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네요~! 마음에 확 와닿네요~!
2024-10-25 09:52:04 | 이남규
자매님 글 덕분에 오늘도 바르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에요~^^ 고맙습니다! 하나님기준을 알면서도 (이도저도 아닌) 오른쪽도 옳고 왼쪽도 좋다는 것은 세상이 두려워서(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일수도 있고,세상사람들에게 마치 포용력있게 보여지는 유혹때문이 아닐까..생각이 들어요. 그리스도인엄마였음에도 세상염려로 가득해 아이들 교육을 세상과 하나님말씀 중간쯤 걸쳐 지도했던경우,뿌린대로 거둔 경험(적어도 참평안은 없는)이 있습니다. 요즘세상은 알맹이는 안보이고 포장에 계속 포장만 해대서 거짓이 겹겹이 싸여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옳고 바른쪽 하나만 해도 돼서 오히려 갈등없이 넘 자유로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는지 그것들을 시험하라.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라-요한일서 4장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4-10-25 07:58:46 | 목영주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믿음으로 합당한 것을 바라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4-10-25 07:35:40 | 김지훈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우리 주 하나님의 뜻을 더 바르게 알아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4-10-25 07:22:26 | 김지훈
내 머릿속에 종종 맴도는 질문이 있다. 주님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기 이 땅 교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혹은 미치고 있는 이들 중에, 종교통합운동 즉 교회의 배교의 흐름을 주도하고 혹은 적극 지지하는 이들을 진정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하는 격동하는 마음 가운데 그들을 정말 천국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그들은 정말 구원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 가운데 생각난 말씀이 있었다. "오직 너희의 대화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이것들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느니라."<마5:37>
우리는 가끔 "선을 넘지 말라."는 조언을 들을 때가 있다. 어찌 보면 이 말씀도 그런 범주의 말씀으로 들린다.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대응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 쳐 놓으신 바리케이트를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한다. 그 바리케이트를 무시하고 넘어갈 때 사건 현장이 훼손되어 진실을 밝히는데 지장을 줄 수 았는 것처럼 우리의 옳은 대응이 오히려 악하게 변질될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리라.
"그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 혹은 그가 진짜 구원받았을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별하실 사항이고 우리가 관계할 일이 아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이 말하거나 행한 것이 성경에 비춰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분명한 입장에 서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성경이 아니오 한 것에 대헤 예 한다든지 혹은 예 한 것에 아니오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악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악을 행하는 자들의 최종 운명을 정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므로 우리가 그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은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맡김이 옳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악에 이끌릴 수 있다는 경고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2024-10-24 16:04:32 | 박혜영
형제님 덕분에 이른 아침 시편 54편으로 하나님께 인사드렸습니다아~^^전지전능하신 아버지가 어떤마음을 보시는지 (무엇보다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말씀들이 성경 한권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감사입니다.
2024-10-24 08:10:07 | 목영주
‘예언적 완료형’ 기도
예언적 완료형은 성경에서 미래의 사건을 마치 과거에 일어난 것처럼 표현하는 문법적 구조라고 한다. 이 시제는 미래에 발생할 일이지만 확실하게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된다. 예언적 완료형 기도의 예를 보자.
사무엘기상 26장을 보면, 1~3절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와서 말하되, 다윗이 여시몬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지 아니하니이까? 라고 하니 그때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선정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 여시몬 앞 하길라 산의 길가에 진을 치니라.’ 이때 쓴 시가 아래 시편 54편이다.
느기놋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마스길, 다윗의 시,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와서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와 함께 숨어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였을 때 지은 시
1.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2.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입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났으며 압제자들이 내 혼을 찾나니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셀라,
4. 보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주께서는 내 혼을 떠받쳐 주는 자들과 함께하시는도다.
5. 그분께서 내 원수들에게 그들의 악을 보복하시리니 주의 진리로 그들을 끊어 버리소서.
