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번역본들의 등장으로 자신의 논리를 위해 이 성경 저 성경에서 발췌하여 성경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각 번역본마다 그럴듯한 표현들이 있기는 하지만 기준점이 사람의 판단이 되다보니 현대판 신앙은 각자의 소견대로 결정짓는 믿음으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기준으로 삼으면 혼란스런 것들이 제자리를 잡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한 때 만용을 부렸던 기억이 있는데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숙한 지혜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귀한 일군으로 세워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2013-02-22 12:55:31 | 조양교
시간이 좀 더 길어 이 글의 내용을 다루었음 아주 좋았을텐데...하며 읽다가 그래도 이부분은 아주 중요하므로 이렇게 글로 올려주신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그저 " 인생의 지침서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를 담은 말씀" 이라는 표현에 공감백배하고
이런 고백이 우리 사랑침례성도들의 전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성경에 관한 글을 기대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3-02-22 12:21:02 | 오혜미
오해가 있을 것 같아 한 줄 더 씁니다. 흠정역이 흠이 있지만 최종권위로 수용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 아시지요? 혹시 위와 같은 정도의 미흡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제 수용에는 마찬가지라는 취지임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2013-02-21 23:51:51 | 임원섭
형제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주 좋은 내용의 글을 시원스레 읽게 되어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보다 근원적인 질문'들.. 이라 하셨는데
형제님께서 얻으신 답들이 매우 궁금하네요 ^^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들도 함께 써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
혹시 여기에 쓰시기가 곤란하신가요? 그러면 나중에 이야기로 들려주세여~
( 만약에 따로 정리해놓으신게 있다면 메일로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takeeurope@naver.com )
2013-02-21 23:47:14 | 이상걸
<흠정역 – 나의 한글최종권위로 수용하는 논리(후반부)와 간증(전반부) >
지난번 간증 때에 흠정역 성경을 알기까지의 과정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이 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1> 현대 개신교회들의 문제와 그 근본원인들을 글로 정리해보고자 인터넷 자료들을 찾던 중에 어떤 형제(나중에 알고보니 형제교회 목양자)들이 올려놓은 자료들을 통하여 제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교회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천주교에 속한 적이 없는, 개신교회와는 뿌리가 다른 무리들이 항상 있어왔으며 그들의 믿는바(근본주의 교리들)가 긴 글들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교회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생각을 체계적으로 지지해주는 이 글들을 밤늦게까지 읽으면서, 성경대로만 믿는 무리가 늘 있어 왔다는 사실 자체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난 12월에 다시 침례를 받은 것은 제 신앙의 전통적 뿌리를 개신교에서 성경대로 믿는 이들 성경신자 그룹으로 바꾼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10년 저희가족이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도 배울 겸해서) 두 분의 미국인 목사님과 저희 가족이 매주 2회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복음서를 읽어가던 중에 제가 평소 의문이 있던 내용을 질문했는데 목사님께서 서재로 들어가 낡은 책(KJV) 한 권을 가져오시더니 원래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바뀌면서 모순이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날부터 KJV가 어떤 성경인지를 인터넷에서 이 잡듯이 뒤져본 결과 보존된 유일한 성경(KJV)이라는 논란이 존재하는 유일한 역본이며, 다른 수많은 현대역본들과 2대별하여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져 왔다는 것, 또 이것이 진정한 교회사라는 것, 그리고 자필원본의 기록부터 보존과정, 정경, 번역상의 이슈들과 천주교의 음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경이슈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2010년 당시 KJV 한글 진영들 간에 있었던 주장과 논박내용도 밤을 새어가면서 거의 다 읽어보았습니다. 서점에는 3종류의 한글 역본이 있어 비교해보니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이 어려워 다시 인터넷 자료들과 씨름하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0년 넘게 읽고 연구하던 한영대역 개역성경(성서공회)을 다른 성경책으로 바꾼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손때가 타서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안에는 많은 메모가 들어있으며, 무엇보다 개역성경의 말투가 익숙해져서 성경을 바꾸면 암송하는 속도나 인용할 때의 심리적 자신감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읽고 암송하다보면 성경의 말투를 닮아가기 때문에 나중에는 의미만 암송해도 문구를 틀리지 않으며, 힘들이지 않고 떠올려 말해도 성경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랬던 기존 개역성경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바꾸기로 한 이유는 개역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저의 믿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단어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 교리체계의 차이를 가져오며 결국은 믿음의 사조(진영)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중의 어느 부분이 문제이고 어느 부분이 문제없는 것인지 알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성경기록에 제 실제 삶을 걸 수가 없으므로 (좋은 인생지침서는 될 수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담고있는 성경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확성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3가지 한글 KJV역본을 다시 살펴본 결과, 번역이 영어KJV에 가장 충실하고 근본주의 교리들에도 부합하는 흠정역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한영대역 4권을 구입하여 가족들과 함께 읽으며 정목사님의 개역성경 강해와 책자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이슈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7권씩 몇번 구입하여 직장에서 함께 공부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주고 성경이슈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전하는 일을 전도하듯이 하다보니 30권 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책상서랍과 자동차에 두고서, 믿는 사람은 하루에 5장씩 읽기로 약속하는 조건으로, 불신자는 전도를 하여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누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 끝으로 성경의 완전성과 최종 권위에 대한 저의 이해는 이렇습니다.
