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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달전 쯤부터 딸과 잠언말씀을 읽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요. 처음엔 새벽이라 목소리가 잘나오지 않는다, 학교갈준비시간이 없다 투덜대던 아이가 이젠 20분 일찍일어나 세수하고 성경을 읽고 학교갈 준비를 합니다. 이제는 잠언 9:10절말씀이 저희 가족의 날마다의 기도제목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
2012-07-14 20:58:25 | 윤영원
무엇이든지 기본이 탄탄해야 그 위에 더 얹을 수 있지요. 자녀가 처음으로 만나는 선생님은 부모이기에 부모가 하는 말과 행동을 아이들은 그대로 복사하는 것을 알지요. 어떨 땐 웃음이 날 정도로 이쁘기도하지만 어떤 경우는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것 까지도. 아이들이 소꿉놀이 할 때 보면 아빠와 엄마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드러나지요. 부모가 일관성이 없으면 아이들도 역시 굴곡이 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로 인해 부모가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어떤 경우는 주관적으로 만 봐서 문제가 있기도 하고요. 부모가 아이와 함께 무엇을 하든 약속은 꼭 지키는 일관성을 보여 주시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부모님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복되지요. 시리즈로 계속 써주시면 어떨지요?
2012-07-14 12:17:57 | 이수영
  벌써 오래전부터 자녀교육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막상 쓰려고 하니 글쓰기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특히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두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항상 기도하며 가르치고 다스리지만, 자녀 교육에 있어서 실수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하는 고민까지 하다 보니 집필 작업이 그다지 진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평소 생각하고 고민하던 바를 함께 나누며 기도하자는 의미에서 짧게나마 글을 정리해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어떻게 주님의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은 모든 크리스천 부모들의 삶 속에서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잠언 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오늘날 각 가정마다 교회마다 “어떻게 다음 세대에 우리의 신앙을 전수해 주어야 하는가?”, “자녀들을 어떻게 주님 안에서 잘 양육할 수 있을까?”, “교회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주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점점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고, 많은 교회들이 성경 말씀을 지루한 옛날이야기나 고리타분한 도덕 교과서로 여기는 아이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간식과 선물을 제공하고 영화나 오락 등을 제공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인본주의 중심의 진화론적 사고를 가진 현 시대의 교육시스템과 사회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과 교회학교 아이들을 지켜나갈 지에 대해 항상 기도하며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지식의 시작이 주를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머리를 들게 되고, 몸을 가누며 기어 다니고, 아장아장 걷게 되며, 점차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라가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모는 그들에게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잘못된 정보를 흡수하기 전에, 주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고, 또 나쁜 정보들을 스스로 걸러내는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지식은 학교에서, 신앙은 교회에서" 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식도 믿음도 그 기초는 먼저 가정에서 형성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의 시작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므로 지식과 신앙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주님의 말씀 속에 거하는 자녀들은 가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혼란을 겪을 수는 있으나 결코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헛되고 거짓되며 속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이사야 40: 7)   부모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자녀교육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아이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 나가려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결코 스스로 바르게 자랄 수 없습니다. 정원을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꽃들은 다 시들어 말라죽고 잡초만 무성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냥 내버려두면 쉽게 잡초 밭으로 변해 버립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시편 51:5), 가만히 내버려 둘 경우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보다는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리석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언 22: 15). 내 눈에 좋은 것, 내 귀에 좋은 것, 내 몸에 좋은 것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아기가 뭔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해결 될 때까지 울어댑니다. 주위 환경이나 상황,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혹은 잠깐의 인내도 찾아보기 힘들죠. 사람들은 아기들을 보며 천사와 같다고 표현하고 때로는 로크(John Rocke)의 백지설에 빗대며 아기들이야 말로 때가 묻지 않은 선함 그 자체이며 순수하다고 합니다. 물론 자는 아이는 천사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마도 그것은 아이가 자고 있을 때뿐일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고 있는 자신의 아이는 천사와도 같으며 엄마도 숨 좀 돌리게 그 잠이 조금이라도 길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제 두 아들들도 태어나서 5~6개월은 거의 밤마다 두어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울어댔던 기억이 있네요).    어떤 부모는 “아직 어린 아이들은 아이다워야 한다.”