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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을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우선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로 구하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이뤄지길 믿고 기다리라 는 말씀에 아멘입니다. 박진태 형제님, 좋은 내용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04-16 13:42:42 | 한원규
"그분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다가 마치시매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소서.(눅11:1)"   이제 우리는 기도의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입술에서 나오는 말 이상입니다. 기도는 마음의 갈망이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거한다는 단어를 적어도 15번 이상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 늘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거함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대한다면 여러분과 나는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며 그분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듣는 것보다 내가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도 응답의 첫째 요소은 내가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과 같습니다.   기도의 둘째 요소는 구함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을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기도에는 요청하는 것 훨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중요한 부분은 구함입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못하고 죽여도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너희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요. 그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십시요. 기도는 예배요, 찬양과 감사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셋째 요소는 응답입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의 청을 즐거이 들어주듯이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즐거이 응답하십니다. 기도는 인색한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쾌히 주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구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필요를 채우십니다. 기도에 성경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원시는지 성경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기도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마도 응답이 지체되는 일일것입니다. 하나님께 필요를 아뢰고 그분의 일하심을 믿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방법과 시기를 아십니다.   기도를 작정했거든 우선 거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성경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여러분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됐으면 이제 구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아뢴 다음에는 문제를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5-04-15 23:46:56 | 박진태
죄가 우리에게 너무 힘든 상대인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더 옳은 것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편에 서서 죄와 대항하여 투쟁하고 마음과 생활에 거룩함을 유지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14 17:55:05 | 박흥식
박진태 형제님, 내용 중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거기로부터 재빨리 도망쳐 나와야, 그리고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내용이 우리에게 지혜로운 '결단성'과 '실행의지' 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좋은 내용 공유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
2015-04-13 12:49:15 | 한원규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그가 자기 옷을 그녀의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가매(창39:12)"   죄와 싸울 때는, 그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따라서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아무튼 거기로부터 재빨리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아예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유혹을 받고 있다면 당장 거기서 뛰쳐나오십시오. 우리가 세상적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 인해 뭔가를 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정에 발목을 잡혀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죄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요셉처럼 옷을 버리고 도망쳐 나오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정말 단호하다면, 어떤 유혹이나 그럴듯한 구실도 여러분을 붙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않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유혹에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유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순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벧전1:16)"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사람보다는 깨끗한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사역을 잘 하기보다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벧후3:14)"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유혹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유혹에 대해 단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결코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요셉처럼 단호하게 죄를 거부하고 피하게 하소서!   스펄전의 365일 묵상 중.
2015-04-12 23:02:05 | 박진태
박진태 형제님, 크게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연결 매체를 통해 하나님과의 늘 접속하고 있어야 휴대폰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성령충만한 상태라고 얘기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인 기도가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늘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09 10:29:12 | 한원규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신앙생활의 가장 귀한 것들은 모두 기도로 얻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심에 따라 성경을 기록한 것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시기 위해, 늘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성령님께 사로잡혀 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설교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의 기도 없는 교회가 양적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 있지만, 기도 없는 성공은 머지않아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는 있어도, 절대로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성공하기 위한 비결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를 기다리시며, 기도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기도하도록 만드는 종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은 종입니다. 그런 종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의 교회가 기도 안 하는 성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까?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기도하게 만드는 종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역사하십니다. 실로 기도만이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늘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통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엠 바운즈의 기도선집"중.
