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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태형제님, 늘 좋은 내용의 글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중에 "주님께서 쓰임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인격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모난 데가 어딘지 모릅니다. (중략) 그래서 주님께서 때로는 극심한 고난으로 우리의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 이라는 내용이 큰 울림으로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2015-03-04 13:48:38 | 한원규
우리에게 인간적인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자제해야 함이 요구되네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귀와 마음을 열고 끈기 있게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함을 또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3-04 09:14:42 | 박흥식
 깊은 협곡 밑으로 한탄강이 흐르고 강위에는 넓은 평야로 벼농사를 짖고있는 냉정리 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2킬로 데는둘레의 둥근 연못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옆에 조그마한 사택이 아담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4년동안 목회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아지랑이가 가믈 가믈 피어나는 초여름 어느날 그 연못을 지나가는 소 달구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에 저는 그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은 마차에 올라타고 소를 몰고 가는데 그옆에는 부인이 걸어서 가고 있었거든요 !  뛰다가 걷다가 하는 그 부인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남존 여비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것은 부부가 아니라 종을 부리는 모습이지, 같은 인격으로 한집에 사는  부부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 되시는 분이 우리 교회에 혼자서 가끔 나오셨습니다.  한 오십이 조금 넘으셨는데 흰 광목으로 치마 저고리를 입고 다녀서 육십세도 더 들어보였습니다.    가끔 교회 올때는 품속에다 쌀이나 잡곡을 한대박씩 싸 갖고와서 우리 집에다 맡겼습니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갈때는 그 것을 갖이고가서 팔아서 필요한 소지품을 사서 남편한태 들키지 않게  쓰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무서우세요?  예! 우리는 하루도 조용히 사는날이 없답니다.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은 몆년전에 집을 나가 버리고 둘째가 17세인데 국민 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에도  안보내고  농사일을 배우라고 집에서 일을 시키는데 조금만 잘못하면 야단을 치고 화가 나면 곡갱이고  삽이고 들고 때릴려고 해서 이 아들이 산에다 움막을 짖고 혼자 사는데, 정신이 불안 해서인지 늘 안절 부절  하면서 사회 생활도 못하고 혼자서 겨우 밥만 끌여먹고 살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차라리 눈에 안보이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태연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어떠 했겠어요, 늘 울면서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목회지를 서울로 옮기게 되어 떠났습니다 .   그런데 그 집이 늘 궁금 했습니다. 그 후로 한 2년후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에서 혼자 살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집에다 불을 놓아서 초가집이 다 타버리고 그 아들은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제일 큰 축복이 남/여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으라고 하셨는데 그렇치 못하고 불행 하게도 비참하게 비극으로 끝내는 가정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을 저주로 바꾸어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것 같아요.     40년쯤 지난 일인데도 가끔은 내 머리에는  불행한 가족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2015 .2 .19 캐나다 한국 타임지에 토론토 노스욕 에서 3살짜리 할엘티야 마쉬 라는 어린이가 티셔츠에  기저기를 차고 부츠만 입고 새벽 4시에 집을 나가 10시에 영하 19도 체감 온도28도의 강추위에서 홀로  견디다 6시간 후에 데이커 {유치원 어린이집 } 앞에서 쓰러져 있는것을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이미   동사로 목숨을 소생시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럼 왜 애기가 자고 깨자 마자 어린이 집을 향해 갔을가요 ?   마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웠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늘 사랑을 쏫고 잘해 주어서 엄마의 사랑 대신   선생님의 사랑이 이 마쉬의 마음을 채워 주었던 것이지요, 추위도 모르고 자고 깨자 마자 늘 다니던 어린이   집으로 걸어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같겠지요!     그런데 집에서 어린이 집이 먼 거리에 있었나봐요,    마쉬 할머니가 아침에 보니 손자가 없어서 경찰에 신고를 해서 찾느라 헬리곱타 비행기를 다 동원해서    찾았는데 어린이 집 앞에 쓰러져 있었답니다, 그 사건을 우리 큰 딸이 토론토에 살고 있는데 카톡에다    보내서 클릭해서 보았습니다.      자녀는 엄마 아빠가 길러야 되나봐요, 우리나라 나이로 4살이니 얼마나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겠어요 !    마쉬의 부모가 이혼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어서 할머니 한태 맡기고 돈을 벌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망울이 초롤 초롱한 마쉬의 사진을 보노라니 얼마나 춥고 힘들어서 얼어 죽었을가 ?    하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사랑 스러운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이 많이 필요할때 듬뿍 주어서 구김살 없는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자라는 어린이 들로 가정마다 잘 양육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때 우리 사회도 더 밝고 건강한 행복한 사회가 되겠지요.  
