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채널이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멋지게 설명해 주셨네요.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은 아들 하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05 18:12:46 | 박기용
좋은 글로 종종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시간과 건강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든 여건 들 까지 허락하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주여,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간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긍휼을 베푸사 주님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2015-08-04 12:26:18 | 한원규
우리는 다채널 세상에 살고 있다. 다원주의와 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채널이라고 하면 티브이 채널을 생각할 수 있는데, 지상파 방송이 케이블 티브이와 종편 방송으로 급속도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단일 채널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요, 꽉 막힌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현시대에는 무한한 선택을 강요받고 또 그것을 누리는 풍요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선택의 풍요로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문제는 선택의 풍요로움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처음에 만들어준 세상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선했고, 아름다웠고, 완전했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어떤 대가를 지불 할 필요가 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 한가지의 채널은 금지되었다. 악을 선택하는 채널이다. 하나님은 악을 대적하시고 경멸하신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시고, 그 어떤 악도 양립, 또는 용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세우고, 사람들을 악에서 보호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채널을 두셨다. 이 죽음의 채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지극히 쉬운 일이었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노선인 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부여된 무한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은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과실을 따먹은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결과 육체의 죽음과 고통스런 삶,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이 저주스런 운명은 하나님께서 허용한 무한한 채널보다 단 하나의 악의 채널을 선택한대 있다. 이제 사람은 의와 생명의 법을 떠나 죄와 죽음의 법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법이 되었고, 최종의 법이 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법에 예외가 없다.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법에 팔리게 되었고, 원치않는 모든 악한 일들의 지배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만 살수 있도록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떠나셔야만 했고, 하나님과 떨어진 사람은 궁극적 멸망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한 꼴이 되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에게 처해진 운명이란, 다양한 악의 채널을 선택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끔직한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리신 죄와 죽음의 법은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은 죄는 극도로 미워하셨지만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하시기로 한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신비중의 신비이다. 죄는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기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신 것이다. 2천년전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그 신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을 아들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당신 자신의 죄가 아니라 죄 없으신 하나님이 희생헌물이 되신 것이다. 그 희생헌물은 완전한 헌물이며, 영원한 헌물이시다.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으므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을 위한 헌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그 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며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히, 완전한 제거를 실행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위한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마련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것이다.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로 악을 극도로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예비심으로 궁극적으로 악을 제거하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참으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끔직이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준비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 역전되었다. 악으로 덮여있는 현 세상에서 구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길 뿐이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행4:12)
2015-08-03 15:21:33 | 조양교
어르신의 모습에서 풍기는 주님을 향한 열정을
젊은 사람들도 배우길 원합니다.
아니 저 자신부터요
늘 건강하시구요.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015-08-02 19:53:09 | 오광일
어르신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시네요~
마음이 젊으신 만큼 몸도 강건하신 것 같아요.
저희도 목사님의 설교가 실제 생활에 녹아 나타나길 기도하며 살지요.
늘상 육신과의 전쟁이 있기에 넘어지기도 수없이 반복하며
주님께서 불러 주시길 기다리며 살아요....
2015-08-02 09:08:22 | 이수영
항상 진지한 모습으로 글을 남겨 주셔서 인상이 깊었는데
'Paradigm shift'로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직접 운영하시는
개인 블로그가 검색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삶의 조각들을 지나치지 않고 깊이 묵상하시는 습관을 통해
이렇게 바른 믿음 안으로 들어오시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고
다시 뵐 때까지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십시요!!
2015-08-01 17:20:26 | 김대용
"자질구레한
아픔과 번뇌에 연연하며
보잘것없는 편린들에
집착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더 큰 아픔과 질고에 다가가
큰 기쁨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 지혜와 용기
그리고 깨달음이
내게 다가오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옛날 2008년 7월 16일 새벽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폐암과 투병하고 있는 동생의 병상에서 간호하며 끄적여 본 단상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간구한대로 그런 깨달음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최근 저의 주변을 다시금 정리하면서 하늘나라로 간 동생을 생각하며 미망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던 큰 아픔과 질고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에 비교될 수도 없고 이를 큰 기쁨으로 바꿀 수 없음을 잘 압니다. 또한 그런 지혜와 용기 그리고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 자신이 덧 없음을 잘 압니다.