2015-04-08 22:54:00 | 박진태
늘 이렇게 성실하게 글을 읽고 공유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글 중에서,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들이 하나님께는 매우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찔림을 얻습니다. 그러고보니 나는 알면서 애써 숨기며 고집대로 살아왔던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모른척 참아주셨네요!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한 나만의 '산당'이었는데 말이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04-08 18:31:23 | 김상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돌보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계속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아직도 주님을 멀리 하고 주님의 명령을 버리고 어긋난 길로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앞으로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데 소홀함이 없게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7 07:05:09 | 박흥식
1. 진화론과 간극이론의 역사 1800년이전까지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1795년 허톤의 ‘지구의 이론’이 출간되면서 그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구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자구의 75%가 퇴적층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 평균 깊이가 1.6km에 달한다. 수많은 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기준으로 30cm의 지층이 쌓이는데 50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과학적 주장이다. 1814년 프리메이슨 지부의 일원이었던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촬머스는 ‘간극이론’을 제창했다. 1841년에 영국의 신학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그리스어 신약본문을 발표한다. 1844년에 독일의 성경학자 테센도르프는 시내산의 캐서린 성당에서 AD4세기에 기록한 시내사본을 발견한다. 1859년에 촬스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종의 기원’을 통해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였다. 1876년 조지 펨버는 ‘초기 지구의 시대’에서 낮은 지층에는 하등의 화석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술하면서 촬머스의 간극이론을 발전시켰다. 1881년 영국 개역성경 발간 1901년 미국표준개역성경 발간 1909년 스코필드 주석성경 발간으로 교회안에 간극이론을 주요교리로 정착시켰다. 1912년에 영국의 필트다운이란 마을에서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고리로 인정되는 화석이 발견되면서 인류진화의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 진다. 1963년에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탕의 턱뼈를 조합시킨 사기극으로 발표되기 까지 50년간 진화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라킨이 ‘세대적 진리’를 출간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진화의 긴 연대를 수용하는 간극이론으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2. 간교한 거짓말 1) 30cm의 지층이 쌓이는데 50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관찰되는 현상이 과거에도 동일했다고 볼 수 없다. 화산폭발이나 홍수를 통해 수십센티의 지층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세인트 헬렌산 화산폭발) 현재와 과거의 상황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노아의 홍수라는 전 지구적 홍수라는 대 격변을 기록하고 있다. 2)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이 발견된다. 그러나 진화는 없다. 처해진 환경에 따라 개체수의 변화와 다양성이 있는 것이지 DNA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종과 종간의 연결고리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그 창조의 질서가 지금까지 유지됨을 믿는다. 3) 낮은 지층에는 하등의 화석이 존재한다? 교과서의 지질 주상도에 나오는 지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 발견되는 생물들의 화석이 고등생물이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예 : 삼엽충) 현재 발견되는 화석들은 서식지의 구분에 따라 매몰된 흔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요, 지역교회의 선택이다. 누구도 강요할 수 없고 강요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간극이론은 유대교와 1800년 이전의 기독교의 입장은 분명히 아니다. 간극이론은 진위를 떠나서 굳이 믿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 태생이 어수선하다. 진화론이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이고, 개역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을 대체하려하고 강력한 힘이 움직이는 시점이다. 성경으로 과학을 이해해야지 과학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의 해괴한 논법은 생각과 판단을 고정하고서, 그 후에 그 추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을 찾아 모으러 다니는 일이다. 뒷받침할만한 것들만 모았기에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이론들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신 그것을 믿으면 된다. 딤전6:20,21절 20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21 그것을 내세우던 어떤 자들이 믿음에 관하여는 잘못하였느니라. 은혜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2015-04-06 14:31:57 | 조양교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로 말하건대 그녀가 작은 숲에 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녀를 제거하여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녀의 우상을 베어 낸 뒤 짓밟아 기드론 시내에서 불태웠으나 산당들은 이스라엘에서 제거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의 마음이 평생토록 완전하였더라.(역대하15:16-17)"   아사 왕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온전히 순종했지만, 모든 일에 순종을 다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런건 큰 문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하나님께는 매우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일도 사소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가지 교훈을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거나 화내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산당'은 아직 그대로 버젓이 남아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부끄러울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여러분의 실제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즉각 중단하십시오. 큰 죄를 버렸다고 해서, 작은 죄는 괜찮아 지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대충 지나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어두운 구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중요한 일에서는 모두 옳았다 할지라도 확실히 아직 뭔가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온전히 순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단 한순간도 박동을 멈춰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모든 문제에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기를 단 한순간도 쉬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주파수를 고정하기 원하시며, 그분께만 온전히 집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들이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면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4-05 23:57:26 | 박진태
"회초리와 꾸짖음은 지혜를 주거니와 제멋대로 버려둔 자식은 자기 어머니에게 수치를 가져오느니라.(잠29:15)"   우리들은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다 보면 죄악된 생활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어 기꺼이 진리를 배우도록 하십니다.   마틴 루터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환난과 고난이 없었다면 나는 성경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이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징계하시며 주의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94:12, 119:71)" 라고 말했던 다윗이 그 진리를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 진리를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연단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는 이러한 깨달음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는 게 없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재난이 우리를 혼절케 해서, 우리는 신경이 곤두서고 마음이 뒤틀리며, 감각이 마비되기까지 합니다. 반면 그에 따른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 듯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우리는 복된 결과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판단력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함을 예민하게 느낄 줄 알게 되고,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분별력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이 징계의 은혜로운 열매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철저한 훈련 과정을 밟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놀랄 만큼 진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때(호레이셔스 보나르) 