자필원본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사본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본들 중 일부에 어쩌다가 사람의 실수가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5500개나 되는 사본(신약)들이 동일한 부분에 동일한 오류를 동시에 담고 있지 않는 이상), 다른 많은 사본들과 비교하여 쉽게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다수 사본에서 만들어진 본문은 보존된 성경이라고 결론지어도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사본 자체에 손을 대거나 본문작성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손댄 것은 논할 가치도 없고)
번역본도 이것과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보면, 올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타 언어 역본들이 많으므로, 비록 번역상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어역본 등과 대조하거나 그 성경자체의 내부 상호규명에 의하여 얼마든지 쉽게 온전히 보완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보존성과 완전성이 훼손되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예를 들면, 문법이 그 나라 표준문법과 일치하는 정도차이, 또는 어순과 단어의 토속성 차이에서 오는 어감차이(그리스어 ‘코이네’와 한글의 ‘되’ / 존댓말 여부등)같은 원초적 한계 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한 실수가 포함되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어역본 등과의 대조나, 그 성경자체의 내부 상호규명 등에 의하여 얼마든지 쉽게 보완할 수 있고, 또 판권자가 (교리가 같아) 보완․정정할 의사가 있기 때문에 보존성과 전체적인 완전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에 말한 정도의 미흡함이 포함되어 있는 그대로도 그 언어권에서 최종권위로 인정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번역대상) 자체가 다르다든지, 본문은 같지만 성경전체를 흐르는 교리와 다른, 자신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가 개입된 역본은 누군가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판권자의 영이 달라) 정정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보존 자체가 훼손된 것이며, 이것은 그 언어권의 최종권위로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창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창세기1장의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해석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기본교리들(삼위일체, 영혼불멸, 대신속죄, 은혜와 믿음구원, 칭의와 성화, 휴거와 재림, 전천년 믿음, 성령의 내주와 사역,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차이 등)을 모두 이해하고, 그 견고한 교리적 기초위에서, 보다 근원적인 질문들의 성경적 대답을 찾다보면 성경전체를 흐르는 더 큰 주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대신속죄라는 방법으로 죄 용서하시기를 원하셨는가?” (달리 정하실 수도 있었음, 죄는 피(생명)로만 속한다는 것 자체도 하나님께서 목적을 갖고 그렇게 정하신 것임) 또는 “법규들을 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시고, 메시야를 보내 구원하시는 일련의 모든 일들(그 자체가 최종목적은 아님)을 통하여 결국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정리하다보면 하나님의 보다 궁극적인 차원의 계획과 의도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재창조론 발상 자체가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번에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런 문제들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좋은 의견이나 정리된 글이 있으시면 weldu37@nate.com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게 참고하겠습니다. 샬롬.
2013-02-21 23:14:21 | 임원섭
먼저 영솔이와 현지자매를 비롯해서 졸업하는 우리 학생들 축하하는 기쁜 마음이예요.
