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이, 도이 입이 가장 크구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거 건강히 자라기를 기도한다.
2009-06-02 22:42:11 | 관리자
아이구 귀여워라. 좀 더 친구들이 많으면 좋겠지. 또 자주 놀러 가자.
2009-06-02 22:40:33 | 관리자
힘드신데도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동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길 기도합니다.
2009-06-02 22:38:48 | 관리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9-06-02 18:09:14 | 관리자
사도신경
사도신경(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도 사도신경은 개혁 교회와 근본주의 침례교회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혹은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배 시에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시각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디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중언부언으로 생각하여 하지 않음으로 역시 주를 위해서 안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의 몇몇 문제와 용어를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은 영어 사도신경과 카톨릭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원문에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알지만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만 해당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인 평생 동정녀(the Virgin)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분이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소위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림보설 등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주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예수님의 혼)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엄밀하게는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럽 부분의 지옥을 모두 음부라고 해서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k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9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10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3) Holy catholic church
영문에는"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assembly)이나 종교 회의의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church" 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2세 교포 아이들(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심각하지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 카톨릭(Catholic) 교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요.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의 통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죽은 카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만들어서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Holy catholic church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참고로 저는 중학교때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로서`가 무엇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연서도 이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로 그 위의 구절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재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이해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지만 몇몇 부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고 특히 카톨릭주의가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을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2009-06-02 18:05:54 | 관리자
주기도문
● 정동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예배 때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또 소그룹 모임 등에서도 모임을 끝맺을 때에 거의 대부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주류인 미국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절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이단을 감별(?)해 주는 연구소들이 몇 있는데 어떤 단체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감별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감별 방법 중의 하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외우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전통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번은 이런 단체의 소장이 미국에(호주에) 가서 이것을 주장하다가 그곳의 교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잘못을 시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 가운데는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므로 그것을 외우는 형제자매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안 외우고가 교만의 문제로 비쳐지고 안 외우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유래와 특징 등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흠정역 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흠정역).
1. 주기도문의 이름과 유래
주기도문은 실제로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5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부분이 끝난 뒤에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2.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8절 말씀에 있듯이 말을 많이 하면 신이 기도를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3. 미국의 침례교인들은 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가?
이 기도에는 신약 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부분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11절에는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런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웝받습니다!’ 절대로 성령님이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도 이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4.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 번역의 본문인 바티칸 사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각주 참조).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원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 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5. 주기도문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서 <대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한국 기독교(개혁신교)에서는 과거에 <대개>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은 <대개>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빼기도 합니다.
그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영어로는 for)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6. 그냥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러 준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이 이 기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 하늘의 왕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추후에 왕국이나 천년왕국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2009-06-02 18:02:50 | 관리자
자기 성찰
● 정동수
청교도 목사들의 지침서 중 하나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Reformed pastor)입니다. 목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글이므로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참목자상(리처드 백스터, 최치남 옮김, 생명의 말씀사)
1. 자아 성찰의 내용
1)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
가장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충실히 배우는 사람이며, 성결한 사람만이 그 일을 온전히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며, 그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서입니다.
신학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철학의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무엇보다 그대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와 묵상에 힘쓰십시오. 하늘의 불을 받아 희생의 불꽃을 피우십시오.
3)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보라.
자신의 혀로 한 말을 그 생활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합니다. 저들은 설교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삶은 정확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강단 위에서만 목회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강단을 떠나 있을 때는 목회자임을 포기하는 셈이 됩니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행동 잘하는 목회자가 됩시다.
첫째, 아무 흠 없이 행하여 그대의 순전함을 유지하십시오. 적어도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가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의 덕스러운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손히 대하십시오.
둘째, 자선 사업을 풍성히 하십시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자가 풍성한 희생 제물을 제공합니다. 이들을 우리의 희생 제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독실한 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보라.
그대는 스스로 조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그대가 경고하고 비난하는 죄에 자신이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로는 죄를 굴복시키고 실제로는 죄를 굴복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5)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보라.
그대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로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지식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우리 역시 부지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실천하십시오. 나태함으로 인해 연약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2009-06-02 17:58:21 | 관리자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서문
● 정동수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
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
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
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
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6-02 17:54:04 | 관리자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 정동수
교회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채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보내온 글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기에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아마도 저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동감이 갈 것입니다. 2008년도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나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부담이 너무 커서 어디부터 기도해야 할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정말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권능을 가지고 굳게 서 있는 교회 말입니다. 율법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그리스도를 앞서지 않는 교회, 성경 말씀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서 고치고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교회, 기도와 말씀이라는 펀더멘탈이 강한 교회,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흥하고 사람은 쇠하는 교회, 그런 교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굳게 서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선포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인간을 인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목사님 말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친근하게 내 것을 허물없이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된 사람들,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말입니다.
주님, 지금까지 여기 저기 가까운데 먼데 다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내 요구가 너무나 큰 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임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마음고생하며 많이 기다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단다.
자유의 영으로 마음 놓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혼을 다해 나를 의식하려고 애쓰는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이다.
영과 진리로 내게 경배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가 준비해 놓았다.
2009-06-02 17:50:59 | 관리자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6-02 17:46:36 | 관리자
"어는 곳에는 부모의 책임을 명시한 법이 있었다.
형법의 일부로 자녀가 적절하게 보호받도록 제정된 법이다 .
부모가 이 법을 위반하면 자녀를 빼앗길 수도 있다.