7월 5일 용기를 내어 먼 곳에 있는 "사랑침례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여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급진적 사랑"을 묵상하며 위에적은 나의 급진적 단상을 다시 주님께 간구해 봅니다.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75세 생애에 영적인 Pradigm shift가 올 것인지 기대를 해 봅니다. 지난 7월 7일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몸담고 있던 교회를 떠남을 편지로 올렸습니다. 직접 말씀드리기가 마음 아파서요.
그간 주일예배는 참석지 못했지만 목사님의 누가복음 강해 설교 말씀 "좋은 사람 되기", "나무는 열매로 안다.", "와서 듣고 행하는 사람 되기"를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믿음 안에서 새로워 지기를 간구해 봅니다. 지난 주일 서울 한마음침례교회를 참석한 일도 있습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좋았습니다.
제가 매주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교통비(2~3만원) 등 기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저의 지금의 경제력과 건강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보다 훨씬 먼 곳에서 오시는 분도 계시는데. 제가 영적으로 계으른 탓일 것입니다.
첫 방문 시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형제/자매님들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다음에 만나 뵐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너무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주님이 저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2015-08-01 16:31:57 | 차영배
차분하게 말씀을 일상에 잘 적용해 주셔서
읽는 내내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7-28 09:18:21 | 김대용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예수님의 급진적인 사랑 실천하기 설교를 들으며
제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화성과 금성.. 각기 다른 별에서 온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사랑의 다섯가지 언어라는 책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사랑은 주는 것이라 하지만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줄 때 낭비 없는 효과적이고 진정한
사랑의 교감이 이루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5-07-27 23:13:34 | 김상희
아내인 제게 글이 참 와닿네요.^^저의 적용으로 남편에게 파격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무엇일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네아이의 육아와 살림으로 늘 바쁜 저는 제 남편의 설겆이 한번이 참 큰사랑으로 와닿는 그런 사람이지요. 작고 약한 그릇인 아내들은 작은 그릇을 담는 큰 그릇인 남편의 조그마한 변화와 노력도 금방 알아 차린답니다. ㅎㅎ 급진적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저희 남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참 어렵게 돌려서 했네요.
곳곳에서 파격적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밤입니다. 샬롬!
2015-07-27 22:24:50 | 주경선
정말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보니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는 죽을 수는? 있어도 변기 커버는 신경을 안쓴다네요...
작은 것들이 아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말이죠......
여자는 사소한 것들에 배려를 느끼고 사랑을 느끼는데
남자는 자기의 일이나 정치나 운동과 취미에 신경 쓰기도 바쁘다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2015-07-27 10:58:47 | 이수영
얼마나 가까우면 무촌 이라했을까......
동화아부지, 변기커버좀.
2015-07-27 10:42:58 | 이청원
가슴에 와 닿는 대단히 귀한 글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7-27 10:05:36 | 관리자
# 나는 아내를 진정 사랑하고 있을까?
모처럼 동창회에 나가 어렸을 때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온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고 있을 때
여론조사를 한다며 친구들 모두에게 “양변기깔판”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설교시간에 들었던 양변기깔판에 관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세대들이고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친구들에게서
그네들 가정에서는 양변기깔판에 대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매우 궁금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가 고작 나까지 네 명에 불과 했습니다.
어떤 녀석이 “야, 그거~골치 아파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해줘~~”라고 말하자,
또 다른 녀석이 “아니고 말도 마! 난 앉아서 소변도 보는데 뭘~~”
그 녀석은 쑥스러운 듯 이런 말을 내 뱉고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갑니다.
아뿔사!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있을 때
한 친구의 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수씨는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시는군요.”
