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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을 25년전쯤 대학교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남자는 (도대체) 알기 힘든 여성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감명(?)깊었던 기억이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책 제목이 Pride and Prejudice인데, Pride가 "오만"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Pride가 자동차 이름으로만 알고있었는데, 오만이라고 번역된 책 제목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을 했던적이 있었습니다. 프라이드-자존심-오만-교만... 인간의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교만.... 고개를 꼿꼿히 쳐들고 하나님께 대드는 교만.... 창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따지려드는 교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한도 끝도 없는 교만.... 학교에서 선생님께 대드는 학생의 시건방진 교만... 교회에서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회의 질서를 헤치려는 교만.... 제가 그랬습니다. 교만했지요. 교만이 철철 넘쳐흘렸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군데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시는가? 라고 생각했던 교만의 대마왕, 교만의 끝판왕이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죄인이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한도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위대하심 또한 감히 헤아려 알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13장1~2 모든 혼들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아멘.
2013-11-09 05:30:20 | 김형욱
 다음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이라는 코너에 “신데렐라 구두를 차버린 여인”이라는 제목의 칼럼 내용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관한 서평입니다. 소설 속 이야기의 줄거리를 파악하시라는 의미에서 잘 요약 된 서평을 올린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잠시 고전을 감상하시면서 사색을 즐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2006년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 제인오스틴은 과연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지 직접 들어 알 수는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소극적 해석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이해와 관계적 측면에서 이 작품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특히 결혼 안한 싱글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연애소설로만 바라볼게 아니라 부부의 관계, 혹은 교회 안에서의 관계로도 대입해서 본다면 더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청혼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고려하셔야지요. 당신의 지참금이 너무 적어서 아마도 당신의 장점과 많은 사랑스러운 자질의 효과를 상쇄할 테니까요.”(첫 번째 구혼자 콜린스 목사가 엘리자베스의 거절을 믿을 수 없어 하며 한 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우리가 처음 서양 문물을 접했을 때, 서구의 ‘숙녀’는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던가. 그러나 많은 ‘숙녀’의 삶은 치욕적인 곡예였다. 여성이 자력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던 사회에서, 숙녀는 필사적으로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결혼 시장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모두 적령기 여성의 배우자 찾기가 주제이다. 오스틴의 여섯 권 소설 중에서 제일 활기 넘치고 아기자기한 ‘오만과 편견’(1813년 출간)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닛은 지주 계층이기는 하지만 부친의 생존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못하면 생계가 막막해질 처지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남자 후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한정상속’ 제도에 의해 부친 사망 후에는 전 재산이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무일푼의 여자라도 데려가겠다는 신랑만 나서면 감지덕지 매달릴 의사가 추호도 없다.   인구도 적고 미혼 남성이 별로 없어서 결혼시장이 지극히 좁은 이 시골마을에 다시라는 남성이 등장하는데 처음 대면하는 날,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친구의 권유에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봐 줄만은 해도 내 마음을 동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들었다. 다시는 헌칠하고 당당한 외모에 무려 연 1만 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대지주여서 최고 조건의 신랑감이지만 비사교적이고 거만해서 곧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함께 있을 기회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자기를 관찰하는 듯 한 다시의 시선을 가끔씩 느끼게 되는 엘리자베스는 무슨 흠을 찾아내려는 것인가 하고 느낄 정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는 좀 가식적이고 얌전빼는 당시의 숙녀들과는 전혀 다른, 쾌활하고 재기발랄하고 비판적 지성이 예리한 엘리자베스에게 점점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집안의 지체가 자기 집안보다 현격히 낮고 엘리자베스의 부모, 여동생들이 모두 몰상식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이별을 하게 될 때 다시는 청혼을 하고 만다. 엘리자베스는 그동안에 다시가 자기 언니와 그의 친구의 결혼을 방해했고, 위컴이라는 싹싹한 청년의 장래를 잔인하고 비열하게 망쳤다고 오해해 지극히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청혼을 받고 엘리자베스는 순간적으로 다시가 거절당하고 상심할 것을 안쓰러워한다. 그러나 다시가 자기 이성이 만류하는 청혼을 열정에 떠밀려 한다고 고백하자 분노가 치밀어서, 분연히 거절하면서 다시를 자기 언니의 행복을 가로막고 악의로 한 청년의 일생을 망친 비인격자라고 맹비난한다.   다시는 비인격자는 아니었고 무식하고 속된 무리들에 대해 우월감은 느꼈지만 매우 관대하고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엘리자베스의 처지에서 자기의 청혼을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단호한 거부와 함께 자신의 인격에까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모욕감에 떨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친구가 몰상식한 가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위컴의 일생을 망쳤다는 것은 완전히 오해였음을 해명하는 편지를 써서 건네고 떠난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치욕이었으나 차츰 자신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예의와 인격적인 존중이 미흡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역시 다시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다시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 자신의 판단력 과신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영영 서로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엘리자베스의 철없는 막냇동생으로 인해 집안이 치욕의 나락에 떨어지게 될 위기에서 몰래 전방위로 힘을 써서 그 일을 해결해 준다. 