2015-03-04 04:55:35 | 윤정용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따로 있을 때에 모든 것을 풀어 자기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더라.(막4:34)"   어떤 일은 주님께서 설명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쓰임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인격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모난 데가 어딘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교만, 고집, 욕심으로 늘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선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도록 성경 말씀, 우리 주위의 사람들, 우리가 처한 환경, 여러가지 사건 등을 통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문제를 보여주셔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옛 자아에서 나오는 일종의 자기기만으로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입니다. 자신을 다루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깨뜨려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잘아십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겸손하고 용기있게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거기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손길을 피할 데가 없는 코너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깨지지 않은 한, 우리는 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로는 극심한 고난으로 우리의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를 인정하는데서 변화는 시작됨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04 00:44:21 | 박진태
김경민자매님, 저도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제 마음 속에 손 꼽는 수작입니다. 감동도 있고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들려주고 싶은 내용도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혹시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자녀들과 함께 DVD 빌려서 집에서 함께 볼 수 있는 가족영화로 추천합니다.
2015-03-02 12:38:19 | 한원규
시댁에도 자폐인 조카가 있어요. 대부분 자폐아는 ADHD가 함께 나타나서 항상 동서가 신경을 쓰고 여기저기 치료 받으러 다니곤 했어요. 저도 자폐아동을 1년간 가르쳐 봤는데 머리가 뛰어난 부분들이 있어요. 사촌조카가 지금 26살 청년이 되었는데 알바를 해서 이번 명절에 사촌동생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을 보고 다들 놀라고 기뻐했어요. 사회생활을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어릴 때의 모습으론 상상할 수 없었지요.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소원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 는 것이지요. 마음이 너무 아픈 말이에요.... 조카의 경우도 있으니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함께 기도하는 지체들이 있으니까요^^
2015-03-02 06:36:30 | 이수영
현실은 참 냉정하기만 합니다. 어떤 특정한 현실을 직접 짊어지지는 않은 제삼자라면 한마디의 위로나 기도나 격려 등으로 간단히 자신의 할 바를 다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코 이런 것들이 무가치하단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 특정한 현실의 당사자는 위로자들과 달리 그 현실의 무거운 짐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저도 형제님의 절절한 간증의 글을 읽고 이렇게 댓글 몇 마디를 남기고 이내 유유히 평온한 일상으로 아주 냉정히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선혈처럼 치열한 글을 남긴 형제님은 오롯이 이 글에 담긴 묵직한 현실을 피할 사이도 없이 자매님과 함께 감당하셔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어찌 보면 참으로 냉정한 우리네 삶의 단면인가 봅니다. 먼지 같은 저의 위로와 격려가 형제님 부부의 고단한 일상에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참 너무나 복된 소식은 형제님이 그토록 많이 읽었던 욥기서의 주인공 욥에게 일어난 것처럼 언젠가 이 모든 고통과 고난이 완전히 끝나버리는 때가 우리에게 반드시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훤칠한 키로 남보다 높은 곳의 맑은 공기를 늘 흡입하셔서 그런지 유독 형제님에게서는 순수한 믿음의 깊은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형제님은 참 멋진 사나이입니다. 앞으로도 그 좋은 향내를 여러 사람에게 풍성히 뿜어 주십시오. 저는 그저 형제님 옆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우리의 울부짖음을 완전히 제거하실 하나님을 뵈올 그날까지 형제님 부부와 세원이의 아름다운 동행을 늘 뜨겁게 응원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2015-03-01 23:39:59 | 김대용
세원이가 다섯 살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열세 살이니까 무려 8년, 그 긴 기간 엄청난 시련을 겪고 계시는군요. 차라리 부모인 내가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자폐증에 관한 자료를 조금 찾아 보았는데 아직 제대로 된 원인 규명이나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 답답하고 가슴이 메이네요.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게 됩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형제 자매 성도님들께서 형제님 부부와 세원이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빨리 주님께서 형제님 눈에서 흐르는 그 눈물을 닦아 주소서.
