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갈5:17)"
거듭남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구원받으면서, 옛 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삶이란, 옛 사람의 본성적 생명은 계속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면서, 주님의 생명에 순종하여 매순간 그 생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본성적 생명의 특징은 교만, 고집, 탐욕, 분노 등으로 대표되는 옛 자아의 자기주장, 그리고 자아의 선함과 신실함을 자랑하는 자기 의(義)입니다. 이 본성적 생명이 계속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져야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주님의 온전하심을 향해 계속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신앙의 내적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교회 참석과 봉사 등 외적 활동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본성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3대 적은, 마귀, 세상, 육신(본성)인데, 마귀는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육신을 자극해서 죄를 짓게 함으로 우리의 영을 무력하게 하고, 그로써 우리가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고 하셨으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늘 주님과 교제하면서 성령 안에서 깨어 있으면,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본성적 생명의 움직임을 명확히 분별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즉시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생명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주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견고하게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5-05-20 22:05:40 | 박진태
'보호하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부터 보호해 주시는게 아니라, 고난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임과, '우리가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그 분은 한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내용이 마음속에 '평강'을 주는군요. 박진태형제님, 좋은 글 공유, 감사합니다.
2015-05-18 10:27:08 | 한원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상속 유업을 받게 하셨나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시 근심하고 있지만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벧전 1:3-6)"
고통의 한가운데 영원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 없는 미래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미래로 가는 길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현재의 고난을 영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의 시각에는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용기를 주시는 요소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보호하심'입니다. 보호하심은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이요. 우리가 뜻밖의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다가올 영원 속에서 유업이 있다고 말한 뒤에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영원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동안 매일 우리와 동행하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이 현재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보호하심'은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통으로 부터 보호해 주시는게 아니라, 고난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보호하시기에 우리는 "산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소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소망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영원을 약속하신 분께서 영원까지 가는 내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그분은 한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이기는 능력, 영원" 폴 트립
2015-05-15 00:15:56 | 박진태
수영자매님은 기억의 달인이세요.
즐거운 운동회...학교에서도 볼 수 없는 정겨운 순간들이 또하나의 가족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거 같아요.
저희도 온 가족이 모여 뛰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하늘나라 가기전에 ....작은 소망일까요? 대망일까요? ㅠㅠ
2015-05-11 19:06:12 | 오혜미
즐겁고 편안한 가운데 수준높은 체육대회를 즐겼습니다.
진행을 맡으신 한분 한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을 운동회가 기대되네요^^
수영 자매님의 정리된 글을 통해 그 때 그시간을 회상해 봅니다.
2015-05-11 12:52:10 | 조양교
운동회를 위해 수고해 주신 형제/자매님들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분들의 적극적인 섬김이 없었으면 운동회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5-11 11:58:54 | 관리자
아직 오월인데 때 이른 여름을 느끼는 햇볕 아래서
함께 걷고 뛰고 응원했던 시간이 이제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네요.
교회의 모든 행사를 정감 넘치는 필체로 기록해 주시는
이수영 기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5-05-11 11:16:02 | 김대용
글을 읽으니 영화 필름 돌아가듯 상황이 그려지네요.
궁금했는데 자세한 내용 감사드려요.
함께 뛰고 달리며 행복해하셨을 형제 자매님들의 모습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2015-05-11 10:51:04 | 김혜순
피곤하셨을텐데 집에 도착하셔서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운동회 풍경을 글로 써주셨네요.
생생한 글로 운동회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보며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
2015-05-11 10:17:16 | 윤영원
날씨도 화창하고 아담한 초등학교에서 준비운동으로 국민체조를 시작으로
운동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손목 아대를 청색과 흰색으로 준비해서 청, 백팀을 구분하게 했네요.
센스있는 진행 팀이죠?
운동장에서 준비 운동이 끝나자 3열로 길게 줄을 섰더니만 백팀이 훨씬 많아요.
정원을 비슷하게 맞추고 나자 협동 줄넘기가 시작 되었어요.
줄잡이 두 형제님이 지나갈 때 모두가 깡총 뛰어 발밑으로 줄이 지나가게 하고
맨 끝에 가서는 줄잡이 형제들이 어깨 높이로 줄을 잡고 앞으로 되돌아가도록 머리를 숙여서
줄이 지나가도록 하는 호흡이 맞아야 하는 게임이지요.