6. 내가 주께 자원하여 희생물을 드리리이다. 오 주여,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7. 이는 그분께서 모든 고난에서 나를 구출하셨기 때문이라. 그분의 소원이 내 원수들 위에서 이루어짐을 내 눈이 보았도다.
사울 왕의 추격에 쫓기는 상황인데, 그분께서 모든 고난에서 나를 구출하셨고, 그분의 소원이 내 원수들 위에서 이루어진 것을 봤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할까? 아래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2024-10-24 06:37:55 | 이규환
책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독자생존이란 말을 생각하면서...
2024-10-23 15:22:05 | 이규환
--악을 보면서도 아무 일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 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질타속에서도 옳은소리를 해야만하는,해 주시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님들을 우리 예수님이 엄청 지켜주셨으면..기도 드립니다. 사랑침례교회 미디어사역을 통해 세상 많은 분들이 눈이 뜨여 바른진리 안에서의 자유로움으로 행복한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2024-10-23 09:16:47 | 목영주
아인슈타인이 남긴 많은 명언들 중 두 개를 우선 적어 봅니다. 하나는 작금의 위태로운 나라 상황에 처하여 그 의미가 새삼 무겁게 느껴지는 내용으로서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악을 보면서도 아무 일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깊어가는 가을, 소위 독서의 계절 맞이하여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내용으로서 ‘엄청 많이 읽으면서 머리를 쓰지 않는 사람은 생각을 게을리하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후자의 명언, 즉 독서 스타일 관련 명언을 달리 표현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많이 읽기만 하는 사람은 점점 생각하는 것 자체를 게을리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은 생각하는 능력(생각의 깊이, 폭 등을 포함하는 개념)의 저하로까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인즉, 사실은...상당히 양심 찔리는 위 독서 스타일 관련 명언이랍니다. 왜 양심 찔리느냐구요? 아침에 잠시, 그것도 자~암시 하나님 말씀 조금 읽는 것 빼고 책이라곤 거의 안 읽는 사람이 감히 독서 스타일 어쩌고 하려니까 양심 찔릴 수밖에 없는 거죠.^^ 양심 찔리는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의 독서 스타일 관련 명언, 그러니까, 책을 읽되 머리를 쓰면서 읽어야 한다는 그 말에 감동 수준의 강한 공감이 느껴졌답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쓴다 함은 책 내용을 머릿속에 입력만 하지 않고 해당 내용 관련 생각(들) 해가면서 읽는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말하자면, 읽기에만 몰입하지 말고 생각 좀 해가면서 읽어라,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위 독서 스타일 관련 명언에 바로 공감했던 까닭인즉, 성경 또는 기독교 신앙 관련 온·오프라인 상의 자료들에 접하여 많이 경험한 바입니다만, 생각 좀 해가면서 읽어야겠다는 다짐 거듭하곤 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읽고 있는 부분과는 다른 어떤 내용(들)과 관련지어 보거나, 또는 해당 부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는 등등의 방식으로 머리 써가며 읽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성경 또는 기독교 신앙 관련 자료들을 왜 그런 식으로, 번거롭게도 그런 식으로 읽어야겠다는 다짐 하곤 했었느냐 하면, 교리 체계를 심히 왜곡시켜 버린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변개된 NIV 성경 등의 현대 역본 성경 구절들에다 칼빈주의 교리까지 곁들여 쓰여진 절대(?) 다수의 소위 양서(良書)들을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는 킹 제임스 성경 속 참된 진리의 말씀과 그 토대 위에 구축된 바른 교리 체계, 믿음 체계를 망쳐 버릴 수도 있겠다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나 할까요.