교회가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더해져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감은 지체들의 사랑과 적극적인 참여가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것 같아요. 물로 바른 말씀과 진리를 찾아온 성도들이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에 하나가 되어감을 부인할 수 없겠죠. 선포되는 바른 말씀에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 성도들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로지 예수님만 높이며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침례교회의 지체인것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2013-02-19 18:03:43 | 김상희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02-18 18:18:14 | 관리자
가축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유익을 끼치는 짐승입니다. 어떤 가축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때로는 운송 수단으로, 때로는 노동력으로, 때로는 식용으로, 마지막으로 가죽까지 사람들을 위해 내어줍니다. 안쓰러운 마음도 들기는 하지만 밭에서 나는 채소 못지않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원래는 야생이었는데 사람과 함께 오랜 기간 살면서 가축화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축으로 구별하여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가축을 그것의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것의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25) 에덴동산에 있었던 동물들은 온순했고 잡아먹기 위해 해치는 일이 없었으며 식물이 먹 거리의 원천이었습니다. 식물을 먹거리로 삼아도 충분한 영양공급이 될 수 있는 그런 풍요로운 환경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사람의 범죄이후 지구환경은 두 단계의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 변화, 사람의 범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되고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모든 창조물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환경으로 변해 버렸고, 그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과 짐승들이 생존하여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노아의 홍수 전까지는 에덴동산과 같지는 않았으나 지금의 환경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였을 겁니다. 이 때까지 채식만으로도 충분한 영양공급이 가능했고 가축은 아벨의 헌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앞에 희생헌물을 드리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죄로 인해 망가진 모습들이 곳곳에서 드러났고 곳곳에서 싸움과 분쟁과 죽음으로 뒤엉키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 노아의 홍수이후 물의 엄청난 힘에 의해 땅에 대격변이 일어난 후,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짐승들을 방주로 들이면서 가축 또한 방주에 들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것들을 살아남게 하라.”(창6:20) 노아의 홍수 이후 환경은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지표면은 홍수 후 온갖 퇴적물로 뒤덮여 버렸고, 추위와 더위와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8:22) 사람들은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추가적인 단백질 공급이 필요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푸른 채소와 함께 먹 거리로 주시게 됩니다. 홍수 이후 급격한 환경의 변화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물들은 더 강인하게, 더 사납게, 더 민첩하게, 내재했던 더 야생스런 형질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 가축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번성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인류의 범법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축을 처음부터 가축으로 구별하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양의 경우 진화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자신을 방어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진작 멸종해 버렸을 동물입니다. 사람과 함께 창조하셨기에 양과 같은 짐승들은 처음부터 가축으로 길러졌고 지금까지 번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야생의 동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가축화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와 성경기록을 부정하는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축으로 창조하신 것을 사람들이 가축으로 길러서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천년왕국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환경을 복원하시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일이 복원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모든 산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이사야 65:25)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복원하실 그 날을 소망해 봅니다.
2013-02-18 16:26:21 | 조양교
사랑침례교회가 한주 한주 업그레이드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로 서로 받쳐 주어서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우리 둘째 애도 마지막 학년을 다 마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2013-02-18 16:25:08 | 조양교
아직 말못하는 손주가 할아버지로 하여금 미소직게 하고
소주 일기를 쓰게 하는 군요,
계속되는 손주일기가 궁금해집니다.
2013-02-18 16:20:54 | 조양교
영솔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앞에 나가 전교인으로부터 축하도 받고 귀한 선물도
받았습니다. 작은것에도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좋은 교회와 참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 행복하고
뭘해서가 아니라 교회당에만 나와도 마음이 푸근해지니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싶네요.
여기 저기 자발적인 모임도 생겨나고 하니 새봄과 함께 부쩍 성장할것 같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마다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는것이 일상이
되고 기쁨이됩니다.
2013-02-18 10:48:39 | 김혜순
3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는 과연 어떨까...생전처음 가장 큰 교회를 다니는데도 아직은 뜨거운 교제는 없지만 그래도 목회자는 가족구성과 이름을 척척 외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여깁니다.
어느 분들은 교회성도가 100여명만 넘어도 이미 목회자의 손이 미치지 않으니 나누어야 한다...는 지론을 얘기하는데 실상은 .현실은 꼭 그래야만 성경적인 교회인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찾아오고 만나서 반가운데 어떻게 인원을 제한 할 수 있겠어요..
앞으로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함께 풀고 채워나가며 건강한 교회로 자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요.
2013-02-18 08:15:47 | 오혜미
날씨가 많이 풀려서 한강이 예전의 모습을 찾아 물결을 그리며 흐릅니다.
똑같은 눈이 쌓여있었어도 음지에는 아직도 눈더미들과 눈물이 흐르고 있지요.
같은 물질의 다른 모습-양지와 음지-인간의 모습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배당 의자를 중간 공간을 없애고 이어서 배열을 하니 뒤편이 훨씬 덜 답답해요.
들어오고 나가는 공간이고 아침에 성도들이 만나는 공간이라 여유가 꼭 필요했거든요.
필요를 보는 눈들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지체들로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 같아요.