처음엔 청팀이 호흡이 잘 맞아서 앞서 가네요^^
익숙해지니까 이젠 줄이 아래위로 파도처럼 첫줄은 깡총 뛰고 다음 줄은 고개 숙이고를
반복하며 끝까지 갔다가 오는데 아- 이번에 백팀이 이겼네요.
다음엔 사랑의 징검다리 게임입니다.
50명씩 줄이어 고개 숙여 등을 다리로 만들어 어린 아이가 등으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갔다 오는 게임이에요.
아이가 지나가면 앞으로 가서 또 다리를 만들어서 반환점을 돌아오도록 하는 게임이라
모두들 열심히 뛰어가며 등을 대고 또 뛰어가고^^
처음엔 남자아이가 건넜는데 다리가 엄청 길어서 걷지 못하고 발이 빠지기도 하고
무릎으로 가기도 하고.... 아이의 양 손을 잡아주는 길잡이 형제들은 빨리 가게 하려
애를 쓰지만 서로 분주 합니다^^
청팀이 앞서 나가고 있네요.
아이를 바꾸어 다시 시작- 청팀이 가벼운 여자아이가 다리를 밟도록 주자를 바꾸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겁이 나는 듯^^
이번에는 길잡이 형제들을 반대 팀에 가서 길잡이를 하도록 바꾸어 길잡이를 하네요.
이번엔 백팀이 승리-
이번에 플라잉 디스크 게임입니다.
뽑기에 적힌 대로 신발, 공, 디스크를 번호판에 맞추는 게임인데요.
중학생들부터 시작 하는데 너무 멀어선지 모두 빗나갑니다.
유아들 차례는 번호판이 아주 가까워 졌어요.
번호에 따라 선물을 받기도 하고 –50점이 나오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 차례입니다.
두 사람이 긴 줄을 돌리고 하나씩 들어가 계속 뛰면서 6명이 되면 숫자를 셉니다.
청팀 마지막 들어가는 사람이 넘어지는 바람에 0
백팀은 27개나 하네요!
마지막엔 아슬아슬하게 1개 차이로 백팀의 승리!
장애물 이어달리기입니다.
4인 5각으로 가면 바턴을 넘기면 다음 팀은 달려가서 풍선을 불어 터뜨리고
달려가서 바턴을 넘기면 럭비공을 차고 출발점으로 들어오는 게임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팀과 백팀의 공방전- 백팀이 한참을 앞섰는데
몽셀통통 먹고 휘파람 불기에서 저런! 청팀은 휘파람 성공으로 신나게 달려가고 있는데
백팀은 휘파람이 나오지 않아서 한참을 뒤쳐지고 있어요.
청팀이 한참을 앞서서 골인하고 승리를 합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청장년 축구 게임입니다.
20분씩 전 후반을 뛰는데 청팀이 우세해서 백팀문전에서 각축을 하다가 슛이 자주 터집니다.
그러나 백팀 골키퍼가 그 때마다 잘 막아내서 골인이 무산되곤 합니다.
드디어 청팀이 1점 올렸습니다! 청팀의 응원 소리가 커집니다.
후반전도 역시 청팀이 전력은 대단합니다.
아! 백팀도 1점을 올려서 1:1 동점!
10분의 연장전으로 먼저 골인 하면 승리 합니다.
아쉬운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아요.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르기로 하고 차례대로 슛을 합니다.
처음은 아쉽게도 두 팀 모두 실패
청팀이 드디어 골 인! 모두 손뼉에 응원이 더해집니다.
백팀도 골인!
청팀의 골인!
백팀 실패-
청팀 실패-
백팀 성공-
2:2 또 동점
결국 또 다시 승부차기.....
결국 청팀의 승리!
아주 재미있게 축구를 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 계주입니다.
유아들의 달리기로 시작되었는데- 아니 이 애기들이 어디로 뛰어 가는 거죠? ㅎㅎ
이해를 못하고 뛰니까 운동장 끝을 향해 열심히 뛰어요^^
모두들 손뼉을 치며 웃습니다. 뛰는 아이들은 아주 즐겁고요^^
이어서 초등 저학년 아이들의 계주도 아이들의 뛰는 모습 때문에 모두 웃고
응원을 합니다.
수영하듯 얼굴은 앞에 있고 몸과 다리는 뒤에 있어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아 불안한데
잘도 뛰네요^^
바람개비 돌리듯 양손을 풍차처럼 돌리며 뛰어도 잘 달려요^^
마지막엔 어른들의 계주에 1번 주자로 지목된 목사님과 홍 승대 형제의 비슷비슷한
달리기로 시작되었지요.