글이 다소 길어지는 감 없지 않습니다만, 지금 읽고 있는 부분과는 다른 어떤 내용(들)과 관련지어 보면서 우리 성경, 즉 킹 제임스 성경 읽어 나가는 경우의 예를 한 번 짚어 보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라는 갈2:20 말씀에 이르러 잠시 읽기를 멈추고...NIV 성경 등의 현대역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표기하는 한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모든 자들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롬3:22 말씀 중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표기한 결과...하나님의 의, 그 본질 자체가 명백히 달라져 버렸으니...교리 자체를 달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라는 마4:17 말씀에 이르러 역시 잠시 읽기를 멈추고...말씀 중 ’하늘의 왕국‘은 단2:44 말씀 중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우실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한 왕국’, 바로 그 왕국, 즉 킹덤(kingdom)을 의미함에도 NIV 성경 등의 현대 역본 성경에서는 마4:17의 경우 ‘하늘의 왕국’ 아니라 ‘천국’으로 표기하는 한편, 단2:44을 비롯한 성경 말씀 중의 모든 ‘왕국’(362 개 절에 나옴)을 ‘나라’ 또는 ‘국(國)’으로 표기(특별한 의미 없는 2 개소(시46:6, 행12:20) 제외)한 결과...성경의 주제라고 할 ‘왕국’, 그 개념 자체가 완전히 지워져 버렸으니...참으로 정죄의 대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등의 생각들 하며 성경 읽어 나가는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독서 스타일로 성경 읽어서야 어느 세월에 성경 일독 하겠느냐구요?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죠. 그렇지만...그런 식으로 성경 읽을 경우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 판에 새겨질 ‘하나님의 의’와 ‘왕국’에 대한 개념과 관련 교리 체계, 믿음 체계는 더할 수 없이 견고할 것이므로, 책 중의 책이요 말씀 중의 말씀이라 할 성경만은 머리를 써서, 나름대로 생각(들) 좀 하면서 읽어 나감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가끔씩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 말씀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 뜻을 조금은 더 바르게 알아가고 그만큼 또 조금은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가끔씩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명색이(^^) 그리스도인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서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취할 자세...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말씀 중 ‘아는 것’, 그에 담긴 뜻이 그런 것...아닐까...요...? ( 끝 )
2024-10-22 23:03:33 | 최영오
인권의 정의와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듯 하게 포장하여 미혹하려는 자들, 반성경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감정에 호소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024-10-18 22:59:50 | 김지훈
인권의 종류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전 정부 시절에 황당한 일이 있었다. 내용인 즉, 집에서 설거지를 시키면 인권 침해이므로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학교 3학년 사회 교과서에 나온 내용이다. 교과서는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권 침해 사례를 소개하면서 여자인 나에게만 설거지를 시킨다는 예를 들었는데, 이 교과서는 가정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권위원회에 신고하거나 지역 신문에 의견을 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부모 단체는 부모와 소통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인권 침해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하고 또 해결을 위해 가정 밖의 기관을 이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헌법이 정한 부모 교육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아니다.
이에 인권의 종류를 알아보고,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떤 인권 교육을 받고 있는지, 또 사회에서는 어떤 인권 개념이 활개를 치고 있는지 살펴본다.
인권(인간의 권리)은 주체가 누구인지, 기준의 무엇인지에 따라 아래와 같이 4가지로 분류한다.
