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6314개
  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2014-01-18 23:29:03 | 김상진
사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전체에 15%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온건주의는 기독교를 누르기 위해서 다산정책을 펴고 있는데, 학계에 알려진 바로는 통계적으로 어느 나라든 이슬람 교도가 그 나라의 인구 5%가 넘어서면 테러가 자행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도 대략 20만 가량의 이슬람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교를 가장 나쁜 종교로 매도하고 있어서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조장된 오해와 편견으로 말이지요~
2014-01-10 01:13:52 | 김상진
여기에서 다룬 참된성도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참된성도는 말씀에 의지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려고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렇게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자매님의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2014-01-10 01:07:30 | 김상진
이슬람교가 어떤 교리를 가졌는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꾸란의 구체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여 주시니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형제님의 열정으로 이곳은 훈훈하네요. 앞으로도 이 겨울을 잘 부탁합니다.^^
2014-01-09 19:47:20 | 김대용
형제님 갑자기 그렇게 댓글을 쓰시니 잠깐 놀랬습니다. 물론 제 부족한 글이 특정 상황이나 인물을 염두에 둔 글이 아님을 아시지만, 우연히 읽는 중에 유익을 얻으셨다는 뜻임을 알고 있습니다. 혹여 한 분이라도 오해하실까 하여 짧게 댓글을 올립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강건 하십시요.
2014-01-09 19:32:51 | 김대용
형제님의 엄중한 메세지를 잘 헤아리며 "갈6:1"말씀을 맘 속에 품습니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저의 위선을 사랑으로 깨우쳐주셔서 감사드리며, 저의 절제치 못한 언행으로 상심하신 분들껜 용서를 구하며 사죄드립니다. 교회 지체로서 걸림돌이 아닌 고임돌로 살아가도록 성찰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이처럼 바른 메세지의 교회 일원으로 심겨주신 주님 은혜가 큰 기쁨을 주십니다. "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 - 고전1:10 -
2014-01-09 17:22:21 | 최상기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본다는 것이 대단한 축복이라는 마음이 다시금 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고 하셨는데 올 한해는 성경을 마음들여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을 알아가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2014-01-09 17:14:22 | 이정희
문득 2년 전 극장에서 아이랑 같이 보았던 에니메이션 가 떠오르네요. 늑대무리의 리더를 '알파'라고 하지요.... 우리의 참 구원자 이신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의 리더이십니다. 그 분의 걸어가신 길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가야 하겠지요. 형제님의 깊이있는 통찰력에 다시한번 놀라며 형제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 어렵지만 기도하며 실천 해 나아가는 사랑침례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4-01-09 00:19:05 | 김경민
정말 제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독이라 형제님의 진지한 글이 마치 질병에 대한 처방전 같이 느껴지네요.... 고통스럽더라도 내 자신의 상태를 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직시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도의 삶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지만 이미 보장 된 길이기에 인내하며 믿음으로 매순간 승리해야 겠습니다. 서로 독려하면서 말이에요.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4-01-09 00:08:53 | 김경민
  동물 가운데 늑대만큼 억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전의 글 ‘왜, 늑대인가?’에서 잠시 다루었듯이, 늑대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로부터 학살을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테러(terror: 공포, 그리스어 ‘terrior’에서 파생된 됨. ‘terrorism’은 공포의 확산의 뜻을 지님.)를 당해온 셈입니다. 그런 피해자인 늑대를 두고, 우리 사회는 단독테러를 자행하는 범행을 일컬어 일명, ‘론 울프테러(lone wolfe terror)’라고까지 명명합니다. 늑대가 들으면 억울해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crime)와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팁(tip)을 드리자면, 그것은 범법동기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범죄는, 가해자 자신(들)의 이익이 동기가 되어 자행하는 범법행위이지만, 테러리즘이란 정치․종교․이념 간의 갈등이 동기가 되어 자행되는 범법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러(terror)의 개념이 바라보는 각도(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제치하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의로운 순국열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정치적인 테러분자로 여기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한 편에서는 영웅, 다른 편에서는 잔인한 킬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도가 인간과 늑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5c 이후 인류는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늑대들의 구역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들의 영역과 무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목숨을 내놓고 다투는 그들만의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늑대의 습성을 알리 만무했던 우리 인간과의 갈등은 그때부터 불가피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를 찬탈당한 늑대들은 전처럼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워져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개간한 농가의 양, 염소, 말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늑대는 인간을 습격하는 ‘잔인한 킬러’라는 오명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늑대를 총, 덪 등으로 사냥하기 시작 했으며 심지어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마구잡이로 죽여 댔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늑대의 방해가 없이 땅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늑대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는 시국을 맞게 되었습니다.(참고로 늑대는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포식자의 위치를 담당합니다.)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늑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결여된 ‘선입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익관계에 따른 타협(탐욕)’입니다.   심리학에서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불리 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초두효과란, ‘초기의 정보 즉, 첫인상이 나중의 정보보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형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선입견은 이러한 초두효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문제점은 한 번 뇌리에 고착되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선입견은 자기방어 기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 하는 타협성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뽕나무 벌레를 보면 소름끼쳐 하지만 어부들은 손으로 뱀장어를 잡고 부녀자들은 누에를 친다." 라며 이익이 있는 일 앞에서는 누구나 용사처럼 용감해진다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입견과 이익관계가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 선입견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줍니다. 설령 선입견이 이익관계에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이브가 뱀의 말에 꼬임당해 선악과를 탐하기 위한 구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듯이 말입니다.<창 3:3> 다시 말해서, 이익을 넘어 탐욕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좋은 선입견도 더 이상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명확한 기준이 되는 법(法)도 무시하게 되어 탐욕을 위한 타협에 우정을 싹티우며 손잡을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예로,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러한 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예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테러집단은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전후의 어린 소년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입시키는 내용은, 이슬람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이슬람 교리를 핍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꾸란 8:39, 9:123, 47:4>는 거짓 교리 입니다. 