백팀이 한참을 앞섰네요. 청팀이 바턴을 놓치는 바람에 자꾸 뒤지고 있어요.
안타까웠던 백팀 자매님이 천천히 뒤를 보며 간격을 좁혀 주다가 청팀에게 쫓기게 되어
위험한 순간 청팀이 넘어지는 바람에 백팀의 승리!
이번엔 작년보다 많이 참여해 주신 것 같아요.
시상식이 있고 난 뒤에 다 같이 학교를 청소하고 교회로 삼삼오오 걸어서 갔지요.
교회에서는 자매님들이 - 사진으로 보고 침만 삼키던- 맛있는 쫄면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네요.
좋은 날씨 덕분에 모처럼 많은 분들이 남아서 함께 하는 시간이었네요.
사진이 올라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겠지요.
가을에도 운동회를 하느냐고 묻는 것을 보니 즐거웠다는 이야기겠지요?
운동회를 위해 며칠 전부터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물품도 사오고
물도 얼리고 저녁 쫄면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모두가 수고해 주셔서
오늘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지요.
항상 모든 일에는 사랑의 수고를 해주는 지체들이 있지요.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감사합니다.
계주 하신 분들 며칠은 아프겠지요?
2015-05-10 21:53:30 | 이수영
꾸준히 요약정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보니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2015-05-07 07:11:19 | 임성희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5:1)"
성경은 이 세상의 덧없음을 장막에 거하는 삶에 비유합니다. 장막은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나그네가 기착지마다 설치하는 임시 거처입니다. 또한 우리 육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장막은 우리가 아직 최종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방랑길에 올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방랑과 가장 비슷한 경험은 시골에서 캠핑한 것입니다. 나는 캠핑의 궁극적인 목적이 집에 대한 고마움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캠핑지를 임시 거처가 아닌 최종 목적지로 여긴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끝없는 휴가이길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최대한 즐기다 떠날 생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 살면 주변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피폐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것입니다. 이곳은 영원한 곳을 위한 준비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스스로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안에 거하면서 여러분과 나는 마음 속 어딘가는 상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절실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대속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머지않아 없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이 목적지인 것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기다리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현재를 이기는 능력, 영원" 폴 트립
2015-05-06 22:45:09 | 박진태
전도사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너무나 좋은 글에 감동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편에만 서기 위해 자신을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2015-05-02 20:06:21 | 박기용
전도사님의 글과 사랑하는 자매님들의 덧글에 아멘, 아멘입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 이글을 보지못했었는데
이글을 보니 오늘은 날씨처럼 명쾌해집니다.
비록 SNS지만 그래도 사랑은 이렇게 전해져 오네요.
그나저나 아기 어서 보고 싶네요.
이글 보시고 할아버지 혼나시는건 아닌지 괜한 걱정도 ^^.
2015-05-01 08:33:12 | 이청원
성경을 대하는 어린아이들은 성경속에서 재창조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요
단순하게 성경을 보는 사람도 재창조는 염두에 없지요.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그것이 구원에 있어 크나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알고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러한 일이 우리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될까 걱정이 되네요.
오히려 우리교회 성도들이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5-01 07:40:49 | 이수영
컴푸터와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믿음생활도 변화가 생겨 실제 내 주위의 사람들보다는 글로서 지식을 주고 받는 사람들도 많아진 거 같습니다.지적발달로 인해 기형적인 성장을 조장하지는 않는가 한번 쯤 생각하게 한 글이네요. 지역교회로서 지체로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더 활발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2015-05-01 00:04:03 | 오혜미
평이한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학식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성경기록을 읽고 이해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을 모세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경기록은 점진적으로 계시해주고 있으므로 구약의 내용을 가지고 신약교리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창세기 1장은 각론보다는 개론차원의 큰 틀의 구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비율로 창조를 하셨지만 제 수준의 적은 비율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손녀 딸을 낳았습니다.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는 정신이 없었는데 손녀의 경우 새로운 것을 많이 느낍니다. 좀 여유있어 졌다고 할까요? 내가 이미 겪었었던 일이기에 몇 마디의 전해들은 소식으로도 딸아이 가정을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딸아이가 작년에 결혼을 했을 때 부부 중심 모드로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식, 신혼여행, 보금자리, 주방기구, 침구류, 의복 등, 주말이면 어디로 갈까? 결혼 후 몇 달이 지난 후 아이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 했으나 배가 점점 불러 올수록 부부 모드에서 아이 모드로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구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침대, 아이가 입을 옷, 아이에게 필요한 용품들, 심지어 유모차까지 장만을 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형편껏 준비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기쁨과 기대와 설레임을 가지고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최상의 것들로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갈 때마다 새로운 것들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렇게 신기할 줄 몰랐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를 그렇게 사랑했었나 봅니다. 요즘에는 돈 주고 자랑해야 한다고 하네요^^ 아내도 손녀 딸 사진을 핸드폰에 담아놓고 눈에 진물이 날 정도로 쳐다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하시는데 6일이나 걸릴 필요가 없죠. 6일의 하루 하루를 기록하시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할 사람이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격을 사람을 통해서 드러내시기를 계획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마음처럼 하나님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사람에게 향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땅히 창조기사를 읽는 사람의 관심과 초점은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합당하고, 그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합당한 접근일 것입니다.