구분
주체
기준
천부적 인권
하나님(신)
성경(자연)
보편적 인권
다수 인간
도덕과 윤리
상대적 인권
(성)소수자, 특정 집단
이념, 사상
자의적 인권
나(자신)
개인
1. 천부적 인권
천부적 인권은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를 말한다. 천부적 인권을 구체적으로 잘 정리한 문헌은 1776년에 작성된 미국 독립선언문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천부적 인권은 성경에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이성과 양심을 가진 존재로 존엄하게 창조하였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성경에서 위임된 인간의 권리는 1)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 2) 땅을 정복하라. 3)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이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이러한 권리는 의무이기도 하다. 천부적 인원 실현을 위한 필수적 권리는 종교의 자유이며 이에 따른 원칙이 정교분리의 원칙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가 권력은 특정 종교와 종파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1) 종교 실행(예배)의 자유, 2) 선교(포교)의 자유, 3) 타 종교를 비판할 자유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 보편적 인권
보편적 인권은 모든 사람(다수)이 가지는 도덕적 권리를 말한다. 보편적 권리는 부나 권력, 인종이나 성별 또는 장애 여부 등 인간을 둘러싼 어떠한 조건과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인권이다. 보편적 인권의 기원은 세계 인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으며, 1993년 비엔나 인권 선언은 더 구체적이다. 비엔나 인권 선언은 ‘인권은 국적과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인위적으로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로 분리할 수 없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종교 및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3. 상대적 인권
상대적 인권은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에게 평등하게 배분하려고 하는 배분적 원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상대적 인권의 기원은 칼 마르크스다. 인간해방을 위한 유물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자기 소회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천부적 인권과 보편적 인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상대적 인권의 핵심적 단어는 소수자(Minority)다. 소수자들은 숫자상으로는 많지만, 노동자, 비정규직, 실업자, 소수 종교, 흑인, 학교 안에서 학생, 군대 내에서 병사 등이 해당하며, 정치적으로는 소수 정당, 관념적으로는 여성, 장애인 등이 있다. 또한 실제 숫자상으로 적은 성소수자, 이주민, 죄수, 병역 거부자, 혼혈인, 사이비 종교 집단 등이다. 상대적 인권은 강자는 가해자로, 약자는 피해자로 인식하고 사회를 강자와 약자로 나눈다.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여성, 원주민과 이주민, 성다수자와 성소수자, 부모아 자녀,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어 이분법적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이분법적 구조를 없애는 것이 평등이며, 약자에게만 인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권과 복지를 혼동한다. 자신들을 비판하면 혐오한다며 ‘혐오 프레임’을 씌운다.
4. 자의적 인권
자의적 인권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며, 일정한 사적 사항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를 자기결정권이라고 한다. 대표적 권리로 성적 자기결정권, 자기 신체결정권, 성별 자기결정권이 있다. 자기 결정권은 나의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은 내가 결정(Free-sex)하는 것이고, 자기 신체 결정권은 나의 신체와 관련된 모든 것은 내가 결정(재생산권)하는 것이고 성별 자기결정권은 내가 나의 성별을 결정(젠더, Gender)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를 권리로 변질시키고, 권리를 남용하는 문제가 있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동성애, 낙태, 성전환, 젠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 등은 모두 자의적 인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권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앞에서 '설거지 시키면 신고하라'는 내용이 어떤 인권에 해당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심상정 등이 마련한 포괄적 차별금지 법안의 내용을 보면 어떤 인권을 겨냥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좌경화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극도로 미워하고 천부적 인권은 물론 보편적 인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적 인권과 자의적 인권에 경도되어 있다. 이들은 목적은 가정 해체다. 이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러한 것들을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도(약 700명의 강사들이 상대적 인권과 자의적 인권을 가르치고 있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몫을 하는 단체가 있으니 바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다.
※참고문헌
1. 김영길, 인권의 딜레마(도서출판 보담, 2021년)
2. 길원평, 김소연, 김영길, 명재진, 지영준, 현숙경 등, 인원이란 무엇인가(한국정직운동본부, 2023년)
2024-10-18 08:15:40 | 이규환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럽게 여겨지거나, 혹은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합당한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잘못된 처신, 언행으로 복음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2024-10-13 21:34:21 | 김지훈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장체가 참 좋다는 생각과 함께 변명하기를 좋아하는 제가 떠올랐어요..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오?-예레미야서 17장 9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대로 믿기전의 저의 모습은 위기상황뿐아니라 평소에도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네요.하루중 작은 실수에도 평온찾기위해 '예수님..예수님..' 뇌에 각인되게 의식적훈련을 해야만 했구요..같은 실수라도, 주인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고도 한 실수는 마냥 부끄럽기만 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하게 되지더라구요..편안 공감 여유 신실로 비춰지는게 예수님때문이라는걸 (물어보는 사람 하나없어도)말하며 다니고 싶어요~^^
2024-10-12 16:34:02 | 목영주
나를 웅변하려 하지 마라
우리는 살면서 종종 자신을 설명하거나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중요한 일자리 면접이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장점이나 능력을 부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사람들은 나의 본 모습을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1.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본 모습
우리는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모습일 수 있지만, 무의식 중에 취하는 작은 행동과 태도가 진짜 나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피곤한 상황이나 긴장된 순간에 나오는 말투, 행동이 바로 우리의 본성을 보여준다.