그것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의 다시에 대한 감정은 감사와 존경과 애정으로 변하고, 다시가 다시 구혼할 용기를 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마침내 한 쌍의 이상적인 부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틴은 불리한 조건의 젊은 여성 한 명이, 현실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의 가치에 충실했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단지 인물 좋고 재산 많은 남편이 아니라 한층 향상된 인격자 남편의 애정과 존중까지 얻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시를 혐오하고 인격을 불신하면서도 그의 뛰어난 조건 때문에 첫 번째 청혼에서 승낙했다면 다시의 부인이 된다는 사실은 같다 해도 그 결혼생활의 내용이나 행복의 질은 결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의 청혼 과정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기제일 뿐 아니라 오스틴이 강조하는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련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탕이 주변의 속악한 인물들보다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단연 우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로의 오해와 비난을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결점을 깨닫고 한 차원 높은 도덕성과 포용력, 그리고 겸허함을 터득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상적인 결합은 또한 철저한 계급사회이던 영국에서 많은 서민을 보듬는 모범적인 지주와 마님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들은 내적으로 타락해 가던 영국적 가치를 정화하고 다시 확립할―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주역이 되고 영국적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2세를 길러 낼 부모가 될 것이다.   이렇게 준엄하고 통렬한 교훈과 꾸지람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소설 속에 담아 놓은 오스틴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사후 2세기 동안 계속 상승했다.<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영화<오만과 편견>, 2006년작  
2013-11-09 04:36:29 | 김경민
박무령 형제님~! 많은 성도님들이 이렇게나 따뜻하게 글을 남겨 주셨네요. 어떻게 보면 사랑침례교회 홈피나 킵바이블이 딱딱하고 엄격한 듯 보이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글을 올리실 때 조금만 유념해 주셔서 상세한 의도를 기술해 주시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질문이나 좋은 댓글로 앞으로도 함께 해 주시고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의 교제도 이루어 질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 일로 침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활발하게 참여하시는 분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8 18:58:54 | 김대용
형제님 저는 임원섭입니다. 구원에 관한 교리는 명확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고민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마음으로든 말로든 행위로든 그것을 통해 나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은혜로 죄를 사하시는 분은 공식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로마서에서는 마음과 말을 믿음의 단서로 제시하며(롬10:10),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으로(창15:6), 눅19장 삭게오에게서는 그의 재물에 대한 결단으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서는 그의 고통 중 고백으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야고보서에서는 특히 행위로 우리의 믿음에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회개의 표지로서의 행위입니다.오늘날처럼 그때도 복음을 남용하여 공식을 가지고 방종하는 풍조가 극성을 부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15:1~6, , 시32:1,2, 롬5:1,10을 읽으시고 그것들을 종합해보십시오.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칭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와 구원에 관하여 균형을 잡으시는데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안심을 해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합당하지 못하면 평안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리는 명확하게 세워야 합니다. 속이는 자들이 이것으로 성도를 속박하고 두려움으로 또는 반대로 방종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기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간을 갖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면 weldu37@nate.com으로 메일주세요. 샬롬
2013-11-08 15:52:49 | 임원섭
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박무령형제님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전혀 없고 이 시대에 전달된 말씀은 완전하니 있는 그대로 믿는 것에서 출발하시면 첫 단추를 바르게 끼웠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안전보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리안에서 야보고서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촛점을 맞추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배우고 믿는 바는 성경말씀은 100%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사람을 써서 말씀을 완성하신 우리 성령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에게서는 불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은 두말하는 분이 아님을 믿기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2013-11-08 10:22:55 | 노영기
제가 이 글을 올리면서 노영기 형제님 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이렇게 난해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야고보서 2장에 대한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해오다가 저의 의문을 풀어주실 분이 이곳에 계시지 않으실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질문을 통해 고민해 주신 노영기 형제님과 여러분들에게 피해를 드린것 같아 죄송합니다. 더불어 저의 질문에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08 02:34:27 | 박무령
