주
4가지 복음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10-18 13:47:15 | 이규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집 안까지 들어와 있는 전기를 생각하게 됩니다.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오니까요.
2023-10-18 13:43:50 | 이규환
믿음과 사랑 : 하마스와 이스라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전 세계가 중동지역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이들의 전쟁은 믿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 부족해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믿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대하여 들은 뒤에 나도 기도할 때에 너희에 관하여 말하며 너희로 인해 감사드리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고’(에베소서 1장 15-16절)
성경을 보면 믿음과 사랑은 항상 함께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부딪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바울이 기뻐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그랬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3장 3절에서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속았고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을 섬기며 악의와 시기 가운데 살고 증오하며 서로 미워하였다.'고 지적한다. 지금도 세상은 곳곳에서 서로 미워하고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정작 사랑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신호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서로를 미워하기에는 충분한 믿음이지만, 서로를 사랑하기에는 충분한 믿음은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기에 전쟁을 하는가? 이들의 믿음은 전쟁을 불사할 만큼 강하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 아마도 주님 오실 때까지 싸울 것이다. 이렇게 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무장을 하지 않는 민간인을 학살하듯이 쏘아 죽일 수 있는가? 양쪽이 다 책임이 있다. 이들이 믿는 믿음은 도대체 무슨 믿음인가? 사랑할 줄 모르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에베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한 것 같이, 팔레스타인(하마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길 바라고,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길 기도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다들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시끄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니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2023-10-18 13:18:16 | 이규환
바른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통한 바른 믿음생활로 바른 구원에 이르시는 분들 날로 증가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입니다. 사랑침례교회 형제님~ 자매님~~ 힘내세요!! 저두 힘내겠습니다~^^
2023-10-18 10:18:38 | 목영주
성경세상철...!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
2023-10-17 01:21:05 | 최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