라고 하며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놔두길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이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악한 것을 쫒아가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20세기를 주름잡았던 교육의 기본 프레임은 결국 듀이(Dewey)의 이론에 근거한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 실용주의, 경험 중심주의 교육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열린교육이나 창의력 개발, 혹은 아이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이론이 현재까지도 한국 교육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흐름은 교회 학교에까지 악영향을 미쳐 현란한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교회학교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영화를 활용한 성경이야기는 예수님을 마치 만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중의 하나인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인간 중심주의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 말씀이 중심이 되는 교육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쓰고, 암송하게 하는 것이 가정에서 해야 할 신앙교육의 핵심이며, 교회학교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확실한 교육방법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하루에 단 5분 혹은 10분만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실 것을 제안합니다. 만약 글을 못 읽는 아이라면 부모님이 읽어주거나 함께 한자 한자 짚어가면서 읽으면 됩니다. 만약 글을 읽을 수 있는 아이라면 함께 큰 소리로 읽게 하고, 쓰게 하고,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게 하십시오.    어떤 부모님은 성경 말씀을 설명해줘야 하는데 성경을 잘 몰라서 못한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부모님이 굳이 성경 강론을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저 아이와 함께 성경을 읽기만 해도 그 말씀은 우리 가운데 능력이 됩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이 다들 바빠서 매일 함께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말을 활용해서라도 시작하십시오. 어떤 부모님은 이런 것은 아빠가 해야 한다고 책임을 미룹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들을 보살필 여건이 안 되면 먼저 엄마가 자녀와 함께 성경읽기를 시작하십시오. 반대로 엄마가 시간이 나지 않으면, 아빠가 먼저 아이들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절대 “너희들끼리 성경 읽고 있어라.” 라고 아이들에게 맡겨 두지 마십시오. 우리 아이들은 내버려두면 게으름을 피우고, 한 눈 팔며 딴 짓을 하고, 옳은 길보다는 편한 길을 택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내 아이를 정말 바른 신앙 안에서 잘 키우고 싶습니까? 학교 숙제나 성적보다도, 당장 눈앞의 시험보다도 정말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아이가 지금은 고 3이라 입시가 끝나고 나서요. 학교 성적을 좀 더 올리고 나서요. 학교에 다니고, 또 학원에 가느라 너무 바빠요.    이런 부모님들은 절대로 자기 자녀가 믿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가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값진 양육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아이를 주님의 자녀로 잘 성장 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엄마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지식의 기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지혜는 곧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과연 자녀교육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 말씀 위에 확고한 기초를 두고 자녀를 양육하여 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녀들을 올바른 주님의 일꾼으로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책임인 것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시 글쓰기는 힘든 작업입니다. 다 쓰고 나니 너무 원론적인 내용이라는 느낌이 듭니다만, 원론적인 이 부분(가정에서 성경 읽고 쓰고 암송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말이지요.
2012-07-14 11:49:20 | 이주옥
저의 외삼촌댁도 과수원을 하셨는데 70년대 중후반 그곳도 전기가 안들어 왔지요 어렸을적인데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나저나 고모님의 장난이 정말 장난아니었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2-07-13 11:44:08 | 송재근
어릴 때의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이 흉터로 남아있네요. 충직한 친구를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쓰디쓴 충고가 약이 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자기 성장을 잘 해 나가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직언은 정말 양날선 칼 맞아요. 아프죠. 피도 나도 흉터도 생기고... 그러나 아픔이 있어야 성숙해 지는 것 같아요.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 문을 열고 주님앞에서 자기를 성찰 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은 결과가 되지요. 사람은 자기 뒷모습을 보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 말해주거나 거울을 통해서 보잖아요? 지체이기 때문에 직언도 충고도 있는 것 아닐까요? 거울처럼. 단지 방법과 사랑의 마음으로 지혜롭게 할 수 있으면 가장 주님께서 기뻐하실 좋은 일이죠. 녹음된 제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이상하고 어이없고 놀랬어요. 내가 아는 내 목소리가 아니고 피 죽도 못먹은 목소리 같아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남들이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를 수 있음을 알았던 순간이었죠. 전 제 목소리가 굵고 크다고 느끼고 있었거든요.^^ 저의 착각이랄까 미련함이랄까...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모습들이 있기에 제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 얘기가 있는 것 같아요.
2012-07-12 22:32:46 | 이수영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목적있는 말이 하고 싶을 때는 아주 잠시라도 나를 먼저 살펴야 되겠습니다. (시19:12) 『누가 능히 자기 잘못들을 깨달으리요? 주께서는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그 다음에 (살전 5:14)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권면하노니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며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하라. (롬 14: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이게 요즘 제가 겪는 일 중의 하나랍니다.
2012-07-12 20:39:47 | 최현욱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도 꼭 필요한 글입니다. 직언의 안 좋은 면을 솔직한 표현이라며 나를 위로하고 다른사람에겐 합리화시키려 했던것이 부끄럽게 생각되네요. 타인을 배려하는 대화기술이 부족함을 시인하고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온유하게 말 하는 태도에 신경을 쓰고 말을 아껴야겠네요.