박무령 형제님! 다음에는 간단 명료한 질문이나 글로 서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시죠! 머리에서 쥐나는 줄 알았습니다 온 몸을 비틀어 가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다보니 스팀이 올라오면서 내가 왜 이글을 읽고 있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글로 고문당하는 느낌을 살짝 경험하면서 끝을 보았습니다. ㅎ~~~~~ 잘 모르는 박무령형제님에 대한 매너로 읽기는 다 읽었습니다.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얼나마 될까? 안타깝다! 어떻게 생각하냐의 대답으로는 사사로이 해석한 것 같아 보입니다. 라고 견해를 밝힙니다. 그 외에는 아무생각도 안납니다. ^^ 박무령 형제님! 성경공부 잘 하시되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시고 사이트안에 있는 여러 자료와 말씀들을 잘 들어서 좋은 결실얻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3-11-08 01:40:50 | 노영기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날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며 미흡하나마 그 분을 닮으려고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요즘 뭐가 그리도 빠쁜지...책읽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 가운데 반성하는 글을 대하니 숙연해 지면서도 흐뭇합니다.~^-^
2013-11-08 00:02:51 | 박순호
박무령 형제님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이런 질문을 하실때는 지금 덧글을 다신 것처럼 질문을 하게된 배경을 먼저 소개 하시고, 질문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런 목적 등을 밝혀 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 공간이다 보니,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글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평안하세요^^
2013-11-07 21:05:22 | 오광일
좋은 글 올리셨네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낍니다. 구원 받음과 동시에 우리의 악한 습관들이 자취를 감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다 한번씩은 인내하고 가끔은 섬기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함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죠.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겅건을, 경건에 형제의 친절을, 형제의 친절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1:5~7) 아멘.
2013-11-07 19:02:19 | 이춘옥
두 분의 음색이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도 미소지으시며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클릭할 때는 '비공개 동영상'이라는 메세지가 떠서, 다운 받아서 들었어요. 저와 같은 경우라면 다운 받아서 보시면 되겠네요. 다른 곡으로 두 분의 찬양을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2013-11-07 18:15:12 | 최문선
먼저 제가 올린 글을 통해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동수 목사님께서 강의하신 야고보서 2장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을 무렵 어느날 인터넷에서 이화영 목사님의 해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짧았던 저는 정동수 목사님과 이화영 목사님의 대립되는 해석에 대해 고민해 오다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결론을 내는데 도움을 얻고 싶었습니다. 제가 올린 글에 대해 불편해 하시는 분이 계셔서 삭제를 하려고 했지만 삭제가 불가능 했습니다. 제가 올린 글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7 15:26:28 | 박무령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우리는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회심 이전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지옥으로 가까이 가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을 체험한 후에 우리는 천국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로 모든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출발에 불과합니다. 구원 이후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거부합니다. 현재에 누리는 것들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지요. 혹시 지금의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고 안도하는 자들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을 참되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겸손한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자로 변화 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슬픈 모습들이 있습니다. 회심 전에도 통제하지 못하던 이들이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참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구원 전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늘 사람을 변화시키며 그 변화는 반드시 지속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분께 속한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의 반응은 자신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요구들에 진실된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반응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진보하고 변화하려는 불타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지속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과 영역은 신조가 아니라 인격 되신 주님 이었습니다. 빌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 이니라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일을 수행하도록 명령을 내리실 모든 권위를 갖고 계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순종케 하실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들을 기꺼이 감내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어려움들을 그는 주님과 함께 나누었고 그분과 교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 되었던 사실을 인정했고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에 자신이 전혀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핍박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으려 했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그러한 핍박은 당연히 찾아옵니다. 날마다 그는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님을 더욱 더 닮아가고자 했습니다.