인천 청라지구와 연수동, 안양지역에서 여러 가족들이 방문해 주셨고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분들도 예배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초, 중, 고, 대학교를 졸업하는 졸업생들이 21명이나 되어 모두 성도들 앞에 나와서인사하는 시간을 갖고
성도들은 바른 믿음안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박수로 환영하고
신혼가정의 특송으로 아침을 열었지요.
예례미아 24장4-7절 말씀으로<좋은 무화과의 복>이라는 제목의 설교와
오후에는 임 원섭 형제님의 간증과 로마서 강해가 이어졌지요.
비교 신약성경이 흠정역 성경을 이단시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보는 눈이 떠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명절에는 아이들과 학생들과 모든 식구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넉넉할 정도였는데
오늘은 뒤까지 꽉 찬 성도들로 배식하는 긴 줄이 되었네요.
신혼부부의 감사하는 마음이 하얀 인절미에 담겨 귤과 함께 제공 되었고
늘 식사준비에 수고하는 성도들의 헌신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각 구역에서 모임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성도들의 친밀도가 더 깊어지고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서로 기도해주는 모임이 되어갈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식사시간 외에는 서로 깊은 교제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교제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서로간의 사정도 잘 모르고 시간이 없어 인사 정도 나누니 말이지요.
구역모임에서 이런 면이 해소되고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허심탄회하게 이루어지면
초대교회 때의 모임처럼 사랑과 기쁨이 교회에 넘치게 될 것 같아요.
2013-02-18 00:15:39 | 이수영
첫번째로 읽었었는데 이제서야 글을 남깁니다. 형제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정감있게 와닿고 몇번을 읽어도 너무도 좋네요.
윤이 할아버님, 축하드립니다! ^^
2013-02-17 23:19:13 | 이청원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이 눈앞에 보이네요.
2013-02-16 14:55:28 | 허광무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요.
많은 글을 쓰셔야겠어요.
샬롬
패스터
2013-02-16 14:24:54 | 관리자
큰애가 "예수님이 지금 오셨으면 좋겠다~아"
목영주엄마 "정말 지그~금 오셨으면 정말 좋겠다"
.......(잠시 침묵)...............................
목영주엄마 "야! 헉! 아빠 때문에 안되겠다! 지금 오시면 큰 일 난다. 큰 일나!"
미처 아빠 생각 못한게 웃겨 큰애와 오도방정 떨며 웃습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원된 걸 보고, 생을 마감한다면 ...그것만큼
행복하게 죽는 게 없을 것 같아요.
2013-02-16 14:17:20 | 목영주
오시는 분들마다 앞치마를 두르며 여러자매님들이 함께 식사 준비를 해 주셔서 너~무 수월한 점심식사시간이였답니다. 맛있고 쫄깃한 호박인절미와 국같은 부대찌개의 환상적인 맛이 설날 점심식당을 더 유쾌하게 꾸며주었답니다.
자매님의 맛갈스러운 글솜씨가 다시한번 지난 주일의 즐거움을 새록새록 기억나게 하네요
감사해요^^
2013-02-16 11:57:36 | 이주옥
# 인생이란 무엇일까?
시집간 딸아이가 일 년여 만에 외손자를 낳아 제 품에 안겨 주었습니다.
녀석이 2013년이 되자마자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14일 만에 울음을 터뜨리더니,
내 나이 64세가 돼서야 진짜 할아버지가 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후 조리를 끝낸 후 안고 온 첫 외손자를 품에 받아 안는 순간,
나를 이제야 할아버지로 만들어 준 고 녀석이 어찌나 귀엽던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식 사랑은 손주를 안아봐야 제대로 안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참말로 그러했습니다.
새삼 품에 안고 있는 손주 녀석의 솜사탕 같은 볼이며,
방금 하나님의 손으로 새로 빚어 내놓은 새 아기별 같이 빤짝빤짝하는 눈동자며,
정말 한입 꼭 깨물어 봤으면 싶은 장난감 인형 같은 코며,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고 무엇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고
무엇 하나 미칠 지경으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 아기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던가!
나는 새삼 수십 년 전에 내 자식들을 낳았을 때가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그 당시엔 지금 손주를 안고 느끼는 감격과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래 숨겨 두었던 비밀이라도 들킨 듯 하는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또 딸아이에게도 그 애가 낳은 이 녀석에 대한 애정만한 애정을
그 아이의 어린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점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밀려왔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그 손주를 안자마자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었습니다.
윤이야!