나는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약간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 까닭은 당신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여러 날이 지나도 그 말이 좀처럼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워지지 않고 때가되면 어김없이 되살아나 그 말이 생각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친구부인이 나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였다는 나의 반발심이
서서히 그 기운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친구부인의 말이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동안 그런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친구부인의 진단이 정확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위에서 시청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내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되묻고 보니 참으로 스스로가 기가 막힙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까지 사랑한다고 한 그 모든 행동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 줄 알고 하였던 그 모든 행동들이
알고 보니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부인은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내가 아직도 아내에 대해서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즉석에서 알아보았던 모양입니다.
이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 같지 않은 남자라는 사실을
즉석에서 느낌으로 알아 맞혔던 것입니다.
곧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시!
즉 그 증거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그 부끄러운 표시를
앞가슴에 달고 살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실로 나야말로 "임금님은 벌거숭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나는 아직도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
즉, 내 가슴에 붙어 있는 그 표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지난 수개월간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답답해 하다가
어제 설교말씀 중에 “파격적인 사랑”이란 단어를 듣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그것을 알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긴? 당연히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무슨 조치?"
"------?"
"그러니까 넌 그 표시를 네 가슴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것 아니냐?
"------?"
“그리고 네가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시를 붙이고 다니겠다는 것 아니냐?"
“그것도 파격적으로~~“
"------?"
이렇게 나는 또 한방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허 허! 세상에 이럴 수가~~
그게 그렇게 되다니~~
자, 그러니 이를 어쩐다?
그러니까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조금도 시급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급한 일은 지금이라도 즉시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 아,
어떻게 하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답”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그가 나대신 죽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내(교회)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아내를 위해서 죽어?
어떻게?
파격적으로?
이것 참 큰일이로구나!
다른 남자들도 나처럼 이런 걱정을 하며 살까?
note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에 대한 그의 요구요, 나에 대한 그의 모든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나에게 말씀 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나무라시고,
십자가로 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성경 말씀에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되는 교회가(즉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쓰는 단어로 이야기하면 가출아내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가출아내는 찾아오는 것만이 남편으로서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의 길입니다.
그런데 가출아내는 죄 값을 치러야 도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가출아내의 죄 값을 치르신 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세상의 남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도 내 아내 곧 내 교회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렸으니 너희들도 너희들의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완성된 그분의 세상창조 목적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종말의 날 까지 계속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은
언제나 인간의 삶의 현장 그곳뿐임을 발견합니다.
2015년 7월 27일(월) 조용한 시간 이 아침에
유 용수
2015-07-27 10:01:44 | 유용수
멋진 글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최후의 차단막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저로부터 글을 읽는 모든 지체들께 확산되어 강력한
면역력을 갖춘 사랑교회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2015-07-16 15:42:49 | 김상희
누룩, 바이러스, 말(言語) 등은 모두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판단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도 마치 꼬리잡기처럼
거의 모두가 예외 없이 해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라 저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에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을 화로 안에 잘 담아 방 한가운데 두고 그것으로 언 몸도 녹이고
때로 긴 겨울밤 맛난 간식을 조리하는 도구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말도 잘 관리하면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며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동력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로라는 안전망 혹은 차단막 밖으로 쏟아진 숯불처럼 우리의 말이 충분한 지혜와 인내와 겸손과
무엇보다 지극한 사랑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필시 갈등과 문제를 만들고 퍼뜨리는 불(火)로 전락할 겁니다.
부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과도하지 않게 행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길 소원해 봅니다.
항상 차분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 귀한 교훈을 마음 깊이 넣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15-07-14 22:49:58 | 김대용
불로 인한 화상을 치유 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시간도 정말 오래 걸리고
치료과정도 고통이 극심했어요. 원상 복구는 생각을 못하는데 끝없는
수술을 겪는 모습을 보고 너무 마음 아팠어요.