2015-03-01 14:30:31 | 최상만
형제님 모든 것이 암담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없는 그러한 근심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신뢰하는 모습 보기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긍휼을 받기에 합당한 만큼 어려운 형제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그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아들 세원이가 더욱 쾌활하고 안정된 아들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5-02-28 23:33:05 | 박흥식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며 걷는 자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예레미아10:23)"   최근 대구에 자폐증을 앓고 있는 세살배기 아들을 안고 어머니가 15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보며, 저또한 자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뉴스를 접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런 방법밖에 없었을까...   이번 뉴스를 보며 지난 날 삶의 간증을 나누고자합니다.   저희 아이가 5살경(현재13살) 정상 행동을 하지못한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여러 병원을 찾아 검진 받아보니 자폐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일이 나에게 일어나리라는게 받아들여지질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 저의 아내는 목놓아 울부짖는 모습을 보며 위로하고 같이 울었던 기억이납니다.   하지만 고난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치료하려했던 스스로의 노력으로 여러 치료기관에 의지하게 되었고, 치료비에 대한 경제적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잠3:5)"는 말씀에 순종해야함에도 그렇질 못했고 우리가 이겨낼 수 있다는 인간적인 희망을 놓지 않고 치료는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재산과 직장까지 잃게 되는 결과만 초래되었을 뿐, 전혀 아이의 상태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나에게 나타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감당할 수 없는 이 아이를 왜 내게 허락하셨을까.... 주님의 뜻을 구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죽어야겠다는 사단의 생각마저 들게되었고, 아래의 말씀처럼 고백하며 저의 삶을 저주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부터 죽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배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리하지 하니하였더라면 이제는 내가 가만히 누워 평온히 지내고 잠들어 안식하였을 것이요.(욥3:11,13)" "나는 먹기도 전에 탄식하고 나의 울부짖음은 물들처럼 쏟아졌으며 내가 크게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던 것이 내게 이르렀도다. 내게는 안전도 없고 안식도 없고 평온함도 없었으되 고난이 임하였도다.(욥3:24-26)" 당시 욥기서와 시편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성경 말씀을 읽고 붙들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 전까지 아래의 말씀처럼 교만에 넘쳐있는 내 자신이 낮아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사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눈이 고통으로 소멸되었사오며 참으로 내 혼과 내 배도 그러하나이다. 내가 내 삶을 고통 속에 보내며 내 햇수를 탄식 속에 보내오니 내 기력이 내 불법으로 인해 약해지고 내 뼈가 소멸되었나이다.(시31:9-10)"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6)" 낮아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됨에 감사드렸습니다.   "그분께서 고난 받는 자의 고난을 멸시하거나 몹시 싫어하지 아니하셨으며 그가 그분께 부르짖을 때에 그분께서 들으셨도다.(시22:24)" 그 이후 저희 부부는 그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합심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제목에도 올려놓았지만 아이가 커감에 따라 폭력이 심해지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며 사랑침례교회 형제자매님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아이의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에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에서 직장을 주시고, 임대아파트 보금자리 또한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드릴뿐입니다.   지금도 이 아이를 보면 고난 중 감사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낮아질때로 낮아진 마음을 주시고, 교만한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내 의지로 하려던 마음을 순종하는 마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기도 글을 인용하며 제 간증을 마칠까 합니다. "시련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 달콤하고, 시련때문에 기도생활이 더 새로워지며 시련때문에 이 부족한 제가 주님의 발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나이다. 주여 더욱 낮추시어 늘 이 낮은 곳에 머무르게 하소서."