저기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저기 저 높은 것,
높고 푸른 것,
없는 것 같으나 있고 내릴 수는 없으나 오를 수는 있으며 움킬 수는 없으나 품을 수는 있는
저것이 바로 하늘이라는 것이란다.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날마다 하늘을 보며 살았다.
천상의 빛으로 푸르게 사는 법이 그리워서 늘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왔어.
그 비밀이 알고파서 하늘만 보고 살았단다.
윤이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 무엇인줄 아느냐?
사람은 하늘을 향해 살아야 하는 법이란다.
하늘처럼 푸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러니 윤이야!
너는 하늘을 보고 살아라!
하늘 보고 사는 일 보다 더 귀한 일이 세상엔 없단다.
윤이야~ 너는 꼭 하늘을 보고 살아라!
이렇게 속으로 한참을 주절거리고 있자니
어설프게 안고 있던 두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엉겁결에 "할아버지 팔 아프다 이제 그만 눕자."라고 말해놓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아버지 팔 아프다 이제 그만 눕자?”
내 인생이 어느새 이런 소리를 할 순서에 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무엇이지?
문득 몇 년 전에 본 “대부”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늙은 “마론브란도”가 손자 녀석의 재롱을 보며 마당에서 놀다가 갑자기 졸도하여
쓰러져 죽는 장면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렇지.
손자 녀석을 안고 있다가 팔 아프다는 소리를 하게 되는 순서 다음에 남은 순서는~~
그렇다면 나도 이 세상에서 살 만큼 다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하여
인생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고 있지를 않던가!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독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매일 책가방 싸 들고 학교에 가는 일이
어처구니없게 여겨졌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만나는 어른들마다 모두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나는 정말로 심각하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모두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데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철학이라는 글자가 붙은 서적이면
눈에 띠는 대로 들쳐보았고 특별히 수많은 인생들을 문학작품 속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으로 돌아와 찾고 또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손자를 안고 있던 그때도 인생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묻고 있었습니다.
실은 바로 얼마 전에 손주 녀석을 품에 안고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말하면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게끔 되어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이면서도
사람은 여전히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인생이란 무엇인가하고 이 한 가지 질문을 하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인생이 무엇인가 마침내 알고 봤더니
인생이란 처음부터 알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성경책 중에서도 전도서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였습니다.
제법 철학자인척 하면서 인생을 논하고 문학을 논하며 친구들과 밤을 밝히던 나에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전에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먼저 들리는 듯 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철학적 통렬한 고백으로 들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애착을 가지고 전도서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여러 날 읽었습니다.
때로는 소리 내어 읽었고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 옆에는 줄도 죽죽 그어가며 읽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밤잠 이루지 못하며 허공에 대고 묻던 바로 그 시절에도
나는 전도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그것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생들을 그렇게 지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글자 위를
내 눈동자가 수십 번을 지나가면서도 나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품에 안고 다시 떠들어 본 전도서에서
마치 생전 처음 이 구절을 발견하듯 하는 충격적인 감동을 느끼며
이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10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 안에서 단련 받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으므로 아무도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 낼 수 없도다.
13 또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로 인한 좋은 것을
누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아노라. (전도서 3장 10,11,13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 낼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
곧 인생의 모든 것을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점치는 일을 미워하신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셨나봅니다.
내가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묻고 있던 그때 그 시간,
여전히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던 바로 그것들이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묻던 바로 그 묻는 것 자체가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나처럼 묻지 않고 살았던 옛날 내 할머니도
바로 그 완전한 인생을 살다가 가셨고,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머리 싸매고 생각하다가 그럴듯한 글 몇 줄 써 놓고 죽은
쏘크라테스나 칸트도 내 할머니의 그것과 조금도 별다를 것 없는
바로 그 인생이라는 것을 살다 가셨던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산 것도 바로 그 인생이라는 것이요
묻지 않고 산 그것도 똑 같은 그 인생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느냐?
아니 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느냐?
왜 자꾸 하늘을 쳐다보며 영원을 사모하게끔 되어 있느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의 처음과 끝,
곧 인생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 손 안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시고
그 결정하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처음부터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 손안에 자기 운명을 의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 손안에 감추어진 내 인생의 비밀을
끝내 알아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각자 인생들에게 주시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영원을 사모하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게끔 하신 이 일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국 전도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2013년 2월 16일(토)
유 용수
2013-02-16 10:51:51 | 유용수
설날이 되면 한살을 더 먹게 되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아이들이 훌쩍 자란 모습이 크게 보입니다.
연휴기간이 짧아서 다들 분주했던 모양입니다.
2013-02-16 10:04:39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