2013-11-07 15:19:55 | 이수영
박무령님.. 질문하신 내용에 답글은 달아드렸지만, 이런 작업이 결코 쉬운것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이러이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식의 질문은 ...마음을 많이 어렵게 합니다.(질문내용이 어려운게 아니라)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가 '~~지식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와 상식을 가지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3-11-07 11:22:53 | 오광일
긴 글을 세세히 읽으시고 다른 분들을 위해 요약정리 해주신 오광일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위 인용된 글을 쓰신 목사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어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게시판이니 다른 분들도 참조하시라는 의미에서 교회와 신앙의 기사를 링크해 올립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472 더불어 윗글을 쓰신 목사님께서 교단을 나와 몸을 의탁했다는 예OO 박사님이라는 분은 과거에 제가 하던 일과 관련되어 조금 알던 분입니다. 이 분이 어떤 인물인지도 아래 기사로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6 우리 모두에게 바른 분별력이 견고하게 유지되길 소망합니다.
2013-11-07 11:01:13 | 김대용
샬롬! 긴 글에서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면... 1.본문의 문맥(야고보서1,2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2.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줌. (창 15:3-6)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 [ 감상평 ] 1. 성경을 연구하고 올바른 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는 칭찬해 드립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이 아닌 개역성경으로 글을 쓰셨네요. 교과서가 올바르지 않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내용도 올바르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복” 과 “상”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본인이 원하는 결론에 맞춰서 해석을 유도하면 안됩니다. 2. 야고보서의 구원을 “복과 상 받는 것”으로 단정지으셨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위험한 추론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단 교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구절을 들어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셨지만, {불행히도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필자(이화영 목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라는 식의 겸손하지 못한 말까지 하신걸 보니 많이 염려가 됩니다. 3. “성경에서 몇 천년 동안 몰랐던 것을 본인만 깨달았다.” 이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온전한 사람 본적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단 교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통해 볼 때 늘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기독교 신앙의 교과서인 성경 문제가 해결되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됩니다. ----------------------------------------------------------------------------- [야고보서 핵심 요약]- 정동수 목사님께서 “야고보서 오해 풀기” 라는 제목으로 강해해 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야고보서는 크리스천 삶에 대한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책들과는 달리 야고보서에는 신학적, 교리적 내용을 많이는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교리적 오류를 바로 잡거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대로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약1:22,3:13) (1)긍정적인 믿음 a.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약2:18)/ 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약2:22) b. 아브라함의 믿음: 창15장, 창22장. 그가 구원받은 뒤에 그의 행위가 그의 믿음을 확증함 (2)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란? 율법행위가 아니라 선한 행위를 의미함. 즉 구원 이후에 삶속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행위(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나와야 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올바른 크리스천의 믿음이 아니다. 마땅히 나와야 할 합당한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봐야할 지도 모른다. (3) 의롭게 됨의 의미 성경의 두 용례 a.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칭의)-롬3:28, 롬4:2 b. 사람이나 하나님이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 정당성을 인정 받는 것, 옳다고 인정 받는 것(딤전3:16, 롬3:4, 마11:19)- 약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은 두 번째 의미의 의롭게 됨을 뜻한다. 감사합니다.
2013-11-07 01:26:43 | 오광일