만약에 재창조의 문제가 하나님께 큰 이슈였다면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두 개의 이슈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창조된 아담에게 알려주었을 것이고, 성경기록을 읽을 독자들에게 명시적으로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창세기 2장에 가서야 불법을 행한 루시퍼에 대한 말씀과 함께 주의해야 한다는 정도의 경고를 주신 것으로 압니다.(2:15절) 그러면 창세기 1-5절 까지 평이한 이해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문자적인 하루하루의 기사 뒤에 문단 구분이 나와 있습니다. 저의 상식으로 문단 구분 표기로 보아 성경이 기록된 이후 1-5절까지 한 문단으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습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문단 구분을 했어야 할 겁니다. 2절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without form, and void)의 표현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직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형태를 갖추어야 할 것들이 형태가 아직 없었고, 채워져야 할 것들이 아직 비어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글로 이해가 됩니다. 완전한 형태를 빚으시고, 빈곳들을 정밀하게 채워 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마치 부모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3절에 가서야 물리적인 빛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물리적인 빛이 없는 어둠 그 자체였고, 빛이 없는 물리적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간극이론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체계에 혼란을 주고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so what? 반면에 하나님의 6일 창조기록은 역동적이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케 합니다.
진화론이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믿음체계인 것처럼, 간극이론을 주장하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을 약화시키는 믿음체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관점, 다른 믿음체계가 분명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거나 설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반론으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인 말들은 SNS를 통해 빠르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지적인 영역만 과도하게 발달된 기형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며, 하나님을 바르게 순종하는 전인격적인 균형잡힌 삶입니다. 힘써야 할 영역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한 말로 인해 하나님앞에서 회계보고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주장을 드러내기 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경 단어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모르지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삼서에 기록된 것처럼 진리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서와 진리 그 자체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았고 참으로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희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 아느니라.” (요삼 12)
2015-04-30 21:43:57 | 조양교
박진태 형제님, 참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 소망 : (내용 중)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앞을 내다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아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2. 기쁨 : (내용 중) " 행복은 대개 상황에 좌우되지만 기쁨은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내면의 확신과 안정 기쁨이며 외부 상황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3. 평강 : (내용 중)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4. 그리고 핵심 단어는 믿음 : (내용 중) "여러분의 과거에 대한 염려, 현재의 처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2015-04-27 15:02:19 | 한원규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너희가 믿는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 너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앞을 내다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과 나는 절대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아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이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소망을 만들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의 통치권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놀라운 소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기쁨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행복을 포함할 수 있지만 행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행복은 대개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쁨은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내면의 확신과 안정입니다. 기쁨은 외부 상황이 만들어내는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의 결과입니다.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나 불평없이 삶을 맞이합니다. 사실 기쁨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삶의 부산물입니다. 기쁨을 찾으려 하면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행하면 마음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과 더불어 평안의 선물이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너희가 믿는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고 말씀하실 때 뜻하신 평안입니다.
이렇든 이 세가지 선물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책임집니다. 뒤를 돌아보든 곁을 돌아보든 앞을 내다보든,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대한 염려, 현재의 처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세 가지 보화인 소망, 기쁨, 평안을 여러분의 내면 깊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5-04-26 21:25:23 | 박진태
우리가 기도는 하는데 그 기도에 따라 실천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계속 간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찿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자마다 받고 찾는 자는 찾으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이 말씀에 따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겸허하게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17 09:08:30 | 박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