심지어 위반 정도가 심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동안 그 조항을 읽고자 법정에 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법전에 기록된 부모의 책임은 아마 수 백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단 한가지 조항도 모른다 .
자칫 이 법을 위반했다가 자녀를 빼앗 길 까봐 걱정한 적은 없다.
그 법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모든 조항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왜 그런지 아는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이 조항이 필요없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2009-06-02 17:15:07 | 관리자
종교규정을 지킨다고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게 아님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전도할 때면 전략을 수시로 바꾼다.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돼요 그게 전부예요."
"뭐라고요?나쁜 습관을 버리겠다고요?"
"그게 아니예요. 아직 이해를 못하셨군요..."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전혀없어요..."
"그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영접하세요..."
"당신이 뭔가 해야하는 일은 없어요 "
"이미 그분이 하고 계세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오직 그분한테 달렸어요! 그분을 신뢰하세요."
"그냥 믿으세요.믿음으로만 되는 일이예요."
"구원은 뭔가를 해서 받는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예요."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영접한다.
"축복해요!"
"당신이 그리스도를 신뢰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항을 몇가지 알려드릴께요."
"우선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께 당신이 주님을 영접한 사실을 알리세요."
"그리고 교회에 등록하고 침례를 받으세요,"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저녁예배까지 빠집없이 참석하세요."
"남선교회에도 들어가셔야해요."
"아,노래를 잘 하시면 성가대로도 섬기세요."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절대 잊지 마시고요."
"참 받드시 해야할 일은 성경을 읽으셔야해요,"
"하루에 구약은 세장 신약은 두장을 읽으면 일년에 일독을 할 수 있어요."
"기도도 하셔야해요."
"아침에는 적어도 30분씩 기도하세요."
"아..그리고 십일조 얘기도 했던가요?"
어떤가?
가까스로 주님을 영접한 그는 아무도 안보이는 사이에 뒷문으로
교회를 빠져나갈 것 같지 않은 가?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은혜의 삶이라 하면서 막상 새신자를 훈련할 때는
노골적으로 율법주의를 드러내어 그들의 숨통을 막는다 ...
그리하여 어떤이는 영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료단추를 누르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어떤이는 교회에 남긴 했으나 율법주의 전두엽백질절제술(1935년에 포르투칼 신경학자 E.모니스가 창시한 것으로
정신 분열증 치료에 널리 사용되었으나 인격변화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시술이 중지됨)을 받은 환자처럼 행동했다.
이들은 비록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긴 하지만 그 어떤 활기도 보이지 않는다...
2009-06-02 17:03:49 | 관리자
화덕피자 먹으러 가요^^ 우리회사로 ㅋㅋㅋ
2009-06-02 16:26:55 | 송재근
그럼 전 저팔계인가요? ㅋㅋㅋ
2009-06-02 16:17:33 | 송재근
칼국수,콩국수,손두부,두부김치요^^
2009-06-02 16:16:15 | 송재근
함께 하지못해 너무 아쉽네요... 좀더 자매님들과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가볍고도 깊은교제를 할수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800년된 은행나무 참 대단하죠?
전 저희남편과 작년가을 성주산을 넘어 소래산에 올랐다 내려오는길 잠시 들렀는데 그땐 노랗게 물이 들어있었는데....초록빛 은행나무도 장관이 참 보기좋았겠다..짐작이 되네요...그래도 은행나무아래 활~짝 웃고있는 우리 지체들이 훨씬 아름다워 보입니다~ㅎㅎㅎㅎ
2009-06-02 15:13:45 | 장영희
칼국수..맛있는 열무김치도 함께 있었겠네요. 답글 고마워요.사모님. 여기 연수도서관 프린터 전용석에 앉아서 쓰고 있어요. 창세기, 요한계시록 다 프린트했는데, 다른 자료들과 함께 100 장이 넘네요. 비가 엄청 오고, 날은 어둡고, 겨우 2시 22분인데 말입니다. 으시시...무섭네요. 다행히 우산이 있어요.하하.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뵈어요..샬롬..
2009-06-02 14:23:13 | 백화자
우선 메뉴는 두부김치와 칼국수였어요.
칼국수가 얼마나 푸짐한지 나중엔 사역(!)의 심정으로 먹는다고 재근형제님이 말했지요.
날씨도 쾌청했고 장미꽃도 여기 저기 색색으로 만발하였는데
저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꽃과 함께 사진찍는 일을 자꾸 잊어
카메라는 메고 다녔지만 많이 찍지 못했네요.
다음에 야외나갈 땐 전담 촬영기사가 있었음 좋겠어요.
그곳에선 삼삼오오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단체 데이트를 하다보니
골고루 교제하지 못해 아쉬웠고 혹 심심해 하는 사람은 없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 코스인 은행나무가 정말 장관이었는데
그 일정까지 인도하신 홍집사님께 감사드려요.
자매님도 함께 있었음 좋았을텐데...가을에 한번 더 가자고 하더군요.
가을엔 운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2009-06-02 09:04:30 | 정혜미
앗..언제 . . ( 왠지 ,, 손오공 출연진같은 분위기가.. 헉)
2009-06-02 03:44:12 | 김형석
맛있는 포스가 느껴집니다^^ 못먹구 먼저가서 아쉽네욤 ㅋㅋ 근데 메뉴가??
2009-06-02 03:41:58 | 김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