2015-03-31 23:10:34 | 박진태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어떤 부족함이 환경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가까움이 없는 내 자신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에 많은 은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5-03-30 02:31:00 | 박흥식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빌4:11)"   환경이나 물질에 행복을 쌓는 것은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변하고 물질은 닳아져 가치를 잃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나가는 외적인 것 위에 행복을 쌓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자기 만족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간증도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   자기 만족은 안일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안일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느꼈고, 위험과 박해에도 아랑곳없이 도시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만족은 사실상 내실입니다. 삶에 용감히 맞서 거뜬히 대처할 영적 자원을 내 안에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족은 하나님의 충족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버팀목과 지지대를 다 떼어내도 여러분은 설 수 있습니까? 내면에 하나님의 충족과 만족이 있습니까? 하나님 방식에 따를 믿음만 있다면, 여러분도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차원의 신앙 상태에 어떻게 도달했을까요? 그는 '내가 배웠노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만족은 그의 구원에 자동으로 따라온 본래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으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여기서 넘어집니다. 우리는 내적 자기 만족과 영적 충족을 당장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내실은 그렇게 다져지는 게 아닙니다. 경험으로 배워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과 역경과 희생을 경험하고 삶의 변화에 부딛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변화가 없으면 도전도 없고 도전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산다면 도전에 부딛칠 일도 없겠지만, 그것은 성숙해질 기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에게 삶이란 싸움터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싸움에 부딛쳐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이라는 삶에 어떤 시험을 치렀는지 보려면 고린도후서 11-12장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을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고후11:23-25)" 여기에다 여러 번 여행중에 겪은 위험, 적들의 방해,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짐까지 더하면 사도 바울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고 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실을 다지는 법, 즉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모든 자원을 속에 품는 법을 고된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읽으면 풍랑 속에서도 만족한 사도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행의 목숨을 건져주실 거라고 공헌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선생들아, 기운을 내라. 내가 하나님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행27:25)"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삶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하는 법을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배울 마음만 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간증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5-03-29 20:37:57 | 박진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은 빛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게 하라. 어둠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하나님의 빛 속에서 본 것들은 그대로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변하여 어두움이 됩니다.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마6:23)"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주셨음에도 그 빛을 외면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속으로 끊임없이 진리가 들어오게 하여, 그 진리에 순종하면서 그 진리와 더불어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빛은 여러분에게 도리어 큰 짐이 될 것입니다.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은, 늘 과거의 영적 무용담을 들먹이며 자부심에 가득 차 있기는 한데, 실생활에서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이 진짜라면 지금 그 사람의 삶에서도 여전히 드러나 보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믿음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가짜입니다. 영적인 자아도취를 조심하십시오.   성화의 교리를 잘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삶의 모든 문제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삶의 문제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리스도 십자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합니다. 문제는 항상 십자가에 처리되지 않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은 '십자가' 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27 00:40:52 | 박진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온전을 향해 가는 나에게 아직도 내려 놓지 못한 것들이 무엇일까! 그 동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 오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고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1,2).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주님을 위해 내려 놓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내려 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15-03-24 07:15:06 | 박흥식
"베드로가 그분께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막10:28)"   베드로는 자신의 권리포기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너무도 밝아서, 주님 그분 보다는 그분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는데 관심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권리포기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권리포기를 깨닫는데서 오는 지극히 순수한 결단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데, 이 믿음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는 고백이 포함됩니다. 즉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권리포기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데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헌신으로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타산적 권리포기'란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형용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권리포기에는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가를 염두에 둔 권리포기는 헌신이 아니라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권리를 포기하면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소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자유로움과 부요함이, 인정받을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겸손함이, 옳고 그름을 따질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관대함과 온유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리를 포기해야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권리를 포기함으로 자아가 죽어야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드러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권리포기는 상실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만큼 주님을 더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24 00:30:41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