더 나아가 특히, 기독교인들과 싸울 때는 가차 없이 벌하라<꾸란 8:57>고 합니다(그 방법으로는 목을 베는 것인데, 김선일 사건이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 그 같은 교육을 받은 소년병들에게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모든 종교는 응징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특히 기독교는 가장 나쁜 종교이면서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오히려 알라의 뜻이라는 정당성이 선입견으로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면 행동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행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관과 관련하여 내세에 주어지는 인본주의적 상급(이익)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죄의 정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 때에 갈라지게 되는데, 단지 직통으로 천국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알라를 위해서 순교(테러행위)를 당하는 것이다<꾸란, 4:74, 9:89>. 그리고 그 순교자(테러분자)는 포상으로 천국 가는 첫날 72명의 미인들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정력이 부여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이없는 비상식적인 교리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몸을 폭탄과 함께 내던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행합니다. 이처럼 ‘선입견’과 ‘이익관계의 조화’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탄의 절묘한 계략’으로 활용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러한 계략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답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에도 사탄의 탐욕스러운 인본주의 교리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오해와 편견’이라는 열매로 탐스럽게 무르익고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짜 신도들도 넘쳐 납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짜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해하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독한 사랑까지도 흉내 내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인류애도 품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짜 성도처럼 장기적으로 흉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가끔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남들에게 좋게 보이려하는 그릇된 일도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의 자극으로 자신들이 곧바로 알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독교는 소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폄하할 때 표현하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탐욕으로 마귀와 손을 잡은 이 땅의 기독교는 온통 ‘오해와 편견’으로 조장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정체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복(福) 사상의 주체가 되는 맘몬입니다.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인양 믿고 있는 가짜 성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른말을 하는 그들을 교세라는 뒷배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가짜 하나님(실상은 맘몬)이 뭔가 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맘몬이 하나님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맘몬의 능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소위 성령님의 열매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만의 확증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대가를 주님 오신 날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며 이를 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자신들이 주님을 오해했다고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마태복음 7:21~23> 우리 손 안에 쥐어져 있는 진정한 말씀(KJB)만이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작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하여 알파늑대(우두머리)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알파늑대는 이렇게 말을 할을 할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은 있어. 우리 신의 이름은 대자연(大自然)이지. 자연은 여태까지 우리 늑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고 제공해 주었어.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은 원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너희들처럼 감히 거래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우리에게 자연은 오직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자연은 우리가 있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출 3:14>하고 있었어.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우리 늑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굴복할 수밖에 없지.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대자연 앞에서 만큼은 굴복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해놓은 규칙(순리)대로 순종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살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 늑대가 오랫동안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어<잠 1:7>. 우리는 너희들이 믿는 신(神)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부여해준 모든 대자연을 보면서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성을 모른 척 변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롬 1:20>.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자연은 잔인하고 사악한 너희 인간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것도 많은 권위를 부여해주면서 말이야. 너희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듣자하니,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고 싶은 대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능숙하다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조상(늑대)들을 죽여 왔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神)까지도 너희 손으로 잡아 죽였다며? 그런데도 너희 신(神)은 너희를 용서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야? 우리는 단지 자연이 너희들에게 부여해준 권위 때문에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너희 신(神)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히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믿겨지지 않는 일인데 말이야!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고? 우리는 너희처럼 잘못된 선입견과 탐욕에 가득 찬 추악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리가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 때문이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한 번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해답을 늑대로부터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제시해준 비결이라고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침묵’이라는 단어 였습니다. 늑대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듯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한 세상. 그리고 이 새대.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시험이 찾아 오지만, 어쩔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이라서 용서를 못한다는 핑계는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물을 찾지 않고도 죄 없는 늑대처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음이 가능해 졌기 때문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014-01-08 23:12:55 | 김상진
성도님들의 귀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깊숙이 빠져 아주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함정과 같은 특성이 있기에 성경 말씀을 읽고 저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았던 묵상을 나누는 차원으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모든 분들의 평안함과 강건함을 소망합니다.