2015-02-28 12:45:57 | 박진태
  예전에 과제물을 하기 위해 보았던 영화 <킹스 스피치>를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는데 아이들과 같이 보시면 좋을  것 같아 잠시 소개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지6세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재임 전 심한 말더듬이 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 장면 중 연설을 훌륭히 마치고 내려온 조지6세에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처어칠이 자기도 예전에 심한 말더듬이 였노라고 고백하며 왕이 자신보다 훨씬 더 낫다라고 이야기를 건내는 재미있는 일화도 나옵니다.   우리 각자는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컴플렉스가 있을 것입니다. 컴플렉스는 꼭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노력한다고 해서 다 고쳐지지도 않겠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극복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일도 나름 가치 있는 일이겠지요.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요.    <줄거리>  영국의 조지5세가 전 세계의 4분의 1을 통치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20세기 초 대영제국박람회 폐막식에 연설을 앞둔 둘째아들 요크 공작은 마이크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다. 모두의 눈과 귀가 그에게 초점이 되어 긴장한 가운데 서서히 입을 열지만 결국 끝을 맺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심한 말더듬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에게 착하고 현명한 아내가 있어 여러 명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해 보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다. 때는 점점 히틀러가 기승을 부리며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에서 요크공작은 불안해지는 정세를 걱정하면서도 점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가뜩이나 아버지 조지 5세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가고 왕위서열 1위인 형은 평민출신의 유부녀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여기에 왕실과 당시 국방부장관을 맡고 있던 처칠은 요크공을 조심스레 왕위에 계승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요크공은 자신의 내면에 국가에 대한 안위와 국민을 걱정하는 뜨거운 마음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형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다는 것과 자신의 말더듬는 연약함이 사랑하는 가족과 왕실을 도리어 어려움에 빠뜨릴 것이라는 복작합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를 잘 아는 아내는 수소문 끝에 호주출신의 언어치료사 로그를 직접 찾아 나선다. 아내의 권유로 로그를 찾아 가지만 사생활을 침해하는가하면 독특한 치료법에 심기가 불편한 요크공은 하다말다를 반복하며 치료를 이어간다.   아버지 조지5세가 서거하면서 형이 왕위에 오르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미국국적의 유부녀와의 결혼문제로 왕실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되면서 요크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된다. 로그의 치료는 서서히 차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대주교의 뒷조사로 인해 로그가 제대로 된 학력과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치료를 중단하게 된 조지 6세는 대관식을 앞두고 초초해 하며 결국 다시 로그를 찾게 된다.   로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대관식을 치르게 된 조지6세 앞에 또 다른 시련이 닥치게 된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자 영국도 결국은 2차 세계대전을 치러야할 위기상황이 닥친 것이다. 라디오가 중요한 대중매체였던 시절 대국민 담화는 그에게 있어서 왕위에 오른 뒤 치르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되었던 것이다. 촉각을 다투는 시간 조지는 로그의 지시대로 그동안의 노력과 열정을 다해 로그를 마주보며 한자 한자 힘 있게 연설을 마쳐간다.   결과적으로 연설은 대성공 이었다. 전쟁 앞에 불안에 떨던 국민들도 자신을 의심에 눈초리로 바라보던 왕실도 그리고 가장 가깝게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아왔던 아내와 두 딸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2015-02-28 10:36:11 | 김경민
장례식장에서 뵙고 형제님의 마음이 담긴 글을 보니 죽음이 꼭 두렵거나 슬픈 일 만은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시작... 그리고 이 질곡의 세상과의 작별... 가장 가까웠던 이들과의 이별은 잠시뿐... 곧 영원한 주님의 집에서 밝게 해우 할 그 날이 더욱 간절함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기에 참 은혜롭습니다.