한 친구가 있었다. 겉으로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불만이 많다는 것이 자주 느껴졌다. 무심코 내뱉는 말에서 본심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그 친구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그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작은 행동이나 말투를 통해 우리의 본성을 파악하게 된다. 이런 일상에서 드러난 모습이 진짜 나인 것이다.
2.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자아
평온한 일상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가 쉽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어떨까? 그 순간만큼은 가면을 쓰기가 어렵다. 위기 속에서는 본래의 자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한 회사에서 화재가 발생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평소에는 매우 침착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던 한 직원이 있었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하자 그 직원은 자신을 먼저 챙기고, 혼란에 빠져 방향을 잃었다. 반면, 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던 또 다른 직원은 침착하게 주변 사람들을 돕고, 질서를 유지했다. 이 사건을 통해 회사 사람들은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위기에서 드러난 행동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자아였다.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평소의 계획된 행동과 다르게,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비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진짜 나를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줬다. 직장, 가족, 친구 등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과 위기 속에서 드러난 모습을 통해 충분히 우리를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일부러 설명하려 할 필요는 없다. 이미 나는 그들의 눈에 충분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를 웅변하려 하지 마라. 사람들은 이미 수개월, 혹은 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보아왔고, 위기와 무의식 속에서 드러난 나의 모습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나를 이해하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진정한 나를 보여주는 것은 내 무의식과 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024-10-10 23:35:14 | 이규환
저의 집 생활지침이 뿌린대로 거둔다 입니다~^^ (아버지가 허락하신) 이유를 알 수 없는 힘겨움에는 (낙심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버틸힘 주세요! 라고 기도 드려요..올 한해 시작할때는 <헌물>이라는 단어에 꽂혔는데 하반기에는 <무익한 종>이라는 성경단어가 마음에 들어오네요..
-그러므로 형제들아,내가 하나님의 긍휼에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로마서 12장 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m.youtube.com/watch?v=FlDU6-4ggjQ
2024-10-05 07:53:49 | 목영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죄에 대한 징계는 당연한 것임에도 회피하기 위한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인간적인 만족을 위해서 뭔가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항상 경계하겠습니다.
2024-10-04 23:42:18 | 김지훈
중보기도는 어떻게 해야할까?
얼마 전의 일이다. 지인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어느 교회(장로교)의 권사들이 운영하는 단톡방에 아래와 같은 중보기도의 내용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OOO 권사님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고 합니다. 구속당하지 않고 벌금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뺑소니)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에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과연 이 교회 권사님(?)들은 어떻게 기도를 했을까? 대략 짐작은 가지만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중보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세와 느헤미야의 사례를 보자.
1. 모세의 기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명령들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든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멸시키겠다고 했을 때 모세는 아래와 같이 하나님께 간청한다.