말은 외적인 상처는 없지만 말로 인해 친형제간이 평생 원수가 되는 것을
보았지요. 정신적인 공황상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낸다고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것으로 가득 채워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2015-07-14 21:07:29 | 이수영
말은 불과 전염병의 파급력을 능가한다. 내가 최후의 차단막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 ~ 감사합니다.
2015-07-14 19:40:47 | 박순호
최후의 차단막..말이 멋있습니다. 워낙 그릇이 작은 저는 '저는 죽었습니다..'하지 않고는 차단막 역할 꿈도 못 꾸네요.
오늘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루 살아가겠습니다.
2015-07-14 10:53:11 | 목영주
중동호흡기 증후군 메르스 바이러스가 잦아드는 듯하다. 예전에는 호한 마마가 큰 병인줄 알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병명들로 인해 때 아닌 몸살을 앓고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의 의료 대응 시스템이 외부에서 침입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자평의 소리가 나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 싶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지나치게 호들갑 떠는 것도 문제지만 안일한 자세 또한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어쨌든 이번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많은 것을 잃었고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순식간에 번져 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 주변에 번져 나가는 특성을 가진 것들은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들이다. 번져 나가는 것들,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이다. 불은 쉽게 번져 나기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 초동진압이 가장 중요하고 다중 이용시설에는 방화문, 차단벽, 소화기 등 긴급을 요하는 시설들이 즐비하다. 불 이외에도 누룩과 같은 것은 좋은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누룩이 퍼져 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순식간에 덩어리 전체를 장악해 버리고 만다. 이미 메르스를 통해 경험했다. 메르스에 전염된 한 사람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은 일정시간 격리해서 치료과정을 가졌다. 불과 누룩 이상으로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 것은 바로 말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사람들이 하는 말은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 방송매체, SNS는 그야말로 국경이 없고, 밤낮이 없다. 불과 누룩과 같은 것들은 공간적 제약이 있지만 말로 파급되는 것은 공간적 제약이 전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이집트인들의 금, 은, 보석, 의복, 소와 양등 많은 가축 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 섞인 무리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출12:38절) 아이들 외 걷는 남자만 육십만 명이 되었고, 전체 인구는 족히 300만은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섞인 무리들의 불평, 원망의 말이 전 백성들을 강타했다. 하나님의 호의로 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정적인 말들이 잦아드는 듯 했지만 또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생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작은 말 하나가 이스라엘 전체를 광야에 묶어 두었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았다. 약3:8절에서는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라고 할 정도로 혀는 불법 그 자체이고, 온 몸을 더럽히며,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인다고 강력한 경고의 글이 적혀있다.
지난 주 목사님께서 판단에 대한 설교를 해 주셨다. 옳고 그름의 판단, 교리의 판단, 죄의 판단은 해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판단,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적인 판단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죄를 미워하셨지만 사람은 사랑하시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다. 그 죄 또한 자신이 친히 담당을 하셨다. 자식의 잘못에 대해 부모가 자신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치는 모습을 그려본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에게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갈보리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모든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다. 또한 그 죄를 담당할 자격 또한 없는 사람인데 어떻하면 좋은가? 형제와 자매된 사람들과 대화중에 부정적인 말, 관계를 파괴시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화의 당사자는 면역세포가 될 필요가 있다. 내가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것이다. 때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70~80%는 해결된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이 고조될 경우가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감정이 심각하게 상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해결책을 찾기 위해 상위의 권위자나 믿음과 연륜이 있는 사람에게 가져가야 한다. 주변에 말하는 것은 불을 확산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불과 메르스를 퇴치하는 것처럼 말은 일정시간 스스로 격리되거나 소방관을 필요로 한다. 힘든 일이긴 하지만 진정시키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후회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말은 불과 전염병의 파급력을 능가한다. 불씨를 조심히 다룰 필요가 있고, 내가 최후의 차단막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불의 순기능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고, 우리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불의 순기능이 활활 타오르고, 부정적인 불은 나 자신이 마지막 차단 막이 돼서 스스로 소멸하게금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갑자기 사명감이 생긴다.
2015-07-14 09:46:26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