2014-01-08 21:50:23 | 김대용
얼마 전부터 많이 생각했던 것들 이었는데, 형제님의 글을 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보는 분들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보다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반성을 하게 될 것 같네요. 인간은 누구나 위선적인 부분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위선을 위한 위선이 있는지를 잘 생각해 봐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4-01-08 20:30:04 | 김상진
위선(僞善)은 참으로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집요함이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달음질을 해도 전혀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잠시 마음의 긴장을 풀면 어느덧 위선은 사람의 내면 깊숙이 둥지를 틀고 곧바로 증식을 위한 세포분열을 시작합니다. 위선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모두 42번 등장합니다. 위선,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는 hypocrite, hypocrites, hypocritical, hypocrisy, hypocrisies, dissemblers, dissembled, dissimulation 등이며 특히, 신약성경에 2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선(僞善) 관련 구절들 중에 마태복음 7장 1~5절과 누가복음 6장 41~42절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성경이 위선과 위선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으며 위선이 사람의 내면에 파놓은 은밀한 함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위선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 중에도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화기에 속합니다. 매우 선한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복음 사역에 매진하던 교회나 단체가 위선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와해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치 누룩과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에(눅12:1) 삽시간에 대중들을 선동해 위선적 사고와 행동 아래로 헤쳐 모이게 만들어 한 시대를 타락하게 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먼저 위선의 독특한 기능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게 될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단체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 후에 외부로부터 포착한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왜곡시켜 집착하게 만듭니다. 41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형제여,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노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리라. (눅6:41~42)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가 빠져버린 함정의 특징이 타인의 잘못과 부정적인 면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확하게 잡아내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는 모순의 극치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위선자가 집중하는 타인은 우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까이에 있는 동역하는 형제/자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아주 작은 먼지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눈물 등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어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사안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공론화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선자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어떤가요? 물론 물리적으로 눈 속에 기둥만큼이나 큰 나무인 들보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비유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보는 눈의 모든 기능을 영구히 상실시키고도 남을 치명적이고 위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있는 부산물과 같은 형제의 눈 속에 작은 티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온유하게 문제에 대한 권면의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형제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며 급기야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할 일은 형제의 눈 속에 미세한 티끌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함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내면은 이미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아직은 그냥 두어도 괜찮은 형제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이 어리석음은 결국 심각한 위기로부터 방치된 자기 자신과 무모한 위선자의 비판의 칼날을 감내해야 하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모두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없고 눈 속에 거대한 들보로 막혀 있는 자가 어찌 티끌이 들어간 사람의 눈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그 부스러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가복음 6장의 위선자는 그런 명백한 자신의 모순과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내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내 의견과 관점이 정확하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라고 호언장담하는 위선자는 교회 안의 지체들과 공동체에 커다란 짐이 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가 발견한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당장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제거해 버린다면 좋을 것이고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들보를 눈 속에 간직한 위선자가 그 티를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 속에 있는 들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코가 눈인지 입이 눈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위선자의 손은 치료하고 해결하는 손이 아니라 흉기로 돌변할 것이 뻔합니다. 문제를 발견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선자의 좌충우돌하는 일련의 행동은 사사건건 지체들과 공동체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주 작은 위선이라도 사람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에게 진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해결책을 꺼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문제인 들보에 대해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마7:3). 자기 내면의 어떤 굽어진 요소들이 거대한 들보라는 문제를 키웠나를 차분하게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이 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위선자의 눈 속에 들보를 빼내는 첫 시작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정확하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눅6:42) 눈 속의 티가 점점 커져 시야를 가리는 들보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속속들이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급한 행동보다 먼저 깊이 자신의 속 중심까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위선자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 그룹이었으며 종교 시스템의 전도사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도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그것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23:27)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트릴 함정을 파는 행위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들의 악행을 절대로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있는 배교의 물결을 보십시오. 