주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력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에게 어찌하여 맹렬히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나와 산에서 그들을 죽이고 지면에서 끊어 소멸시켰다,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고 돌아서셔서 주의 백성을 향한 이 해악에 대해 뜻을 돌이키소서. 주의 종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 자신을 두고 그들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하게 하고 내가 말한 이 온 땅을 너희 씨에게 주어 그들이 영원토록 그 땅을 상속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매(출애굽기 32장 11절~14절)
모세가 주께 돌아가 이르되, 오 이 백성이 큰 죄를 짓고 자기들을 위해 금으로 신들을 만들었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러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출애굽기 32장 31절~32절)
2.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서 거기 그 지방에 남게 된 남은 자들이 큰 고통과 치욕을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도 무너지고 그곳의 성문들은 불탓다는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며칠 동안 애곡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간청하건대 오 주 하늘의 하나님 곧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을 위해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이제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여사 주의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내가 이제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주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죄들을 자백하오니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나이다. 나와 내 아버지 집이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가 주를 매우 악하게 대하였으며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명령들과 법규들과 판단의 규범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간청하건대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하옵소서. 이르시기를, 만일 너희가 범법하면 내가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로 널리 흩으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서서 내 명령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면 너희 중에서 하늘 맨 끝 지역까지 쫓겨난 자들이 있을지라도 내가 그곳에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가 내 이름을 거기에 두려고 택한 곳으로 데려오리라, 하셨나이다. 실로 이들은 주께서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오 주여, 간청하건대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기 원하는 주의 종들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원하건대 이날 주의 종의 일들을 형통하게 하사 이 사람의 눈앞에서 주의 종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하였나니(느헤미야 1장 5절~11절)
모세와 느헤미야는 무슨 잘못을 했는가? 모세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읽으면서 중보기도는 기도해야 할 사람들과 동일시 되고 죽을 각오(순교)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이 교회 권사님들이 몇 날 며칠 동안 슬피 울고 금식하고 애곡했을까? 오늘날 교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2024-10-04 08:27:36 | 이규환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제4차 로잔대회(9월 22일~28일)가 막을 내렸군요. 그 총체적 결산이라 할 로잔 서울선언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소견에 따르면 ^^) 빛 좋은 개살구, 속 빈 강정, 곰팡이 쓴 빵 연상되는 내용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차피 곰팡이 쓴 빵 정도의 선언문에서 무슨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즉 성경 읽는 방식에 관한 오류를 지적하고 싶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로잔선언문 중 ‘II. 성경 : 우리가 읽고 순종하는 성경’ 부분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더군요.
(전략) 따라서 높은 성경관을 확언하려면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정경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교회의 해석 전통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이 필요하다. (중략)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세계와 본문이 쓰인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학인지 그리고 더 넓은 본문 내에서 단어와 아이디어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정경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 비추어 각 부분을 함께 읽는 것을 의미한다.
아닌데...아니지...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선언문 상의 해당 부분(위 ‘중략’ 이하의 대목)에 시선 고정한 채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생각,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 보겠습니다.
‘역사적 맥락에서’는 뭐, 그렇다 치고, ‘문학적 맥락에서’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서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에 의해 주어진 것(딤후3:16)이라고,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을 통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거늘, 그 말씀을 문학적 맥락에서 읽으라니 말이 됩니까? 성경 말씀이 문학 작품입니까? 문학 장르(선언문 상에 나오는 표현임) 어쩌고 아이디어의 흐름 어쩌고 하게 말입니다.
‘정경적 맥락에서’ 역시 문제 있는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 비추어 각 부분을 함께 읽어라, 참으로 허황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꾸어 말씀 드리면, 신구약 성경 전체에 비추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가장 핵심적인 사항, 구체적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뜻 또는 계획, 바로 그것에 비추어...라고 명기, 즉 분명히 기록하지 못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랑침례교회 신학원에서 배운 바 있는 ‘조직신학’ 72강 중 제7강 교재를 펼쳐 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군요.
(전략) 성경 신자들은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취한다. a. 문법적 :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의 정상적인 의미를 취한다. b. 역사적 : 시대, 수신자, 목적 등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해석한다. c. 신학적 :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에 따라 해석한다.
위 조직신학 교재 내용과 대비하매, 로잔 서울선언문 상의 성경 읽는 방식, 그 심각한 오류, 허구성이 밝히 드러나는 것 같군요. 특히, 아이디어의 흐름에 따라 문학적으로가 아니라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 문법적으로, 그 대목에서 너무나도 확연히 말입니다. ( 끝 )
2024-09-30 14:28:32 | 최영오
미음의 누룩이 들뜨지 않도록, 악의 싹이 자라지 않도록, 주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 주신 바른 말씀, 바른 교리를 따라 성화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샬롬
2024-09-12 21:25:30 | 김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