2015-02-27 23:51:18 | 김경민
사랑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안녕하세요 유영조 형제입니다. 지난주 토요일부터 금주 월요일까지 어머님의 장례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지면을 통하여 인사를 드립니다.   장례예식에 참여해 주신 정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 목사님께서 인도해주셨던 장례예식은 저에게 매우 감동적이고 가슴이 메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과 휴거의 소망이 있음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앞으로  형제자매님들의 애경사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님 안에서의 슬픔과 기쁨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제가 2.25 잠이 안 와서 새벽에 어머님을 생각하여 일기형식으로 적어본 내용입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2015.2.25. 새벽, 어머님을 기리며 아들 유영조  2015년 1월 4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어머님이 계신 요양원에 갔습니다. 오늘은 동짓달 열이레 어머님이 만84세 되시는 생신을 기념해서 형제들이 요양원으로 모였습니다. 어머님은 침대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음식물을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앞치마를 하고 계셨습니다. 조금 있으니 요양보호사가 식판에 어머니의 저녁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녁 메뉴는 밥과 국 그리고 동그랑땡, 김치와 나물 등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머님은 치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잡수시기에 불편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던지 집사람은 침대에 올라앉아 반찬을 잘게 잘라서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마음에 안들었던지 부엌에 가서 직접 가위를 가져다가 반찬을 아주 잘게 잘라서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젓가락을 잡고 일일이 어머님의 숟가락에 반찬을 놓아 드렸습니다.   어머님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왼손으로 어눌한 동작으로 조금 빠르게 식사를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고 오른 손이 저리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왼손으로 식사를 하시면서 조금 빠른 속도로 식사를 하십니다. 혹여 체하지나 않으실까싶어 천천히 식사를 하시라고 권해드려도 습관이 되었다는 듯이 잘 드셨습니다. 식사 도중 간호사님이 약을 가져오기에 약들 속에 소화제가 있는지 재차 확인을 하고 안심을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칠 즈음이 돼서 두 여동생 부부가 생일케이크를 가지고 밝은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식판을 물리고 둘째 매제가 어머님 옆에 앉아 생일케이크를 조그마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촛불을 켜고 어머님께 친근히 다가갔습니다. 매제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어머님께 아주 다정했습니다. 어느 때 보면 아들인 나보다도 더 어머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녀석입니다. 더욱이 매제의 딸인 미나는 너무나 예쁜 아이입니다. 둘째 동생의 가정에 믿음의 씨앗을 심은  귀한 아이입니다. 작년에는 캄보디아에 1년간 선교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님은 미나가 캄보디아에서 몇 월 며칟날에 온다고 기억하시면서 벽에 미나 사진을 붙여놓고 기도하시며 기다리시기도 하였습니다. 매제는 오래전부터 바랐던 장모님의 소원인 교회 가는 것을 딸로 인하여 풀어드렸습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생신축하 합니다."   자녀들의 축하노래에 어머님은 매우 흡족해 하셨고 모두 케이크를 잘라 먹고 어머님도 아주 맛있게 한 조각 드셨습니다. 어머님께 더 많이 드시라고 권했지만 사양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배부르다 싶으시면 딱 잘라 거절하십니다. 첫째 매제가 사온 귤도 먹고 어머님께도 드렸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님께 오늘 예배를 드렸냐고 여쭈니, 드렸다고 하시면서 지난 주 크리스마스에 5천원을 헌금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꺼내자 큰매제도 보태서 어머님께 헌금하시라고 드렸습니다. 어머님은 조그만 옷장에 있는 어머님의 바지 주머니에 이미 가지고 계셨던 돈과 함께 접어서 넣으셨습니다. 큰매제가 “다음 달 설날에 뵙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나는 어머님을 눕혀드렸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손을 흔들고 유쾌한 마음으로 방을 나셨습니다. 설날에 뵙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이날이 살아계신 어머님을 뵙는 마지막 날이 될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2월 11일 요양원 원무과장이 오늘은 어머님이 매우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면서 물리치료를 받으시고 난 후 메일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참으로 평온해 보이셨습니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시고 아주 밝게 보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장을 보내고 나서 핸드폰의 갤러리에 저장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멀리 캐나다에 이민 가서 최근 소식이 없는 막내를 구글에서 찾았습니다. 밴쿠버 한인감리교회에서 가족찬양을 하는 사진이 올라와  있어서 스크랩하여 명절날 어머님께 막내의 사진을 보여드리려고 출력하여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사진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2월 17일 설명절로 인하여 휴가 중이었는데 저녁 5시 30분경에 원무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우 침울한 어투였습니다. 어머님이 식사도중 쓰러지셨다며 병원에 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어 다시 전화가 와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멀쩡히 식사하시다 불과 10분여 만에 운명하셨다는 것입니다.   8시경 안산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여 어머님의 얼굴과 몸을 만져보니 아직 온기가 있으셨습니다. 당장 일어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의 얼굴은 놀랍게도 매우 평온하셨습니다. 식사중에 돌아가셨다면 고통스러워 하셨을듯한데 의외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뇌수술을 두 번 받으시고 담석증 수술을 두 번 받으시면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오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만도 젊어서부터 장사, 가락시장, 골프장일, 대파밭 등 많은 일을 하시며 가정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힘들다는 불평 한번 안하셨었습니다. 어머님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던가 봅니다. 