2012-07-12 15:20:43 | 김상희
고모들 장난이 장난이 아니었군요^^ 갈수록 노아의 때와 흡사해져 가니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있는게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오전에도 잘못된 일들로 인해 절제하지 못하고 직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는데.. 제게 참 필요한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07-12 13:36:24 | 김경양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갔읍니다. 60년대 후반기였으므로 모든 것이 낙후된 환경이었구요, 도심에서 살다가 친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면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버선 발로 뛰어 나오실 정도로 반가이 맞아 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시 앞서가는 농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호롱불을 사용하던 시절에 전기를 가장 먼저 끌어서 사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정에 사기로 된 애자를 감고 전기줄이 쳐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젖소를 4-5마리정도 키우셨고, 과수원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과수원을 날라 가듯이 뛰어갑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참외와 수박을 원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고모와 삼촌이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과수원은 그야말로 땡볕이었습니다. 우마차길 옆으로는 아카시야 덤불이 우거져 있었지만 그늘로 쓰기에는 적당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수원 한 복판에는 원두막이 있어서 그늘도 만들어 주고, 갑자기 소나기가 올 때면 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2층으로 된 원두막은 사방으로 뚫려 있고 그늘 창이 있어서 그야말로 놀이터로는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 원두막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원두막위에서 놀고 있는데 고모가 식칼을 가지고 마루 틈 사이로 찔러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나는 무서워 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밑에서 올라오는 칼을 피하려고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고모들은 나의 행동이 재미있었는지 계속해서 칼을 찔러 대었습니다. 칼이 위에서 올라 올 때 마다 펄적 펄적 뛰어 다녔고, 급기야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는데 그 칼에 발을 찔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목에 당시 칼에 찔린 흉터가 남아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마루 틈으로 칼을 찌른다고 한들 그 틈을 피해서 서있기만 하면 아무 염려가 없었을 텐데 괜히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칼에 찔리고 만 것이죠, 고모들도 칼에 찔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장난삼아 한 것일 뿐인데 장손이 칼에 찔렸으니 크게 당황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찔린 것만 기억이 날 뿐 다음 상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청 울었던 것 같고 이일로 고모들은 할아버지에게 혼 줄이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기억은 흐릿해도 당시 초등학교 1-2학년 때쯤 일어난 이 사건은 지금까지 상처와 함께 두고 두고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도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 나도록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벧전5:8) 사실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 있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널빤지의 틈을 피해서 널빤지 위에만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었죠,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마귀는 믿는 자들을 해할 권세가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괜히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위험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험했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조급한 마음에 성급한 결정을 하거나 믿음의 자리에 이탈된 상태에서 많이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7-8절)  장마의 소식도 있지만 더운 여름 날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생명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씀과 가까이 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시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에서 발췌한 내용을 겸하여 올립니다.     사람들은 저 마다 마음속에 벽이 있다  직언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양면의 칼날과도 같다. 그래서 직언은 홀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새로운 길을 여는 개척자로서의 당연한 착각하기 쉬운데 그래서는 안된다. 이는 직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다. 사람을 대하면서 일일이 지적하고 성격상 결점을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은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에게 부담감만 안겨주는 것이다. 당신은 직언을 하면서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가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 마다 마음속에 벽이 있다. 그 벽안에 자존심을 숨기고 있는데 당신이 직언을 통해 그것을 깨뜨리려 한다면 어느 누가 좋아 하겠는가? 말은 아낄 수 있을 때 최대한 아껴야 한다. 반드시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원만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라 이것도 기술이다. 진정 변화를 시도하고 싶거든 변화로 인해 잠시 일어나는 문제들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자신이 있을 때 그렇게 하라.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좋은글 중에서-
2012-07-12 11:08:38 | 조양교
둘러보면 혜택받는 것도 많고 누리는 것도 많은데 정작 자족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보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을 보아야 하는데 너무 위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12-07-12 11:04:12 | 조양교
우연히 장애인 사업장 얘기를 보게 되었는데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어요. 항상 즐겁게 웃으면서 일을 하기에 기자가 물었지요.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아니요 일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고요 이 일이 좋아요.” 하면서 또 환하게 웃는거에요.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매일 같이 똑같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그 아가씨처럼 즐겁게 일을 했는지? 반성하게 되었어요. 그 사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국가가 주는 돈을 포기하고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을 원했어요. 일하고 싶다고...... 국가에서 주는 돈 편히 앉아서 받을 수 있지만 내 힘으로 일하고 보수를 받고 나름대로 꿈을 위해 살 수 있어서 좋다고...... 너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반대로 일하지 않고 살 수 없나를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장애가 있지만 자기 힘으로 일하고 작지만 나름대로의 보람을 누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었어요.   후배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직까지 직장생활 중인 싱글입니다. “언니는 너무 좋겠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 매일 출근해야 하지 않아서.” 공교롭게도 아침에 방송에서 직장을 구하는 절절한 편지를 들었거든요. 어떤 사람은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그 가운데 끼기를 소원하고 너무 너무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금은 위로가 되었는지 고맙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가끔은 사람들이 눈이 앞에만 있어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 안에 들어와 오랜 시간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고통, 어려움, 고난, 오래 기다림, 오래 참음, 오해, 등등- 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었다는 말씀을 인용하지 않아도 고난 중에는 전능자이신 주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고 사람의 매를 사용해서 주님만이 신실하시고 유일한 피난처이신 것을 알게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시간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 같아요.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요. 당시에는 깜깜한 터널 속에서 ‘ 끝이 있긴 한가?’ 싶기도 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그 가운데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눈물로 동행하셨던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나은 환경과 조금 더 풍족한 생활이 목표가 되면 노예가 되어버리고 기쁨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단순하게 몸만 낮추어도 서 있을 땐 전혀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지요. 주님께서도 바울도 겸손을 자주 말하고 족한 줄 아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급했지요. 지금 이 시대에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 선택하며 살아야겠어요. 작은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알면서 친절을 베풀고 나누면서 살고 싶습니다.
2012-07-12 01:23:23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