이 가증한 물결의 최전방에 서 있는 타락한 기독교계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밤 베개를 베고 누워 잠들기 전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조차 두려워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항구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장애를 입힌 사람들입니다. 1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4:1~2) 이 시대가 더욱 빠르게 극악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은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위선의 독주에 취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각한 배교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는 '위선의 역사'가 주는 뼈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 않았기에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현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보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선하며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오늘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월등하고 바르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무모한 믿음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1:9)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벧후2:1) 은사주의로 교인들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로 전락시키고 WCC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 외치며 만담가와 개그맨처럼 우스갯소리로 설교시간을 장식하는 타락한 목사들도 강단에서만큼은 다들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위기는 도대체 누가 불러온 것일까요? 각자 다 선한 선생이 되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는데 과연 그 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누구란 말입니까? 독주에 진탕 취하고 싶은 알콜중독자도 처음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딱 한 잔 만!!'이라는 위선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배교의 장본인들이 하나같이 강단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위기라고 떠드는 것은 자신의 배교행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위한 일종의 위선입니다. 가증함으로 가득한 이런 위선적 설교에 취해 교인들은 '그래 아직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야.' '아직 우리 교회는 살아있어.'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이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분별하는 제대로 된 분이군.'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대언자,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간단명료한 기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택한 행동들이 그의 세월의 앨범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15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남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위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더불어 위선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순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는 제쳐 두고 타인의 작은 잘못과 문제를 교정해보려 달려드는 무모함입니다. 정리하면, 위선이라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3)”와 “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눅7:42)”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감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 장애를 겪게 하는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형제/자매의 영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 원리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길 권장하지 않고(야3:1)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밝혀내는 논박의 전문가가 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마7:1~2, 눅6:37). 물론 한편으로 성도는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고전6:2).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반드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허물은 없는가, 나에게 부족함은 없는가, 내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를 항상 먼저 살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선의 은밀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논쟁과 논박에서 승리한 사람보다 한참이나 성숙한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저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엄격하고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고 온유하게 지체를 섬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갈6:1)
2014-01-08 14:48:17 | 김대용
매우 무거운 주제라서 강평원 형제님께서 일러주신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개인적으로 출애굽기 책에 관한 지식이 너무 짧아서 제기한 내용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다만 십여 년 전의 경험입니다. 현존한 애굽이라는 나라는 그들의 고대사에서 출애굽 사실에 대한 상대국 입장에서의 기록사항이 궁금하여 도서관 자료나 온라인 등에서 알아보는 수준이었으나 시내산 경로에 얽힌  내용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승학 저자의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 를 밝히게 된 동기, 탐구의도와 열정, 그리고 탐색답사 경로상의 고비고비 위험 앞에서 기적의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면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엄밀한 고증에 입각한 비판과 논쟁의 연구대상인지 분별 할 순 없지만,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잘 건너도록 도해지점의 삼각주 바닥을 앝게 만드시고 무난히 바다를 걸어서 건너게하신 섭리와 수장된 애굽 군사의 마차와 바퀴 등 많은 유물 등을 제시한 자료를 접하면서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절대권능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더욱 감격하고 기쁨이 충만한 경험이었습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우선 "떨기나무" 책에 대한 몇 서평 등 비판의 글을 검색하였으나 두 진영의 관점과 주장이 상호 절충 또는 대립함을 목격하고 결국 교회 차원의 가르침과 지체님들의 고견을 기대케 되었습니다.
2014-01-07 16:58:55 | 최상기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는 국기가 초록 바탕에 아랍어(語)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알라 외에는 신(神)이 없고, 무함마드는 예언자이다.”라는 《코란》1절이 씌어 있을 정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이며, 외국인의 내륙여행은 불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유적 발굴이나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만은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11 : 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7 13:25:25 | 강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