쓰러지시면 일어나시고 또 쓰러지면 일어나시는 오뚜기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시지 못하셨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제는 이 고통스러운 육신의 장막을 벗으시고 안식을 누리실 때가 되신 것입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어머님의 영혼을 반가이 맞이하는 듯 그렇게 평온하셨습니다.   국과수 부검결과는 뇌출혈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뇌출혈의 직접적인 원인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장례일정을 2/21일부터 23일까지 3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주셨습니다.   첫날 맨 처음 조문오신 분은 우리교회 차형제님 부부였습니다. 전혀 뜻밖의 방문이었습니다만 믿음 안에서 생각을 나누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볼 때는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었으나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며 주관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형제에게 깊은 인상과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2월22일 주일로서 발인 전날입니다. 친구인 정용훈 목사가 장례식장에 들어오면서 “죽어야 만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불광동교회에서 함께 교제했던 10명의 친구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고 다들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얼굴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강성기목사, 김찬일형제, 윤봉섭목사, 윤석경집사, 정용훈목사, 김광섭목사, 민경렬형제, (강충성형제), (신세기형제) 나중에 함께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정동수 목사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님과 성도들이 함께 하는 장례예식이 있었습니다. 식장을 빈틈없이 가득 메웠습니다.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과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장례예식 중 가장 최고의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음이 얼마나 기쁨인지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몸은 현재 잠들어 계시나 어머님의 영혼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앞서가신 어머님의 믿음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실 때 그동안 사셨던 어머님의 생활과 신앙생활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3절은 모두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예수라”   고통스러우셨던 육신을 벗으시고 천국에서 기쁨으로 안식하실 어머님을 상기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님을 받아 주심에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2월 23일 새벽, 처남 목사님의 인도로 간단한 발인예식을 하고 서울 추모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화장을 마친 후 임실 호국원에 어머님을 아버님과 합장하여 안장을 하고 가족과 친척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저의 기도로 안장식을 마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어머님의 육신을 이곳 임실 호국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시던 어머님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셔서 어머님께서 영원히 안식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비록 몸이 이곳에 묻혀있지만 예수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홀연히 변화하여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고 어머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 있는 어머님의 아들, 딸, 손주, 일가친척이 주님 안에서 남은 생애를 기쁘고 행복하게, 서로 용납하며 화평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5-02-27 14:41:00 | 유영조
아무리 오래 기도를 한다고 해도 겸손히 기도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으로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헛 고생이고 시간 낭비 이겠지요.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언제나 겸손을 있지 않아야 되겠지요.
2015-02-27 05:51:08 | 윤정용
제가 어렸을때 그리고 청년때 장년때가 되기 까지 참 순수하게 믿음 생활을 했던것 같았는데 갑작이 그 순수한 믿음은 어디로 가고 세상과 짬뽕이 되어 구분이 안되는 신안 생활로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아니 더 타락해 가는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을 바라 보노라면 주님이 오실날이 가까운것 같아요.
2015-02-27 05:45:19 | 윤정용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이름, 아름답고 그리운 이름                    그 이름 어머니 :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시고 모든 허물을 감싸주시고                    사랑으로 훈계하시며 정성을 다해 우리 7남매를 길러주신                    영원히 내 가슴에 사랑의 그루터기로 남아있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                      힘들 땐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생기고                    외로울 땐 훈훈한 봄바람 같은 사랑으로 가슴을 메워주는                    어머니의 사랑                      저도 어머니 같은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내 자녀들에게 가르치렵니다.                                      이땅에 수많은 어머니들의 숭고한 그 사랑으로                   자녀를 잘 양육한다면 평화의 물결이 멀리 멀리 저 멀리                   지구의 끝까지라도 흘러넘치겠지요 .                     세상에서 제일 나를 사랑해 주셨던 그분을 생각하면                   조금도 삐뜰어진 길로 갈 수가 없었답니다 .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끄럽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우리 7 남매는                   모두가 떳떳한 사회인으로서 먼 이국땅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변함없으신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지요.                     지금은 내 곁에 안 계시지만 늘 내 마음속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향기 되어 남아 있기에                   저는 어머니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찡 합니다.                    지금은 천국에서 즐겁게 살고 계실 나의 어머니                                                                                          1997. 5 월 어느날
2015-02-27 05:36:57 | 윤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